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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반고소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과거 산하사직도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지나갔다.
‘여와와 복희가 반고를 강신했을 때 황제와 복희는 백중세였다!’
정확히는 반고의 적자인 삼황 둘이 각각 반고의 영혼을 절반씩 나누어 강신시킨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제의 본체를 상대로 잘 싸웠다. 그것도 그 당시 여와가 황제를 합공한 것도 아니었으니, 만일 온전한 상태에서 반고강신을 한 여와와 복희가 동시에 황제에게 덤빈다면 그는 이겨내지 못하리라!
그러나 - 나는 동시에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고강신, 혹은 반고소환이라고 불리는 태고의 질서를 소환하기 위한 소환조건.
그것은 바로 오행신옥(五行神玉)의 공양!
여와가 관리하고 있던 오행신옥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물리법칙이자 거대한 인과율의 도구인 오행의 법칙 그 자체였다. 그걸 제물로 바쳐버리는 바람에 세계는 단숨에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삼황은 모든 [옛 지배자]의 미움을 사서 공적 신세가 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은 오행신옥도 없고 그걸 관리하는 여와도 없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망량이 구천현녀를 제물로 삼아 공양한다고 해서 과연 반고소환이 이루어지는 걸까?!
나는 망량의 눈을 쳐다보았다. 망량의 눈은 여전히 의기로 넘쳤으며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현인(賢人)의 정신력이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망량을 떨리는 눈으로 보다가 말했다.
“…망량. 당신은 왜….”
다음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망량은 아마 내가 하고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망량의 눈이 잠시 처연한 빛을 띄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미안하오. 여기서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무의미할 것이오. 깨진 신뢰는 되돌아오지 않을 터(覆水不返盆)…. 허나 지금이 이번 생의 마지막 선택의 기로임은 틀림없소….]
“…….”
망량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백웅. 그릇은 엎어져 깨졌소. 그래도 아직도 나를 믿을 수 있겠소?]
그는 질문했다.
나는 그 말이 질문이라는 사실에서 그가 마지막까지 내게 과제를 던져주는 걸 느꼈다. 망량이 [믿어달라]고 했다면 나는 찝찝한 점은 남아있더라도 망량의 뜻에 따랐을 것이다.
그것은 신뢰와는 상관없는 영역의 행동이다. 내가 밑바닥에 이르게 될지라도 망량에게 최후까지 지니고 있는 연민과 의리였다.
허나 망량은 요구하지 않고 굳이 질문했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내 자신의 의지로 - 한 줌의 연민에도 구애받지 않고 신뢰의 거취를 결정지으라는 과제! 신랄하게까지 느껴졌다.
‘차라리 강요해줬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을….’
오랫동안 함께 해 왔기 때문일까.
사소한 한 마디에서조차 망량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주륵….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슬프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서 도저히 몸을 가누기 힘들다. 천마에게 몸이 꿰뚫리고 터지고 부숴졌을 때의 고통보다 더욱 절절한 괴로움이 눈앞을 메우고, 목을 따갑게 만들었다.
어쩌면 지금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처음으로 내가 망량을 죽였던 그 때의 벌을….
심상이 우글거린다.
아수라장이 된 머리통이 마치 잡초밭처럼 난잡하게 느껴진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에서 총천연색의 무형(無形)이 실처럼 변해서 눈앞에서 흩어진다. 홀리듯이 그 무형의 실을 관찰하고 있자니 아무런 생각도 이어지지 않았으나, 감정만은 남아서 계속해서 심장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러나 -
[나는 나로서 지내오고 있었소. 제갈현이 아닌 망량으로서.]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살 운명이었지…. 아마도 당신과 처음 마주친 그 날 부터….]
[매듭] 안에서 만났던 망량의 이야기.
비록 그 안의 이야기는 꿈이었으나, 꿈속의 존재들에게도 의지가 존재했다. 그 때 망량이 했던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 스며들어 있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진정한 마음이 이해되었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생각이 흩어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무심(無心)으로 한 마디를 내뱉을 수가 있었다.
“당신을 믿소.”
왜 이런 대답을 했을까.
아직도 나를 배신했을지도 모르는 망량에 대한 서운함이 가득한데.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당장이라도 따져물으며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인데.
하지만 그러니까… 나는 나인 거다.
망량을 믿는 나 자신을 버릴 수도 없고, 망량 또한 내게 종속되어 있다.
세상 모두가 망량을 버린다고 해도 나는 망량을 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책사이니까.
[그 말을 기다렸소.]
우웅!
