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37화 (1,234/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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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내가 놀라고 있을 때 아수라가 움직여서 불상 위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신승의 사체를 지근거리에서 유심히 보더니 이번에는 천장을 쳐다보았다. 천장에도 상흔이 존재했으며 그건 아마 무공의 흔적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아수라는 뛰어내려서 명룡자의 사체 맞은편에 섰고, 손을 내밀어서 뭔가 초식의 자세를 잡았다.

일련의 과정이 끝난 아수라가 말했다.

“난 어떤 놈이 저질렀는지 대충 짐작이 가는군.”

“뭐라고! 누구냐?”

“답을 맞춰보고 싶군.”

“응?”

“너도 직접 판단해 보란 말이지.”

“제기랄…. 아픈 사람한테 별걸 다 시키는군.”

나는 투덜거리면서 신승의 사체를 살펴보러 올라갔다. 아수라의 말은 틀림없이 무공의 흔적을 보고 신승과 명룡자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전투의 경과를 유추하라는 말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절대지경 고수가 그걸 못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법장(法杖)이 신승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 법장은 소림사의 것. 하지만 실전에 쓰는 무기가 아니고 장식에 가까워. 신승의 무공은 권장법이니 강적을 상대로 어설프게 법장같은 지팡이를 쓰진 않을 것이고…. 흉수가 법장을 일부러 써서 신승을 죽인 건가?’

나는 법장이 파고든 각도와 결을 유심히 살폈고, 신승의 몸에 나 있는 자잘한 상처들을 살폈다. 뛰어난 사냥꾼은 수풀의 방향만 보아도 사냥감의 퇴로를 안다는 것처럼 무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상처는 무공의 흔적이었으며 심지어 얼마나 숙련된 고수인지도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법장이 신승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신승은 법장이 가슴팍을 꿰뚫기 전에 이미 죽어 있었고, 흉수는 그저 본보기를 위해 법장을 꽂아놓은 것뿐이었다. 유추할 수 있는 범인의 성격은 상당히 가학적이고 잔인한 놈이라는 사실이었다.

‘설마 이건….’

나는 신중하게 무공의 흔적을 살피다가 아까의 아수라처럼 천장을 살폈다. 지금이라면 어째서 아수라가 저길 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룡자의 시체 부근에 왔고, 모든 걸 이해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신승과 명룡자는 합공당했군. 그것도 적어도 세 배 이상의 인원에게 죽었어.”

“정답이다. 내가 볼 때는 열일곱 명이 한꺼번에 신승과 명룡자를 합공했겠군.”

“뭐? 그렇게 정확하게….”

아수라가 훗하고 웃었다.

“무흔(武痕)을 보는 게 아직 어설프군. 하긴 대련경험이 많아도 강호행 경험 자체는 적은 편이니 어쩔 수 없나? 안목을 키워라.”

“쳇.”

그렇다.

이 자리에 남겨진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신승과 명룡자를 뛰어넘는 절세고수가 한번에 그들을 격퇴한 게 아니다. 도리어 상당한 고수들이 떼로 몰려들어서 강호 최정상급 고수인 신승과 명룡자를 살해한 합공의 흔적이다. 처음에는 신승과 명룡자의 몸에 있는 난잡한 무공의 흔적 때문에 의아했지만, 점차 기력이 떨어진 그들에게 합공하는 고수들이 한 칼씩 박았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명룡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명룡자가 죽은 이유도 지친 상태에서 갈비뼈를 가른 살초에 당해서 생명력이 끊어진 거군. 살초는 창법(槍法)인가? 목과 팔을 자른 것도 그저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아마 그렇겠지.”

“제기랄…. 잔인한 새끼들. 죽였으면 됐지 시체를 욕보이다니.”

합공을 당해서 이렇게 처참하게 죽은 걸 본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염증이 나서 이를 악물자 아수라가 말했다.

“열일곱 명 전부가 초절정 무공수위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들이다. 중원강호에서 열 손가락으로 꼽힌다느니 하는 수사가 붙을 만한 놈들이지. 그러니까 신승과 명룡자가 힘을 합쳤어도 당해내지 못한 거다.”

