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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목이 잡힌 상태에서 온갖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장 견명하게 내 뇌리를 지배하는 것은 형용할 수 없는 절망감과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모든 힘을 다했으나 결국 이렇게 끝이 나 버리는 것인가.
동시에 다른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그건 절망감과는 다른 현실의 분석이었다.
본디 대라멸진을 쓴다면 전신이 회복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 제약을 완화시키기 위해 생명력공유를 이용한 불사 같은 꼼수를 써본 적도 있지만, 사실 그 방법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어찌됐든 생명력공유를 했을 경우 상대 술자는 생명력과 수명이 급속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은 사상최고의 출력을 내는 대라멸진을 행한 상태. 내 몸은 완벽하게 죽음에 이르러서 죽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기력이… 그대로다?’
대라멸진을 써서 죽어갈 때 느끼던 기경팔맥의 파괴와 경혈의 분쇄현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릇이 깨져서 막대한 기가 바깥으로 쏟아져 나가던 절망감이 없다. 내가 곤혹스러워할 때 천마가 내 목을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설마 소호의 영혼을 멸하고 전욱에게까지 큰 타격을 줄 정도라니. 인과율을 마지막으로 읽었을 때는 이런 잠재력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
“그렇군…. 대라멸진인가. 허나 종말까지 내 앞에서 숨길 수 있다니…. 크큭. 처음부터 세상의 종언에는 관심이 없었구나. 정해진 변수가 아니었다면 출현할 가능성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천마가 사공린의 얼굴로 기분좋게 웃었다.
“정녕 세상이 멸하는 건 신경쓰지 않는구나…. 하하하하.”
왜 웃는 걸까.
도대체 뭐가 웃긴 걸까.
아무것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확실한 건 나는 지금 굉장히 애매한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는 놓쳤다. 하지만….’
패배하지 않았다.
정신승리일 뿐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대라멸진으로 힘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측정불가능한 거대한 힘이 내 안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천마가 천마신공으로 내 기를 제압하고 있을 뿐 아직 절대적인 패배라고 할만한 피해는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나는 다시금 주먹을 불끈 쥐며 기운을 일으키려 했다.
‘한 번 더…!!’
오싹
그 순간이었다. 나는 전신의 힘을 솟구쳐서 천마를 공격하려 했지만 전신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순수한 공포감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왔다.
육중하다.
전신을 꽉 누르는 것 같다.
[힘].
그저 압도적인 천마의 힘이 정면에서 내 대라멸진의 잠재력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천마의 내면에 이미 나타나있는 힘의 수준이 오제를 모두 흡수하고 본연의 힘을 되찾아가는 황제 공손헌원 그 자체의 힘으로 뒤바뀌었단 소리였다.
쿠구구구
상대가 안 된다. 눈앞에 태양이 서 있는 기분이다. 아니, 그걸로도 표현이 안 될 정도의 아득한 거대함 - 경외심을 느낄 정도의 순수한 거대함! 지금껏 느꼈던 삼황오제의 권능과도 격이 다른 무언가가 내 앞에 서 있었고, 굳이 형용하자면 힘의 단위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게 느껴졌다.
부들부들
손이 떨린다. 분명 아직 대라멸진의 효과가 남아있는 이 육체는 지상최강의 육체일 테지만 눈앞의 천마에게 일 푼조차 미치지 못한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기나 의념으로 극복할 수조차 없는, 객기로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 일순간이지만 이 정도면 삼황오제를 다 합친 것만큼 강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잠시 말을 하지 못하다가 천마에게 말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무엇을 말이냐?”
“너정도로 대단한 놈이… 뭐가 아쉬워서… 외신같은게 되려고 모두를 계략에 빠뜨린 거냐….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 수도 있었을 터….”
“…….”
천마가 대답하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이었다.
“외신이 되어도 결국 굴레 바깥에서 모든 걸 관조할 뿐이잖아…. 억겁의 세월동안 그럴 뿐이 아닌가…. 굴레에 휩쓸리느냐 아니냐가 그렇게 중요한 거냐!!”
