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216화 (1,213/1,615)

1216====================

사신지혼(四神之魂)

완연히 여유를 지닌 황제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백웅. 무(武)로 나와 결판을 내게 된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느냐?]

“또 무슨 소릴 하려고….”

[나는 무척 불만이다.]

잠시 침묵하던 황제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 입장에선 아주 기분 좋겠지. 고작 서른 번 남짓의 죽음과 이백여 년의 적공(積功)만으로 나와 대적해서 승산을 갖게 되었으니…. 허나 나는 수십억 년 동안 준비했던 모든 계획이 틀어졌으며, 무수한 적수를 쓰러뜨린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된 채 지푸라기만 잡고서 이 자리에 섰노라.]

“…….”

[인간의 왕 백웅이여. 네게 황제 공손헌원의 대적자(對敵者)로서의 자격이 있는가?]

극히 오만한 한 마디.

그러나 나는 그의 한 마디가 오만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오만하기는커녕 [옛 지배자] 답지 않은 회의감과 슬픔마저 녹아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황제 공손헌원이라는 존재는 아무리 적이라지만 저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따지고 보자면 진정한 신의 반열에 오를 자격이 있는 존재.

그런 자가 니알라토텝의 단순한 변덕 때문에 하찮은 인간인 나와 대등한 처지까지 끌어내려진 셈이었기 때문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그게 적수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아직 없어.”

눈앞의 적은 대단한 놈인 건 틀림없다. 내가 황제의 적수가 되려면 적어도 수천 년 이상 연마해야 그럴 자격이 생길까 말까일 것이다.

내 솔직한 대답에 황제는 훗하고 웃는 듯 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음에도 왠지 그의 감정만큼은 느껴졌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날 쓰러뜨리고 난 후 무엇이 어떻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주제에, 그저 죽지 않기 위해 승리하겠다는 건가? 처절하구나….]

조롱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징징거리지 마.”

위대한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춰주는 건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동료들의 영혼과 긍지를 위해서라도 양보할 수 없다.

[뭐라고?]

나는 황제에게 검을 겨누며 눈을 부릅떴다.

“이기면 그게 전부라는 식으로 살아왔던 건 네놈이었지 않나? 내 말이 틀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치우를 쓰러뜨리고, 사제를 이용해먹고, 삼황을 퇴물로 몰아넣고…. 결국 네놈도 결과만 얻으면 과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잖아.”

[…….]

“그렇게 살아온 놈이 [기어오는 혼돈]의 변덕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이 꼴이 되었다 한들 무슨 할 말이 있다는 거야? 최소한 너는 아무 할 말도 없다고. 너나 그놈이나 똑같은 새끼니까.”

황제가 멈칫거리자 나는 쐐기를 박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알고 있으니까 만만해보이는 나한테 징징거리는 거잖아!! 지금껏 그렇게 혼돈의 방식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납득하며 살아왔다면 이 불합리함도 받아들여라, 제왕이여!”

내 사자후에 황제는 한동안 침묵했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예측할 수 없는 자로군. 동료들이 연관되자 얼빠진 모습은 금세 사라지고 갑자기 핵심을 꿸 수 있다니…. 그대가 정녕 우둔한 존재인지 의심이 간다.]

“……?”

[그대의 말대로다. 나는 혼돈의 총아(寵兒)이자 신좌를 노리는 자로써 이 정도의 불합리함은 받아들여야겠지.]

우우우우우

황제가 무예의 정자세를 잡으며 한 손에 검(劍)을 들었다. 지금껏 권장법을 써오던 것과는 달리 검법자세를 취하는 게 이질적이라서 내가 그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자, 황제는 내 쪽으로 두 걸음을 선취하며 말했다.

[공손검법(公孫劍法)은 천마신공의 원형이며 내가 직접 만든 유일무이한 무공이다. 어디 절기를 겨뤄보자.]

역시 공손검법이었다. 기수식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좋지!”

드디어 제대로 오는 건가?

나는 과거에 공손검법과 몇 번이나 붙어보았기에 그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제갈유룡이 발굴하여 형(形)을 복원해낸 공손검법은 그가 천하삼대기인으로 우뚝 서게 한 무공절기였다. 사상오행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특징이 있었으며 전반적으로 무결성(無缺性)을 최대의 장점으로 하는 무공이었다.