“흠.”

“개개인의 무공은 전부 명룡자나 신승보다 낮다. 하지만 이리떼가 모이면 사자와 호랑이도 감당치 못하는 법이지.”

아수라의 말이 맞다. 나도 무공흔적을 보며 습격자들이 검강과 검벽 등을 자유자재로 쓴 걸 보았기에 납득할 수 있었다. 아수라가 ‘상당한 실력’이라 표현할 정도라면 사실 중원강호에서는 각 성(城) 무림의 패자(覇者)이며 무림지존을 노릴법한 고수들인 것이다.

“음…. 현 강호에 그런 놈들이 모여 있는 집단이라면 딱 하나밖에 없잖아.”

“백련교 원로원. 너는 그 놈들이 범인이라 생각하나?”

“…….”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신승과 명룡자를 죽인 건 백련교의 무공이 아니야. 특히 원로원의 무공은 백련교주에게 지도받은 티가 나서 바로 알아볼 수 있는데 그 놈들이 한 짓이 아냐.”

“좋아. 순조롭게 추측하고 있군. 중원에 한정한다면 백련교가 의심스럽지만 범인이 될만한 놈들이 또 하나 있지 않나?”

나는 아수라가 대충 뭔가를 추측했다는 걸 알아차렸고 그 결론까지 도달할 수 있게 내게 질문하면서 이끌어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십이율(十二律).”

“십이율이 범인이라고 생각하나?”

“아냐… 절대 아냐. 십이율의 무공은 내가 잘 알아. 그들은 도리어 중원보다 무공의 특색이 강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지만 이건….”

나는 약간 혼란을 느끼고는 명룡자의 목잘린 단면을 쳐다보았다. 지독하게 깔끔한 절단면이라서 죽은 지 시간이 오래되었는데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나는 이런 특성을 지니는 검술을 아직 무림에서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이제 내 추측을 말해도 되겠나?”

“크윽…. 빨리 좀 말해 줘! 몸이 정상이 아냐. 빨리 대환단 찾아서 회복해야 해.”

아수라가 명룡자의 팔에 난 큰 상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천축(天竺) 소뢰음사(小雷音寺)의 명문절기인 마라십륜공(魔羅十輪功)이다. 성취는 십륜 중에서 구륜(九輪)을 성취했으니, 아마 이 일격을 가한 놈은 소뢰음사의 주지승일 것이다. 소뢰음사에서 구륜 이상 성취한 놈은 그 놈 뿐이니까.”

“……?!”

소뢰음사?!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천축최대문파인 뇌음사에서 갈라진 분파가 소뢰음사라고 들었는데 지금 거기의 우두머리가 중원까지 와서 소림사에서 혈겁을 일으켰단 말이냐?!”

“그 뿐만이 아니다. 천축에서도 쟁쟁한 문파의 종주들과 그 무공이 읽히는구나. 구루칼키 파(派)에 살수의 신(神)이라 하는 푸자나야트(智朔月), 자이나 교(敎), 시크 교(敎)까지 모조리 최상위 문파의 주인들이 온 것 같군. 하나같이 천축무림 최대의 명문정파들이지.”

“……!!”

“쉽게 말하자면 천축무림 최고의 고수 17인이 다같이 몰려와서 소림사를 멸망시키고 신승과 명룡자를 합공해서 죽였다. 그게 내 결론이다.”

대체 이게 무슨!!

그러나 아수라가 내린 결론이라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아수라야말로 인간일 때 천축무림의 지존인 파순이기 때문이다. 아수라보다 천축무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으리라.

“빌어먹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지. 죽은 자에게 직접 물어보지 그러나?”

“뭐?”

“넌 할 수 있잖나. 전륜성왕이니까.”

아수라의 무심한 듯한 말에 나는 아차하고는 바로 술수를 발동시켰다.

“나, 전륜성왕으로써 명하나니 죽은 자의 영혼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라!”

나는 전륜성왕의 권능 중 사자(死者)를 초혼(招魂)하는 능력을 써 보기로 했다. 그러나 내가 언령을 외쳤는데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머릿속에 어두운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촉룡(燭龍)…. 너는 누구인데 전륜성왕을 자처하느냐….]