다음 순간, 망량이 구천현녀를 상징하는 태양의 백(魄)을 손에 쥐며 혼(魂)을 내게 던졌다. 내가 태양의 혼을 빠르게 낚아채는 순간 지평선에 드리워져 있던 거대한 황제가 포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행신옥을 대체할 순 있어도 반고와 인과율이 이어지지 않은 놈들이 어찌 소환을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꾸웅!!
황제의 손이 천지를 뒤덮듯 내려쳤다. 시야 내의 모든 범위가 일순간에 압정(壓頂)당해 쥐새끼 하나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우리는 마치 파리처럼 때려잡힐 줄 알았으나, 뜻밖에도 나와 망량은 멀쩡한 상태로 혼백을 쥔 채 황금의 빛을 전신에서 내뿜고 있었다.
쿠오오오
서서히 우리 둘의 몸이 황제의 손을 무시하고 반투명해져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느껴진다.’
구천현녀의 진짜 힘이 혼과 백을 타고 이어져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여기까진 계산대로군.]
황제의 공격을 구천현녀의 혼백을 이용해서 한 차례 넘겨버린 망량이 말을 이었다.
[황제여. 그대 말대로 우리는 복희나 여와처럼 반고의 적자도 아니고 질서의 신성도 아니지. 구천현녀를 제물로 삼는다 하여 그 상징성과 인과율을 획득할 수도 없소.]
[그렇다. 그리고 네놈은 삼황과 정식으로 계약하여 그들에게서 권리를 양도받지도 못했다. 그건 내가 모두 확인한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잊은 게 있지 않소?]
[뭐라고?]
망량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꿈 속’에서는 분명히 백웅이 천계 100층의 시련을 통과하여 ‘나’에게서 그 권리를 양도받았소. 그렇지 않소?]
[…….]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황제는 순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내게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런 편법이 통할 것 같으냐!! 꿈은 꿈일 뿐이다!]
[하지만 백웅은 전륜성왕의 권능조차 겉핥기로 이 세상에 가져왔소. 제대로 인과율이 성립되지 않아 생사부도 쓸 수 없긴 하지만, 이 세상에 두 명의 전륜성왕이 존재하는 모순조차 성립하는 상태에서….]
망량은 싱긋 웃었다.
[반고소환의 권리가 계승되지 않을 리는 없소. 질서의 근원인 반고는 꿈의 영역보다 결코 하위가 아니니까!]
[…이 놈….]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렇구나!’
[매듭] 속에서 나는 기어이 천계 100층의 시련을 모두 뚫고 99층의 시련관인 망량에게서 반고소환의 권리를 받았다. 그러나 그게 꿈 속, 즉 [매듭] 속의 일이라서 헛수고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것이다.
[매듭] 속에서 있었던 일은 현실에 계승된다.
단순히 [꿈] 속이었다고 잊혀지지 않는다.
비록 그게 불완전한 형태일지라도!
순간 나는 생각나는 게 있어서 믿기지 않는 눈으로 망량을 보았다.
“…설마, 그것까지 계산한 거였소?”
망량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확신을 의미하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걸 깨닫자 도저히 망량의 귀계(鬼計)가 인간의 경지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고 말았다.
“…….”
괴물이다.
평소에 제갈사나 제갈유룡같은 행동파에 비해서 눈에 띄는 활약이 적고 큰 그림만 그리기에 망량의 역할에 다소 불만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망량의 단점이 아니었다. 그저 힘이 없을 때만 단점일 뿐 망량이 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망량이 지닌 특유의 재능인 [큰 그림을 그려서 책략을 짜넣는 능력]은 사상최고의 책사가 될 수 있는 재능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제갈사가 망량에게 왕의 재능이 있다고 한 이유인가…!!’
어렴풋하게 느껴진다.
지금 황제와 수를 겨루고 있는 망량의 대국(對局)이!
그 사실을 황제도 느꼈는지 섣불리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고 노려보기만 하는 게 느껴졌다. 망량은 내게 구천현녀의 백을 내밀며 말했다.
[확실히 구천현녀의 혼백만으로는 오행신옥에 비해 조금 제물이 부족하오. 이혼대법(移魂大法)을 써서 나와 정반합(正反合)을 맞추시오.]
응?
무슨 소리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음 순간 망량이 들고 있는 구천현녀의 백에서 강대한 흡인력이 느껴졌다.
쏴아아아아!!
“크윽.”
나는 그 흡인력을 내버려두면 내가 가진 혼이 백에 빨려들어가 흡수된다는 걸 깨닫고는 급히 혼을 지탱시키게끔 이혼대법의 요결을 시전했다. 그리고 이윽고 나와 망량이 지닌 혼백 간의 흡인력이 길항 상태에 놓이게 되자, 구천현녀의 혼백이 점차 부풀어오르는 게 눈에 보였다.
쿠구구!!