그렇다. 공손검법은 천하무림에서 가장 완벽한 검법 중 하나였다. 공수전환은 물론 변초와 허초, 환초, 강격, 유격 모든 분야에서 흠 잡힐 데가 없었다. 사대무류의 검법들도 공손검법에 준할만큼 강하긴 했지만 한두군데씩 공손검법에 비해 덜 다듬어지거나 약한 부분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공손검법을 깊은 경지로 익힌 태산노옹 제갈유룡의 무공은 천하에서 손꼽힐 정도로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당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여고수인 공손대랑이 36결 중 12결을 손본 덕에 강대한 실전성을 품게 된 것도 한몫 했으리라.

그러나 나는 공손검법의 단점 또한 알고 있다.

‘굴공검과 천축검.’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두 가지의 검공을 잘 응용하면 공손검법의 무결성에 흠집을 내어서 손쉽게 상대할 수 있다. 이건 내가 알아낸 파해법은 아니었으며 절세천재 진소청이 알아낸 거긴 했지만, 어쨌든 이 약점을 알고있는 이상 이 대결은 내가 충분히 유리하리라.

파밧

황제가 선취한 두 걸음을 토대로 내 검계(劍界)를 장악하며 선공해 왔다. 이는 신의 수법이라기엔 절대적으로 무림인다운 싸움법이었으며 황제가 이미 필멸자의 전투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마치 명인(名人)과도 같은 철저한 간격재기의 솜씨는 그가 지상의 기준으로 절대지경 이상의 고수라는 걸 실감케 했다.

공손검법(公孫劍法)

황룡일검(黃龍一劍)

곧이어 날아드는 엄청난 속도의 강검(鋼劍)! 바보같을 정도로 정직하고 우직한 공격이었으나 황룡의 의기용형(意氣龍形)를 머금은 그 검격은 엄청난 위력을 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공손검법의 초식 중에 이런 초식은 없다.’

나는 천신경의 술수로 불러낸 공손벽의 영혼한테서 공손검법의 원류초식을 모조리 들어서 외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초식 중에 황룡일검과 비슷한 초식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동시에 나는 그 찰나지간에 선택해야하는 걸 느꼈다.

‘정면대결? 아니면 파해식대로 굴공천축검을….’

판단은 빠르게 내려졌다.

까가강!!

용아(龍牙)

합식(合式)

만승회절(萬乘回切)

뇌영배교(雷影背較)

나는 삼보절기로 공간을 확보하면서 화신류 검법, 용아(龍牙)의 절기를 쓰며 뇌신류 만승검결과 뇌영검법의 초식을 동시에 시전했다. 어째서 다른 대처가 아니라 반사적으로 이런 대응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결과 황제의 황룡일검에 크게 튕겨져나가서 삼 장을 날아갔다.

콰앙

나는 뒤늦게 밀려들어오는 압력에 손이 저릿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황제는 나를 추격해서 공격하지 않고 의외라는 듯 말했다.

[무량단으로 힘대힘으로 맞서거나 굴공천축검을 쓸 줄 알았는데 의외군. 왜 화신류의 오의를 썼지?]

“…….”

나도 모른다.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단지…. 고수의 감각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고밖에는.

‘이 대처가 최선이었을까? 피해는 없지만….’

평상시의 나였다면 절대 이런 대응방법은 떠올리지 못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새로운 전법이 자연스럽게 출현한 거지?

나는 머릿속에 의혹이 떠올랐지만 다시금 잡념을 지우고 집중상태로 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지금까지 싸워왔던 전투경험을 끝까지 믿고 가는 수밖에!

쿠와아앗

다시금 황제는 황룡일검을 써서 공격해왔다. 나는 황룡일검에 담겨있는 힘이 내 무량단에 못지않다고 예상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째서 저렇게 단조롭고 변화없는 강검으로만 공격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이것 자체가 심리전인가?’

그렇다면 방금 전 화신류 오의를 써서 황제의 검격을 막은 이유도 그걸로 설명이 가능할 터.

나는 전에 없이 전투에 관련된 두뇌가 맹렬히 회전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다시금 황룡일검을 상대로 신중하게 받아치는 전략을 택했고, 이번에는 화신류 오의가 아니라 수신류의 장법을 써서 황룡일검의 기세를 꺾기로 했다.

