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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201화 (1,198/1,615)

1201====================

사신지혼(四神之魂)

화신지혼…!!

500년 후의 세상에 도착해서 백련교주가 된 그녀를 찾아갔을 때 한백령은 자신의 절대지경이 화신지혼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다만 그 정확한 효과는 알지 못했으나 나는 한백령이 그때 했던 설명을 빠르게 기억해냈다.

물아(物我)를 뛰어넘은 인식(認識)의 세계에 도달한 화염!

그 당시 한백령의 범상치 않은 자신감을 느꼈기에 화신지혼의 위력이 500년 전과는 차원이 다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회의적인 감정이 몸을 감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과연 일취월장한 화신지혼의 위력이 지금 이 판국에 먹힐 것인가?

지금은 삼황오제의 수장, 황제 공손헌원이 최강의 화신(化神)인 천마(天魔)에 강림해 있는 상황! 오제보다 더 강력해보이는 천마를 상대로 화신지혼의 힘이 통할 것인가!

내 얼굴이 어두워지자 한백령이 재차 무표정하게 말했다.

“준비해라! 시간이 없다.”

“뭘 준비해야 한다는 거냐. 이제 와서 무엇을….”

내가 처진 목소리로 힘겹게 대꾸하자 한백령이 말했다.

“구궁파천뢰(九宮破天雷)의 힘을 천령개(天靈蓋)에 일심관천의 태세로 모아라!”

“…구궁파천뢰?! 어째서.”

“단 한 순간에 모든 게 결판날 것이다. 네가 도와줘야 한다.”

스윽

한백령의 눈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잘 들어라. 구궁파천뢰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제갈사의 주도 아래 다함께 마련한 대책이다. 나와, 제갈사와, 뇌신류의 힘을 믿어라!”

“……!!”

“잡념을 없애! 더 이상 흔들린다면 넌 뇌신류의 종사(宗師)라 칭할 자격이 없다!”

종사!

나는 그 호령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 천마에게 몇 번이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며 고통에 절어 있던 마음이 팔딱거리며 뛰는 것 같았다.

그래.

이번 생에 나는 이광 앞에서 뇌신류의 종사로 자처하지 않았던가?

그런 주제에 최후의 최후에 화신류 종사에게 이런 말을 들을 순 없다.

뇌신류의 종사답게 정신차리자!!

“알았다!”

쿠오오오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전신의 모든 공력을 모아서 구궁파천뢰의 요결에 따라 움직이며 천령개로 힘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전신의 기경팔맥을 휘돌던 거대한 뇌구(雷球)들이 용솟음치며 점차 빠르게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윙윙윙

구궁파천뢰의 기운이 정점에 달해가자 내 천령개에서 모인 뇌전의 기운이 빛을 발했다. 마치 전신에서 번개가 튀기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러나 한백령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역시 구궁파천뢰의 수련기간이 너무 짧아서 뇌성(雷性)이 부족하군. 어쩔 수 없지.”

한백령이 옆에 있던 누군가를 향해서 외쳤다.

“네 차례다!”

파앗

그 순간 뒤편에 있던 자들 중 한 명이 앞으로 튀어나왔고, 나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크게 놀랐다.

“…이설표!!”

투웅!

뇌신류의 최후 계승자, 방룡(龐龍) 이설표는 내 명치를 향해 빠르게 자신의 좌장(左掌)을 날렸고, 둔중한 충격과 동시에 물결같은 거대한 공명이 허공에 일어났다. 다만 신기하게도 날리려는 목적이 아니었는지 반(反)과 흡(吸)의 내공요결이 동시에 적용되어 그의 좌장이 명치에 딱 붙는 듯한 형태가 되었고, 이윽고 이설표는 곧장 우장을 좌장 손등 위에 겹치는 동작을 취했다.

“종사여! 내 모든 것을 걸겠소!”

이설표가 전신에서 내 것에 못지않은 뇌광의 기류를 끌어올리며 외쳤다.

“뇌신류의 자존심을 보여주시오!!”

치지지지징!!

치징!!

다음 순간 벌어진 일은 내 눈을 의심스럽게 했다. 차마 형용할 수 없는 - 눈을 고스란히 멀어버리게 할 정도로 충천한 뇌광이 떨쳐지면서 이설표의 전신이 뇌화(雷化)했다! 나는 그 형태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기에 머릿속에서 하나의 글자가 떠올랐다.

뇌신지혼(雷神之魂)?

…아냐! 저건 뇌신지혼처럼 보이지만 뇌신지혼은 아니다. 뇌신지혼에 존재하던 수많은 요결의 흔적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순수한 원(圓)만이 내부에 응결되어 있다!

[오오오오오!!]

파칭!!

