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5====================
사신지혼(四神之魂)
측천무후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패배했으면서 무슨 요구란 말이냐. 도리어 그대가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측천무후의 말에 아수라가 씩 웃었다.
[치료의 대가로 나, 아수라가 측천무후 당신의 궁을 천 년 동안 전력으로 지켜주지. 이 정도면 됐나? 아주 후한 용병계약이다.]
[…….]
[더 이상 말싸움하기 싫다. 받아들이든가 말든가.]
측천무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잠깐……!! 너희들 멋대로 굴지 마라!!]
후와악
그러자 긴나라가 본체로 변신하면서 뭔가 거세게 항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싸움을 끝까지 볼 기력이 남지 않았고, 서서히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어가는 게 느껴졌다.
‘으…. 숨이 안 쉬어져….’
심장도 파열해버린 걸까? 나는 그 생각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피비린내.
지독한 비린내가 난다. 피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어야 정상일거 같았지만 - 이상하게도 나는 이 비린내가 무척이나 익숙하다. 나는 피빛으로 물든 길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고, 길을 걷던 중 누군가와 마주쳤다.
[왔나?]
그 자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짐작한 대로군. 그 자가 꿈을 통해서 굴레의 바깥으로 끌어들이고 있었군. 과연 끝을 본 전생자라는 건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괴인.
아니… 괴인인가? 망토를 쓰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등 뒤에 마치 박쥐와 같이 생긴 날개가 펼쳐져 있어서 평범한 인간이 절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전생자.]
괴인은 내가 걷던 혈로(血路)의 한가운데를 가로막은 채 버티고 있다가 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잠시 후 괴인이 흉측한 손을 뻗어서 내 머리를 움켜잡으려 했으나, 갑자기 번개가 튀었다.
파직!!
그 번개에 움찔한 괴인은 손을 잠시 물렸고, 나는 내 눈 앞에 작은 소녀의 환영이 떠올라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괴인은 그 환영을 보더니 휙하고 등을 돌렸다.
[초대장은 주었다. 네가 스스로 찾아올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나는 괴인이 사라지자 소녀의 환영에게 손을 뻗었다.
넌….
그러나 환영은 만져지지 않았고, 단지 원망어린 목소리만이 남은 채 은빛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헉!!”
“일어났나?”
내가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있었다.
시력은 회복된 건가?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옆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봤는데, 예상대로 아수라가 있었다.
“아수라!!”
“소리는 왜 지르나. 이거나 받아라.”
착!
휙하고 아수라가 뭔가를 던져주자 나는 반사적으로 그걸 받았다. 내 손에 감기듯이 잡힌 무기를 본 나는 중얼거렸다.
“오도(吳刀).”
“빈 껍데기다.”
“…뭐?”
내가 반문하자 아수라가 무미건조하게 설명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마왕은 너를 데리고 지상세계에 오자마자 본질을 드러내서 도망쳐 버렸다. 귀찮아서 놈과 싸우진 않았다.”
“……!!”
곤(鯀) 임금이 도망친 건가!
나는 골치아파졌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그 생각은 뒤로 넘겼다. 그 놈이 어찌되든간에 일단은 내 목숨을 건진 게 다행인 것이다. 나는 내 몸을 기공으로 살폈는데 확실히 터졌던 내장이 회복된 것 같았다.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나아졌기에 나는 아수라에게 말했다.
“고맙다. 그럼 여기는 인간세상인가?”
“그래. 측천무후가 자기의 궁 또한 마력이 가득한 암천향이라서 회복시키기엔 좋지 않다고 널 천원의 방으로 보냈지. 네 녀석의 동료가 말하는대로 상관혁이라는 인간의 의가를 빌려서 회복시켰다.”
“상관세가인가….”
잘 보니 상관세가라는 생각도 든다. 아마 천하오대신의 중 의성 상관혁이 날 치료해줬나 보다. 나는 어쨌든 살아서 인간계로 귀환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뭔가를 깨닫고는 말했다.
“…어? 동료가 말하는대로? 그게 무슨 말이야.”
“이혼대법이란 걸 걸어놔서 술사끼리 서로의 몸을 조종할 수 있다더군. 인간세계에 데려오자마자 네 입을 빌려서 내게 말하는 놈이 있었고 그놈 말대로 한 것 뿐이다.”
“…….”
“응급처치로 네 몸을 스스로 절개하고 내장을 이식하는 걸 보니 참 신기하더군. 자기 몸이 아니니까 고통이 안 느껴지는건가?”
나는 질려서 중얼거렸다.
“…아니, 이혼대법을 교환했다면 고통도 느껴져. 그냥 고통 이상으로 미친 녀석이라서.”
보나마나 제갈사다.
아마 암천향으로 가서 실종된 후부터 계속 내가 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혼대법으로 내게 빙의해서 급한대로 응급처치를 해준 듯 했다.
