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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그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갑자기 나를 붙잡고 있던 황금빛 손의 악력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느슨해졌다고 해야 할까? 물샐틈없이 꽉 잡던 기세가 절반이상 수그러들었기에 나는 몸을 뒤척거리며 조금이나마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오오오….]
황제는 다시 한 번 기이한 소리를 내며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안간힘을 다해서 몸을 비틀면서 굴렀다. 영혼인데 몸을 비튼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내 의지가 여기서 형상화되는 것 같았다. 덜컹 하면서 골반 아래까지 몸을 뺐을 때 다시 한 번 귓가에 그 목소리가 들렸다.
[꿈속에서 현실로 동위(同位)이지만 동체(同體)가 아닌 존재가 튀어나오는 모순. 이것은 또한 리(裏). 통상적인 인과로는 해석이 불가능한 현상이오.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을 인과율이 어떻게 해결하겠소?]
응?
난데없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듣자 머리가 구르지 않는다. 아니, 내가 지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에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답은…. 해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왜냐하면 꿈과 현실은 불가분(不可分)이니 그저 위치를 옮긴 것에 불과한 것. 그것이 바로 세계의 진실. 인과율이란 자연(自然)이니 우리 필멸자의 생각처럼 강제로 수정하거나 억지하여 통제할 필요조차 없는 것….]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문득 황제를 향해 말했다.
[공손헌원이여. 당신 또한 인과율의 그런 성질까지는 미처 계산에 넣지 못했던 것이겠지.]
투웅!!
강한 반탄력과 함께 황제의 황금빛 쌍수가 튕겨져서 뒤로 날아갔다. 나는 그제서야 압박에서 벗어나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졌고 조금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커헉. 헉. 허억….”
저 목소리가 날 위해서 황제를 물리쳐준 건가?
헛기침을 토해내며 간신히 호흡을 추스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거의 다 되었소. 마지막 수순(手順)은 함께 둡시다.]
“잠깐… 너는 대체…. 누구….”
[…….]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또다시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거군…. 과연 황제.]
촤좌좌좟
키이잉!!
다음 순간, 이 어둠의 공간에 사방팔방으로 뻗어나온 종횡(縱橫)의 황금빛 직선이 교차되었다. 황금빛 직선은 처음에는 면(面)으로는 펼쳐져 있다가 잠시 후 높이를 포함한 3차원의 범위에 드리워졌고, 이윽고 온 세계가 찬란한 황금빛에 휩싸인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그리고 황금빛 공간의 저편에는 거대한 황제의 상반신이 제관(帝冠)을 쓴 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평선을 가득 채우는 그 모습은 가히 공포스럽기 그지없었으며, 황제 공손헌원의 황금색 용이 새겨진 가면이 씌워진 채 나를 내려다보자 섬진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의 서늘한 시선은 잠시 나를 향하다가 내 뒤편으로 향했다.
[아둔한 자여. 내가 인과율의 그런 성질을 몰라서 너를 통제치 않은 것이 아니다. 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아득한 격차를 진정으로 모르는 것이냐? 네가 아무리 날뛰어도 결국 이번 생의 결말은 본제(本帝)의 승리로 결정났다.]
마치 내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듯한 말투.
아무래도 [목소리]를 향해 하는 말인 듯 했다.
[…….]
[죽은 제왕의 원념(怨念)으로 나를 저주해 죽이고 싶은가?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너처럼 뛰어난 자가 이렇게 아둔한 선택을 할 줄은 몰랐구나.]
그러자 내 등 뒤에서 목소리가 대꾸했다.
[‘몰랐다’. 무지(無知)라는 거군. 이로써 가장 불분명했던 가설이 확실하게 되었으니 감사드리오.]
[뭐라고….]
[처음에 이번 생이 시작되면서 흑요석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바로 그 능력이었소. 인과율을 읽는 능력….]
목소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은 실로 무의미했소. 제갈세가의 천재들이 아무리 뛰어난 지력을 갖고 있어도, 제왕의 그릇을 지닌 인재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줘도, 천상의 재능을 지닌 무투가들이 아무리 열심히 연마를 하더라도 그 능력 앞에서는 하찮기 그지없었소. 사실상 미래를 예지하는 그 능력을 이용하면 우리의 천년적공(千年積功)을 한 방에 무너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오.]
[…….]
[황제 당신의 괴력보다 더욱 두려운 게 바로 그 예지능력이었소…. 당신은 명실상부 역대최강의 적이오.]
