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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침묵했다. 입을 열기에는 천마가 지금 던져준 한 마디가 너무 의미심장하기 때문이었고, 또한 내가 스스로 생각해볼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
내가 가만히 있자,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아닌 듯 천마가 머나먼 대지에서 퍼져나오는 어둠의 기운을 쳐다보며 말했다.
“대결계가 절반쯤 깨어졌다.”
그 말의 진위는 판별할 수 없지만 그가 괜히 꺼낸 말은 아닐 것이리라. 황제가 저런 말 한마디로 나를 압박해서 얻을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대결계가 깨어지면서 진정한 종말이 찾아오고 있는 중인 게 분명하다.
나는 천마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사공린은 어떻게 된 거지?”
“여기에 있다.”
천마의 손이 자신의 심장 언저리로 향했다. 천마의 금안(金眼)을 뚫어져라 보았지만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기에 소름이 돋아서 움찔하자, 천마가 나직이 말을 이었다.
“훌륭한 공적을 세웠지.”
나는 그 말에 왠지 발끈하는 기분이 들어서 이를 악물며 강한 어조로 외쳤다.
“사공린의 인격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그 말에 천마가 대꾸했다.
“처음부터 천마(天魔)였거늘 무엇을 구분코자 하느냐.”
“…….”
뭐… 라고…?
나는 그 말에 잠시동안 사고가 정지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지금 천마가 한 말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저 말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나는 눈꼬리를 떨면서 말했다.
“웃기지… 마…. 사공린은 사공린이야!”
“그렇군…. 전생자여. 좀 더 이야기를 진전시키려면 네게 천마의 정체를 알려주는 게 맞겠구나.”
우오오오
천마의 몸에서 갑작스럽게 황금의 광채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전신이 황금빛에 물든 사공린의 형상은 잠시 후 기이한 환수같은 형태로 변신했고, 눈부신 황금의 광채가 그 짐승을 감싸고 있었다.
파아앗
광채의 너머에서도 아직까지 천마의 광대한 존재감이 여실히 느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저 짐승을 본 적이 있다.
남극에서 사공린이 처음으로 천마로 각성했을 때 나타났던 바로 그 형태!
[전생자. 그대의 말대로 최초의 사공린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내가 인간계에 남긴 공손씨의 혈맥이 인과율에 따라 나와 만난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이윽고 천마가 영언으로 입을 열었다.
[이는 혈맥의 계승으로 완성되는 내 영혼의 조각…. 가면이 본질을 극복한 형태….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신(化神)이 바로 천마(天魔)이다.]
“……!!”
[남극에서 사공린이 나와 거래를 했던 바로 그 때…. 사공린은 내 영혼의 조각과 합일(合一)하여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사공린은 황제 공손헌원의 일부가 되었다.]
“뭐… 라고….”
화르륵
금빛의 광채가 사그라들자 어느 새 황금의 짐승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천마는 사공린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인간으로 되돌아 온 천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 사공린은 나의 가면이 되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
나는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가면이라니.
천마의 힘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사공린은 인간이 아닌 황제의 가면으로 변해버렸다는 뜻인가?!
천마의 계약이란 게 그런 의미였단 말인가?!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기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공린!! 넌 아직 죽지 않았어!!”
천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또 한 번 외쳤다.
“신투지존을 보아서 알고 있어!! [가면]이라고 할지라도 자유의지는 존재해!! 황제의 지배에서 풀려나라!!”
잠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침묵이 끝나자 천마가 웃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뭐가 웃겨!!”
“확실히 신투지존이란 예시가 있지. 그대의 말대로 [가면]에도 자유의지가 있는 건 사실이다.”
천마의 눈이 가늘어진다.
“허나 그건 본체가 봉인된 상태에서 가면을 완전히 잃어버려 통제할 수 없게 된 경우. 주체인 나 공손헌원이 확실한 계약을 지니고 그녀의 영혼을 가면으로 만들었는데도 되돌아올 수 있다 생각하는가?”
