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23화 (1,22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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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곤이라고?

‘고대의 신화에서 들어봤던 것 같은데.’

언뜻 놈의 정체를 알아낼 순 없었다. 나는 신화에 그리 정통한 것도 아니었고 지금은 망량이 곁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곤의 정체보다는 놈이 내게 적의를 갖고 있느냐 아니냐였기 때문에 나는 그걸 더욱 집중해서 살피고자 했다.

‘애매하군.’

적대감과 호기심이 반쯤 섞인 듯한 느낌이다. 왜인지 그 오묘한 감정의 흐름을 눈치 챈 나는 상대가 무작정 적이 될 존재가 아니라, 내게서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여기는 싸우기보다는 일단 말로 해결할 때 같다.

나는 직감에 따라서 곤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고대의 위대한 존재 같군. 황제 공손헌원이 당신을 가뒀던 거 같은데 봉인이 풀려서 이 세상으로 뛰쳐나온 것이오?”

[그렇다.]

“그러면 이제 뭘 할 생각이오? 삼황오제에게 복수할 셈인가?”

[…….]

곤은 텅 비어있는 눈두덩으로 내 쪽을 보았는데, 눈알이 없음에도 그 눈에는 마치 귀신불 같은 청염(靑炎)이 맴돌아서 귀기스럽게 보였다. 이윽고 곤이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네놈은 삼황오제의 사도로 보이는구나. 저주받을 소호의 문양을 그 팔에 지니고 있으면서 내게 덤비지 않는 거냐?]

역시 보통 놈은 아니다. 아마도 소호의 날개가 꽂혔던 팔뚝에 사도의 문양이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으며, 그걸 단번에 알아차린 듯 했다. 그 말은 적어도 저 곤이란 존재 또한 생전에 삼황오제의 사도에 준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하긴 황제의 봉인에 갇힐 정도면 평범하진 않았겠지….’

상대의 능력은 마왕급 이상일 수도 있다. 이번 전생을 시작하자마자 이런 놈과 피튀기게 싸워봤자 소호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라서 더 싸우고 싶지 않다.

나는 곤의 물음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내가 소호에게 받은 임무는 전혀 다른 것이오. 당신이 협조해주기에 따라서는 우리가 굳이 싸울 필요는 없겠지.”

[호오. 그 싸움닭 소호의 사도인데 냉정하며 호전적이지 않다라….]

곤은 더 흥미를 느낀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을 거듭하다가 말했다.

[삼황오제에게 당장 복수할 생각은 없다. 나는 힘을 키워야 하며 당분간 자유를 누릴 생각이다. 나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너와 협력할 수도 있겠지.]

“좋았어! 말귀를 알아 처먹었구려.”

[…군왕의 격을 지닌 고귀한 존재 같은데 이상하게 말투가 저렴하군.]

뭔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던 곤이 말을 이었다.

[타협점이 있을지 알고 싶군.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

나는 곤에게 말했다.

“나는 요순의 존재를 탐색하는 중이오. 그 자의 거취나 정보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내게 알려주시오.”

[…….]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듯 곤의 눈두덩에 있는 청색 불꽃이 크게 일렁였다.

어? 뭔가 예민한 얘기를 꺼낸 건가?

곤이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알 것 같기도 하군. 위치는 모르지만 놈에 대한 건 조금 안다. 꽤 중대한 정보도 말이지….]

“그렇소?”

[네게 이 정보를 알려주면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셈이지? 설마 이 자리에서 나를 놓아주겠다고 알량한 거짓 자유를 대가로 내놓을 정도로 뻔뻔하진 않겠지.]

“하하, 그럴 리가….”

눈치 빠르네.

나는 내심 투덜거리다가 말했다.

“당신에게 내가 가진 보물을 공양하도록 하지. 인과율에 따라 당신의 힘이 회복될 확률도 높아질 터….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거래라고 보이는군.”

[어떤 보물을 가지고 있느냐?]

“흐음. 지금은 보는 눈이 많아서 꺼내기가 싫은데.”

