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4====================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첫 합이 상쇄되는 즉시 하단세를 잡으며 어깨를 낮췄다. 연속된 공방에서는 당연히 중단세로 무게중심의 안정을 찾아야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지난 회차에 아수라 밑에서 수련할 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만일 과거의 나와 싸우게 된다면 일단 시작은 하단세 위주의 초식을 잡는게 좋다.]
[뭔가 이유가 있어?]
[과거에 나는 강력한 절초로 적을 밀어붙이는 걸 좋아했지만 그 와중에 하단견제로 상대의 중심을 흐트러뜨리는 변칙을 그 다음으로 즐겨썼다. 대부분의 검호는 불안정하고 범위가 좁은 하단세를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역을 노리다보니 생긴 버릇이었지.]
[호오.]
[만일 시작부터 하단세를 잡고 절초를 기다리다가 중단으로 끊어치면 반응이 재밌을 거다.]
뇌신류(雷神流)
만승검결(萬乘劍決)
도회낙락검(導回落落劍)
만승검결에서도 가장 견고한 하단세의 틀을 갖춘 도회낙락의 검식으로 아수라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자, 아니나 다를까 첫 공격은 중단을 노리는 초식이 강하게 베어왔다.
‘아수라의 무술 중 자영환수도(紫影幻秀刀)의 운편최람(隕片催嵐)이군.’
정말 아수라가 말했던 대로다. 그가 상대와의 대결에서 버릇처럼 꺼내는 초식 몇 가지를 알려줬었는데 그 중에 자영환수도 운편최람 또한 있었던 것이다. 물론 초식 하나하나의 파해법까지는 시간낭비였기에 익히지 않았으나 초식의 특징만 알고 있다면 내 무술수준에서는 굉장히 큰 이득을 볼 수가 있었다.
‘운편최람의 검궤는 몇 번이나 그와 대련하면서 이미 알고 있다.’
까앙
초식을 알고 있으니 검술의 궤적에 갖다대기만 해도 아주 찰나의 여유를 벌 수 있었다. 검면(劍面)이 비스듬이 부딪히면서 반탄력이 서로의 검을 살짝 밀어내었고, 그 틈에 나는 여유를 살려 검의 손잡이를 옆으로 밀면서 재차 검면에 한손을 갖다대었다. 그리고는 곧장 아수라의 겨드랑이 쪽으로 찔러넣는 뇌룡신검(雷龍神劍) 제아병탄(除牙倂灘)의 초식으로 응수했다.
피잉
갑작스럽게 강렬한 찌르기 초식으로 변환했는데도 아수라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검을 휘둘러서 내 찌르기를 튕겨내었다. 약간 허를 찔렸을텐데도 과연 현 시대 최강의 절대지경 고수 다웠다. 그러나 아수라가 응수한 방법이 아직도 내 의도를 모른다는 걸 알아차리게 해 주었고,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역의 역이다.’
나는 허공에 뜬 상태에서 체중을 실어 아수라의 목 쪽으로 손을 뻗으며 장력을 발출했고 아수라는 잠시동안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듯 했다. 왜냐하면 근접검투술에서 이런 수법을 자주 쓰기는 하지만 아수라만한 고수에게 섣불리 권장법으로 접근하다가는 한끝만 실수해도 난도질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이놈….]
위험은 높고 대가는 적은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아수라는 자신을 얕본다 생각했는지 점차 분노하는 표정으로 바뀌었고 찰나지간에 검벽(劍壁)을 생성하여 내 손을 절단내려고 했다. 촘촘한 강기로 이루어진 검벽에 잘못 걸리면 아무리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있더라도 일격에 절단당하기 십상이었다.
후웅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손쉽게 장력을 물린 후 이번에는 뇌신류 명왕수(冥王手)의 기운을 새로 맺어서 나와 아수라 사이의 공간에 발출했다.
투쾅!
반탄진기를 가득 실은 명왕수는 허공을 세게 때리며 일순간 나와 아수라의 거리를 벌렸고, 아수라는 내가 쓸데없는 초식을 연발한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추격해와서 강렬한 일섬을 꽂았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번의 부딪힘이 이어졌을 때 나는 슬슬 때가 온 걸 느꼈고 아니나 다를까 아수라가 내게 절초를 날려왔다.
