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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29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나는 외양간에서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제길…. 이게 대체 뭐지.’
분명히 그 악몽 같은 상황에서 빠져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면 안도의 감정과 감격이 느껴져야 정상이리라. 하지만 지금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은 암울하기 짝이 없는 절망의 감정과 열패감이었다.
황제 공손헌원!
그 막강한 적수가 마지막에 행동을 바꾼 덕에 내가 이번 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 -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마지막까지 동료들의 넋을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해 싸웠지만 결국 최후의 결과는 적수의 변덕으로 결정 났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는 너무나 짜증나는 것이었다.
이런 기분이 든 적이 그리 많지는 않다.
단지 살아남는 것에 급급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이막측한 감정 -
그것은 언젠가 황제 공손헌원 앞에 다시 섰을 때 반드시 내가 했던 말을 지키고 말리라는 오기어린 감정이었다.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옆에 있던 황금이를 슬며시 보았다.
음머
황금이는 한구석에 앉아 있다가 속편하게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바깥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태연한 황금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짓고는 이내 씩 웃으며 녀석의 이마를 쓰다듬어 줬다.
“황금아. 너 사실 내 말 알아듣지?”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얘기하고 나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황금이의 대답이 들려올 리는 없었지만 나는 그래도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리고 황금이의 이마부분을 손가락으로 긁어주며 생각했다.
‘할 일이 많지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군.’
굳이 책사들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선행절차.
그것은 바로 [황제 공손헌원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황제 공손헌원은 마지막 순간에 말했었다.
[아까 말했듯 너는 아직 모든 게 부족한 자…. 그런 네게는 적절한 여유가 되겠구나.]
[니알라토텝을 봉인하는 궁극의 주문. 이 주문을 쓰는 대가는 [다음 굴레]에서의 봉인. 마도황제 또한 그 때문에 니알라토텝에게 승기를 빼앗겼었다. 내 경우 어떤 식이 될지는 모르겠군.]
황제라고 해도 혼돈의 극한에 이른 니알라토텝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 대가는 다음 굴레에서의 봉인. 그렇다면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하다.
[이번 생]에서 황제 공손헌원은 봉인되어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그 대신에 황제의 견제를 받지 않고 이번 생만큼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이리라. 이것이 바로 그 길고 길었던 28회차에서 얻어낸 최대의 이득일 것이리라.
어찌보면 망량의 염원대로 된 것이기도 하다. 망량이 끝까지 내 자살보다는 황제에게 대항하기를 원했던 것도 바로 황제의 인과율 계산능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황제가 봉인되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봐야만 한다. 만일에 그게 아니라면 나는 또 다시 황제 공손헌원의 손에 농락당하다가 예전보다 더 끔찍한 꼴을 당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를 생각해보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우선 먼저 해야 할 일부터 빠르게 하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천암비서를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천암비서를 챙긴 후 곧장 소환수를 부르기로 했다.
“나와라!!”
우웅
“……?!”
아니 뭐야?!
평소와 달리 소환수가 나타나는 마법진이 몇 배나 거대해져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살짝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고 눈이 따갑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소환수는 평소보다 무려 세 배나 몸집이 거대해져 있었다.
“뭐지?!”
나는 이게 어찌된 일인지 몰라서 곤혹스러웠는데 문득 천암비서의 동굴 근처에 냇가가 있다는 걸 알고 가까이 가서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내 눈의 바깥쪽 눈자위가 시꺼먼 물감이 퍼져 나오듯 칠흑빛에 잠식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잠식된 범위는 전체 눈동자의 3할 정도로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상당히 괴기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끼룩
소환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나는 놀라움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다.
‘내 눈이 왜 이렇게 변한 거고 소환수는 어째서 커진 거지?’
잘 이해가 안 된다. 확실한 건 지금 상태면 보통 사람을 마주칠 경우 나를 위험한 인물로 판단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파앗
나는 소환수를 써서 산동에 가서 비등을 획득한 후, 비등이 있던 상단의 곳간에서 얼굴을 가릴만한 도구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인적 없는 창고에서 한참 뒤적거린 결과, 고려로 수출하는 듯한 삿갓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급하게나마 이걸로 까만 눈을 가릴 수 있겠군.’
나는 눈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커다란 삿갓을 눌러쓰자 조금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해서 상단물품 중에서 거울을 하나 꺼내서 다시 비춰보자 그 짧은 순간에 칠흑의 잠식도가 절반이상 진행되어 있어서 이제 조금만 있으면 칠흑안으로 변할 것 같았다.
‘…제길….’
나는 소환수를 소환해제하고는 비등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번뜩하고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망량을 먼저 만나면 안 돼!’
제갈사를 무조건 먼저 만나야 해.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는 이번엔 목갑을 얻으러 황연장군이 있는 대뢰옥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뢰옥에 잠입해서 두꺼비 괴물이 있는 최심처에 들어갔을 때 나는 뭔가를 느꼈다.
“음….”
두근! 두근!!
마음속이 고동친다. 정확히는 시꺼먼 무언가가 내 심장 근처에서 맴돌면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환청이 들렸고, 내 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렬한 불꽃에 휘감기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내 앞에 서 있던 두꺼비 괴물이 두려운 듯 외쳤다.
[너… 너는…. 대체… 무엇이냐….]
“…….”
[싸워봤자 난 그대를 이길 수 없다…. 부디 내게 자비를 베풀어 다오…. 살려주거나… 혹은 깔끔하게 죽여주었으면 한다.]
예전에 들었던 말과 똑같군.
나는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꺼비 괴물에게 말했다.
“좋아. 원하는 대로 죽여주지.”
내가 칼을 뽑아들자 두꺼비 괴물이 당황했다.