어라 이 새끼가 왜 나와?!

‘촉룡…. 명계에서 인간의 영혼을 받아먹고 있는 [옛 지배자]!’

어찌됐든 지금 충돌하기엔 적절치 않은 상대다. 아니, 어쩌면 지금 놈이 내 존재를 알아챈 것 자체가 좋지 않은 상황이다.

나는 뜻밖의 위기에 동공이 확장되었지만 급히 답했다.

[아, 생각해보니까 전륜성왕이 아직 아닌 것 같군! 내가 전륜성왕인줄 알았지 뭐냐! 사람이 실수할 때도 있으니까 이해하지? 나중에 내가 전륜성왕 되면 다시 얘기하자 촉룡!]

[뭐라고…. 잠깐….]

[실수해서 미안! 그럼 나한테서 신경 꺼! 안녕!]

파앗

나는 재빨리 촉룡의 목소리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큰일 날 뻔 했네.”

아무래도 상황을 보아하니 내가 전륜성왕의 권능을 명계에서 끌어 쓰려고 하면 제대로 된 자격을 얻은 게 아니므로 실질적으로 명계의 영혼을 먹어치우고 있는 촉룡이 감지하고는 권능발현을 차단하는 듯 했다. 예전처럼 명계에 가서 전륜성왕의 자격을 다시 회복시키지 않는 한 능력을 제대로 쓰긴 힘들 듯 하다.

아수라가 말했다.

“전륜성왕의 권능도 막혔나? 아무래도 초반부터 노력을 기울여야 회복가능한 권능인 것 같군.”

“젠장…. 그 새끼들을 어떻게 하지.”

나는 화가 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 중요한 건 대환단을 찾는 거라고는 해도 신승과 명룡자 또한 내 전생에 도움을 준 동료다. 지난 생에는 500년간 천계의 탑을 탐색하는데 참여하면서까지 자신의 생을 소모해 줬던 것이다.

그런 자들을 일대일 승부도 아니고 몇 배나 되는 숫자로 에워싸서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사실 자체가 화가 났다. 가능하다면 복수해주고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사건은 우선순위에서는 좀 멀다. 지금 제갈사를 찾는 게 자칫 늦어져 버리면 모든 전망을 꼬이게 해 버린다.’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지금 급한 일이 산재해 있는 상황에서 복수를 할 때가 아니다. 아직 이번 전생에서 나와 신승, 명룡자는 일면도 없었던 사이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를 악물었고, 잠시 후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천축 놈들이 이 혈사의 범인이라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지? 나는 머리가 잘 안 돌아가서 모르겠어.”

“글쎄. 의미란 사람마다 다른 법이지. 허나 내가 말하고 싶은 건…. 17인의 천축 최고수들이 ‘왜’ 연합했느냐는 것이다.”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너도 알겠지만 무림방파의 우두머리, 그것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문파의 수장이라면 자존광대한 자존심과 음흉함을 지니고 있다. 천축무림 또한 다르지 않아서 그들을 복종시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들이 연합해서 중원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를 친다는 건 사실상 중원과 천축무림의 대전쟁을 의미하는 것. 그리고 웬만해서는 무림인이라 해도 대전을 원하지는 않지.”

“…….”

“…그 거부감을 도외시하고 17인의 대문파 수장들을 맹목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제 3의 인물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 제 3의 인물이 뭔가를 시켰기 때문에 놈들이 혈사를 벌인 것이지. 그 자의 힘과 지혜는 엄청날 게 분명하다.”

나는 아수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보다 간단해지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그 제 3의 인물을 찾아야 하는 거군. 그래야 명룡자와 신승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말이군!”

“그렇다. 허나 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군.”

“뭐가?”

“지금은 네가 전생한지 1년하고도 석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다. 새로운 강자가 출현하기에는 네가 이미 서른 번 가까이 전생하면서 웬만한 무림의 고수를 다 알고 있는 상태이고, 절대지경 고수도 알만한 놈은 다 알지. 그런데 이리도 뜬금없이 17인의 대문파 문주를 복종시킬 수 있는 절대자가 출현한다는 건 생뚱맞지 않은가?”

