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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천마는 잠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깨달은 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찮은 짓을 했군….]
목소리가 다르다. 방금 전까지는 완전히 인간 사공린의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목소리는 위대한 존재들 특유의 신언(神言)이었다. 천마가 내 쪽으로 한 걸음을 성큼 걸어왔고, 나는 그 일 보에 움찔하면서 사공린의 영혼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런 내 행동을 보자 천마가 말했다.
[네가 갖고있는 그건 내 가면이 아니다. 처음부터 천마가 강림할 계약의 매개체였을 뿐.]
“…뭐…?”
[사공린의 영혼이 없다 하여 천마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황금의 광채가 퍼져나왔다.
만마군림(萬魔君臨)
콰과광!!
“큭.”
단지 한 번의 빛이 쏟아진 것 뿐이었지만 나는 내가 있던 명계의 대지가 몽땅 사라져서 허공을 날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이한 부유감에 등 뒤를 보자 모든 것이 소멸되어 땅이 있던 공간이 모조리 허공으로 변한 것이었다. 단 일 격에 대륙을 날려버린 듯 거대한 공허가 내 등 뒤에 끝도없이 펼쳐져 있자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대라멸진이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흔적도 없이….’
빈 말이 아니다. 사공린의 영혼을 뺏았다 하여 천마의 힘이 사라지진 않는 것이다.
쓔우웅
반탄력으로 허공을 날아가고 있던 내 곁에 황금광이 따라붙었다. 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날아 나를 따라오고 있던 천마의 모습이 점차 변하는 게 보였다.
[전생자여. 천마가 무엇인지 궁금했느냐? 화신도 사도도 아닌 듯한 이 존재가 무엇인지 줄곧 궁금했겠지?]
“…….”
[사공린이 없으니 인간모습을 더 유지할 수 없구나.]
쿠르르륵
“아앗.”
이윽고 그 모습이 익숙한 웬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자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천마의 등쪽에서 갈기가 황금빛을 내뿜으며 출렁였고, 한계를 알 수 없는 황금의 마력이 다시 한 번 퍼져나왔다. 그리고 완연한 신수(神獸)의 형태로 변한 천마가 갑자기 내게서 떨어져서 허공으로 크게 승천하는 게 보였다.
[전생자여. 여기까지 왔으니 네게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파아아아앗!!
거대한 금빛 광채와 함께 천마가 허공에 멈추었고, 그 천마를 중심으로 하여 갑자기 허공에 거대한 금빛의 윤곽선이 그려지는 게 보였다. 그 윤곽선은 웬만한 거신에 못지 않은 크기였고, 빠르게 인간과 비슷한 형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형상이 그려지자 그 거신의 양손과 양발에 익숙한 형상이 소환되는 게 보였다.
슈슈슉 - !!
거신의 왼팔에 임한 것은 전욱(顓頊)의 형상.
거신의 오른팔에 임한 것은 제곡(帝嚳)의 형상.
거신의 왼다리에 임한 것은 요순(堯舜)의 형상.
거신의 오른다리에 임한 것은 소호(少昊)의 형상.
그리고… 황금거신의 심장(心臟)에서 찬연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 바로 천마(天魔)!!
“아… 아아….”
뜻밖의 사실에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명계를 가득 채우는 황제 공손헌원의 금광을 쳐다보고 있을 때 황금의 윤곽이 점차 공간감을 가진 채 채워지기 시작했다. 황금빛의 거신이 서서히 실체화되기 시작했고, 그의 머리 위에 황제 특유의 제관이 소환되어 씌어지는 게 보였다.
신농의 본체에 못지않은 크기로 변한 황금의 거신, 황제 공손헌원이 자신의 심장에 한쪽 손을 올리며 말했다.
[천마란 바로 나 황제 공손헌원의 가장 거대한 원초의 신력(神力)이자 근원인 심장이었노라! 그렇기에 전 우주에 존재하는 그 어떤 [옛 지배자]의 화신보다도 강력했으며, 심지어 여와의 서왕모보다 더욱 인과율에서 유리했지!]
“……!!”
[더 이상 겉보기뿐인 천마의 인간형상 따윈 필요 없다. 진정으로 우주를 지배할 자의 힘이란 게 무엇인지를 잘 보는 것이 좋다. 이 모든 게 바로 네가 자초한 일이다…. 전생자!!]
포효한 황제 공손헌원이 문득 자신의 오른손을 내뻗었다. 나는 그 오른손을 쳐다보자 외쳤다.
“제, 제곡도 전욱도… 모든 사제가 소멸했을 텐데!! 어떻게 손발이 움직이는 거야!”
황제가 조롱하듯 말했다.
