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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서문혜의 말에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말로 전후사정을 전달해서 동료를 만들 수밖에 없단 말이오?”
“여의치 않을 거예요. 백웅 님이 겪으신 그 수많은 경험을 말한다 해도….”
서문혜의 표정이 잠시 흐릿해졌다.
“인세의 그 어떠한 이야기꾼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도 납득하기 힘들어요. 증거를 내세우면 약간은 설득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심복시켜 진정한 동료로 삼으실 순 없어요.”
“…….”
“마도의 전문가인 제갈사나 백련교주라면 납득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백웅 님의 ‘경험’ 그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크게 한정됩니다.”
맞는 말이다. 내가 겪은 걸 어떻게 인간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예전에 흑요석이 없을 때 입담으로 동료들을 설득하여 아군으로 만든 일도 있었지만 흑요석을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신뢰도와 성장율이 엄청난 차이가 났다. 흑요석이 없다면 대부분의 인간동료들은 그저 적대자가 아닌 것에 만족할 뿐 큰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서문혜에게 말했다.
“그들이 미치는 걸 감수할 순 없어. 그들을 만나는 건 좀 더 대책이 세워진 후에 해야겠군.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소?”
마도의 종사인 제갈사와 백련교주가 흑요석의 암기를 견딜지도 모르지만 그들이 미쳐버릴 위험성도 꽤 높다. 그리고 그들을 전생동료로 인정한 이상 그런 도박을 할 순 없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도리어 내가 못 버티리라.
그리고 그저 입으로만 설득할 경우,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예상할 수 없다. 뜬금없이 나타난 10대 소년의 몇 마디에 휘둘려서 자신들의 주관을 바꾸거나 내 말에 순순히 따를 자들이 아니기에 나를 배신할 수도 있다. 과거에 유사한 경험이 있었기에 어설프게 그들과 접촉하는 건 내게 독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문혜가 나직이 말했다.
“선지자를 찾아가시는 게 제일 옳은 방향이에요.”
“선지자를….”
“그 존재라면 백웅 님께 답을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만 그 전에 해야할 게.”
쿠구구구
쿠구구구구…!!
그 때 해적섬 전체가 뒤흔들리면서 바다 저편에서 마치 거대한 고둥 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동시에 바다가 검게 물들며 파도가 일렁였고, 어렴풋이 바다 저편에서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는 것도 눈에 보였다. 나는 그 조그마한 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해신족(海神族).’
이 섬에 세 시진이나 머물렀으나 자기들 부하인 해적들에게 생겨난 이변을 눈치 채고 온 것일까? 그렇다 해도 고작 해신족 무리 따위가 저런 천재지변 같은 현상을 일으킬 순 없었기에 나는 또 다른 사실을 눈치 챘다.
“상당한 마력을 지닌 고위존재가 이 섬에 오는군.”
“네. 아마도 해신족의 간부이거나 그 이상의….”
서문혜는 말을 잇지 않았으나 나는 그 뒷말을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서문혜가 내 눈치를 약간 살피다가 말했다.
“저 자들과 싸우는 건 전적으로 백웅 님의 선택이에요. 저는 그 선택에 따르겠어요.”
“흠….”
나는 고민했다.
‘해신족이 일천 마리가 몰려와도 큰 문제는 아니야. 진짜 문제는 저 놈들과 함께 오는 거대한 놈이지.’
만일에 지금 해신족 무리와 함께 이 해적섬에 도래하려는 게 ‘그’라면 지금 시점에서 싸우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일이다. 내 힘이 예전보다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일대일로 이긴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문혜가 말에 여지를 남긴 걸 보면, 그녀는 내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싸워도 되고 아니어도 된다고 한 건 아마 그런 속뜻이 있으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서문혜에게 말했다.
“시작부터 크게 상황을 꼬아버리고 싶지 않소. 승패와 관련없이 이곳을 떠나는 게 옳은 선택이오.”
“역시 그렇지요.”