“짐작은 했지만.”
천마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전생(轉生)이란 권한이 얼마나 거대한 건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너처럼 특이한 전생자가 있었을까….”
“……?”
“네가 죽음으로서 내게서 도망가려는 행위…. 언뜻 구차해 보이지만, 그렇게 네가 굴레를 벗어나 새로운 굴레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나 공손헌원은 물론이고 이 세상의 모든 굴레 속 존재들은 네게 하찮은 미물만도 못한 게 되어버린다.”
천마의 황금안이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여전히 내 목을 손으로 짓누르고 있지만 다소 높이를 낮춰서 나를 주저앉게끔 한 뒤 말을 이었다.
“외신이란 네가 지닌 전생의 권리를 항상 발동하고 있는 존재들이나 마찬가지…. 그 위대함을 짐작이나 할 수 있는가?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내 위치를 깨닫고 승천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을 따름이다, 전생자여.”
“노… 노력?”
“그렇다. 노력…. 태초부터 지금까지, 나는 나보다 강한 자를 이겨내고자 늘 노력해 왔지…. 수십억 년 동안 인내하고, 수억 년간 판을 다듬고, 수만 년간 계책을 쌓았다. 그 결실이 이제 코앞에 와있는 것이다.”
스윽
천마의 손이 내 목을 놓았다. 내가 풀썩하고 바닥에 앉는 자세가 되자, 천마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는 어떨 때 존재가 전능감(全能感)을 가장 크게 느낀다 생각하느냐?”
“…….”
“그것은 바로 전지(全知)를 이루었을 때다…. 네가 굴레를 반복하며 이전 회차에서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해 다음 굴레에서 더 큰 이득을 얻는 그 순간마다 즐겁지 않았다고는 하지 못하겠지. 몇천 번을 반복하게 되면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은 분명하다.”
“그건….”
“하지만 그런 너도 외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건 전생자인 네가 몇억 번을 반복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왜냐하면….”
천마의 황금안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전생자는 굴레의 시작과 끝…. 윤회의 도정(道程)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냐. 너는 굴레를 뛰어넘을 수는 있어도 굴레 사이의 근원에는 접근할 수 없어.”
윤회의 도정?
“나는… 더 많은 것을 알아 전지자의 길에 다가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능해질 것이다.”
이윽고 천마의 머리카락이 완전한 금발으로 빛나서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더욱 막대한 마력을 뿜어내는 게 보였다.
“내가 천상에 이르러 전능해지는 걸 지켜보아라!!”
쿠구구구!!
거대한 천둥소리가 하늘 저편에서 울려퍼진다. 그리고 아주 잠깐동안 하늘 저편에서 거대한 먹구름과 함께 우뢰가 수천 번이나 나타났고, 그 번개의 폭풍 사이에서 무언가의 형상이 비쳤다.
흑묘(黑猫)!
흑묘는 얌전히 앉아있는 형상이다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듯 했다. 그걸 끝으로 우뢰는 멈추었고, 나는 그 광경을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망량선사!!’
틀림없다!
동시에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천마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설마… 낙양의 대결계를….”
천마는 이내 훗하고 웃으며 대꾸했다.
“지금 부숴졌다.”
“……!!”
“자아, 나 황제 공손헌원의 위업을 지켜보아라….”
그는 지극히 만족스러운 말투로 턱을 쓰다듬었다.
“훌륭하다…. 인과율이 이리도 요란하게 들끓다니…. 억겁의 세월을 살아오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천마는 하늘 저편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런 천마의 뒷모습을 보았지만 전혀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인과율이 대체 뭐가 들끓고 있다는 말일까?
차원이 다른 존재다.
그런 사실만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 때였다.
[백웅. 단 한 순간의 빈틈…. 만들 수 있겠소?]
망량!!