나는 슬쩍 주변을 돌아보았다. 방금 전에 곤이 도(刀)에서 빠져나올 때 그저 충격파만 일어났기 때문에 사상자가 없는 수준이었고, 모산파의 모든 도사들이 지금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진 즐비한 보물을 다 꺼내는 건 강호에 소문이 퍼지라고 고사를 지내는 격이다.

그러자 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깟 게 무슨 걱정이냐? 힘을 합쳐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나서 얘기하자.]

“…….”

[현세의 인간 따위 내 백성이 아닐지니.]

우오오오!!

곤이 한쪽 손을 들어 올리자 괴이쩍은 귀곡성과 함께 어둠의 광구가 그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고, 거기에는 막강한 마력이 압축되어있는 게 보였다. 나는 마왕들을 상대해 봤던 경험과 마력의 크기로 그 어둠의 광구가 한번 터지기만 하면 이 모산 따위는 가볍게 날아간다는 걸 직감했다.

웅성웅성

모산파 도사들이 안 좋은 느낌이 드는지 웅성거렸고, 특히 내 근처에 있던 모산파의 장문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내게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위대한 존재시여!! 제발 그만두소서!! 뭐든지 하겠나이다!!”

“…….”

“저, 저 자를 멈춰주십시오! 으으으….”

나는 안 그래도 곤을 제지할 생각이었으나 모산파 장문인이 저렇게 말하자 장난끼가 발동했다. 그래서 농담삼아서 말해보았다.

“곤을 멈춰주는 대신에 너희 모산파가 내 부하가 된다면 생각해 보지.”

“…네!! 당연합니다! 부하로 받아주십시오.”

그러자 옆에서 보고 있던 모산파 장로들이 깜짝 놀라는 듯 했다.

“장문인!!”

“어찌 저런 어린애에게 본파의 운명을….”

그러나 모산파 장로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모산파 장문인은 자신의 머리를 바닥에 쿵쿵 찧으면서 필사적으로 내게 외쳤다.

“위대한 존재시여!! 부탁드리나이다!! 제발 저희를 부하로 받아주십….”

나는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재빨리 바닥에 머리를 찍는 모산파 장문인의 혈도를 찍어서 멈추게 했다. 그리고 모산파 장문인을 일으켜세우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알았으니까 그만 해라….”

젠장…. 코웃음도 안 치는 반응을 내심 기대했는데 정색해서는 부하가 되겠다고 하니까 도리어 내가 당황했잖아.

그 동안 내 인생여정과는 맞지 않는 반응이 나오니 나는 곤혹스러웠고 모산파 장문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그가 정말로 나를 주군으로 생각하는 건 아닐 테고, 나를 곤과 동급의 괴물로 판단하기에 모산파 문인들을 살리기 위해 용기를 쥐어짠 것이리라.

나는 곤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보물을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사도로써 명예를 걸고 네게 섭섭지 않게 보물을 공양할 것을 약속하지.”

[정말인가. 날뛰지 않는 건가?]

“그래.”

[그냥 몰살시키고 나서 얘기하는 게 더 편할 터인데 보기보다 인간에게 약한 놈이군….]

“제길. 넌 고대의 임금이 아니냐? 왜 이리 잔인하단 말이냐.”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곤이 대답했다.

[내 백성들은 모두 삼황오제의 흉계에 죽어나갔다. 이 세계에 한 줌의 온정도 남아있지 않으니,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

“…그 얘기도 나중에 해줬으면 좋겠군. 아무튼 거래는 성립된 건가?”

[…….]

곤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놈이 어떤 놈인지 좀 더 지켜보고 싶어졌다. 나는 다시금 오도(吳刀)에 들어가 있을 터이니 나중에 거래를 하고 싶을 때 나를 깨우도록 하라.]

“뭐?”

[나는 좀 더 수면을 취하겠노라….]

슈르르륵!!

다음 순간 곤의 신형이 마치 빨려들듯이 도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이윽고 어둠의 기류가 씻은 듯이 사라졌고 곤의 존재감도 없어져버렸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오도에 가까이 다가가서 오도를 들었는데, 오도에서도 방금 전과 같은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나는 옆에 있던 모산파 장문인에게 물었다.

“모산파 장문인. 곤이 어떻게 한 거야?”