“하지만… 시험해보고 싶은 게 있소. 그리고 그 시험에 저 놈들은 딱 좋은 연습상대요.”
“…….”
“걱정 마시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도망칠 거요.”
저벅
전투를 결의한 나는 해안가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상륙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내키지 않는군. 그럼 먼저 쳐 볼까.”
우우우….
나는 선검을 소환해서 잔뜩 기를 모았다. 그리고 기력이 완전히 채워지자 곧장 해면을 향해 무량단을 날렸다.
무량단 응용
해령참(海嶺斬)!
촤아아아악!!
[끼아아악!]
[까아악!!]
순식간에 반경 이 리 내의 해면에 떠올라 있던 해신족들의 목이 날아가 버렸다. 엄청난 크기로 불어난 검뢰가 번쩍이며 바다 위를 스쳐지나갔고, 뒤이어 검뢰가 지나쳐간 해면에 크게 번개가 튀었다.
파지지직
[카악….]
검뢰의 강력한 뇌전을 이용해서 검뢰가 스쳐간 근처가 모조리 감전되게 하는 절기! 내 딴에는 무사시의 무쌍참을 따라해 보았는데 결과가 영 달라서 입을 쩝쩝 다셨다.
‘역시 급조한 기술이라서 그런가? 무쌍참보다 범위가 좁고 검뢰 자체의 위력보다는 보조효과가 강하군….’
무쌍참 또한 하루아침에 만든 게 아니라 무사시가 오랫동안 실전 속에서 다듬은 기술이니 당장 따라잡을 순 없으리라. 나는 몇 번 더 해령참을 날리자 해안 근처까지 다가오던 해신족을 약 오백여 마리 정도 해치웠다는 걸 깨달았다.
둥둥
그렇지만 해신족은 계속해서 대가리를 해면 위로 보이면서 해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놈들의 숫자가 고작 몇백 단위가 아니란 걸 깨달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흠, 몇천 마리는 오는 건가? 끝이 없군.”
잡졸들을 계속 베어봐야 재미도 없었기에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츄와아아악!!
갑자기 거대한 소용돌이가 몇 개 일어나며 어두운 바다 속에서 무언가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바다 밑에 보이지 않는 소환진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거대한 존재는 계속해서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신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웬만한 산보다 더 거대해진 그 존재를 보자 뚫어져라 쳐다보며 주시했다.
나는 알고 있다. 저 놈은 저 크기가 끝이 아니다.
쿠구구구구
우오오오 -
이윽고 어깨가 구름을 넘어서서 그 장대한 상반신이 시야의 수평선을 모조리 먹어치웠을 때 - 태산보다 더욱 커진 그 존재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해신(海神).”
쿠콰콰콰
마치 박차듯이 놈이 몸을 일으키자 세계는 완전한 어둠에 집어삼켜진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실제로는 인간의 시야로는 더 이상 감당치 못할 정도의 크기를 완전히 드러내어, 상반신뿐만 아니라 하반신마저 드러났기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시험해보고 싶다.
지금의 내가 해신을 상대로 어느 정도 싸울 수 있을지.
나는 곧장 천공으로 치솟아오르며 그대로 무량단을 날렸다.
콰과광!!
무량단은 해신의 몸 한켠을 크게 갈랐으나 역시 저 놈에게 큰 피해는 주지 못한 듯 했다. 심지어 무량단으로 갈라버린 부분은 눈에 보일 정도로 재생되고 있어서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흠….”
예전에 여동빈과 화룡진인의 합동공격은 저 놈을 살짝 물러나게 할 정도였지만 지금 내 무량단은 그 정도 위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까?
나는 문득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검(神劍)의 힘이 절기와 화합된 공격력에 무량단만으로는 따라붙지 못하는 거야.’
그렇다면 내게도 화룡신검에 준하는 기보가 있으면 여동빈과 비슷한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늘 저 위에 있던 해신의 머리 부분에서 번쩍 하고 괴광선이 빛나는 게 느껴졌다.