내 머릿속에 망량의 목소리가 울려퍼지자 나는 반사적으로 그 쪽을 쳐다보았다. 망량은 아까 천마신공 때문에 그의 몸을 불태우던 사대신기 아그니의 화염을 몸에 둘러싼 채 여전히 눈을 감고 버티고 있었다. 그의 몸에 큰 부상은 없어보였지만 점차 화염이 강렬해지는 걸로 보아, 그가 계속해서 버틸 수 없음은 자명해 보였다.
‘…저 놈은 방금 전보다 더 강해졌소…. 지금도 숨을 쉴 때마다 강해지는 중이오…. 도저히… 그럴 틈이 나지 않소.’
나는 침통하게 머릿속으로 대꾸했다.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리를 하기 싫지만 방금 전 생각한 건 모두 사실이다. 대라멸진을 펼쳐놓은 내 힘을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르고 있는 천마의 힘은 마치 악몽과도 같았고, 심지어 실시간으로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몇 할씩 더 강해지는 존재를 보는 기분은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전투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십수 배 이상 강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다.
이대로 덤벼들어 기습한다 해도 단 일격에 전신이 파쇄당하는 것밖에 길이 없다. 순간의 틈 따위는 나지 않는다. 절대지경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실전을 겪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사실이 절대적이란 걸 알고 있는 것이다.
[…….]
망량 또한 잠시 절망한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우리의 노력은 다 했소. 그렇다면 남은 것은… 천운(天運) 뿐이오.]
‘천운?’
[믿읍시다…. 이 세상의 인과율이 잠자코 황제의 승천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리고 만일에 그 한순간의 틈이 난다면….]
망량이 계획을 내게 설명했다. 나는 그의 계획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들었으나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절망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코끼리와 개미 수준의 전력차이를 과연 그 계책 한 번으로 역전 가능할까? 아니 그 전에 천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도박조차 시도할 수 없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나는 우는 소리를 하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았소.’
딱 한 번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면…. 반드시 역전하고 말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까지 죽어간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쿠르릉
천둥소리가 재차 울렸다. 하늘 저편을 잠자코 관전하던 천마가 흠칫하고 놀란 듯 했다.
“…이럴 수가!! 설마 그랬단 말인가?!”
천마가 저렇게 놀라는 건 처음 본다.
지금껏 계속 냉정하고 음험하기 그지없던 존재가 순수하게 놀라는 것이다.
“뭐?!”
“크크…. 크크큭…. 그러니… 그럴 수밖에…. 크크…. 하하하하!! 설마 나보다 오랫동안 계획을 꾸민 자가 있었을 줄이야!!”
천마가 갑자기 미친듯이 광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저 새끼 대체 무슨?! 아니, 지금이 틈인가!’
천마의 동요가 무엇 때문에 생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이 틈인지를 빠르게 판단했다. 그리고 빈틈투성이인 천마를 보고도 지금이 전혀 틈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너무 거대하다.
빈틈투성이인 건 확실하지만 코끼리가 빈틈투성이라 해서 개미가 그걸 찌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좀 더…. 천마 그 자체가 타격을 받을 정도의 빈틈이 있어야 해!
“하하하하하….”
하지만 나는 끝내 천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실컷 웃으며 즐거워하던 천마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내 가슴을 발로 밟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꾸욱하고 내 가슴을 밟은 천마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지금 낙양에서 [기어오는 혼돈]과 그 자의 전초전이 시작되었다. 내버려둬도 파멸은 예정되어 있지만 가능한 빨리 가서 지켜보고 싶군.”
“…….”
“그럼 이제 마무리를 지어….”
그 때였다. 천마의 표정이 무척이나 이상해지더니 갑작스럽게 내 가슴을 밟아서 죽이려다가 휙하고 허공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선악과(善惡果)? 이런 식으로 인과율을….”
“물론.”
두웅
어느 새 누군가의 신형이 나타나 있었다.
엥?!
저, 저 새끼가 왜?!
나는 그 자의 모습을 보자 믿기지 않아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고, 천마 또한 그 자를 주시하는 기색이었다.