이설표의 외마디 기합과 함께 뇌신지혼의 섬영(閃影)이 번쩍하고 빛난 후 사라졌다. 급작스러운 소멸에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나는 천령개에서 마치 산 채로 불이 붙는 듯한 따끔한 느낌에 놀랐다.

후와아악

“크… 크윽!!”

천령개에서부터 뇌가 몽땅 불타는 것 같다! 아까 천마에게 살해당할때만큼 거대한 격통이 정수리에서 찌르듯이 퍼져나오자 나는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아서 혼미한 눈으로 주춤거리고 있자 한백령의 외침이 들려왔다.

“뇌신(雷神)의 [그릇]이 넓혀지는 중인 것이다!! 정신력으로만 버티려하지 말고 뇌구를 전륜(轉輪)시키는 데 힘을 분산시켜!!”

뇌구를 전륜시키라고?

그렇군!

평소라면 저게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이상하게 오성(悟性)이 크게 트여있어서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머리보다는 느낌에 따라서 천령개에서 폭주하는 뇌력을 분산시켜서 기경팔맥에서 회전하고 있는 뇌구에게로 내려보내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부웅

치리리리링 -

전륜하는 뇌구의 회전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기에 내 전신의 살과 혈맥이 통째로 뜯겨나가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도저히 내 공력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힘이 윤전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만 비명을 토해내고 말았다.

“끄윽… 끄아아악…!!”

일격으로 지진을 낼 수 있는 나의 내공으로도 이 힘의 일할조차 감당키 힘들다고…?! 어떻게 이런 힘이…!!

“참아라!!”

한백령이 서릿발같은 기세로 외쳤다.

“사신지혼(四神之魂)이 곧 부활할테니!”

화신지혼(火神之魂)

수룡융합(水龍融合)

한백령의 몸 전체에 우주(宇宙)가 끌려들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쌍검을 날개처럼 펼친 한백령의 전신에 거대한 황혼의 기운이 맺혀서 빛나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한백령의 왼쪽 팔에서 솟구쳐오른 거대한 수룡(水龍)이 무한한 어둠과 합일하여 하나가 되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진(眞) 천령단(天靈丹)

굉력일발(宏力一發)!

그리고 동시에 한백령의 흑인(黑刃)이 내 천령개를 그대로 직도황룡의 초식처럼 내려베었다.

꽈과과광!!

거대한 폭음! 그 폭광의 기운이 천령개를 내려 베는 순간 인간의 수준에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미증유의 거대한 기운 두 개가 서로 충돌했다! 그리고 한백령이 흑인을 날려서 뻗은 기운은 내 천령개에서 폭주하던 뇌신의 기운을 억눌렀는지 점차 몸이 가벼워지고 통증이 씻은듯이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파지지직….

뇌광의 잔류가 내 몸 주위에 흘렀다. 동시에 나는 나도 모르게 번개의 힘을 내가 쓸 수 있음을 알 수 있었고, 그건 머리로 이해한 게 아니라 본능적인 감각으로 체득된 기분이었다.

한백령이 나직이 말했다.

“두 명인(名人)의 목숨값이 네게 깃들었다.”

“…….”

“백웅. 지금 네 사대신기 중 하나가 부활했으리라.”

뭐라고?

나는 그 말에 급히 눈을 감고는 정신을 집중해서 사대신기를 볼 수 있는 뇌리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윽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

물의 사대신기 바루나만 남아있고 나머지 신기는 모두 폐절(廢絶)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 엄청난 활력과 함께 사대신기 번개의 바즈라가 부활한 것이다!

그것도 통상적인 상태와 달리 정신공간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게 느껴진다! 저건 틀림없이 평소와는 다르다!

내가 놀라고 있자 한백령의 말이 이어졌다.

“이젠 내 차례군. 독고준의 수룡과 달리 내 화룡(火龍)을 맨몸으로 받으면 무조건 터져버릴 테니 물의 신기 바루나를 소환해서 내 공격을 막아라.”

“자, 잠깐.”

“수룡 덕분에 바루나의 힘도 어느정도 채워져 있을 것이다.”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이설표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뇌신의 그릇이 되었다. 구궁파천뢰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만든 거였으니까.”

“뭐라고.”

내가 흠칫 놀라자 한백령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천공을 한 번 쳐다보았다.

쿠구구구구

아직도 천공은 무시무시한 폭열로 뒤덮여 있었다. 미호와 제갈사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쉴 새 없이 천마를 몰아치는 중이었고 반격따윈 없어 보였다. 그 광경에서 시간이 없다고 느낀 듯 한백령이 말했다.

“간다.”

다음 순간, 한백령은 내게 쇄도하며 쌍검을 교차했다. 쌍검의 흑인과 백인이 교묘하게 비틀어지면서 검로(劍路)가 파생되었고, 그 검로는 정확하게 내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한백령이 방금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나서 곧장 의식세계에서 물의 바루나를 꺼내었다.