쿠오오오오!!
“우우웃.”
예전에도 겪었던 해신의 광선! 광선이 한 번 스쳐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바다가 갈라지고 해저의 표면이 열 때문에 타오를 정도의 위력! 나는 광선의 범위가 어마어마하기에 멸혼보를 써서 간신히 회피할 정도였고 피해내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피해낸 순간 나는 오른팔과 왼쪽 날개뼈 쪽에 알 수 없는 가려움을 느끼고는 힐끔 쳐다보았고, 깜짝 놀랐다.
“허억?!”
오른팔에 왠지 모르겠지만 따개비가 잔뜩 달라붙어 있다?! 뿐만 아니라 피부에 파고들고 있었으며 따개비 옆에는 이끼까지 눈에 보일 정도로 자라는 게 보였다. 보나마나 날개뼈 쪽도 똑같은 괴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게 뻔했으므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게 무슨….’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예전에 해신과 싸울 때 화룡진인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신급 주살과 마법은 내가 감당하겠다. 여동빈 너는 천둔검법으로 놈을 해치워라.]
화룡진인이 여동빈과 공투하기 전에 했던 그 말. 단순히 화룡진인이 의욕상승을 위해서 했던 말이 아니라, 해신을 상대로 무력만으로는 싸울 수 없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 순간 내가 혼자서 해신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뭐가 부족한지를 알아차렸다.
‘해신은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신급 저주를 걸고 있는 거였어!!’
역시 신은 신이란 말인가?
여태껏 해신과 싸울 때는 신급 무기를 들고 있거나 아군 주술사가 내게 보호를 걸어주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지만 분명히 저주나 술수에 대한 대비 또한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따개비의 저주를 통해서 내 팔에서 혈액과 체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끼고는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저주가 이렇게 성가실 줄이야.’
당연한 듯이 화룡진인이나 망량의 시해지술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저주란 게 이 정도 효과가 있었단 말인가. 보통의 무인이라면 당장 따개비의 침식을 피하기 위해서 팔다리를 잘라내야 할 수준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가 즉시 목갑에서 수요를 꺼내서 장비했다.
우우우
수요에서 은은한 신력이 흐르면서 방금 전보다 따개비의 고통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저주의 진행이 느려졌을 뿐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역시 미해방 수요로는 화룡신검을 절대 따라잡지 못하는군!’
미해방 상태로는 칠요라 하더라도 간혹 잠재력을 발휘하는 고대의 명검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문득 수요를 억지로 해방할 수는 없을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방법도 생각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그렇다면….’
지난 생에 얻었던 옥황상제의 권능이 이번 생에도 유지되는지 어디 확인해 볼까?
나는 천공에서 천상제의 신법으로 크게 몸을 뒤로 빼면서 동시에 정신을 집중하며 주문을 외웠다.
“혼원지순!!”
…….
어라 왜 발동이 안 되지? 나는 예전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주문만 외워도 발동하던 방패술법 혼원지순이 안 펼쳐지자 당혹스러웠지만 뭔가를 깨달았다.
‘이번 생에 옥황의가 없어서 그런 건가!’
옥황의는 흑웅을 대신해서 내 술법제어력을 담당해주고 있었다. 그 덕에 내면의 신력을 곧장 술법으로 변환할 수 있었던 건데 지금은 옥황의도 흑웅도 없으니 주문만으로 술법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기초술법 몇 개를 제외하고는 쓸 수 있는 술수가 없다.
‘젠장. 천계에 가보기 전에는 옥황상제의 권능이 이어졌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군….’
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봤다.
“좋아…. 나와라 생사부!!”
파앗!
그러자 생사부는 곧장 소환이 되었다. 전륜성왕의 권능은 이어진 것 같아 보였기에 나는 곧장 생사부를 들어서 이름을 썼다.
해신(海神) 사망!
…….
나는 한동안 기다렸지만 해신이 가만히 서 있을 뿐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머릿속에 거대한 목소리가 웅웅 하고 울리는 게 느껴졌다.