그러자 모산파 장문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스스로 오도에 봉인된 것으로 보입니다. 봉인이라기보다는 자기의 힘을 회복하기 위해 추가로 수면기간을 가진 것에 가깝겠습니다만….”

“수면?”

“아마 방금 전에 출현했던 곤은 완전한 힘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신적인 존재들은 수면을 통해서 소모된 힘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신기(神器) 오도에서 잠든 것입니다.”

“흐음.”

이 칼을 오도라고 부르는군.

나는 오도를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모산파 장문인에게 말했다.

“당신과도 할 얘기가 있겠군. 우선 안으로 들어가지.”

“존명….”

이윽고 장내가 정리된 후 우리 둘이 모산파 장문인과 이야기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장로들도 우리의 대화를 듣고 싶어 했으나 모산파 장문인의 방에 들어가자 도청술법도 통하지 않는 듯 했다. 모산파 장문인이 극히 공손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본파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대한 존재시여.”

나는 짜증이 나서 말했다.

“그놈의 위대한 존재라는 얘기는 그만하시오. 이면의 세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데 나는 이족이나 괴물이 아닌 순수한 인간이오.”

모산파 장문인이 놀라서 말했다.

“네? 삼황오제의 사도라 하셨는데 어찌 인간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가공할 마력을 어떻게 인간이… 곤이 전승된 대로의 존재라면 그 존재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는 인간 따위는 없습니다.”

나는 흑요석을 줄 수도 없고 상대에게 전생자라는 걸 굳이 설명할 이유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충 깔아뭉개기로 마음먹었다.

“아 몰라. 살아왔던 사정상 삼황오제의 유적을 뒤지거나 할 일이 많았소. 그 덕에 기연을 좀 얻은 것뿐이니 그렇게 알아두고, 나를 인간으로 대우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아무튼 오도와 곤에 대해 좀 설명해줄 수 있겠소?”

내 질문에 모산파 장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오도는 신화시대의 보물로써, 고대에 곤(鲧)이 치수(治水)를 실패하자 요(堯) 임금이 그를 베는 데 사용했던 보물입니다. 그리고 오도에 곤이 봉인되자, 요 임금의 뒤를 이어 순 임금이 즉위하여 북방상제 전욱의 도움으로 치수를 하여 세계를 안정시켰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치수? 전욱?”

여기서 전욱과 연결이 된다는 것인가?

내가 놀라서 대꾸하자 모산파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모르셨습니까? 곤은 본디 북방상제 전욱의 아들이며, 신(神)의 반열에 올라있던 존재입니다.”

“……!!”

전욱의 아들?!

‘그 정도라면 곤은 정통 신격이잖아!’

내가 깜짝 놀라자 모산파 장문인이 말했다.

“저 또한 신화시대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곤이 오도에 베여 신으로써 죽음을 맞고 오도에 영혼을 봉인당했으며, 그 때 규룡(虯龍)이라는 존재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저희 모산파의 초대 시조라 하실 수 있는 상청신군(上淸神君)께서 천계에서 지상에 내려오실 때 오도를 갖고 내려오셔서 그 이후로 저희가 줄곧 오도를 봉인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복잡하군.”

예전에 망량에게서 신화공부를 할 때 언뜻 들은 것 같지만 단지 종이책의 역사기록을 듣는 것과 이렇게 생생한 존재를 맞닥뜨린 경험은 전혀 달랐다.

내가 모산파 장문인의 말을 열심히 기억하고 있자 모산파 장문인이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곤은 본디 자존심이 강하고 요순 임금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던 강인한 군주였다고 전승되는데…. 설마 귀인과 대화하여 얌전히 재봉인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녕 위대하신 존재십니다.”

“아 좀 작작 하라니까…. 위대한 존재 아니라고.”

“죄,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상청신군은 또 뭐하는 놈이오? 그 놈도 천계 놈인가?”

“…….”

“내가 들어본 적 없는 대라신선인데.”

약간 미친놈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던 모산파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분은 일반적인 대라신선이 아니라 위대한 존재의 화신(化神)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모산파를 개파하시면서 종산(宗山)인 곤륜산(崑崙山)의 오른팔이 되어 위기상황에 언제든 천계에 협력하라는 훈시를 남기고 등선하시었습니다.”