“……!!”

나는 흠칫했다. 아수라의 말이 몹시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17인의 천축고수들이 하나같이 명문정파의 수장이며 초절정고수라면 그들을 복종시킨 자의 힘은 최소한 절대지경에 이르러있으리라. 그러나 그만한 고수가 어디에 숨어있었단 말일까? 내가 전생을 몇 번 하지 않았을 때라면 이런 의문까지 가질 일은 아니었겠지만 30번이나 전생한 지금은 뭔가 이상하다고 할 수 있었다.

“천축에 은거해있던 절대지경의 고수가 존재했던 건 아닐까?”

“글쎄…. 나는 천축지존 파순으로써 꽤 오래 살아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그 정도의 명망을 지닌 자는 들은 적이 없어. 아무리 고수가 스스로를 감추고 은둔해도 낭중지추, 강대한 힘을 지닌 자는 그 힘의 편린이 세상에 입소문으로 퍼지기 마련인데….”

“…….”

“이건 하나의 수수께끼다. 무언가 중대한 음모의 단서라고 보여지는군.”

“그래….”

나는 아수라가 수수께끼 놀이를 즐긴 게 아니라 내게 큰 단서를 주려고 노력한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까 생각한대로 이건 지금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만, 나중에 중대한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사건이다. 충분히 사건의 진상을 쫓을만한 가치가 있으리라.

나는 아수라에게 말했다.

“소뢰음사나 방금 말했던 다른 문파들의 위치를 알고 있나?”

“당연히 알고 있다.”

“좋다. 그럼 놈들을 나중에 찾아가겠어. 그리고 지금은 일단 대환단부터 찾겠어.”

일의 우선순위를 구분하고 차례로 실천하는 게 좋으리라.

대환단이 있는 장소는 알고 있다. 전생하면서 미리 알아둔 장소이기에 거기로 가면 될 것이다.

타닷

나는 아수라와 함께 뛰어가다가 아수라의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신력으로 몸을 회복시키진 않는 건가? 음신지력같은 걸 쓰면 내장을 회복시킬 수 있을 텐데.”

“응?”

나는 조금 당황했다. 왜냐하면 아수라의 질문이 내가 생각지 못했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젠장. 그런 방법이….’

하지만 여기서 아니라고 하면 왠지 체면이 안 선다. 그래서 나는 침착하게 아수라의 말에 대답했다.

“황제가 봉인되었고 별의별 난리가 나는 판국이잖아. 내 마력도 걷잡을 수 없는 판에 섣불리 권능으로 회복하려고 들었다가 큰일나면 어떡하라는 말이냐.”

“호오, 일리있군.”

“마력 폭주하면 감당 못해. 난 무조건 죽겠지.”

“그래. 조금 느리더라도 부작용을 줄이며 나아가는 것도 좋은 전략이지. 아둔해 보이지만 생각보다 큰 그림을 보는 녀석이군…. 과연 전생자….”

“훗.”

나는 여유있게 씩 웃으며 생각했다.

‘표정관리 잘 됐지?’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그런 척 할 수밖에! 나는 신력으로 회복하려는 걸 포기하고는 소림사의 비지(秘地)로 향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끝까지 대환단으로 회복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림사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심산유곡.

‘이곳이 방주(方舟).’

바위에 손을 대면 신승의 지문을 인식해서 비밀공간인 방주의 문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까 신승의 손가락을 잘라올까 생각했지만, 예전에 망량이 시체의 지문은 인식되지 않으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기에 그만두었다.

대신에 나는 백면신군에게 전수받은 일자상전의 오의, 변태술(變態術)을 시전했다.

“하압! 변태(變態)!!”

우드드득

변태술을 시전하자 전신의 근골이 성형되며 일시적으로 내 모습이 신승의 것으로 뒤바뀌었다. 변신술과 달리 변태술은 오래 유지되지 않으므로 나는 서둘러서 내 지문을 바위에 찍었고, 이윽고 바위가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해냈다!”