[오오…. 내 손발이 수십억 년 동안 [옛 지배자]로 생장했으나 그 영혼만이 사멸했을 뿐, 육체는 여전히 내 근원에 붙어서 움직이지. 이 영혼들의 흔적에 동정심을 느끼는가? 큭큭….]
“…….”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걸 느꼈다.
‘다, 달라….’
이 놈은 차원이 다른 놈이야….
힘뿐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마침 끝장을 내줄 상대가 나타났군.]
우우우우 - !!
반고소환(盤古召還)
진체(眞體)
그 때 허공에서 새하얀 반고의 몸뚱이가 재차 소환되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손뿐만이 아니라 몸 대부분이 한 번에 소환되었고, 그 거신 반고의 머리 위에는 망량이 올라타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망량에게 외쳤다.
“망량!!!”
망량이 내게 영언으로 대답하는 게 들렸다.
[…백웅…. 다 끝났소…. 최후까지 대항해 봤지만… 이제 남은 길은… 당신의 자살 뿐.]
“……!!”
망량은 마치 끊어질 듯한 목소리를 이었다.
[바… 반고와 황제가 충돌할 때 명계가 멸망하고 대우주로 튕겨나갈 거요…. 동시에… 우주의 검은 구멍을 통해서 잠시동안 황제의 이목을 피할 수가 있소…. 황제의 권능이 미치지 않는 틈에… 전륜성왕의 권능으로 자살하시오….]
‘지, 지금 자살하는 건 안 되오?’
[절대 안 되오…. 황제의 권능이 너무 거대해서 아까부터 자살할 기회따윈 없었던 거요…. 이 반고소환조차 자살하려는 최후의 틈을 내기 위한… 그리고 이미 내 권능은 모두 당신에게 양도했으니….]
점차 말이 드문드문 끊어지던 망량이 식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백웅…. 사제…. 안녕히….]
쿠와아악!!
소환된 반고가 마치 짐승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완전히 소환된 반고는 황금거신인 황제의 몸뚱이보다 무려 다섯 배는 커 보였다. 반고가 성큼 다가와서 황제의 코앞에 서자, 황제는 그런 반고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위대한 질서의 축이여. 어째서 다른 외신들처럼 얌전히 승천을 관전하지 않았던 거지? 결국 우주의 끝에 질서가 패배할 운명이란 걸 받아들이지 못했던 건가.]
반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서 황금의 빛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질서, 실로 허망하도다…!!]
…….
…….
잠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고와 황제가 서로 주먹을 날리는 그 순간 - 세상의 시간이 정지된 것 같았고, 한 순간 세계 전체가 흑백의 두 가지 색깔로 변화한 듯 했다. 반고가 하얀 색을 휘감고 황제를 업어치려 했으나 황제는 시꺼먼 몸뚱이를 벼락처럼 날려서 그런 반고를 도리어 패대기치는 게 보였다.
구우우우우
시공간이 쪼그라드는 듯한 착각과 함께 나는 어둠의 세계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마치 머나먼 곳에서 인형극을 하는 듯 조그맣게 변한 황제와 반고의 싸움이 비쳐보였고, 이윽고 황제가 반고를 차원 너머로 던져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고 초라해 보이는 싸움.
하지만 나는 그 싸움을 대우주로 튕겨가는 와중에 관전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여실히 느꼈다.
우주의 종말에 이르게 되면 - 황제가 정말로 반고조차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으으으….”
나는 어둠의 우주공간을 훨훨 날면서 입술을 덜덜 떨었다.
정말로 황제에게 대항한 모두가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투웅!
등짝이 아픈 느낌이 들면서 차원의 벽을 뚫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명계가 폭발할 때의 반발력으로 우주로 튕겨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어느 새 주변의 우주는 휘황찬란한 성천으로 뒤바뀌어 있었고 수많은 별들이 휘몰아치는 게 보였다.
후오오오
성좌가 폭풍을 일으키는 것 같다.
밤하늘에 가만히 있던 은빛 별들이 마치 썰물에 휩쓸리듯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하는 게 느껴졌다. 내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탓도 있었지만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은하수(銀河水).
그게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강처럼 보였다. 무수한 은하와 성단들이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여 폭풍 속에 내던져지는 게 보였다. 나는 그 광기어린 우주의 풍경 속에서 그만 실성하듯 웃고 말았다.
“하… 하하하….”
투웅
다시 한 번 등짝의 아픔을 통해 차원벽을 뚫으며, 몇 개인가 거대한 별들이 부딪혀서 폭발하는 게 보였다. 휘몰아치는 우주의 공진(共振)이 이어지면서 흐름은 더욱 빨라졌다.