절기(絶技)
천수관음(千手觀音)!
촤촤촥 하는 소리와 함께 절대지경의 의념으로 만들어진 수천 개의 칼날이 내 전신을 가득 에워싸는 느낌이 들었다. 단 하나의 칼날이라도 잘못 막았다가는 금강동인이 절단당하는 무시무시한 절기가 바로 천수관음! 본디 이렇게까지 내가 수를 잘못 두었다면 이쯤에서 내 패배가 확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 나는 아주 빠르게 허공에서 몸의 균형을 잡으며 재차 중단세로 검세를 전환했다. 그리고는 찰나의 시간동안 아수라의 천수관음에 존재할 헛점을 살피려고 노력했다. 머릿속에 과거 아수라의 조언이 기억났다.
[그 합에 도달할때까지 너와 내가 나눌 초식의 조합은 측정이 불가능하지만 너도 절대지경이니 웬만하면 그 합까지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합에 도달하면… 반드시 텅 빈 장소가 보인다.]
보인다.
아수라의 말대로 저 위맹한 천수관음의 빽빽한 칼날의 사이로, 텅 비어있는 의념이 보였다. 본디 정상적으로 천수관음을 전개하면 나타날 수 없는 약점이지만 아수라의 무의식적인 버릇이 연결되다보니 초식에 헛점이 절로 드러난 것이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눈을 빛내며 그대로 최강의 검뢰를 쏟아부었다.
절대검뢰(絶對劍雷)
무량단(無量斷)!
무량을 베는 번개가 아수라의 천수관음을 찢어버린다. 번개의 검광(劍光)이 아수라의 목덜미까지 베어가는 순간 아수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조금 맺히는 게 보였다.
우웅!
그러나 비천원기영옥(飛天元氣靈玉)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보호하면서 무량단의 검세가 일순간 약해졌고 아수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량단의 검기를 흘리면서 자연스럽게 이 보(二步)를 전개해서 피해를 무마시켰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뛰어난 대응이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했다.
“아!”
완벽하게 헛점을 찔렀는데 저렇게 피한단 말인가? 절대 생각하고 펼칠 수 없는 경지다!
‘과연 아수라…!!’
파밧
아수라는 무량단의 검뢰를 피해낸 후 나와 삼 장의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 수가 없군. 어떻게 내 수법과 버릇을 미리 알고 있다는 듯이 나와 싸울 수 있는 거지?”
“…….”
“넌 누구냐?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지?”
그 말에 옆에 있던 긴나라가 의아한 듯 말했다.
“삼황오제의 사도가 너와 맞상대할 정도로 강력한 무공을 갖고있단 말인가? 설마 방금 전 정말로 무공만으로 겨뤘던 건가? 마력을 써서 싸울 줄….”
긴나라의 질문에 아수라는 성을 냈다.
“닥쳐라, 긴나라! 이건 내 싸움이니 끼어들지 마라!”
“…….”
“끼어들면 죽여버리겠다!”
긴나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자 가만히 앉아 있던 측천무후가 말했다.
[긴나라. 너무 성급한 것 같소. 저 자의 말도 좀 들어볼 만한데 다짜고짜 싸워서 될 일이오?]
“측천무후. 당신 이상으로 우리는 삼황오제를 증오하오. 어설픈 동맹을 맺을 바엔 빨리 없애버리는 게 우리의 기본방침….”
긴나라가 골치아픈 듯 아수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 막무가내로군. 설마 저 자와 끝까지 무공으로 결판내겠다 이 소리인가? 삼황오제의 사도와?”
“난 경고했다. 내가 진다면 끼어들어도 좋다.”
“후. 맘대로 해라….”
긴나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힐끔 측천무후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서 긴나라가 측천무후와 뭔가 음모를 꾸밀 거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젠장. 아수라는 몰라도 긴나라라면 합공을 주저하지 않을 거고 여기에 다른 지원군을 더 불러올 수도 있다. 측천무후가 긴나라에게 동조한다면 오래 끌어서 좋을 건 없어….’
