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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가면] 니알라토텝의 신형이 서서히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고, 그가 사라지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루동안 충분히 즐기도록….]
“…….”
대체 뭘 즐기란 말인가….
나는 한동안 놈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망량선사에게 말했다.
“망량선사. 저 놈이 막기 때문에 자살은 할 수 없는 거겠지?”
[그렇다.]
“…망량은 마지막에 ‘우주의 검은 구멍’이란 곳으로 가서 자살하라고 했어. 그래도 자살할 수 없었을까.”
[그렇다. 내 제자는 그 곳이 우주의 리(裏)와 이어지는 장소이기에 황제의 손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겠지만 그 정도론 피할 수 없으리라.]
“…….”
결국 여기에 오는 게 답이었다는 걸까….
어찌보면 운이 좋았지만, 몰리고 몰린 끝에 단 하루의 유예가 남았다는 게 허망했다.
심지어 지금 내게는 동료가 없다. 모두 공손헌원에게 당해서 소멸했으며 영혼이 되어있는 사공린 뿐인 것이다. 더 이상 힘도 계책도 아무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대체 하루동안 무엇을 해야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는 말했다.
“망량선사. 내가 파천의 가호를 얻으면 황제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러자 망량선사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등하게 싸우겠지만 결판이 나기 전에 가호가 소멸되어 결국 네가 지겠지.]
“…그런가.”
새삼 황제의 현재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어떠한 존재조차 쉽게 상대할 수 있게 해주는 파천의 가호였으나 황제를 없애는 것까지는 힘든 것이다.
[백웅. 너는 무엇을 위하여 황제와 끝까지 싸우기를 택했는가?]
“무슨 의미로 하는 질문이지?”
[네가 자살하고자 하면 몇 번이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을 진정으로 결심한 순간은 적었고 항전에 초점을 맞추었지. 결국 네가 그렇게 움직였기에 네가 낙양에 도착하는 미래가 찾아오게 된 것…. 인과율이다.]
나는 망량선사의 말을 듣자 자조적으로 대꾸했다.
“비웃어도 좋아. 내가 고집 안 부리고 자살했다면 훨씬 더 나았을테지. 동료들을 볼 면목이 없어….”
이어진 망량선사의 말에 나는 움찔했다.
[반대다. 너는 기묘할 정도로 최상의 선택을 해냈다. 마치 바늘구멍을 뚫는 듯한 난이도였다.]
“…어?”
뜻밖의 말에 내가 반문하자 망량선사의 눈이 투명하게 나를 관조했다.
[본디 이 시간에 니알라토텝과 함께 내 앞에 서 있을 자는 네가 아니라 황제 공손헌원이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읽었던 미래의 인과율이었지. 그러나 네가 선택함으로써 미래가 바뀐 것이다.]
“무슨 말이야? 공손헌원이 이 자리에 있었을 거라는 말이….”
[네가 명계에서 항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자살을 택했다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1백 번 중에 성공하는 경우는 5번도 되지 않았지. 왜냐하면 황제뿐만이 아니라 니알라토텝도 네 죽음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전륜성왕의 권능을 차단시킬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
흠칫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굳어있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네가 싸웠기 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현재 상당한 전력손실이 일어났다. 그렇다 해도 이 우주에서 최강의 존재 중 하나라는 건 변함이 없으나, 그 때문에 낙양에 올 여력을 남기기 위해 한 걸음이 늦고 말았지. 그리고 그 한 걸음을 앞선 게 바로 너의 선택이었다.]
“…….”
사공린의 영혼을 훔친 걸 말하는 건가.
[본디 내 앞에서 황제 공손헌원이 으스대며 내결계를 파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으나…. 결국 네가 도리어 황제를 니알라토텝에게 시험당하도록 만들고 말았다.]
“자, 잘 된 건가?”
[이상한 일이지.]
흑묘 망량선사가 잠시 침묵하다가 오솔길을 걸어서 화마가 가득한 오두막으로 갔다. 그리고 망량선사가 꼬리를 살랑이자 화마가 일렁이던 마을에서 불길이 모조리 씻은듯이 소멸되었고, 망량선사는 새까맣게 탄 오두막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모든 인과율에는 변인(變因)이 존재한다. 그러나 너의 기묘할 정도의 투지는 평상시의 너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단순한 분노와 오기가 동기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편중되어 있었지. 너의 선택은 변인이 읽히지 않는데도 결과적으로 정답을 향해가고 있다. 나조차도 읽기 힘든 영역의 정답까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음…. 역시 멍청하군….]