[이건 무슨 장난질이냐…?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의 이름을 걸고 감히 신인 내게 죽음을 내리겠다니!]
쿠와아악!!
보기 드물게 분노가 섞인 해신의 포효와 함께 이번에는 천공에서 무려 다섯 개나 되는 거대광선이 날아와서 대지를 초토화시켰다. 그 와중에 해신족들도 무수히 쓸려나갔지만 자기 졸개들이 타죽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듯 했다.
“이크크.”
나는 미친듯이 멸혼보를 써서 허공을 날아 피해다니면서 생각했다.
‘뭐야!! 생사부로 해신을 못 죽여?’
금성의 신들은 죽였는데 지금 저 반응은 그저 범의 코털만 건드렸을 뿐 실질적인 영향을 하나도 못 준 반응이잖아!
‘전륜성왕의 권능…. 완전히 전승된 게 아냐. 뭔가 문제가 있어.’
그렇다면 불사의 권능도 보장할 수 없는 건가!
뭔가 복잡한 술법이나 신에 관련된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지만 지금 내가 그걸 파악할 수는 없다. 지금 확실한 건 생사부가 전승되긴 했지만 이전 생처럼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었다. 나는 생사부도 잠정적으로 봉인되었다고 간주하고는 재빨리 소환해제를 시키고는 생각했다.
‘음…. 이 정도면 시험해볼 건 다 해본 느낌인데, 여기서 대라멸진을 쓴다면 아마 이기긴 이기겠지만….’
생명력공유를 할 상대가 없는 이상 나도 죽을 뿐이다. 그렇게까지 해서 해신에게 이길 이유는 전혀 없다. 여기서 해신하고 싸워서 이겨봤자 죽는다면 30번째 삶이 시작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칠요를 좀 더 챙기거나 준비를 조금만 더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군.’
애초에 꼭 달성해야하는 업적도 아니다. 내가 가진 전승된 힘을 시험해보는 차원의 전투였을 뿐이다. 이미 해신을 몇 번 타도해본 적 있었기에 나는 여기서 더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해신에게 외쳤다.
“해신!! 내 말 들리냐!!”
[…….]
해신이 내 말에 반응한듯 저 멀리 천공에서 놈의 시선이 내게 향하며 잠시 움직임이 멈춘 게 느껴졌다.
“깝쳐서 미안하다! 한번 싸워보고 싶었다!”
해신의 목소리가 내 뇌에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외쳤다.
“이제 혼자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 참 세구나! 이제 그만 싸우지 않을래?”
[건방진 놈, 죽어라!!]
쿠오오오오오!!
거대한 포효와 함께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강대한 해신의 광선이 천지를 뒤덮듯이 날아왔다. 광선의 범위가 어찌나 넓은지 한 순간 천공이 모조리 빛으로 물드는 것처럼 착각을 느꼈을 정도였다.
“씨발!!”
어쩔 수 없군!
우우웅
찰나의 순간 나는 눈에 잔뜩 힘을 모았다. 그리고 이 권능이 제대로 전승되었다는 걸 느낀 나는 소리를 쳤다.
“광 - 선!!!”
콰과과광!!
눈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짐과 동시에 내 눈에서 새하얀 광선이 발사되어서 해신의 광선과 마주쳤다. 내 눈에서 뻗어나간 광선은 범위가 매우 좁아보였지만 갈수록 그 범위가 압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허공에서 파지직거리며 해신의 광선과 힘싸움을 하듯 겨루기를 시작했다.
파지지직! 파지직!
“우오오오오오오!!”
질 수 없다!
내가 눈에서 피가 날 정도로 집중하며 광선에 힘을 쏟기 시작하자 내 광선이 해신의 광선을 밀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확실히 눈이 따가워지는 순간이 오자 갑자기 내 머릿속에서 색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처구니없구나! 하지만 조금 재밌어보이는군?]
이… 이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 봤는데.