나는 재빨리 제갈사에게 이혼대법으로 정신적으로 소통하려고 해 보았다.
[제갈사! 들려?]
하지만 회신은 오지 않았다. 그렇기는 커녕 이혼대법 술사에게 본디 생생하게 느껴져야 할 상대의 백의 낌새가 없었다. 나는 그 사실에 불길함을 느끼고는 재빨리 제갈사에게 가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제길…. 아수라! 내 동료가 된 거 맞지?”
“약속을 했으니까.”
“지금 상황이 좀 안 좋은 것 같은데 부탁 하나만 들어줘라.”
“어떤 부탁?”
“그게…. 아 제기랄!”
나는 품에서 목갑을 꺼내려다가 목갑이 없자 크게 소리를 쳐서 상관혁을 불렀다.
“상관혁!! 내 목갑 어딨어!”
잠시 후 상관혁이 부리나케 달려와서 내게 목갑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안에 있는거 안 건드렸지?”
“물론입니다….”
“야. 그러고보니 저번에 만난 뒤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냐?”
“…일 년 하고도 석 달입니다….”
“그 괴물은 날뛰지는 않나?”
“아직도 야차님과 대치중입니다. 백련교도 큰 자극이 없기에 동향만 살피고 있습니다….”
일 년 석 달이라.
저 말대로라면 나는 최대한 서두른 덕에 현실에서 큰 이변이 일어나기 전에 귀환하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제길. 저 놈을 믿을수가 있어야지….’
나는 상관혁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다가 목갑에서 흑요석을 꺼내서 내 기억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흑요석에 기억이 가득 충전되며 마력이 흑요석에 흐르기 시작했고, 그 흑요석을 본 아수라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상당한 마력이군.”
“그런가? 아무튼 이건 기억을 전송하는 흑요석이다. 내 모든 기억을 받아볼 테냐?”
“그러지.”
“의심 안 하는 건가?”
내가 질문하자 아수라가 히죽 웃었다.
“내 마력내성을 뚫고 저주를 내릴 수 있을 정도의 존재는 [옛 지배자] 뿐이다. 네가 헛짓을 했다면 이 자리에서 널 죽여버리면 그만이다.”
“…아 그러셔.”
신뢰고 뭐고 철저하게 자기 힘에 대한 자신감과 오만함 때문인 건가. 나는 이런 이유로 흑요석을 거부하지 않는 놈은 처음이었기에 내심 혀를 내두르며 아수라에게 흑요석을 주었다.
우우웅!!
“……!!”
기억을 다 받은 아수라는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네 녀석…. 정말….”
“나머지는 나가서 얘기하지.”
“좋다.”
상관혁의 이목이 있는 곳에서 기억에 관해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았기에 나는 아수라와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그리고 아수라와 함께 제갈사가 있는 장령곡을 향해서 신법으로 뛰기 시작했다.
파파팟
“으으윽.”
나는 뱃가죽이 땡기며 욱신거리는 걸 느끼자 죽고싶은 기분이 들었다. 코피도 나는 걸 보면 내상이 재발한 게 틀림없었다.
“우웩.”
나는 결국 토혈을 하게 되었고 길가에 핏덩어리를 퉤 하고 뱉어내었다. 내장이 또 찢어진 것 같다.
역시 내장이 다 터진 걸 간신히 살리긴 했지만 그 어마어마한 중상은 결코 단시간에 낫는게 아닌 것이다. 나는 아직도 중환자였고 이런 식으로 경공을 쓰는 건 명줄을 재촉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시라도 빨리 제갈사에게 이상이 생긴 게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내가 조급해 하는 표정을 짓자 아수라가 옆에서 달리다가 말했다.
“믿기지 않는군. 전생자라는 게 존재했다니.”
“기억을 받아서 알고 있겠지만 이전 생에 너한테서 가르침을 받았어. 그래서 널 비교적 쉽게 상대했던 거다.”
“그랬군.”
납득하던 아수라가 말했다.
“경공속도로 봐서 장령곡까지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가면 네가 그 전에 기절하겠군. 내가 데려다 주마.”
“응?”
후와악
다음 순간 아수라가 본체로 변신했고, 놈은 등 뒤에서 날개를 뻗치더니 말했다.
[타라.]
“고맙구만.”
휘이잉 -
나는 아수라의 등 뒤에 올라탄 채 말했다.
“근데 마왕들은 이런 식으로 막 변신해도 인과율에 제약받지 않나?”
[가끔 턱걸이하듯 제약에 걸리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타 존재에게 큰 간섭을 하지 않으면 별 상관없다.]
타닷
잠시 후 나와 아수라는 장령곡에 도착해서 내렸다. 아수라는 인간형으로 되돌아왔고, 나는 급히 장령곡 내부로 뛰쳐들어갔다. 그리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제갈사!! 어딨어!!”