“…굉장하군. 변태술은 지문까지 복사한단 말인가?”

“전신의 근골을 바꾸는 거니까 당연하지!”

“후후. 수천 년을 살아왔지만 역시 강호는 넓군….”

저벅

안으로 걸어들어가자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아무래도 신승과 명룡자를 해한 천축무림의 고수들은 여기까지 오진 못한 모양이다. 나는 안쪽으로 가서 대환단을 꺼내서 먹고는 운기조식을 했다.

우우웅

운기조식을 하면서 전신의 공력을 치유력으로 바꾸어서 퍼뜨리자, 엄청난 속도로 전신이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갈가리 조각났던 내장조각이 재생되고 전신의 혈류가 안정을 되찾아갔다. 나는 이윽고 운기조식을 끝나자 이제 전신의 상처가 찰과상 정도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 이제 살 만 하군.”

“무림제일의 영약 중 하나인 대환단을 일회용 회복약처럼 쓰는 놈은 너 뿐일 거다.”

“뭐 어때. 도구라는 건 필요한 데 쓰면 장땡이야!”

난 적어도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는 말했다.

“이제 제갈사의 행방을 찾으러 가야겠어. 따라올 거지?”

“물론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좀 있는데.”

나는 전국옥새를 꺼내서 제갈사의 행방을 탐색하려다가 멈칫했다.

“뭐가?”

아수라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 시설 내부에 뭔가 숨겨진 방이 더 있는 것 같지 않나?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것 같은데.”

“음…?”

“보이는 넓이와 기감의 영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잠깐만.”

나는 눈을 감고 아수라의 말대로 이 방주에 기를 뻗어내어 감지해 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하자, 아수라의 말대로 뭔가 공간감이 어색하다는 걸 깨달을 수가 있었다. 보이는 넓이와 실제 넓이가 다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찾아볼 가치는 있겠군. 한 번 볼까.”

나는 알 수 없는 기계장치가 가득한 방주 내부를 아수라와 함께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그저 수련장소로만 썼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제대로 뒤져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대략 한 시진 내내 뒤적거리다가 아수라의 외침을 들었다.

“여기다!”

나는 아수라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평범해보이는 강철벽 앞에 아수라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수라가 손을 벽으로 뻗으며 말했다.

“이 뒤편에 뭔가 있다는 게 느껴진다.”

“파괴할까?”

“글쎄. 이걸 봐라.”

아수라가 눈을 빛내며 절대지경의 절학을 시전했다.

월아영상패룡파(月牙永狀覇龍波)!

두우웅….

천축의 광세절학이 시전되었지만 강철벽은 파괴되지 않았고 대신에 무형의 원형 파동이 마치 호수에 물방울이 떨어진듯 크게 주변을 향해 퍼져나갔다. 심지어 찌그러지지도 않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수라가 쓰는 월아영상패룡파라면 조그마한 산도 날릴 텐데?!

아수라는 벽을 손등으로 퉁퉁 치며 말했다.

“보다시피 의념절기가 통하지 않는다. 의념으로 힘이 응고되기 전에 분산되어버리는 느낌이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게 가능한가? 과학기술이 의념까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걸 건축한 자는 무공원리와 의념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매우 해박하다. 의념이 어떻게 발동하는지 무척 자세히 알고 있어. 힘만으로 부술 수는 없는 것 같다.”

“흐음.”

나는 큰 호기심을 느꼈다.

‘힘으로 부술 수 없다면 다른 출입방법이 존재한다는 거 아닐까? 방주의 입구는 지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나는 혹시나 해서 강철벽에 신승으로 변태해서 지문을 찍어봤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고, 적어도 출입방법이 지문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긴 지문을 찍는 것만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면 여기서 수십 년을 지냈던 신승이 우연히라도 들어갈 수 있었으리라.

나는 힐끔 아수라를 보며 생각했다.

‘아수라가 적멸무극을 쓴다면 힘으로 부술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 정도 힘이라면 방주 전체가 부숴질 가능성도 있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었기에 나는 좀 더 똑똑한 방식으로 접근해야한다는 걸 느꼈다.