수룡장(水龍掌)

수신류의 기초무공 정도는 나도 뇌기를 변환시켜서 쓸 수 있다. 수룡장의 강기가 맺혀서 황룡일검의 궤도를 아주 살짝 틀어버리자 황제가 금세 궤도를 수정해서 신검합일의 기세로 돌진해 왔으나 나는 그 빈틈을 이용해서 다시 삼보절기로 황제의 사각(死角)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소름끼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아니…?!’

황제가 세 명?!

내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히 그랬다. 검을 든 황제가 동시에 세 명이나 출현해 있다니! 그것도 한 명의 황제가 내가 노리는 사각에 이미 검초를 날리며 선공을 해오고 있었기에 도리어 내가 헛점을 찔린 셈이 되었다.

키리릭

마치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듯 시꺼먼 검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 목을 찔러왔다. 매우 이질적이었지만 이건 공손검법에 내재된 초식이란 걸 알아챈 나는 빠르게 내 목을 방어하면서 동시에 반탄력을 이용해서 황제의 명치를 발로 걷어찼다.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얻어맞은 황제의 신형이 허공으로 짧게 날아갔다가 그대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고, 남은 두 명의 황제가 내게 동시에 공격을 해 왔다. 나는 두 명이 동시에 황룡일검을 쓴다는 걸 알아채고는 이번엔 대치조차 하지 않고 급히 신법을 최대로 전개해서 몸을 뒤로 뺐다.

슈쾅

아슬아슬하게 황룡일검의 전개를 피해내자 황제의 몸뚱이가 도로 하나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눈치챈 건지 모르겠군.]

“…분신술인가?”

[여기서 술법은 쓰지 못한다. 그리고 본좌가 복희의 유물 따위를 쓸 이유도 없지. 이건 순수한 무공이다.]

우우우

황제의 신형이 다시금 세 개로 분열했다. 그리고 분형한 세 개의 몸체는 어떤 게 진짜인지 도저히 내 힘으로는 분간할 수가 없었다.

[공손검법 오의, 삼천자(三天子). 태초에 내가 인간들에게 전수했으나 은주시대에 황궁이 불타면서 이 비기를 소실했던 모양이더군.]

“…….”

[하나하나가 실체이며 환영이다. 어디 받아봐라.]

파밧!!

황제가 세 개의 몸을 움직여서 동시에 나를 공격해 왔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화신류의 용아로 놈의 기술을 받아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나의 초식만 써서는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나머지 2개의 동체에 공격당한다! 화신류의 용아를 써서 동시에 2개의 초식을 전개해야 견제하면서 제대로 피하는 게 가능했던 거야…!!’

무량단을 쓴다 하더라도 진짜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나만 황룡일검에 꿰뚫리고 상대는 회피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굴공천축검을 썼다면 그것대로 삼천자의 3개의 몸이 동시에 나를 에워쌀 기회를 주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리라. 굴공천축검은 삼천자에 대해서는 아예 먹히지 않는 파해법이었다.

‘침착해. 분신을 쓰는 고수들은 많이 상대해봤어. 그리고 저 분야에서 최고의 고수라 할 수 있는 홍길동의 공령백팔환(空靈百八幻)도 상대해봤지 않나!’

공령백팔환 또한 저런 식으로 분신술을 쓰는 무공이며 그 분신의 숫자는 고작 3개가 아니라 무려 108개나 되었다. 그리고 그런 공령백팔환의 달인인 홍길동조차도 절대지경이긴 하지만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세 개 중 진짜는…!!’

나는 평소처럼 안력을 돋우어서 알아보려 했다. 하지만 이윽고 평소와는 달리 화안금정이나 전시안이 발동하지 않는 걸 깨닫고는 아차하는 느낌이 들었다.

‘제길! 초상능력 못 쓴댔지! 그럼 순수한 의념만으로….’

부웅!!

“헉.”

그러나 한 호흡을 놓친 댓가로 나는 기겁을 하며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고 피하기엔 늦었기에 나려타곤 비슷하게 구르면서까지 필사적으로 피한 것이다. 황제의 검예가 순식간에 공간에 수백 개의 참선을 만들어내며 난도질하는 가운데 나는 삼보절기를 써서 엉덩이를 뒤로만 빼며 억지로 피했다. 그 모습을 본 황제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장삼봉이 미워지려 하는구나. 삼보절기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결판났을 것이다.]

“나는 좋아지려고 하는데!!”

나는 빠르게 몸의 중심을 다잡으며 이번에야말로 삼천자의 헛점을 꿰뚫어보려 했다.