어려운 말을 써서 내가 헷갈리는 표정을 짓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필요가 없다. 어쩌면 너의 우둔함 자체가 무기일수도 있으니.]
“차라리 욕을 해…. 씨발….”
[진심이다.]
아 네 그러세요!
내가 저놈의 흑묘를 언젠가 골탕먹여주리라는 생각을 하며 분을 삭히고 있자 망량선사가 그 자리에서 고양이 특유의 네모나게 앉는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더 이상 네가 할 일은 없으니 이 마을에서 하루동안 쉬어라.]
“뭐? 쉬라고? 하루동안 해야할 일이 많지 않….”
망량선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없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수준까지 온 이상 아무 의미없다. 지금은 종말의 서막과 전개를 지나쳐서 종장에 이른 시점 - 우주에서 가장 강대한 자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칠요를 공양하거나 뭐라도 하는 건….”
[이해를 못 하는구나. 네가 가진 모든 수단이 무의미하다. 가장 강력한 가면이 나온 순간부터….]
“…….”
나는 망량선사의 말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니알라토텝이라는 가면이 그렇게 강력하다고?’
설령 삼황오제가 적이 되었던 때라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보물들을 응용해서 뭔가 꼼수를 부리면 상황이 만들어지곤 했는데 망량선사는 그런게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니알라토텝이 그만큼 거대한 존재이기에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망량선사에게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저 니알라토텝이란 놈 말고 또 하나의 가면이 봉인되어 있다고 했었잖아. 그 가면은 어디 있는 거야?”
[더 심층에 봉인되어 있다.]
“으음. 그 가면의 이름은 뭐지?”
[나도 알지 못한다.]
“왜?”
[니알라토텝을 포함한 그 2개의 가면은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는 이 우주의 그 어떠한 존재도 그 이름을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존재들은 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봉인된 자들이기 때문이지.]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봉인됐다고?! 그게 가능해? 말이 안 되잖아!”
[…….]
“아니 우주가 있어야 뭐가 있던가 하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 비밀을 말하는 것조차 큰 인과율이 필요하군. 더 이상 호의로 말해줄 게 남아있지 않으니 네가 알아서 알아보아라.]
“쳇….”
망량선사가 헛소리를 할 때도 있나? 삼척동자가 봐도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 앉았네!
내가 내심 투덜거리고 있자 망량선사가 말했다.
[좌불안석하지 마라. 네가 할 수 있는 걸 모두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인과율의 충돌을 기다리는 것 뿐…. 그 결과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으나, 여기까지 판을 만든 것은 너와 동료들이 필생의 염원을 다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만있어도 된다는 거야?”
[그렇다.]
나는 망량선사의 말을 듣고 고민했다.
저 말대로라면 나는 그냥 하루동안 멍 때리고 기다리기만 하란 말이 아닌가?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시간낭비가 늘 죄악처럼 느껴졌기에 나는 초조함이 절로 느껴졌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말했다.
“뭐라도 했으면 좋겠어! 할 게 없을까?”
[정 할 일을 원한다면야.]
망량선사가 귀찮다는 듯 멀리에 있는 바위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며 말했다.
[여동빈의 사당으로 가서 청소를 해라.]
“응?”
[청소라도 하면 마음이 가라앉겠지.]
“…알았어.”
나는 망량선사의 말대로 원상복귀된 마을의 오솔길을 따라걸어서 마을 안쪽으로 갔다. 그리고 여동빈의 사당을 발견해서는 그 안쪽으로 걸어갔고, 간만에 색다른 감회에 휩싸였다.
‘여기도 간만에 와 보는군.’
비록 여기가 꿈속의 세계이긴 하지만 온통 비현실적인 우주나 시공간을 쏘다니던 탓에 이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경이 도리어 그립다. 나는 여동빈의 사당의 나무기둥을 쓸듯이 만지다가 청소를 하기 위해서 걸레를 들고 개울물로 향했다.
개울물에 걸레를 적시며 사당바닥을 닦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
‘아! 사공린은?’
어느샌가 나와 망량선사가 대화를 하던 중에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려서 눈치를 못 챘다. 나는 급히 망량선사를 불렀다.
“망량선사!! 사공린은 어디갔어?”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다시 걸레를 빨기 시작했다.
‘망량선사가 사공린을 해치기야 하겠어….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나는 걸레를 빤 후 여동빈의 사당 바닥을 물걸레로 닦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나무바닥을 닦자 바닥에 수북하던 먼지가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반 시진 내내 사당 바닥은 물론이고 근처의 바닥도 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청소를 하고 있을 때 나는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
“아, 저거.”