느껴진다.
지금 우주가 진정으로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라는 게.
나는 이 광란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미치기도 힘들었다. 미쳐버리면 자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동료들이 죽어버린 이 순간, 내가 자살하지 못하면 다른 모든 이의 희생이 헛되게 된다는 모순 - 나는 그 모순 때문에 그저 멍하니 우주의 파멸을 입벌린 채 쳐다보았다.
“…….”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망량의 말대로라면 황제의 영향력을 벗어났을 때 자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인지 측정조차 되지 않는다. 예전 소호금천조차도 다른 은하계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반고조차 쓰러뜨리는 완전체가 된 황제의 권능은 과연 어디까지 뻗어있을까? 수십억 광년을 넘어가더라도 그의 권능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문득 이 지경까지 와서 어떻게 자살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나 자신이 허망해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흐흐흐흐흐… 크… 크큭….”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토록 비참해질 줄이야….
그러나 눈물조차 안 나오는 걸 보면, 이제 슬퍼하기도 지친 게 분명했다.
그래.
나는 절망한 것이다.
그 때였다. 내 귓가에 사공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백웅…. 나 때문에….]
아니.
당신 잘못이 아니야.
다른 동료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나쁜 건 황제야.
당신은 내 동료야….
[난… 알고 있었어요.]
사공린이 마치 자책하는 듯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내가 자율의지를 갖고 천마를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 황제가 그렇게 내버려두는 것뿐이라는 걸….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짐작했어요…. 하지만, 당신을 계속 돕고 싶었어요.]
충분히 도움이 되었어.
당신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야….
[백웅….]
잠시 망설이던 사공린이 뭔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황제의 본질을 받아들였던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황제는 나를 쓸모없는 도구로 취급했지만 그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죠…. 그리고 어쩌면…. 역전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뭐?
[하지만… 그 대신… 당신은 형언할 수 없는 업(業)을 짊어져야만 해요…. 당신은 그래도 할 건가요?]
…….
하겠어.
여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선택하고 말고는 없어….
[알았어요….]
잠시 후 사공린의 영혼이 말했다.
[우선 낙양으로 가야 해요.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나는 사공린의 말에 이를 악물고 전신의 힘을 모두 뿜어내어 튕겨나가던 걸 멈추었다. 어마어마한 추진력 때문에 지금까지 광속을 넘는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던 것 같지만 내 몸에 새겨져 있는 대라멸진과 마신의 힘 또한 절대 만만하지 않았기에 충분히 될 것 같았다.
“하아아압!!”
쿠궁
튕겨나가던 걸 멈추자마자 나는 곧장 비등을 꺼내서 사용했다.
파앗
내가 비등을 써서 낙양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나는 내가 알던 낙양의 모습이 전혀 아니라는 걸 깨닫자 낙양의 성문 밖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 이건?”
낙양의 건물들은 그대로였으나 건물이 모조리 시꺼먼 색깔으로 변해 있었으며 심지어 대지조차도 완전히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낙양 시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사람같이 생긴 괴물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저 괴물은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완전히 사람처럼 생겼고 단지 완전히 시꺼먼 찰흙같은 몸뚱이에 새하얀 눈코귀입이 마치 인형처럼 붙어있는 형상이었다.
‘천우진이 모든 인류를 꿈의 세계로 보낸 게 다행이군….’
여기에 평범한 인간이 있었다면 어떤 지옥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내가 낙양 성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개 중 하나의 칠흑괴물이 나를 발견해서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파앗
칠흑괴물은 나를 보다가 갑자기 내 앞으로 순간이동을 해 오더니 인간의 말으로 대화를 걸었다.
“하하. 너어는? 백. 웅. 맞지?”
“…….”
내 이름을 안다고?
내가 칠흑괴물을 경계해서 쳐다보자 칠흑괴물이 새하얀 이목구비를 움직여 요사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알아. 가. 면. 과 만났잖아. 히히… 히히.”
“…….”
칠흑괴물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왜. 여. 기. 왔. 니…? 황제한테 져서 어디로 도망칠 줄…? 알았는데.”
“……!!”
어떻게?!
이 괴물은 대체 뭐길래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이토록 자세히 안다는 말인가?!
내가 크게 경계해서 저 괴물을 쳐다보자 내 내면에 들어와 있던 사공린의 영혼이 내게 말했다.
[백웅. 우리는 저 자와 거래해야 해요. 그게 역전의 실마리에요.]
‘뭐라고?’
[나와 약속해줘요. 업(業)을 감수하겠다고.]
이어진 사공린의 말에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걸 느꼈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한이 있어도 이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