고오오오
황금의 공간 속에서 침묵이 이어졌다. 황제가 그의 말을 끝까지 듣기로 한 듯 별다른 공격성향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잠한 공간 속에서 그 목소리가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 당신은 흉신(凶神)이나 치우(蚩尤)를 상대로 제대로 정면승부해서 쓰러뜨리지 못했을까? 나는 그런 의문이 들었소.]
[쓸데없는 의문이구나.]
[치우의 경우는 너무 압도적인 괴력을 지니고 있어서 그랬다고 가정할 수 있소. 그러나 흉신의 힘을 예측컨대 치우 정도는 아니었으리라 생각하오. 흉신이 비록 보통 삼황오제보다는 훨씬 강하다고 하더라도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잘만 활용하면 10배의 역량차이도 메꿀 수 있을 터인데 당신은 흉신과 전면전을 하기는커녕 신경 거스르기도 힘들어 했었던 것이오. 이는 분명 이상한 일.]
[…….]
[게다가 당신이 직접 판에 끼어들었다면 지금 이상으로 유리하게끔 판을 짤 기회도 넘치도록 많았소. 백웅의 28번째 생에 이르기까지 기회가 아닌 적이 없었소. 그런데도 당신은 끼어들지 않았던 것이오. 이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의 가정뿐이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은 끼어들지 않았던 게 아니라 끼어들지 못했던 것이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가 판에 끼어드는 순간 [인과율을 읽는 능력]은 스스로 제약되어 버리니까!]
뭐?!
듣고 있던 내가 깜짝 놀랐다.
저게 무슨 소리지?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황제가 차분히 대꾸했다.
[재미있군. 그게 만일 아니면 어떻게 하려는 건가?]
[아닐 수는 없소. 왜냐하면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사실상 미래를 예측하고 있는 셈이니 단 하나의 실수나 예측불허의 사태조차 없어야 하오. 그러나 당신은 천마의 몸에 강신한 순간부터 이쪽의 수(手)를 못 읽는 경우도 몇 번 있었지. 바로 지금조차도 당신은 내가 끼어들어 백웅을 구해낼 거라는 예측을 하지 못했소.]
[흐음.]
[그것이 바로 [인과율을 읽는 능력]의 제약일 것이라 생각하오. 바로 관찰자일 때에만 의미가 있다는 제약!]
목소리가 단정 짓듯이 말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측하는 한 완전하게 미래를 읽어낼 수 있으나, 본인이 인과율에 참가하는 순간 그 능력은 무의미해지는 것이오! 즉, 당신으로써도 판에 끼어들어서 최대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이라는 말이지!]
[…….]
[사실 마지막까지 아리송했지만 제갈사의 한 수가 통하는 걸 보자 확신했소. 외신의 주문이란 건 알고 있다면 일부러 당해주지 못하는 강력한 역습. 그걸 예측하지 못하고 맞아버린 이상 내 가설은 옳다고밖에 할 수 없지.]
나는 목소리의 말을 곁에서 들으면서 아연실색했다.
‘그, 그런 거였나.’
인과율을 읽는 능력.
달리 말하자면 미래예지능력.
너무나 완전무결한 그 능력에도 단 하나의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인과율을 읽는 본인이 참여할 경우 그 미래를 읽을 수 없다]는 것!
관측자일 때만 의미가 있는 능력이었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내가 놀라고 있자 황제가 말했다.
[제갈세가의 인간들에게는 늘 놀라게 되는군. 인간 중에 가장 뛰어난 지혜를 지닌 자들이여. 허나 그렇다 해도 그 지혜 때문에 필멸자의 한계를 더욱 실감하게 될 뿐.]
스윽
지평선을 가득 채운 황제의 상반신이 마치 우리를 지근거리에서 내려다보듯 앞으로 쑥 내밀어졌다. 황금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제왕의 싸늘한 눈이 우리를 내려다보자 오금이 저릴 것만 같았다.
[알면 어찌할 건가? 감히 나와 수를 겨루고 있다고 착각이라도 했던가? 절대적인 힘의 격차를 무마할 방법은 그대들에게 존재치 않아.]
[…….]
[그래…. 전생자의 무한한 가능성을 이용했다면, 어쩌면 존재했을 수도 있지. 그러나 그 모든 방법은 내가 천마를 움직인 순간부터 모두 봉쇄했다. 혹시 모를 삼황에게의 구원요청도 모두 감시했으며 외계와의 계약 또한 모두 차단했다. 천마에 강신하는 이 시점까지 내게는 완벽한 승산만이 존재했다.]