하지만 정말로 내가 아수라와 일대일로 끝까지 싸워서 이길 수 있냐고 하면 그건 좀 힘든 일이다. 아수라가 방금 전 완전히 허를 찔렸는데도 대응해낸 실력을 보면 확실히 같은 절대지경이라지만 나와는 수준차가 있었다. 단시간에 결판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애초에 아수라에 대응할 방법을 연구했던 것도 다짜고짜 덤벼드는 이런 상황만 무마한 후 나머지는 교섭으로 처리하려고 했었던 것이기에 난감했다. 내게 호승심을 느끼고 끝까지 싸워보려는 전투광 아수라에게 지금 흑요석을 준다고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으리라.
갈수록 상황이 불리해지자 나는 조급해졌다.
‘어떻게 하지…. 이 측천무후의 궁에 있는 천원의 방에 가서 지상세계로 빨리 가려고 했었던 건데.’
이렇게 된 이상 저 녀석들을 따돌리고 천원의 방까지 가 볼까? 멸혼보를 쓴다면 어쩌면….
‘아냐…. 확률이 너무 낮아…. 음… 아 그래!’
나는 계속해서 고민하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들어서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난 지지부진하게 싸우는 게 싫다! 그러니까 나랑 내기하자!”
아수라가 솔깃했는지 대꾸했다.
“어떤 내기 말이냐?”
“네 최대의 필살기인 적멸무극을 써라! 내가 그걸 정면에서 파해한다면 너는 앞으로 내 동료가 되어야 하며 나를 도와줘야한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
아수라의 표정이 크게 날카로워졌다.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옆에 있던 측천무후에게 말했다.
“측천무후! 당신은 공증인이 되어라! 내가 이기면 천원의 방을 개방해준다는 약속을 해줘야겠어.”
[…미친 건가? 그럴 수는 없….]
측천무후가 당연히 거부하려고 할 때 아수라가 갑자기 그녀 쪽으로 검을 향하며 외쳤다.
“받아들여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너와 네 백성을 다 죽여버리겠다.”
[아수라. 저런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응할 이유는 없다. 왜 이리 망둥이처럼 펄쩍대는가.]
“내 적멸무극이 진다는 소리냐? 내 무예를 모욕하는 건가.”
쿠르르르
“내가 바로 세계최강, 천축제일의 고수 파순이다! 난 이긴다!!”
아수라의 전신에서 강렬한 힘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투기와 살기는 진짜였기에 측천무후와 긴나라가 그의 기세에 움찔했다. 아수라가 진심이란 걸 알아챈 듯 측천무후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좋다. 공증인이 되어주지. 지게 된다면 아수라 너도 그만한 대가를 치르리라.]
“흥.”
스스스
나와 아수라가 대치했다. 나는 아수라 덕에 판을 여기까지 끌고 오자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다른 팔부신중이 있었다면 씨도 안 먹혔을 텐데 하필 아수라가 여기 있었던 덕분에 일대일 결투까지 판이 만들어진 것이다.
고오오오
아수라의 전신에 가공할 투기가 밀집되는 게 눈에 보였다. 말 그대로 전력을 다할 생각인 듯, 아수라의 몸이 점차 인간의 형상에서 그의 본체로 뒤바뀌기 시작했다. 마왕(魔王)으로서의 형상을 드러내는 아수라가 이윽고 자신의 여섯 개의 팔에 각각 무기를 들었고, 흉흉한 안광을 빛내었다.
[건방진 놈…. 어디서 나에 대해 많이 조사를 해 온 것 같지만 적멸무극을 받아내겠다는 오만의 대가는 목숨으로 갚아라!]
나는 아수라의 말에 투덜대었다.
“야. 말이 이상하잖아. 어차피 이렇게 내기 안 해도 싸움에 지면 날 죽일 생각이면서 결과가 뭐가 달라?”
[닥쳐라. 그럼 간다!]
아수라의 여섯 개의 팔에 각각 광세절학의 의념이 맺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있을까….’
28회차의 아수라는 내게 적멸무극 파해법을 알려준 바가 있었다. [흐름]만 읽을 수 있으면 적멸무극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고, 나는 그 이론에 따라 부단히 흐름을 읽는 수련을 했다. 하지만 사실 그 흐름이란 게 뭔지는 하나도 알지 못했고 그저 초식 사이의 흠결만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다. 사실 아직 파해법을 모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28회차의 아수라처럼 검결만으로 적멸무극을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내기를 제안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잘 되야 할텐데.’