제길. 제갈사와 이혼대법으로 통한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갈사의 지혜만 있다면….

나는 머리를 굴리고 있다가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한숨을 쉬었다.

“제길… 됐어. 이게 뭐라고 꼭 들어가야겠냐. 그냥 가자.”

“그래? 다음에 올 건가?”

“뭐 훔칠 것도 없는데 뭐하러….”

나는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다가 퍼뜩하고 뭔가가 생각났다.

“…훔친다? 그, 그렇지!”

“아. 설마….”

아수라가 혹시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나는 눈을 빛냈다.

“간닷!”

나는 생각이 나자마자 즉시 강철벽으로 출수했다.

절기(絶技)

만상지투(萬象之偸)

‘이 강철벽의 성질 때문에 파괴할 수 없는 거라면….’

의념을 해산시키는 성질 자체를 훔쳐버리겠다!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에 기하학적인 수많은 전자회로(電子回路)가 보이는 걸 깨달았다. 거미줄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 그 회로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두뇌’에 통솔당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또한 그 ‘두뇌’가 모종의 방법으로 이 강철벽에 의념을 해산시키는 성질을 부여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좋아. 바로 이 끈인 것 같군!

내가 만상지투로 ‘두뇌’와 벽을 잇는 끈을 재빨리 훔치는 순간이었다.

텅!

빠가각

“쿠에에엑.”

나는 볼품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퉁퉁 피빛으로 부어오른 손을 부여잡았다.

‘니미러어어얼!! 아프다!!’

맨몸으로 강철벽을 친 것처럼 육체가 대비 없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손가락뼈가 분질러진 느낌에 내가 바닥을 구르고 있자 아수라가 물끄러미 강철벽을 보다가 말했다.

“…훌륭하다. 직접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콰과광

아수라가 가볍게 일 장을 내뻗자 이번엔 강철벽이 손쉽게 부숴졌다. 내가 고통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맞은편에 가 있던 아수라가 말했다.

“빨리 건너와라. 벽이 재생된다.”

치지직

그 말대로였다. 마치 벽이 살아있는 생명체의 줄기처럼 뻗으면서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재생성되고 있었다. 나는 손의 아픔을 참으며 자동으로 흘러나온 눈물줄기를 쓱하고 훔쳤다.

“다음번엔 이런 식으로 안 부술거다. 제기랄….”

“안쪽 공간은 제법 넓군.”

아수라의 말대로 강철벽 뒤쪽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바깥은 복잡한 기계장치가 사방에 있었고 바닥에까지 전선이 널려있는 다소 난잡한 공간이었지만, 안쪽은 무척이나 절제되어 있는 새하얀 벽과 바닥이 가득했다. 그리고 잠시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거대한 공동이 나왔고, 그 공동에서 웬 하늘을 떠다니는 동그랗고 조그마한 기계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위이이잉

“넌 뭐야?”

내가 말을 걸자, 그 기계에서 눈빛처럼 보이는 빛이 번쩍거리더니 기계음으로 사람의 말을 했다.

[#&%^&%@%@…. 언어번역 완료. 중세 중국어 변환중…. 번역시스템 작동.]

“……?”

[방주(方舟)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러자 나는 기억이 났다.

‘그래!! 운사를 따라서 [옛 대륙]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지! 그것도 방주고 이것도 방주라서 그런가?’

그 때 운사가 자기의 팔뚝을 드니까 통과 가능했었는데!!

어디 나도 해 볼까!

“자 실컷 봐라!!”

나는 슥 하고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나는 멋쩍어서 팔을 내렸고, 아수라가 말했다.

“혼돈감염은 검사하지 않느냐?”

아수라의 질문에 그 떠다니는 동그란 기계가 대답했다.

[현재 이 방주는 인류연합(人類聯合)의 소유가 아닙니다. 소유주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혼돈감염 검사시스템이 꺼져 있습니다.]

“흠….”

[방문목적을 밝히고 방명록을 기입해 주십시오.]

아수라는 기계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웅.”

“응?”

아수라가 히죽하고 웃었다.

“이거, 잘만 하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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