“…….”

“저희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요.”

모산파 장문인은 정말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나는 그 말에 담겨있는 진짜 의미를 알아챘다.

‘…상청신군이란 놈은 아마 삼황오제나 그에 준하는 대신격의 화신. 그 놈은 지상을 천계가 좀 더 다스리기 쉽게 하려고 지상에 내려와 모산파를 만든 거로군. 유사시에 곤륜산의 대라신선들이 움직이기 쉽게 하는 역할인 거야.’

모산파가 이면의 세계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술법수준이 꽤 높은 이유가 대번에 이해가 되었다. 말하자면 모산파는 천계의 분타나 파수꾼 같은 것이리라.

나는 혹시하는 마음에 모산파 장문인에게 말했다.

“혹시 당신은 여기서 얻은 정보를 천계에 넘기는 건가?”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건 아니겠지?”

모산파 장문인이 고개를 크게 저으며 말했다.

“모산파가 천계와 이어졌던 건 딱 만당시대 까지였습니다. 그 때 종말의 거룡이 강림하면서 천지가 대혼돈에 빠졌고, 그때 모산파의 숱한 도사들이 대요괴들에게 당하면서 천계와 다시 연결할 방법도 사라지고 말았지요. 저희는 천여 년 가까이 독립적으로 술수를 연구하는 문파가 되었습니다.”

“…….”

“천계는 전설 속의 존재가 된 지 오래지요.”

만당시대, 종말의 거룡.

그 때의 파장이 모산파에도 영향을 미쳤던 건가.

‘하긴 천계와 연결된 술법문파라면 대라신선급 존재가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한데 그렇진 않군. 무력수준이 낮은 걸 보니 이 자의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아무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나는 대충 넘어가고는 모산파 장문인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천계와 연락하지 마시오. 내 말을 어긴다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소.”

“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흐음, 전욱의 아들이란 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놈과 맞닥뜨린 느낌이다. 나는 방금 전에 보았던 곤의 기이한 형체가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 두 눈이 뽑히고 죄수의 옷을 입고 있었던 걸까?’

왠지 곤에게는 신화시대의 비사(秘事)가 있을 듯 하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는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모산파 장문인…. 음… 별호가….”

“도산법사(道山法師)라 합니다.”

“도산법사. 이걸 보시오.”

나는 수요를 꺼내서 도산법사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것은?”

“칠요 중 수요. 나는 수요를 봉인지에서 꺼냈는데 그 때의 여파로 강대한 수기가 봉인지 인근에서 떠돌고 있소. 조만한 그 수기 때문에 수해가 닥쳐오겠지.”

“그래서 수기를 공양하겠다 하신 거로군요.”

“그렇소. 수기를 모아서 공양할 술법이나 술법사가 있소?”

도산법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잘 할 수 있겠소?”

“상당한 고급술수가 필요하겠지만 어렵진 않을 것입니다.”

나는 모산파 장문인의 실력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좋소, 갑시다.”

파앗

이윽고 나는 서문혜, 도산법사와 함께 수요의 봉인지 인근에 도착했다. 그리고 근처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서 도산법사가 임시로 돌로 제단을 만든 후 그 자리에 꿇어앉아서 한참동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잠시 후 하늘이 깜깜해지더니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도산법사는 이마에서 땀을 송골송골 흘리며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한참 후 헉헉대면서 말했다.

“허억…. 허억…. 수… 수기를 다 모았습니다….”

“이제 공양하면 되는 거요?”

“고, 공양 주문은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엥? 따로 해야하는 거요?”

“네…. 앞으로 한 시진동안 주문을 외우면….”

“…….”

어째 영 부실한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게다가 하는 양을 보아하니 수기를 모으는 것만도 힘들어보이니 천계 대라신선들을 불러오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역량차이가 너무 눈에 보일 정도였기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천우진은 금방 하던데.”

내가 내심 실망하며 중얼거리자 도산법사가 크게 놀라며 말했다.

“화, 환신 말입니까?”

“당신도 천우진을 알고 있소?”

“좌도방문의 절대자이신 망량선사의 제자이신 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거에 그분께서 모산파에서….”