크기가 무려 두 배 이상 커졌다!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사왕지법(邪王之法) 쌍반대영롱(雙般大影朧). 이혼대법을 대성한 자들이 두 명 이상 있을 때만 쓸 수 있는 최상위 이혼대법의 비술이오. 혼을 인위적으로 커지게 만들어 그 제물의 품질을 일시적으로 증대시키는 것.]
“…….”
[제갈사는 그대의 숙련도가 모자라다고 여겨 섣불리 수련시키지 않았지만 지금은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소.]
그 말은, 망량은 500년 동안 이혼대법도 겸사겸사 대성했다는 뜻인가?!
내가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때 구천현녀의 백을 극대화시킨 망량이 허공으로 백을 내던지며 말했다.
[던져서 소환하시오!]
파앗
내가 백을 향해 혼을 던져서 적중시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빛과 함께 현실이 녹아내리는 듯한 꿈틀거리는 공간이 소환되었고, 그 순간 나는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아차리고는 외쳤다.
“반고소환!!”
내 언령이 터져나가는 순간 그 공간에서 꿈틀거리며 거대한 신의 손가락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태초의 거신인 반고의 것이었고, 그 손가락을 확인하자 황제가 말했다.
[마지막 발악치고는 제법이구나.]
[황제. 어찌하시겠소?]
점차 소환되고 있는 반고의 육신이 커지자 망량이 여유롭게 말했다.
[이대로 영부의 경계에서 질서의 최고신 반고와 싸우시던가, 아니면 백웅의 혼을 생사의 경계에서 이만 놓아주시던가!]
[…….]
[원래라면 [기어오는 혼돈]을 소환해서라도 이 위기를 무마했겠지만 지금 당신은 이미 꿈속에서 그 권리를 써 버렸지.]
[…후후…. 나를 원하는 대로 몰았다 생각하느냐?]
황제가 부드럽게 웃더니 말했다.
[좋아…. 원하는 대로 해 주지…. 현실에서 보자꾸나….]
파앗!!
갑자기 천지를 뒤덮던 황제의 거대한 신형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가 펼쳐졌고 나는 어둠의 공간 속에 망량과 단 둘이 남겨지게 되었다. 나는 어찌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다.
“망량…!! 황제를 격퇴한 건가?”
[…….]
그러나 망량은 뜻밖에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백웅. 이제 곧 현실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이제 황제는 천마에게 모든 힘을 몰아주어서 전력을 다해서 덤벼오게 될 터…. 우리는 반고에게 의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승산이 없소.]
“반고라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 않겠소?”
[…황제는 아마 자신의 수족을 이용해서 소모전으로 나올 터….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오.]
망량은 암울한 눈빛으로 허공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백웅…. 천마에게 질 게 뻔하지만 더 이상 내겐 계책이 없소. 그래도 끝까지 같이 가겠소?]
“…….”
저 눈빛은 진심이다.
망량이 어디까지 수를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망량은 지금 황제의 남겨진 전력을 짐작하고는 더 이상은 반고소환으로도 통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이르게 된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망량의 식견은 거의 정확할 것이므로, 이대로 황제와 계속 싸워봤자 절대 이기진 못하리라.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 저으며 말했다.
“더 이상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나는 끝까지 당신을 믿기로 했으니까.”
[…사제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아니오. 천우진의 말도 물론 있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을 이었다.
“나는 솔직히 멍청하고 재능없는 놈이오. 그런데도 이런 날 따라와준 모두에게 감사하고 있소. 그리고 그런 당신들이 날 위해 목숨을 버려주는 도움이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내 등을 내어주는 것뿐이겠지.”
[…….]
“죽을 각오를 하고 동료들을 믿겠소. 그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오.”
[…배, 백웅.]
순간 망량의 표정이 크게 흐트러졌다. 지금까지 강인한 정신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그의 동공이 흔들리면서 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러더니 그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봤자지만…. 황제는 너무 철두철미한 존재였소. 심지어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어떠한 계교를 부려도 도중에 차단당하기 일쑤였소. 그래서 그를 진정으로 속여넘기고 빈틈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진짜로 당신을 배신할 필요가 있었소.]
“음….”
[결국 당신을 꿈속으로 유도하고, 전륜성왕의 직위를 주어 쉽게 죽지 못하게 하는 황제의 계책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지만…. 제갈사가 당신을 구원해주리라는 일말의 희망에 걸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숙부가 당신을 구해준 덕에 전륜성왕의 권능을 써서 역습할 기회가 생겼지….]
망량이 크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신을 배신한 죄인이오. 나를 지옥으로 내친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겠구려….]
하지만 망량의 이야기는 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내 마음이 정리된 이상 그런 구구절절한 이유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쪽이리라.
“흥!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퉁명스럽게 대꾸한 나는 씨익 웃었다.