“나도 오매불망 이 순간만 기다려왔소, 황제 공손헌원이여.”
“…….”
“이 굴레에서 당신의 승리가 확정됐다고? 그럼 내 입장에선 한 가지 책략뿐이다.”
개탈을 쓴 그 자는 씩하고 웃는 듯 했다. 그의 손에는 은하구절편이 들려 있었고, 은하구절편의 쇄가 천마를 향해 겨누어졌다.
“이번 판은 나가리야.”
십이율주 하은천.
그가 종말 최후의 전투에 등장한 것이다.
“죽어라.”
등장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말을 한 십이율주를 향해 천마가 달려들어서 분쇄하려 들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힘과 속도는 마치 빛의 속도를 뛰어넘은 듯 했고 십이율주의 본래 실력이라면 그 공격은 절대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으리라.
아니, 지금 대라멸진을 쓴 내 힘만 하더라도 십이율주 정도는 한두 초식 안에 박살낼 수 있는데 그런 나조차도 꼼짝 못하게 하던 경세적인 천마의 힘에 어찌 대적이나 가능하겠는가. 천의무봉이 완벽하다 해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그 순간 행성을 일격에 쪼갤 법한 그 힘 앞에 맞선 것은 바로 은하구절편이었다. 정확히는 은하구절편의 한쪽 면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 면에는 일곱 개의 보석같은 게 박혀져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치리링!!
천의무봉(天衣無縫)
최종극의(最終極意)
혼돈역산(Deus Ex Machina)
일곱 개의 보석이 격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은하구절편과 하은천의 뒤편에 거대한 악마(惡魔)의 형상이 떠올랐다.
인류최종무기 발동(Unitary Equation)
꽈과광
“……!!”
거대한 폭렬음과 함께 십이율주 하은천의 은하구절편이 터져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십이율주의 몸뚱이 또한 갈가리 찢겨나갔고, 방금 전에 뭔가 발동한 게 무색할 만큼 허망한 최후였다.
그러나 막상 십이율주를 일격에 찢어죽인 천마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천마는 주먹을 내뻗은 채 그 자리에 부들거리며 멈춰 있었는데, 누가 보아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천마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네놈이 혼연(混然)의 속성을 어떻게 무기에?”
마치 있을 수가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한 반응!
뜻밖의 함정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기, 기회다!!’
천운이란 게 정말 온 건가?!
나는 대라멸진의 힘을 전신에 끌어올렸고, 그 찰나에 어디에선가 십이율주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퍼지는 게 들렸다.
[예전엔 당신에게 이 무기를 써볼 틈도 없이 오제에게 가로막혔지. 수천 년이 지나서 써먹어 보는군.]
역시 죽은 게 아닌 건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도 전에 내 몸은 전방으로 뛰쳐나가 있었다. 그리고 천마의 황금안이 내 쪽을 향하는 그 순간 나는 대라멸진의 모든 힘을 실어서 천마의 옆구리를 크게 가격했다.
쿠콰쾅
‘안 통해…!!’
무슨 이런 방어력이 다 있단 말인가!
미증유의 타격력이 천마의 동체를 때리는데도 천마가 가진 힘이 너무 막강해서 내 힘으로는 타격을 줄 수 없는 듯 했다. 심지어 천마는 아까처럼 소호의 영혼을 내세워 막을 필요도 못 느낀다는 듯 멀쩡한 기색이었다.
여유로운 표정.
나는 천마의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다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 나와 때를 맞춘 망량이 눈을 번쩍 뜨면서 외쳤다.
[아그니의 화염이여!! 전륜성왕으로서 명하노니 나의 [표식]을 불태우라!!]
쿠와앗
동시에 망량이 전신에 두르고 있던 화염이 빛의 속도로 뿜어져 나와서 천마를 가격했다. 화염이 가격한 부위에서 초고대의 신화문자 같은 게 떠올랐고, 그 문자가 떠오르자마자 화염이 문자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크윽….”