뭔가 말하려다 관둔 도산법사는 내심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분은 저와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인간을 초월한 술법사와 비교하지 말아주십시오….”

“…….”

천우진 녀석 생각보다 높은 위치였잖아?

약 한 시진하고도 반 식경을 더 기다리자, 마침내 파김치가 된 도산법사가 전신에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크게 외쳤다.

“칠요의 수기여…!! 백웅 님께 귀속되어 공양될 지어다!!”

우우우우!!

잠시 후 천공에 거대한 삼 장 크기의 물방울이 떠올랐다. 물방울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바로 눈앞까지 도착해서 멈추었다. 이게 바로 수요의 수기가 한데 뭉친 거라는 걸 알아차린 나는 도산법사를 쳐다보았고, 도산법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허억… 허억…. 이 물방울에 손을 뻗은 후 원하는 것에 공양을 행하시면 됩니다….”

“수고했소.”

“크어어….”

풀썩

도산법사는 체력과 술력이 동났는지 바로 기절해 버렸다. 설마 수기공양이 이렇게 어려운 술법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에 내가 황당한 눈으로 기절한 도산법사를 쳐다보자, 옆에 있던 서문혜가 말했다.

“백웅 님. 저래 봬도 모산파 장문인인 도산법사는 중원의 인간술법사 중에서는 최고에 가까운 상급술사예요. 단지 백웅 님께서 여태 만나왔던 술법사들이 초인적인 수준에 이르러있었을 뿐이에요.”

“그렇구려….”

“자, 어서 공양을….”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물방울로 손을 뻗었다.

촤아아악

물방울이 내 팔뚝 내부로 스며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동시에 눈을 감았고, 머릿속의 네 가지 원이 떠오르자 그 중에서 물의 바루나가 있는 원을 향해서 수류(水流)가 흘러들어가기를 염원했다.

우우우웅

수요의 수기가 절반쯤 사대신기 바루나의 원으로 흘러들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둔탁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백웅이여!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

슈욱!

의식세계에서 물의 바루나가 정령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어느 새 육체의 감각을 잊은 채 이 의식세계에 동화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물의 바루나의 앞에 서게 되었다. 나는 물의 바루나에게 말했다.

“바루나. 너희 사대신기가 나를 거부하는 것 같은데 꼭 그래야겠냐? 수요의 수기라도 받고 화를 좀 풀어 줘라.”

[…….]

바루나가 팔짱을 낀 채 침묵하다가 말했다.

[뇌물을 준다는 거군.]

“뭐, 말하자면 그렇지.”

[무척 알량한 발상이구나. 내가 이깟 걸 받고 기뻐할 줄 알았느냐?]

윽, 젠장….

통하지 않는 건가?!

내가 이를 악물고 있을 때 바루나가 갑자기 두 팔을 벌리더니 외쳤다.

[당연히 기뻐하지!! 받아주마!]

“…….”

[앞으로도 많이 바쳐라!]

이 새끼 헷갈리게 하지 마!

[다만 마력이 거슬리긴 하니까 물의 신기를 사용할 수는 있되, 사용할 때마다 네 마력을 신기 사용량에 비례해서 삭제하겠다. 동의하느냐?]

“……?!”

[삭제된 마력은 영구적으로 쓸 수 없게 되리라.]

나는 뜻밖의 말에 바루나에게 말했다.

“잠깐 그런 게 어딨어?! 마력도 일단은 내 힘이란 말이야!”

[이건 양보 못 한다. 본디 우리는 마력을 극도로 혐오하니, 지금의 네 상태로 볼 때 네게 힘을 빌려주기는커녕 즉시 불태워 죽여도 시원찮다. 이게 최대한 양보한 조건이라는 걸 알아두길 바란다. 내가 성의에 약한 성격이라서 운이 좋구나.]

“…으음.”

[게다가 나 말고 다른 녀석들은 지금도 널 죽이고 싶어서 살기가 들끓고 있으니 조심해라.]

그 말에 나는 휙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머지 세 개의 원에서 희미하게 살기 섞인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바루나의 말이 전혀 거짓이 아니었기에 내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자 바루나가 말했다.

[그리고 충고하자면 그 마력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뭔가 알고 있는 거야?”