“아무리 대단한 분영술이라 해도 홍길동 수준은 아니잖아!”

그리고 다시금 쐐액 하고 황룡일검의 검기가 날아오는 순간, 나는 암담함을 느꼈다.

‘아…. 모… 모르겠다…. 완전히 똑같아….’

검뢰 무량단!

콰과광

어쩔 수 없이 나는 무량단으로 반사적으로 황룡일검에 응수했는데, 그 순간 거의 동시에 황제의 검이 내 배를 꿰뚫으려 하는 게 느껴졌다. 고작 반 치 정도 들어온 칼날이었으나 나는 눈동자가 격렬히 흔들리는 걸 느끼며 최대한 호신강기를 펼치면서 뒤로 피해냈다.

푸슛

내 배에서 실핏줄이 치솟자 황제가 말했다.

[확실히 숫자로만 볼 때 홍길동 수준은 아니지. 그러나 홍길동의 환영보다 더 간파하기 어렵다는 건 내 이름을 걸고 자부할 수 있다.]

“뭐… 뭐라고?”

[본질이 완전히 다른 무공이거늘 간파하지 못했구나. 그렇다면 승기를 가져가마.]

스스스

황제의 신형이 다시 세 개로 늘어났다. 나는 크게 긴장하며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를 생각했다.

‘어쩌지? 무량단으로 단순히 베어넘기기에는 황제의 신형이 너무 빨라. 제대로 못 찾출 것이다. 그렇다고 방금처럼 반격으로 가기에는…. 위험하다!’

활로를 찾으려면 화신류의 용아를 써야하는 건가.

하지만 용아는 그 자체로 초식인 게 아니라 그저 동시에 두 개의 초식을 쓸 수 있게 하는 연결기에 불과한데…. 그것도 두 개로는 세 팔을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

나는 고민하고 있다가 문득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창이여!!”

우웅

그 순간 내 다른 손에 강철 창 한 자루가 떠올랐다. 역시 모든 초상능력이 봉인되긴 하지만 무기만큼은 자유로 소환할 수 있게 해주는 듯 했다. 방금 전 황제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검을 소환하는 걸 보고 그러려니 생각했던 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스윽

나는 일검일창(一劍一槍)을 양손에 잡은 채 이검류의 자세를 취했다. 생전 처음 취해보는 자세였다. 그래서인지 내 자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황제가 말했다.

[설마 쌍문사가(雙門四家)의 가주들을 상대하던 진소청을 따라한 것인가?]

“…그래.”

역시 저 놈은 사공린을 통해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던 만큼 바로 알아차린 것 같군.

이 자세는 바로 과거에 황궁에 반역을 일으켰던 전생에서 진소청이 보였던 신위! 전혀 무예사에 존재하지 않던 기괴한 자세였으나 진소청은 이 자세를 이용해서 수적열세를 극복하고 가주들을 물리쳤던 것이다.

황제가 말했다.

[어리석군. 불후의 무학천재인 진소청이 그 때의 기분에 맡겨 휘둘렀던 무예를 둔재인 네가 즉석에서 구현할 수 있겠는가?]

“…….”

[실망이군. 잔꾀에 의존하여 위기를 타파하는 건 제왕의 소양이 아니다.]

저벅

황제가 한 걸음을 내딛었을 뿐인데 나는 움찔하는 기분이 들었다. 황제보다 내 무공이 현저히 딸린다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확실히 상대는 웬만한 절대지경고수보다 훨씬 노련했으며 완벽에 가까운 숙련도를 지니고 있었다. 무공밖에 쓰지 못해서 평상시보다 일만 배는 약해져 있을 텐데도 이렇게 강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게다가 그의 말대로 이런 임시변통이 저런 노련한 절세고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왠지…. 왠지 될 것 같아!’

그런 날이 있다. 평소 내가 하던 모든 게 갑자기 잘 풀리고 순탄해지며 잘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날. 그리고 나는 어째서인지 방금 전부터 그 기분이 내 몸을 감싸 안는 걸 느꼈던 것이다.

지면 지는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의 내 감을 거스르지 않겠어!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이 일검일창의 자세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잔말말고 들어와!”

그리고 내가 끝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자, 황제는 약간 노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무쌍패로 날 대적했다면 인정했을 것을…. 이토록 한심한 놈일 줄 몰랐구나!!]