천마는 이 공격은 상당히 아프다는 듯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역시!! 전륜성왕이 고대에 황제와 싸우다가 남긴 저주의 표식!’
그 표식을 사대신기의 화염으로 긁었으니 생살을 찢기는 고통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는 망량과 계획한대로 그 빈틈을 다시 한 번 때려서 황제에게 치명상을 준다는 계획이 이미 막혀버린 걸 깨닫고는 암담해졌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방어력이었고, 이대로 내가 한 방을 더 때린다 하더라도 결코 치명상이 될 수 없음은 확실했기 때문이다.
…제기랄!! 그래도 할 수 없다!!
쿠콰쾅
나는 고수답지 않게 눈을 딱 감고는 주먹을 날려서 화염이 불태우는 부위를 가격했다. 대라멸진이 실려서 대륙을 일격에 쪼개버릴 거력이 담긴 공격이었지만 천마에겐 통하지 않을 게 자명했다. 그렇다 해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타격감이 느껴지지 않자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말았다.
‘역시… 안 통하나….’
정말 이런 괴물은 처음 본다….
내가 내심 절망을 거듭하고 있을 때 뜻밖의 소리가 들려왔다.
“크윽… 네 놈이….”
고통스러운 천마의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슬며시 눈을 떠 보았다.
그리고 어느 새 천마의 뒤편에 떠올라 있는 어두운 거인의 모습에 숨을 멈추고 말았다.
“……!!”
전욱(顓頊)이 천마의 상처부위를 양 팔로 누르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전욱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나의 창조주여, 나 스스로를 불태워 천상에서 떨어뜨리겠노라!!]
후와아악!!
전욱이 스스로 들이대듯이 화염에 돌진했고, 아그니의 화염은 전욱을 삼키자마자 몇 배나 강렬한 기세로 불타올랐다. 상황이 어찌된 건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전욱이 갑자기 자신의 의식을 되찾아서 내 공격을 대신 막아주지 않고 도리어 황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준 걸로 보였다.
“으으… 으으으….”
신음소리를 내는 천마는 비틀거리며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거센 외침을 터뜨렸다.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쿠웅
천마가 거세게 일 보를 내딛었다. 나는 그 한 걸음에 실려있는 제왕의 기세에 그만 기가 죽을 뻔 했다.
어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전륜성왕 망량은 물론이고 삼황의 대리인으로 온 미호, 대마왕 제갈사, 그리고 십이율주가 비장의 무기까지 썼고 전욱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아그니의 화염을 강화시켜서 지지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버틴다고?
이만큼 했는데도 황제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건가?
“으… 으아….”
나는 진실로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투지가 거짓말인 것처럼 눈앞의 괴물에 질리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런 괴물과 싸우고 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고 당장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뒷걸음질을 치려 할 때였다.
[…줘요….]
하나의 목소리가 내 발걸음을 멈추고 붙잡았다.
[도와줘요. 백웅….]
사공린의 목소리.
지금까지 황제때문에 내부에 유폐되어있던 사공린의 영혼 - 그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모든 감정이 멎어버리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가 그녀를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천마의 앞잡이에 불과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끝까지 믿기로 했었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구해주지 못해.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인가….
그렇다고 하여….
후회를 남길 셈인가?
뇌리에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환영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오래전의 기억처럼 느껴졌다.
“으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생사(生死)가 거꾸로 뒤집히는 듯한 역한 기분과 함께 나는 달려들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신역절기를 이룬 신투지존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상이 전환되는 걸 느꼈다.
내가 신투지존이라면 어떤 걸 훔치려 했을까.
황제가 쓰고 있는 황제의 가면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건 아마도 가면이 아니었겠지. 처음부터 없었겠지.
그렇다면 나는 -
만상지투(萬象之偸)
파밧
나와 천마의 신형이 교차했다.
그리고 나는 뒤로 내려앉으며, 내 손에 분명하게 들려있는 확실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해냈다….”
황제의 가면이 아닌 [사공린의 영혼]을 훔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