[글쎄. 나는 아무튼 경고했다.]

“…좋아.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거래는 성립되었다.]

파앗!!

다음 순간 나는 현실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해냈다.’

사대신기 바루나의 사용권한을 되찾은 듯 했다. 내가 내심 뿌듯해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서문혜가 말했다.

“백웅 님. 급한 불은 껐어요.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흠…. 일단은….”

나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얻을만한 걸 좀 더 얻으러 다녀볼 생각이오.”

파앗

나는 곧장 황궁으로 가서 무명제사서를 얻었다. 그리고 수정석비를 얻고 나서는 곧장 전국옥새가 있는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신력을 써서 문을 열고 전국옥새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전국옥새를 손에 넣고 나자 갑자기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옛날에 만들어뒀던 물건을 혹시 만진 것이냐? 파장이 느껴지는구나.]

소호금천의 목소리였다. 나는 소호금천의 말에 대꾸했다.

“전국옥새를 손에 넣었습니다.”

[아, 맞다 그거….]

“제자리에 놔둘까요?”

[아니…. 자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날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네가 알아서 쓰도록….]

“소호금천 님?”

[…….]

더 이상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진짜 귀찮아하네….’

소호금천 평소에는 잠만 자고 있는 거 아닐까?

‘뭐…. 평소에 내 행동을 일일이 살필 순 없는 것 같아서 다행이군.’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서문혜가 말했다.

“백웅 님. 강한 기운이 다가오는 게 느껴져요. 심상치 않은 강자입니다.”

그 말에 나는 기감을 돋우어서 힘을 감지해 보았다. 그리고 서문혜의 말대로 강대한 기운이 서서히 이쪽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힘의 파장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아마 팔부신중 야차겠군.”

“싸우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그런 위험부담을 감수하기 싫어. 피하자.”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아마 이기겠지만 나로서도 어느 정도의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특히 만일에 야차가 자멸을 각오하고 추가변신을 하면 야차랑 싸우다가 죽을 가능성도 높았다. 지난 생에 야차의 잠재력을 보았던 나로서는 지금 야차와 싸우는 게 너무 위험한 일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파앗

나는 무영문에 도착했다. 그리고 무영문에 도착하자마자 서문혜와 함께 검마를 찾아갔다.

‘해적섬의 포로들과 대뢰옥 포로들을 해방시켜주려면 들를 수밖에 없지….’

한 시진에 걸쳐서 검마에게 비교적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거의 믿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서문혜가 함께 그를 설득하자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혜아의 말이라면 믿을 수밖에. 허나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로군, 소협.”

“죄송합니다. 흑요석을 쓸 수 있다면 금방 이해시켜드릴 수 있는데….”

“흑요석?”

“기억을 전송하는 술법입니다.”

내가 흑요석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하자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던 검마가 말했다.

“소협. 이제 선지자라는 존재에게 갈 생각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흑요석의 암기에 대해 해결을 할 겸…. 그 전에 북쪽으로 가서 드라큘라를 풀어줄 생각도 하고 있었고요.”

“…….”

검마가 잠시 후 말했다.

“뭔가 감이 안 좋군. 나는 자네에게 선지자에게 가기 전에 곤과 먼저 거래할 것을 추천하네.”

“네? 어째서….”

“선지자라는 자는 그리 자네에게 호의적인 존재만은 아니지 않은가? 자칫하다가는 곤과 거래할 교섭재료가 남아나지 않을지도 모르네.”

“흠.”

“어쩌면 곤과 교섭해서 나온 결과가 선지자에게 더 좋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지.”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검마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우웅

나는 외딴 곳으로 혼자 가서 오도에 신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마력에 반응한 오도에서 다시금 곤의 형상이 출현했다.

곤이 말했다.

[나를 불렀나….]

“곤. 그대가 원하는 게 뭐요? 최대한 들어줄 테니 요순의 정보와 교환합시다.”

곤이 실쭉하고 웃는 게 보였다.

[…너, 멍청한 척 하지만 무척 교활한 녀석이군….]

“뭐?”

이어진 곤의 말에 나는 놀라고 말았다.

[요순은 이미 소멸했다…. 너는 왜 그걸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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