[헉…. 잠깐…. 죽이랜다고 진짜로 죽이는 게 어딨어.]
“문답무용!”
절대검뢰
무량단!!
[끼아아악.]
츄와아악
무량단의 검뢰로 두꺼비괴물을 일격에 회쳐버린 나는 바닥에 널부러진 괴물의 잔해를 보며 칼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한방에 죽여줘서 고마운 줄 알아, 멍청아.”
두꺼비의 정체는 나를 배신했던 항아. 녀석이 28번째 삶에서 [매듭]을 이용해서 내 발목을 붙잡은 바람에 진짜 큰일 날뻔했었다. 그 원한을 생각하면 괴롭히면서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았지만, 지금은 내 사정이 더 급했기에 단칼에 죽여준 것이었다.
나는 목갑을 비롯한 보물을 손에 넣고는 황연장군과 포로들을 구출하러 갔다. 그리고 포로들 하나하나를 목갑에 집어넣고 있을 때 뜻밖의 일이 터졌다.
빠지직 빠지직
쿠르르륵
“……?”
나는 마치 반인반충처럼 변해있는 [변이]가 심해진 인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트는 걸 보자 당황했다. 여태껏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들을 경계하고 있자 개 중 하나가 입을 쩍 벌렸고 그 입을 통해서 꿀렁거리며 시꺼먼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
시꺼먼 걸 토해낸 변이체는 그대로 매미허물처럼 말라비틀어져 버렸고, 약간의 점액과 함께 땅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는 잠시 후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람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두 다리를 가졌지만 인간이라기엔 기괴한 촉수를 상체에 매달고 있는 그 괴물이 기이한 언어를 써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신지…. 나는 [몽환의 악사(樂士)].]
“…….”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뜻 약해 보이지만 저 놈은 틀림없이 누군가의 대리인이거나 화신일 것이리라. 조그마한 몸집으로 보이지만 강대한 마력이 저 놈에게서 느껴지고 있다.
그 시꺼먼 괴물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위대한 그 분의 명에 따라…. 귀하께… 초대장을 드리겠소….]
“초대장?”
[원하실 때 언제든 찾아오시기를….]
퍼벅!!
그 말을 끝으로 괴물의 몸이 점액처럼 흩어져서 터져나갔고, 머지않아 바닥에 물처럼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괴물이 터져버린 그 잔해에는 마치 눈동자처럼 생긴 청은빛의 보석이 남아 있었다.
‘…아름다운 색깔이군.’
저 기괴한 괴물이 남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보석이다. 보석의 내면에는 눈동자처럼 보이는 게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기에 흉흉함이 느껴지지만 보석 자체가 최상급 그 이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이게 아마 [초대장]인 건 틀림없다.
나는 청은빛 보석을 수발하고는 남은 변이체들과 포로들을 목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나서 황산으로 향했다.
파밧
황산에 도착해서 수요의 유적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인면지주를 마주쳤다. 그런데 두꺼비 괴물과 달리 강약도 구분 못하고 마구 덤벼들던 인면지주의 반응이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키익!! 키익!! 키기긱!!]
인면지주가 거대한 거미의 몸뚱이를 뒤틀더니 내게 적의가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여덟 개의 다리에서 모조리 힘을 빼고 내 앞에 엎어졌다. 내가 황당한 눈으로 인면지주를 쳐다보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인면지주의 말이 머릿속으로 해석되어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대한 자!! 멋있다!! 나를 부하로 삼아줘!!]
“…….”
[뭐든 할게!! 부탁이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이 놈은 갑자기 왜 이래?’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고보니 이번 삶을 시작하고 처음부터 느껴졌던 두통이 계속 가시지 않는 게 느껴진다. 그렇게 심각한 두통은 아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머리가 아픈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극심한 고통 이후의 환통도 대부분 반 시진 정도만 지나면 사라지게 마련이었는데 이 두통은 좀 오래 간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인면지주에게 말했다.
“음…. 너를 목갑에 넣기에는 공간이 많이 부족한 거 같은데 힘들 것 같구나.”
목갑이 아무리 넓어도 저런 거대괴물을 집어넣고 나면 나중에 공간이 딸릴 수도 있으리라. 내가 곤란함을 말하자 인면지주가 말했다.
[좋아!! 그럼 내 이름을 바칠게!! 받아줘!!]
“……? 이름?”
[부탁이야!! 제발! 더 이상 여기서 살기는 질려!]
나는 저게 뭔 소린가 싶었지만 간절한 감정이 느껴졌기에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주마.”
[아아아!! 위대한 자에게 종속되는구나!]
쉬이이익!!
다음 순간 인면지주의 몸에서 빛이 나더니 놈의 몸뚱이가 통째로 소멸되기 시작했다. 빛의 가루가 되어서 흩날리던 인면지주의 흔적이 갑자기 내 팔뚝에 달라붙었고, 그것은 마치 글자처럼 변했다.
우우웅
잠시 후 약간의 진동과 함께 내 팔뚝에는 기이한 고대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왜인지 모르지만 그 글자를 읽을 수가 있었고, 글자의 뜻이 [힘쎄고 체력강한 고대거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쩐지 되게 단순한 이름인걸.
아무튼 영 알 수 없는 일을 겪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수요의 유적에 있던 나머지 보물을 모두 손에 넣었고 전욱의 동상도 목갑에 넣었다. 일련의 과정을 마친 후 나는 바로 제갈사에게 가기로 했다.
그 때였다.
“우욱.”
갑자기 더욱 심해지는 두통.
‘설마!’
나는 급히 상단에서 챙겨온 거울을 꺼내서 내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상했던 일이 벌어지자 이를 악물었다.
눈이 완전히 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