쿠구구구구
기력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아수라의 여섯 개의 팔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듯 했다. 그리고 아수라의 최강의 절기, 적멸무극이 펼쳐졌다.
월아영상패룡파(月牙永狀覇龍波)
천수관음(千手觀音)
자영환수도(紫影幻秀刀)
비천원기영옥(飛天元氣靈玉)
폭광누멸검(爆光漏滅劍)
아수라파천(阿修羅破天)
저 광세절학이 합쳐져서 무(武)의 폭풍이 만들어지는 걸 눈 앞에서 보자,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거대한 힘의 압력에 나는 팔가죽이 뜯겨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보는 것과 실제 마주하는 게 천지차이인 것이다. 나는 적멸무극의 위력이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 최소 다섯 배는 강하다는 걸 체감하고는 암담함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었다.
“으으으!!”
적멸무극이 펼쳐짐과 동시에 나는 내면의 뇌기(雷氣)를 궁극까지 끌어올려서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집중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절대지경의 의념을 써서 크게 일참(一斬)을 날렸다.
“으아아아아아!!”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일백(一白)
천축검(天縮劍)
마치 탄력을 잔뜩 매긴 시위를 튕겨내듯 천축검의 일검이 적멸무극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당연히 내 전력을 다한 무량단으로도 정면에서 아수라의 적멸무극을 막아내는 건 무리였기에 천축검의 기(氣)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재차 몸 안의 뇌기를 공명시켰다.
울어라.
뇌혼(雷魂)이여.
치리링
번개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와 동시에 내 몸안의 뇌혼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아차렸고 전신에서 뇌화(雷花)가 피어나서 전류를 방출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아직 절대로 정면에서 적멸무극을 감당할만한 기술이 없다면 - 최소한 힘으로라도 엇비슷하게 따라잡는 방법은 딱 하나, 구궁파천뢰 뿐! 과연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궁파천뢰로 적멸무극과 맞서보리라!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이흑(二黑)
오행강기(五行罡氣)
끼기긱 -
일백 천축검에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이흑 오행강기가 펼쳐지자 적멸무극의 맹진이 잠시 멈칫거리는 듯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과거 방룡 이설표가 내게 구궁파천뢰를 펼치는 요령을 설명했던 걸 기억해냈다.
[종사. 구궁파천뢰에 집어넣는 초식 하나하나가 최강이라고 해서 결과적인 위력도 최강이 되는 건 아니오.]
[그게 무슨 소리지? 무량단만 아홉 번 쓰면 안 되나?]
[하하. 종사가 또 일부러 대가리 터진 소리를 하는구려. 무량단은 강력하지만 그만큼 단순해서 도리어 구궁파천뢰와는 그다지 맞지 않소.]
[…….]
[구궁파천뢰의 뇌혼은 다양한 성질이 융합될수록 각각 다른 성질을 증폭시켜 강대한 보조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소. 그래서 설령 하나의 초식으로는 약한 편이라 하더라도 강력한 잠재력이 있다면 결과적으로는 더 강한 구궁파천뢰를 만들어내는 재료가 될 수 있소.]
그래. 그 때의 수련을 통해서 많은 조합을 배워놓았다. 그리고 천축검이나 오행강기 하나하나는 내가 가진 초식 중 최강이 아니지만 나는 이 조합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삼벽(三碧)
진무칠절경(眞武七絶經)
콰치칭
내 코앞까지 날아온 적멸무극이 처음으로 속도가 늦춰졌다. 그리고 강렬한 뇌혼이 내 몸을 태워버릴 듯이 번쩍거리면서 번개를 방출했고, 동시에 진무칠절경을 내뻗은 좌장(左掌)에서 펼쳐진 진무칠절경의 방탄진기가 형형색색으로 빛나며 칠채(七彩)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오행의 기운을 머금은 방탄진기가 회전하면서 동시에 강력한 척력(斥力)을 발생시킨다.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오행의 기운과 흡인력을 동시에 지닌 방탄강기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성질이 융합된 방탄강기는 본연의 무공위력을 훨씬 뛰어넘는지 적멸무극은 잠시동안 허공에서 멈추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적멸무극을 완전히 막은 게 아니다. 겨우 삼벽 정도의 융합절기로는 잠시 멈춰 세웠을 뿐 이내 적멸무극이 힘을 더해서 전륜(轉輪)하면 무조건 박살나고 말리라. 나는 이를 악물고 전신에서 뇌혼을 회전시켜서 계속해서 구궁파천뢰를 펼쳐내었다.