이혼대법이 끊기는 건 보통 상황이 아니다. 제갈사가 나를 갖고 장난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갈사는 이런 일에서 장난을 치는 놈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 상황은 이혼대법의 술자인 제갈사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죽은 건 아냐. 죽었다면 이혼대법의 맥 자체가 사라졌을 텐데 그게 아니라 응답만 안 하고 있어. 그렇다면 누군가가 제갈사를 억제하고 있는 건가…?’
내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정말 천선 님의 말대로군. 배교교주를 조종하던 자들이 이 자리에 나타날거라 했는데 이 자리에서 얼굴을 보게 되었구나.”
“…….”
“악도(惡徒)야. 네 정체를 밝히거라!”
쉬쉬쉬쉭
다음 순간, 의문의 목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술법을 조금 배웠던 가락으로 그들의 수법을 알아챌 수 있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은신술과 팔정대진(八正大陣)을 합한 건가….’
인원은 약 서른 명 정도였고, 아무래도 미리부터 진법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연령은 다들 중년 이상이었으며 노인도 꽤 있었다.
내가 힐끔 그 자들의 면면을 살피자 생전 처음 보는 도사(道士)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도사들은 하나같이 특정문파의 소속인듯 입고있는 복색이 통일되어 있었다.
나는 그 도복이 어느 문파인지 알고 있었기에 내게 말을 걸어온 자에게 대꾸했다.
“곤륜파(崑崙派)인가?”
명문정파의 하나로써 곤륜산에 거점을 둔 강대한 도가문파. 나는 살면서 몇 번인가 곤륜파 출신의 인물들과 연관이 있었기에 그들의 정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맨 앞에 있던 노인이 창노한 음성을 터뜨리며 내 쪽으로 송문고검(松紋古劍)을 겨누었다.
“내상을 입은 것 같구나. 허나 사악한 배교의 주구는 결코 봐줄 수 없다!”
“…장령곡주를 찾아왔는데 그는 어디 있지?”
“말해줄 것 같으냐? 이대로 물리쳐서 천계에 압송해 주마.”
코웃음을 친 노인 도사가 검을 높이 들며 외쳤다.
“천권진(天權陣) 옥형(玉衡)으로 휘돌아라!!”
부우웅
다음 순간 노인 도사와 서른 명의 도사들의 모습이 일제히 사라지더니 엄청난 기세로 운무가 감돌며 한치 앞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이게 환무진의 일종이며 오감을 현혹시켜서 상대를 제압하는 수법이란 걸 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화안금정을 발동시켜서 아수라를 바라보았는데 아수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딴 잔챙이들 사정까지 봐줄 생각이냐? 주제파악도 못하는 놈들이니 죽어도 싸다.”
이런. 아수라는 죽여버릴 생각이 가득하다….
나는 아수라에게 말했다.
“그게 아냐. 약한 척을 좀 하란 말이다.”
“음?”
“이 놈들에게 명령을 내린 놈이 나타나게. 한 방에 다 쓸어버리면 겁먹고 안 나오잖아.”
“아, 그거군. 좋다.”
“시작하자.”
파바밧
나는 아수라와 함께 신법을 발동하며 바로 진법의 축을 이루는 도사들에게 가서 혈도를 찍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절반 이상이 눈만 뜬 채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고, 노인 도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지 아직도 진법을 펼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파밧
“…….”
나는 경악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전신혈도를 제압당한 노인도사 앞에서 말했다.
“후우…. 너무 강하다…. 정말 그 약하던 곤륜파가 맞는 건가…? 모든 체력이 소모되어버렸구나.”
“괴… 괴물….”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덤벼라 곤륜파!!”
“…….”
이 정도면 약한 척이 잘 먹히지 않았을까?
나는 기대하며 뭔가 덤벼오기를 기다렸지만 왠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옆에 있던 아수라가 말했다.
“생각해보니 안 죽이고 다 혈도만 찍는게 훨씬 강하게 보일 것 같군….”
“…….”
진작 좀 말해주지….
‘제길. 이혼대법이나 쓸까?’
원래 인간한테 가능하면 안쓰려 했지만 제갈사의 목숨이 걸려있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이혼대법을 눈 앞의 노인에게 쓰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거기까지다.]
나와 아수라의 시선이 신령스러운 오색구름과 함께 나타난 자들에게 향했다.
총 다섯 명이 그 자리에 와 있었고, 나는 그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제일 전방에 있던 자를 보고는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무형의 검기가 찌를 듯이 내게 날아와서 견제를 하는 게 느껴졌다.
[혈겁(血劫)을 일으킨 배교교주의 동료들이여. 순순히 천계로 포박되거라.]
검선(劍仙) 여동빈을 위시한 중화팔선(中華八仙)의 오인(五人)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