그리고 잠시 후 내 등 뒤에 거대한 오색조의 환영이 떠오르면서 내 눈의 광선에 오색빛의 광채가 감돌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기왕 시작한 거 이겨보거라!]
승기가 내 쪽으로 넘어온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내 눈에서 뿜어지던 광선이 단순무식하게 힘의 폭출만 거듭하고 있다가 오색의 빛이 감돌기 시작한 순간 광선의 일점집중력이 더욱 강해지면서 위력이 증대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광선이 해신의 광선을 팔 할 정도 밀어냈을 때 결국 해신이 이겨내지 못하고 힘의 끈을 놓아버린 느낌이 들었다.
툭
쿠콰콰콰콰쾅!!
다음 순간 내 눈에서 발사된 광선이 해신의 머리통을 날린 게 느껴졌다. 밑이라서 잘은 안 보이지만 물고기같은 해신의 대가리에서 삼 할 정도의 육신이 광선에 박살났다는 게 느껴진다.
[오오오…. 이 노옴… 이런 말도 안 되는….]
한쪽 눈을 잃은 듯한 해신은 비틀거리다가 이윽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구웅 -
촤좌좌좌좌좍
어마어마한 덩치가 바다로 쓰러지면서 무시무시한 소용돌이와 해일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멀리에서 태풍이 몰아치는 듯한 그 엉덩방아를 보면서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젠장… 예전에 만신전에서 광선을 썼을 때보다 체력소모가 훨씬 크잖아. 거의 무한체력이었는데 지금 잘못하면 졸려서 기절할 것 같다.
내가 머리를 크게 흔들고 있을 때 원독어린 해신의 한 마디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생김새를 보고 혹시했지만…. 역시 인간이 아니었구나…. 이런 교활한 놈…. 삼황오제의 사주를 받아 나를 견제하러 왔구나….]
뭐?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허나… 너무나 분하구나! 언젠가 이 빚은 갚아주마! 네 이름을 밝혀라!]
싫은데.
너같으면 밝히겠냐?
내가 머릿속으로 이죽거리자 해신이 뜻밖의 말을 했다.
[이건 결투신청이다…. 나의 이름은 %*&^@*%&*@…!! 나는 신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노니, 내 이름을 걸고 기필코 너를 쓰러뜨리고 말리라!!]
“……?!”
[나는 존재의 소멸을 걸었으니 네게는 이름을 밝힐 의무가 생겼다! 결투에 응하라!]
이… 이게 무슨?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해신이 이름을 밝히라고 하는 건 절대 헛소리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신이 이름을 걸었다는 건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의무가 생긴 건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나는 백웅이다. 결투신청은 받지 않겠어.”
[크흐흐…. 그건 네 뜻대로 될 일이 아니다…. 조만간 위대한 [아버지]께서 의지를 내려 결투를 가름하시리라! 결투가 받아들여지기만을 바랄 뿐!]
“…….”
[부디 그 때까지 나 말고 다른 놈에게 죽지 말거라!]
촤아아악
다음 순간 소용돌이가 잦아들며 스며들듯이 해신의 거대한 동체가 바다 밑으로 사라졌다. 아마도 마법같은 걸 써서 이 자리를 떠난 것이리라.
“…….”
대체 뭐지…?
내가 멍하니 서 있을 때 갑자기 내 눈앞에 오색빛과 함께 오색조의 환영이 떠올랐다.
파앗
눈앞에 나타난 오색조가 내게 의지를 전달했다.
[나는 황후인 오색조. 싸움이 끝났으니 너를 위대한 군주께로 인도하겠노라.]
“자, 잠깐. 무슨….”
[영광으로 알거라!]
파앗!!
오색조의 환영이 홰를 치는 순간, 나는 예전에 와본 적 없는 궁궐에 도착해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심상치 않은 위압감.
나는 동시에 맞은편에 있던 옥좌에서 장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
[네가 내 권능을 함부로 쓴 놈인가?]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일좌이자 새들의 제왕인 소호금천(少昊 金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