‘잠깐… 잠깐정도는….’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사록(四綠)
뇌명(雷鳴)!
치지직
구궁파천뢰의 특징은 공격방어초식 뿐만 아니라 뇌명같은 보조무공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급박한 전투 와중에 함부로 뇌명같은 걸 대놓고 쓰면 헛점이 너무 많아서 위험했는데 일단은 삼벽까지 전개한 방탄강기의 힘을 믿고 내 잠재력을 강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빠지직 빠지직
‘컥… 크헉….’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전력을 다해서 뇌혼을 회전시키며 구궁파천뢰를 펼치니 겨우 사록까지 펼쳤는데도 강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광속이동을 연속으로 해서 몸이 피칠갑이 된 상황에서 이만한 고통이 느껴지니 분골당하는 고통이 따로 없었다.
나는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꺼내서 버티며 다시 한 번 뇌혼을 회전시켰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오황(五黃)
무환천랑백팔식(霧換天朗百八式)
뇌신류 초대종사 초무린의 팔황경천신공(八荒驚天神功), 그 중에서도 최강의 패환(覇幻)을 머금은 절초! 검선 여동빈조차도 무형검을 쓰지 않는다면 감당해낼 수 없는 극한의 초식이야말로 오황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더구나 무환천랑백팔식이 지닌 환법의 다양성은 뇌명을 머금은 상태에서 극대화될 게 뻔했다.
촤좌좌좍
마치 방탄강기에서 내 검강(劍罡)이 살아있는 것처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의 뱀처럼 뻗어나간 검강은 이내 운무(雲霧)처럼 변해서 허공에 흩날렸고, 수십만 개가 넘어서는 무수한 검로를 만들어내었다. 본디 채찍으로 펼치는 무환천랑백팔식을 검초로 펼쳐내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적멸무극은 조금씩 밀리는 기색이 보였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의념으로 뭉쳐있는 적멸무극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대로 밀어붙이면 아수라의 목까지 벨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내가 웃으려고 할 때였다.
찰나의 순간 - 아수라의 염심이 들려왔다.
[어리석군. 내가 지금까지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했나?]
뭐?
쿠궁
“……!!”
갑자기 적멸무극의 회전이 몇 배나 빨라지더니 두 배나 강렬해진 중압감이 내 전신에 닥쳐오는 게 느껴졌다. 실컷 밀어냈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무환천랑백팔식과 진무칠절경의 강기가 동시에 부숴지는 게 육안에 보였다. 나는 이것이 순수한 ‘힘의 차이’라는 걸 깨닫고는 경악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지금까지 대충 펼쳐본 거였단 말인가?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력이?!
파캉!!
다음 순간, 적멸무극이 내 지근거리까지 다가옴과 동시에 내 검이 반쪽나서 부숴져 버렸다. 급히 꺼냈던 철검이긴 하지만 내 의념을 담고 있는데도 저리 쉽게 부러진다는 건 적멸무극의 위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뜻이었다.
죽는다.
또 죽는다.
‘아… 안 돼….’
나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이번생 내내 휘둘리기만 했고 하나도 얻은 게 없다는 생각에 절망을 느꼈다. 정말로 여기서 끝인가?
그 순간, 나는 목숨이 아깝다는 생각 이상으로 더 아까운 게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더 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는 더 회전시키면 목숨이 터져 버릴까봐 오황까지를 잠재적인 한계로 잡았다. 그게 현재 내 뇌혼성취에서 발휘하는 한계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여기서 한 번 더 회전시켜봐도 되지 않을까?
아니…. 끝까지 가 보자.
끝까지 가는 거야!!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육백(六白)
무량단(無量斷)
뇌혼의 인도에 따라 일백에서 오황까지의 모든 기운이 하나로 합쳐져서 검에 모이는 듯 했다. 그리고 나는 여태껏 없었던 수준의 무량단을 펼쳐내었고, 그 무량단에는 다섯 개나 되는 무공의 모든 성질이 융합되어 있었다.