잘 보니 사당 안쪽에 녹스고 낡은 철검(鐵劍)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검이었고 예전에 잘못하면 부숴질까봐 손도 안 댔던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머릿속에 두 가지 선택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철검을 든다.
철검을 들지 않는다.
“…….”
이럴 땐 당연히 들어야지!
나는 철검을 들어서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딱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어라…. 방금 그건 확실한 직감이었는데…. 왜 아무 일도 없지?’
이 정도로 강렬한 직감이 들었던 적은 달리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다.
‘뭔가 내가 잘못했나? 아니면 직감이 발동했어도 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나….’
어렴풋이 느껴지는 건,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를 갖고와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한동안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결론이 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철검을 있던 자리로 갖다놓았다.
아직 내가 여기서 뭘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고양이한테 물어봤자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나 할 거 같고…. 나중에 여동빈한테 물어볼까.’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다음이 있기는 할까.
당장 내일 모든 운명이 결정되는 상황이고 다음 전생이 있을지조차 불확실한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사당을 나왔다.
그리고 가만히 사당의 정문 기둥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이 흐르는 걸 기다렸다.
예전에는 자주 이랬었지.
농촌에서 살아가면서 가끔 시간이 남으면 황금이랑 같이 석양을 보면서 마음을 비우면서 시간이 흐르는 것만 느꼈지. 괴로운 시간이 곧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면서….
‘황금이랑 농사나 짓고 싶다.’
언젠가 모든 게 끝나면 그것도 가능할까…. 아니, 세상의 진정한 멸망을 바라고 있으니 그것까진 안 되겠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는 동안에 석양이 지고 밤이 찾아왔다.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앉아있자 마음이 텅 비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얼마 전에 동료들이 그리 참혹하게 죽어나갔던 게 마치 거짓말 같이 평화로운 하루이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롭게 시간을 보낸다 해서 내 마음속이 지옥이 아닌 건 아니지….
과연 내가 복수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공손헌원에게 한 방 먹여주고 다음 생으로 갈 순 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생각이 소용돌이 치던 와중, 문득 나는 망량선사의 말을 들었다.
[백웅. 일어나라.]
잠시 후 나는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는 걸 느꼈다.
[니알라토텝이 너를 옥좌로 초대했다.]
“뭐….”
뭐라고?!
[마지막 결과를 네 눈으로 확인하라.]
파앗!!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번 와본 적 있는 풍경에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긴.”
거대한 차원의 회랑.
이전에 소환수를 이용해서 한 번 온 적이 있었지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오색현란한 빛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혼돈의 통로 속에서 나는 서서히 걷기 시작했고, 잠시 후 은하단이 썰물처럼 내 곁을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쿠웅….
은하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이 회랑에서 한 발짝을 걸을 때마다 은하가 점처럼 작아지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듯 모든 게 달라진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설마 이 곳에 또 다시 오게 될줄은 몰랐기에 무척이나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제길… 옥좌에 가는 통로로 왔다는 건…. 이미 현실에선….’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전제조건이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생각을 떨쳐버리며 일단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찌되었든 결판을 내기 위해서 여기에 온 거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쿠구구구….
초은하단이 모래알처럼 작아지자 안개가 내 눈을 가리는 현상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이 길의 중반부 이상에 도달했다는 걸 알아챘고, 점차 기이한 생물체들이 곁에 떠다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저 놈들 하나하나가 [옛 지배자]였기에 나는 눈도 마주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길의 끝에서 두 명을 마주칠 수 있었다.
[왔구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흑백대비의 미청년.
황금빛 제관과 용포를 쓴 존재.
나는 그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떫은 눈으로 놈들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왔다. 이제 날 찢어죽일 거냐?”
[…….]
“둘이 한 통속이 되어서 날 없애려고 작당질을 했다고 해도 난 굴하지 않아. 다시 태어나서라도 네놈들을 없애고 말겠다!!”
내가 사자후를 터뜨렸지만 눈앞의 두 존재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응?’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흑백대비의 미청년은 살포시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반대로 황제 공손헌원은 그저 팔짱을 낀 채 침묵하여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동료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인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내가 분위기를 읽고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흑백대비의 미청년, 니알라토텝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백웅. 뭐가 제일 재밌을지 생각을 해 봤는데 결론이 났어.”
“뭐…. 무슨 결론!!”
“후후후.”
이어진 놈의 말에 나는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걸 느꼈다.
“너희 둘이 옥좌 앞에서 무공으로 겨뤄서 이기는 쪽에게 승천권한을 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