콰르르릉

황룡일검(黃龍一劍)이 황제 공손헌원의 거대한 의념을 담아서 공격해 오는 게 느껴졌다. 어째서 혼돈의 존재인 황제가 이토록 강대한 의념을 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념 하나만큼은 지상의 그 어떤 절대고수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의념의 끈기와 총량은 인간의 수십 배나 되는 걸로 보였다. 이런 걸 정통으로 맞으면 틀림없이 내가 밀릴 것이다.

이 자세는 정말로 처음 잡아보는 자세다.

이 자세에서 어떤 초식과 변초가 파생되는지도 모르겠고 진소청이 그 때 어떻게 싸웠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난다 한들 황제의 공손검법에 어떻게 대적해야하는지 한 줄의 대안조차 제시되지 않았다.

‘진소청이라면… 내가 진소청이라면…. 지금 어떻게 할까.’

하지만 나는 왠지 내가 진소청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영귀와 이야기했던 게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가면을 만들 수 있는 자는 오로지 당신 자신 뿐….]

동시에 신투지존에게 배울 때의 기억도 스쳐지나갔다.

[난 도둑이니까 훔칠 수밖에.]

[훔칠 수 없는 걸 훔친다.]

…….

그래, 어쩔 수 없어.

초짜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국면이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선택이 정답이 되게 하려면… 내가 잘하는 걸로 땜빵하는 수밖에 없잖아!

찰나의 깨달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스스로 그 깨달음을….

‘훔치겠어!’

가면을 염상(念想)한다.

존재하지 않는 가면이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한다.

인식함으로써 가면은 거기에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파천의 가호를 받았을 때 느꼈던 고유한 감각.

그 가면은 바로 천재 진소청의 것.

상식적으로 훔칠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면을 훔치기 위해서는 많은 제약조건이 필요하며 이미 그 당시의 진소청은 [큰 굴레]의 과거로 넘어간 존재. 그런 존재의 가면을 훔치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옛 지배자]라고 해도 이딴 짓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을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상상한 가짜 가면을 훔치는 건 어떨까.

[옛 굴레의 진소청의 가면]을 토대로 내가 만들어낸 거짓 가면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부터는 신투지존조차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경지. 아니 그조차도 생각지 못했을지 모르는 경지. 이 정도 되면 도둑이라기엔 너무나 높은 곳에 도달하려는, 공상소설가나 다름없다.

그래도 한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전생자인 내 업보니까.

인간의 왕으로써 진소청같은 영웅의 힘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도둑의 역량을 빌려서라도 목표에 도달해야만 하니까!

츠아앗

만상지투(萬象之偸)

내 손이 공허의 영역을 떠도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내 내면에서 시꺼먼 혼돈같은 게 끓어오르는 게 느껴졌고, 한없이 끓어오르는 것만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내 눈이 시꺼멓게 불타오른다고 느끼면서 손을 내밀어 가면을 잡았다.

존재치 않는 가면.

상상 속의 가면이 내 인식으로 현실이 된다.

‘진짜와 똑같냐고?’

그건 가짜를 훔친 도둑인 내가 알 바 아니지.

내 상상력만 받쳐주면 그만이야!

나는 씨익 웃으면서 그대로 가면을 내 쪽으로 끌어왔다.

백웅고유절기(白熊固有絶技)

상상절도(想像竊盜)

파앗!!

찰나의 다음 순간, 황제의 황룡일검이 날아올 때 나는 그대로 우수의 일검을 휘둘러 절대검뢰 무량단을 시전했다.

꾸콰쾅

두 절기의 위력은 거의 동급인지 서로 공중에서 상쇄되는 게 눈에 여실히 보였다.

그러나 일검일창의 어설픈 자세의 특성 때문인지 내 몸의 좌반신이 그대로 헛점에 노출되었고, 황제는 그걸 놓치지 않고 그대로 삼천자의 비기를 써서 재차 황룡일검으로 내 심장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천뢰무극창(天雷無極槍)

찰나지각(刹羅之覺)

육천합일창(六天合一槍)!

경쾌하게 내 좌보(左步)가 중심을 잡은 채 일극(一戟), 이진(二進), 삼란(三攔), 사전(四纏), 오나(五拏), 육직(六直)에 이르는 창예(槍藝)의 정수가 담겼다. 일극에서 육직까지 쭉 이어지는 궁극의 창술은 순식간에 다음번 황룡일검을 튕겨내고 황제의 자세를 주춤거리게 만들었다.