우웅

깃발 모양의 바루나를 휘둘러서 백인(白刃)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거대한 물의 기운과 불의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하기 시작했고, 나는 밀려들어오는 불의 기운이 너무 막대해서 바루나가 크게 밀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글부글

커억…. 팔의 뼈와 가죽이 동시에 기름물을 부은 것처럼 끓어오르는 것 같다! 내가 격심한 불의 기운 때문에 주춤거리자 한백령은 그대로 백인 위에 흑인을 얹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마치 방금 전 이설표가 했던 것과 똑같았다.

쿠와아앗

한백령의 전신에서 번쩍 하고 거대한 화염의 섬광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섬광은 바로 내 눈앞까지 날아들더니 이윽고 눈동자를 꿰뚫고 내 심층의식까지 파고드는 듯한 압도적인 열광(熱光)을 비쳤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거대한 홍염의 기운이 전신을 한올한올 태우는 듯한 기분과 함께 정신이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거대한 용암이 내 심장 속에 부어진 듯한 맹렬한 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후우우우….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의식 속에서 보아오던 사대신기 앞에 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어느 새 불의 아그니가 새겨져 있던 사대신기의 공란이 다시 뚫리면서 재활성화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세 개의 사대신기가 부활한 건가….’

내가 정신세계 속에서 멍하니 서 있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끝이 아니다.”

“헉! 한백령!”

등 뒤를 돌아보니 한백령이 거기에 서 있었다. 한백령은 내게 시선도 안 주고 사대신기를 쳐다보며 말했다.

“세 개의 사대신기를 보면 알겠지만 지금 뇌신기 바즈라와 화신기 아그니는 전에 없이 강화되어 있다. 그건 [그릇]에서 힘을 넘겨받은 덕택이지.”

그 말대로였다. 방금 전까지 바즈라가 강화된 걸 눈으로 보았었고 이제 보니 아그니 또한 완전히 활성화되어서 뿔피리에서 맹렬한 옥염이 치솟아오르는 중이었다. 나는 한백령에게 말했다.

“한백령. 사대신기를 부활해서 이제 뭘 어떻게 하는 거지?”

한백령은 그 말에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예전 얘기를 하지. 네가 미래에 도착한 후 감숙성의 백련교 총단에 왔을 때, 네게 말하지 않았던 게 있었다. 그건 망량이 날 찾아왔었던 일에 대한 거였지.”

“…….”

이게 한백령이 하고싶었던 말인 건가.

정신세계는 비교적 시간이 늦게 흐르니 여기서 말을 해 주는 듯 했다.

한백령이 말을 이었다.

“망량은 마지막에 사대신기가 가장 중대한 역할을 할 거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대신기에 모든 걸 걸고 있다고 했었지. 나는 원영신을 수련할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대성하고 난 후에야 그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때부터 이 순간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한백령의 깊은 눈이 나를 향했다. 그녀는 무언가 초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웅. 나는 교주의 뜻에 따라 지난 500년간 수행해 왔다. 하지만 거기에는 우리 최후의 호법사자로서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던 우리만의 긍지가 있어. 독고준의 수룡은 바로 그 증거다.”

“한백령.”

“이대로 저 황제라는 괴물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농락당하고 싶지 않다. 지금 네가 바로 사대무류(四大武流)를 짊어지고 있다.”

한백령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기왕 짊어질 거라면 다 가지고 나가란 말이다.”

“뭐?”

“저 신기들을 잘 살펴봐라. 셋 중에 가장 강맹한 기운을 지닌 게 무엇이냐?”

한백령이 말하는 대로 나는 사대신기가 있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운의 강함을 느낀 후 말했다.

“…바즈라로군.”

한백령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사대신기가 봉인되어 있는 저 판은 사실 회전시킬 수 있다.”

“……?!”

“강력한 신기의 추진력을 이용해서 판을 밀게 되면 약한 신기가 있는 칸을 밀어내고 회복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본디 풍신지혼이 있어야 바유를 회복시킬 수 있겠지만 편법도 가능하단 거다.”

“진짜?!”

“그래. 현 백련교주로써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다.”

내 반문에 한백령이 손가락으로 바즈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뇌신기 바즈라가 가장 강력하다고 해서 바즈라를 잡고 판을 회전시키면 안 된다. 저건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 다른 사대신기가 다 해금되더라도 폭주해버릴 수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원영신과 화신지혼의 힘으로 네 정신세계까지 따라온 것이다.”

한백령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일시적으로 화염의 아그니를 최강으로 만들어서 아그니를 축으로 바즈라까지 밀어내면서 풍신기(風神器)를 회복시키는 것! 그렇게 하면 사대신기는 모두 회복될 것이다.”