“미안하면 같이 죽어주시오. 그걸로 퉁칩시다.”
그 때처럼.
내 말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망량도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윽고 허탈하게 웃었다.
[훗! 먼저 죽는 쪽이 다음 생에 만나면 밥을 사는 걸로 합시다.]
“그거 좋지.”
파앗
잠시 후 나와 망량은 현실세계에 돌아와 있었다. 내가 눈을 떠 보자 망량은 어느 새 검은 옷을 입은 채 내 곁에 서 있었고, 그가 내게 지적하듯 말했다.
[백웅. 심장에 꽂힌 바즈라를 뽑으시오. 전륜성왕의 권능으로 무마하겠소.]
“크윽.”
찌직 하는 전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는 바즈라를 뽑아내었고, 핏줄기와 함께 뽑혀진 바즈라는 즉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꿰뚫린 치명상이었지만 망량이 손가락으로 한 번 지목하자 상처는 씻은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맞은편에는 천마가 둥둥 떠 있었다.
사공린의 모습을 한 금발금안의 천마는 무표정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경계에서 자살하려고 온갖 수단을 쓰리라고 생각했는데 끝내 나와 승부하겠다는 건가. 정말로 반고소환만으로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까진 다 해볼 생각이오.]
“무모하군. 목적이 대체 뭐지? 정말 나를 이기려고?”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반문하는 천마에게 망량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적어도, 당신의 양수양족을 모두 절단해야겠소!]
“…….”
[그래야 백웅에게 최소한의 자유가 보장될 터.]
“어리석은 생각이구나.”
천마는 진정으로 하찮은 걸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게 될 일은 절대로 없겠지만, 그리 된다 하더라도 너희는 나 이상의 지옥을 보게 될 뿐이다. 그 놈은 절대 나에 못지않은 놈이다. 차라리 내게 굴복하여 종속하는 게 낫다는 걸 어찌 모르는 것이지?”
[그런 이야기는 의미 없소. 백웅은 마주치는 모든 걸 없애기로 마음먹었고 우리는 그런 우리의 왕을 따를 뿐.]
“하찮군…. 그리고 화가 나는구나.”
천마의 눈이 반개했다.
“너는 이만 돌아가도 좋다, 비슈누.”
천마의 말에 그 때까지 허공에서 제갈사와 미호를 상대로 싸우고 있던 비슈누가 반응했다.
[아니되오! 이제 곧 현실세계에 태초신 반고의 몸이 소환될 게 뻔할진대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위험….]
“닥치고 돌아가거라.”
천마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이 벌레들에게 진정한 공포를 가르쳐 줄 생각이니까.”
[…….]
파앗!
비슈누가 천마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만신전의 주인인 황제 공손헌원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제갈사가 그런 천마를 보며 이죽거렸다.
[스스로 악수를 두다니 어쩔 셈이지? 현이가 반고를 소환하는데 성공했는데 지금이라도 꽁지빠져라 도망쳐야하지 않은가?]
제갈사가 껄껄 비웃었다.
[하긴 성좌 108개의 봉인이 걸려있으니 이제 와서 천마에서 본체로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해졌겠지만!!]
“흐음. 아주 건방지구나. 제갈유룡이란 놈….”
감흥없다는 듯 짧게 중얼거린 천마가 잠시 후 손을 들었다.
“봉인따위는 거추장스러우니 빠르게 풀어버리겠다.”
[108개의 성좌를 거두는 건 아무리 네놈이라도….]
천마가 약간의 감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고 해도 내놓기는 아까운 대가구나. 너희는 이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되리라.”
퍼벙!!
그 순간 천마의 오른쪽 팔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리고 천마의 몸 전신을 은은하게 감싸고 있던 봉인이 소멸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제갈사는 물론 미호도 깜짝 놀라는 듯 했다.
[……!!]
[어떻게?!]
다만 장내에서 오직 한 명, 망량만은 천마의 위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이를 악물면서 말했다.
[이제 한 명이 소모되었군. 두 번만 더 죽이면….]
천마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쿠와아아앗
다음 순간.
천마의 왼쪽 팔에서 전욱(顓頊)의 환영이, 그리고 오른쪽 다리에서 소호(少昊)의 환영이 솟아올랐다.
아니….
환영이 아냐….
저, 저건 본체(本體)!
“……?!”
이게 뭐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저건 대체?!
“언젠가 봉선의식 때 그대에게 전욱이 말했었지, 백웅이여.”
그 모습에 아연실색한 모두가 딱딱하게 굳어있을 때 천마가 입을 열었다.
“오제가 태어나 생득적으로 군림의 권한을 깨달았던 그 때…. 그들 모두의 근원은 바로 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