뇌전의 칼날이 무수한 효과를 안고 처음으로 적멸무극을 베어가는 순간, 나는 뇌혼을 과도하게 끌어올린 대가로 내장이 다 터졌다는 걸 깨달았다. 뇌혼의 회전을 더 이상 육체가 견디지 못한 것이다.
퍼억
내장이 터지는 감각과 함께 무량단이 적멸무극과 충돌했다. 적멸무극은 반쯤 베여가다가 갑자기 범위를 넓혀서 내 주변을 모조리 휩쌌고, 나는 무량단으로 끝이 없는 물길을 베어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키리리링 -
번개의 칼날이 계속 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검신합일의 상태에서 무아지경으로 나아가다가 아수라의 염심이 들렸다.
[어디까지 헤맬 셈이냐? 그만 죽거라.]
두근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나와 아수라 사이의 거리가 단 일 장 남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느 새 적멸무극을 뚫고 이만큼이나 접근했으나 이 거리는 말 그대로 천지차이나 다름없었다. 내 무공성취로는 정면으로 대항해봤자 마왕 아수라가 전력을 다한 적멸무극에는 이겨낼 수 없는 것이다.
몸 상태는 더할 나위없이 엉망이다.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어차피 한 식경도 안 되어서 죽을 몸 상태다.
…정말… 끝이군….
나는 이제 전신이 적멸무극에 폭발하며 곧 30번째 삶이 시작될 거라 생각했으나, 그 순간 누군가의 환영이 눈앞에 비치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건…?
[나는 그릇이 되고서야 깨달았소. 진정한 번개는 구속되지 않는 것.]
뇌광에 휩싸여 아른거리는 그 존재가 희미하게 웃는 게 보였다.
[그것은 결국 마음이오!]
그걸 느끼는 순간, 나는 전신의 뇌구(雷球)가 덜덜 떨리면서 갑자기 빛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
칠적(七赤)
뇌신지기(雷神之器)
자유다.
전신의 뇌구가 마치 그릇을 뛰쳐나가서 자유로워지려는 것 같았다. 전신에 빛의 광선이 미친 듯한 속도로 회전하는 걸 더 이상 내 육체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고, 전신의 구멍으로 뛰쳐나오려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뇌구의 회전이 굳이 내 몸 안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퓨욱
[…….]
그 순간, 뇌검(雷劍)이 삐죽 하고 아수라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마왕 아수라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뇌검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이윽고 나는 나도 모르고 손가락을 위로 치켜올리며 뇌검을 움직였다.
츄카칵
[크아악!!]
아수라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다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왕의 힘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막강한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흐리멍텅한 눈으로 그런 아수라를 보며 생각했다.
‘…의념이…었나…?’
뭔가 다르다…. 의념으로 한 공격이라면 아수라는 무조건 막거나 피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아수라는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고 당해버렸다. 그렇다 해서 지금 공격이 [작은 굴레]를 조작해서 시간을 갖고논 것도 아니다.
어떤 원리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나는 눈앞에 있는 환영에 시선을 집중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 눈이 흐릿한 상태에서도 나는 그의 외견을 볼 수 있었고,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설표…?”
눈을 깜박인 순간 그 환영은 사라져 있었다.
털썩
나와 아수라는 둘 다 양쪽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검을 잡기는커녕 기식이 엄엄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반면에 아수라는 심장이 꿰뚫린 고통으로 발버둥치면서도 서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왕이 지닌 강대한 생명력 때문에 저만한 부상도 치명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크윽… 으윽… 으아아아아!!]
마왕 아수라가 괴성을 토해낸다. 그리고는 나를 슥하고 들어올렸다.
‘산 채로 씹아먹을 생각인가?’
제기랄… 엄청 아프겠군.
나는 여기까지라고 생각하며 눈을 꾹 감았지만 잠시 후 일어난 일에 어리둥절했다.
[측천무후.]
그렇게 말하며 아수라가 걸어가서 측천무후에게 내 몸뚱이를 내밀었다.
측천무후가 당황한 듯 했다.
[아수라. 설마.]
이어진 말에 장내의 분위기가 확 굳어져 버렸다.
[이 녀석을 치료해라. 내가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