“……!!”

“네가 사대신기의 힘을 동시에 발동시킬 수 있다면 이 판을 크게 뒤엎을 수 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이런 정밀한 계획이 있었다니!

나는 들으면서도 얼떨떨해서 한백령에게 말했다.

“다… 다 좋아. 그런데 사대신기를 부활시키는 이유가 뭐지? 지금 중요한 건 내가 다음 번 전생으로 넘어가는 거였잖아.”

“백웅. 황제는 처음부터 모든 인과율을 계산하여 이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가 어줍잖은 재주를 부려도 더 이상 [죽음으로 탈출한다]는 먹히지 않아. 물러날 곳이 없는, 독안에 든 쥐라는 말이다.”

“…….”

“그러면 이젠 생각을 달리 해라. 독 안에 든 쥐는….”

그렇군.

그런 마음으로 다들 나를 위해서….

나는 새삼 모든 이들의 의지가 내 어깨에 걸려있음을 깨닫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고양이를 물어야 살 수 있는 거군!”

“그래. 황제를 물 준비는 되었나?”

“물어죽이겠어!”

할 수만 있다면 잘근잘근 씹어주마!

내 대답에 한백령은 훗하고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신검합일의 기세로 쌍검을 교차시키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다면 너의 승리다!”

원영신(元靈身)

태허합리(太虛合理)

진(眞) 화신지혼(火神之魂)!

한백령의 몸에서 황혼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진홍의 빛이 아그니에게로 날아갔다.

쿠구궁

아그니는 진홍의 빛에 휩싸이자 지금까지보다 더욱 맹렬한 빛을 토해내기 시작했고, 이윽고 붉은 빛이 터져나갈 듯 부풀어오르다가 무언가가 소환되는 게 보였다.

파아앗

[오… 오오…!!]

저것은 불의 정령 아그니?!

신음성을 내며 등장한 거대한 정령의 신은 내가 외우주에서 사대정령을 봉인할 때 보았던 바로 그 아그니였다! 신기 아그니에서 출현한 본체는 잠시 동안 기성을 내지르는 듯 하다가 거대한 고함을 내질렀다.

[나 아그니, 신녀(神女)와의 계약에 따라 신기의 굴레를 굴려주겠노라!!]

쿠쿠쿠쿵!

아그니의 두꺼운 양쪽 팔이 잠시 후 사대신기의 원판을 한쪽으로 크게 밀기 시작했다. 아주 무거운 듯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던 원판은 절반쯤 움직였을 때 갑자기 멈추었고, 아그니가 눈앞에 무언가가 있다는 듯 노려보며 말했다.

[이런 양아치같은 놈!! 백련교와의 정당한 계약의 행사마저 방해할 생각이냐!!]

그 외침에 허공에서 무언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아직 저 놈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간따위가 내게 명령을 내린다는 걸 용납 못해!! 다 죽여버릴 테다!]

[…….]

[신기로 존재하는 것도 열받아 죽겠으니 당장 꺼져라…!!]

[웃기지 말아라. 뇌신(雷神).]

아그니가 진심으로 분노한 듯 거성을 내질렀다.

[본체라면 몰라도 [그릇]을 얻은 내가 지금은 더 강하다…!!]

푸콰콱!

[끄윽.]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는 듯 했고 아그니가 속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비키랬잖나. 끼여갖고는.]

쿠르릉!

마지막 절반만큼의 원판을 모두 밀자, 맨 밑에 있던 풍신의 원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힘을 잃어서 잠들어 있던 풍신기 바유가 점차 현실감을 갖고 구현화되기 시작했고, 이윽고 바유의 정령이 정신세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오…. 백웅. 설마 사대신기를 전륜(轉輪)시키다니. 그대의 역량이 너무 티끌 같아서 기대도 안 했건만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신의 힘을 갖고 있어도 힘든 일일 터인데!]

부활한 바유는 정말로 기대도 안했던 모양인 듯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사대정령이 보기에는 내 힘이 벌레같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딱히 반박하지 않고 바유에게 말했다.

“바유여. 아그니여. 이제 저는 사대신기를 현실에서 모두 쓸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저 황제 공손헌원에게 한 방 먹이는 걸 도와주십시오.”

[…….]

잠시 정령들이 서로를 쳐다보는 듯 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재밌겠군. 한 번 해보세.]

한백령. 이설표.

그들이 나를 위해서 소멸되었지만 그들이 한결 같이 바라는 건 하나였다.

더 이상은 엉덩이를 뺄 수 없다. 황제 공손헌원이라는 이름에 기죽어서 다음 생으로 도망치는 건 할 수 없다.

싸운다.

싸워서 놈에게 한 방 먹여주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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