스으으….
황제의 황금빛 손가락이 내 옆의 허공을 가리켰다.
[마지막 희망인 백웅의 사대신기도 통하지 않아 이 꼴이 되었거늘 이제 와서 무엇을 할 셈이더냐? 고작해야 내 능력의 약점을 하나 알아내고는 이겼다고 자기위안이라도 하고 싶었느냐…?]
나는 황제의 말을 듣자 다시 한 번 소름끼치는 절망을 느꼈다.
‘그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황제의 능력에 있던 뜻밖의 약점을 알아낸 건 다행이지만 그렇다 해도 현 시점에서 승리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정상적인 공간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영체가 달랑거리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에게 엄포를 놓아봤자 가소롭게 여겨질 뿐이다.
잠시동안 침묵하던 목소리가 말했다.
[스승님은 처음부터 알고 있으셨소. 당신이 지켜보고 있는 한 우리가 제대로 된 결말에 도달할 일은 없다는 사실을.]
[망량선사….]
[인간을 구하고 싶다면 황제 공손헌원 당신을 판으로 끌어내라고 말씀하셨소. 비록 이번 생의 일은 아니고 먼 과거의 일이었으나, 그 말이야말로 진정한 해답을 함축하고 있었소.]
투웅!!
[……!!]
갑자기 황제의 손가락이 튕겨져 나갔다. 황제가 흠칫하고 놀라자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기운은 마치 내 몸에 있던 신력과 동조해서 점차 강해지는 것 같았고 나는 점차 내 몸에 활력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나는 백웅이 실종되는 순간부터 직감했소. 이번 생에 어떻게든 당신의 마수(魔手)에서 탈출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고.]
[호오….]
목소리가 발악하듯 외쳤다.
[왜냐하면 당신은 생이 지날수록 우리에 대해서 점차 많이 알아내는 반면 우리는 차원 저편의 만신전에 앉아있는 당신을 건드릴 방법조차 없었으니까! 갈수록 [인과율을 읽는 능력]에 의해 올가미는 죄어올 것이고 백웅은 길어도 10여 생 이내에 외통수를 맞아서 지금보다 더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을 것이오.]
황제는 그 말에 피식 웃는 듯 했다.
[잘 알고 있군. 후후….]
절대자의 여유.
가증스럽지만, 그렇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그리고 그에 대답하는 자의 정체는 바로….
“…….”
나는 그들의 문답을 들으면서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랬나.
그래서였던가….
마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눈앞에서 풀리는 듯한 느낌에 나는 눈앞의 문답을 주시했다. 이번 생 내내 꼬리를 이어왔던 수수께끼의 해답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황제여. 이것이 최초이자 마지막 승부가 될 것이오.]
스르르륵
내 옆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자는 흑색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선복(仙服)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복장이었다. 또한 내가 마지막에 보았던 그의 모습조차 아니었다. 많이 초췌해져서 앙상마른 듯한 얼굴이 되었으나, 도리어 그의 눈에는 정기(精氣)가 가득하여 절대적인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었다.
[나 망량(魍魎) 제갈현(諸葛賢). 백웅과 함께 당신의 기휘(忌諱)를 무너뜨리는 천 년의 한 수를 놓겠소!]
파앗
[아니?]
망량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 이 공간에 갑작스럽게 구천현녀(九天玄女)의 모습이 소환되었다. 심지어 구천현녀 본인도 어찌된 일인지 몰라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순간 망량의 입에서 주문이 터져나왔다.
[진정한 전륜성왕의 이름으로 명한다! 지구의 정령신 구천현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라!!]
퍼버벅
[아아아아!!]
다음 순간.
구천현녀의 단말마와 함께 신적 존재의 혼백(魂魄)이 분리되며 손쓸 틈도 없이 형태가 부숴져 버렸다. 저게 구천현녀의 진정한 죽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륜성왕의 권능이 구천현녀를 일격에 분쇄할 정도로 강하다니!!
망량이 애증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황제에게 모든 인간의 넋을 팔아넘긴 존재여. 가련한 생명체들을 구하고자 우주를 죽이려 했던 나의 스승이여. 그대를 죽이기 위해 평소부터 전륜성왕의 인(印)을 새겼으니, 그대의 최후는 이와 같으리라!!]
마치 이글거리는 듯한 태양의 혼과 백과 같은 게 허공에 둥둥 떠 있자 망량의 몸이 허공이 떠올랐다.
[제물은 준비되었소. 백웅.]
그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말했다.
[반고소환(盤古召還)을 시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