타타탕!!

[……!!]

정확히는 이 수법은 당시의 진소청이 익힌 수법은 아니었으나, 나는 28번이나 죽었다 살아나며 계속해서 진소청을 보아왔다. 그 중에 한 번이라도 보았던 진소청의 재능이라면 가면에 섞어 담을 수 있다. 본디는 불가능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짜 가면이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진짜 가면이 아니니까 더 좋다!

[이런…!!]

삼천자의 마지막 분영이 급격히 공손검법의 환검결으로 내 전신을 회치려고 날아왔다. 본디 이만한 간격을 준다면 아무리 삼보절기라도 내 힘으로는 피하지 못할 테지만, 내가 쓰고 있는 가짜 진소청의 가면은 위대했다.

아니 - 진소청은 위대해.

약식(略式)

뇌신지혼(雷神之魂) 발동(發動)

파지직!

전신에 뇌신의 힘이 몰아치며 내 안의 구궁파천뢰가 반응하는 게 느껴졌다. 본디 내 감각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천재 진소청의 가면은 순식간에 약식 뇌신지혼의 요령을 간파하고 어림짐작으로 펼쳐내었다. 동시에 구궁파천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공전하면서 진소청의 창이 투명한 뇌명(雷鳴)을 떨쳐내었다.

‘받아라, 황제.’

뇌신류(雷神流)

초절오의(超絶奧義)

쿠구구구

‘…어?’

아주 잠깐이지만 아까 느꼈던 섬섬옥수가 살며시 내 손을 뒤덮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손을 포갠 듯한 그 느낌에 멈칫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희 뇌신류만의 공이 아니다.

그 순간 나는 덜컹 하고 무언가를 실감했다.

‘그랬구나.’

그 때 소멸했던 게 아니었어.

그 때부터 계속 나와 함께 옆에서 재능을 빌려줬던 거야….

‘좋습니다….’

이 일격은 뇌신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되는 거겠지요.

카앙!!

나는 순식간에 양손의 일검일창을 교차하여 쌍검류의 자세를 취했다. 그것은 바로 화신류에만 전해져 오는 자세였으며, 내가 수많이 대적해보았던 그녀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녀가 도와주고 있기에 나는 마치 화신류의 명인인 것처럼 화신류의 무공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뇌신지혼(雷神之魂) 개벽(開闢)

합식(合式)

화신지혼(火神之魂) 열광(熱光)!

두 개의 사신지혼(四神之魂)이 내 안에서 교차하는 게 느껴진다. 뇌혼(雷魂)은 영혼의 그릇을 둘러쌌고 염혼(炎魂)은 신명을 내려받으며 뇌혼을 보조했다. 사신지혼은 마치 처음부터 그래야만 했다는 듯 서로 융합되기 시작했으며 격렬하게 구궁파천뢰의 뇌혼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기전을 거쳐 이뤄진 융합(融合) -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 창에 깃들어있는 진소청의 가면 - 그리고 검에 깃들어 있는 화신류 종사 한백령의 영혼이 나를 밀어주는 걸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추진력을 딛고 뛰어올랐다.

황제가 내 공격에 대적해서 삼천자와 황룡일검을 동시에 전개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아아아아아아!!”

번쩍!

다음 순간 비명같은 외침과 함께 한 번의 교차가 이뤄졌다.

쌍신지혼(雙神之魂)의 일검일창(一劍一槍)이 황제의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는 낯선 감각이 내 손끝을 간지럽혔다.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나는 얼굴 한켠이 크게 찢어지며 혈맥이 터져버린 걸 느꼈다.

푸콱

“크윽….”

얼굴이 반쪽난 듯한 격통과 함께 숨막힐 정도의 갈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환영같은 아지랑이의 형태로 조각난 가면조각이 내 눈앞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틀림없이 방금 전 한 순간 진소청의 재능을 상상절도로 훔쳐낸 댓가일 것이리라.

황제는… 황제는 어떻게 되었지?

내가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순간, 황제의 무면(無面)이 내 눈에 비쳤다. 그리고 그의 무면 또한 쩌적 하고 갈라져가고 있는 게 보였다.

…….

저게 설마 얼굴이 아니라…. 탈이나 가면이었단 건가?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다시 쓸 수 있게 되었다.]

곧이어 황제는 허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사신지혼(四神之魂)…. 나조차도 그것만은 읽지 못했던 건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