“…….”
“그 동안 대웅제국을 위해 내 힘을 편리하게 쓴 대가라고 생각하거라.”
“제, 젠장…!! 이 악마같은 새끼!!”
절망이라는 두 글자가 또 다시 뇌리에 새겨진다.
단 한 점도 내게 희망이란 걸 남겨주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뭐, 좋다…. 그런 게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니까.”
내 외침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 천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전생자여. 다시 말하지. 나와 함께 승천(昇天)하자. 나라면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리고 영겁의 굴레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웃기지 마.”
“뭐가 웃긴다는 거지?”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천마를 노려보았다.
“내 동료들을 죄다 쳐죽이고 날 이런 꼴로 만든 놈을 위해서 싸울 것 같으냐!! 영겁토록 고문하든 봉인하든 멋대로 해라. 난 절대 네놈한테 협력하지 않아!!”
“호오…. 당연한 반응이로군. 보통 인간이라면 그런 반응일 거야.”
여유롭게 대꾸한 천마가 잠시 뒷짐을 지고 걷는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대는 보통 인간이 아닌 [전생자]. 전생자의 이해(利害)는 나와 맞아 떨어질 거라 계산했다.”
“뭐?”
“그대가 만에 하나 이 자리에서 역전을 일궈내어 나를 쓰러뜨리고 승리를 얻었다고 가정해 보지. 그리고 그대는 다음 전생을 시작할 터…. 허나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릴 복안 따윈 어디에도 없지.”
“…….”
“몇 번이나 전생(轉生)할 생각이지? 백 번? 천 번? 아니면…. 백만 번? 그런 무의미한 싸움을 반복하는 게 의미가 있는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한 가지, 그대를 내 손에 넣기 위해 중대한 정보를 한 가지 알려주지.”
천마가 담담하게 웃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꿀릴 게 하나도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승천이란 바로 [아버지]를 알현하여 [굴레]를 초월할 권한을 손에 넣는 것이다. 통상적인 [옛 지배자]라면 외신(外神)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라고 할 수 있지.”
“……!!”
“이 정도는 그대와 그대의 동료들 또한 대충 유추했으리라 생각한다. 진짜 말해주고 싶은 건 바로 승천이 전생자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것….”
“…….”
“…….”
응?
“…….”
“…….”
갑자기 침묵이 감돌았다.
천마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너무나 어색한 침묵이었기에 나는 그만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개새끼야!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냐!”
천마가 담담한 미소를 유지했다.
“더 듣고 싶은가보군. 내게 사무친 원한을 잠시 접어둘 정도로.”
“크윽….”
제기랄… 완전히 약 올리고 있어!!
하지만 내게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듣지 않을 수도 없다!
완전히 내 심리를 읽고 휘두르는 황제의 언변은 분하지만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내심 화를 삭히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승천을 하게 되면 전생자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생긴다.”
“뭐?”
“그 선택지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하나는 외신에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 가는 천상(天上)의 권위(權位)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길이라고 들은 바가 있다.”
“……!!”
나는 움찔하고 놀랐다.
저게 사실이란 말인가?
‘믿을 수 없어!!’
나는 도저히 상대의 말의 진위를 판단할 수가 없었기에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황제 공손헌원!! 난 당신을 믿을 수 없어! 나와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싶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는 것에 네놈의 진짜 이름을 걸어라!! 그렇지 않으면 나 또한 모든 것을 걸고 네놈의 말에는 절대 응하지 않겠다!”
천마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진짜 이름]의 약속이 갖는 권위는 어쩔 수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약간 통쾌함을 느꼈다.
‘흥. 잘난 척 해봤자 네놈도 거짓말쟁이….’
하지만 그런 내 생각도 잠시.
이윽고 천마의 입이 열리자 나는 동공이 마치 지진난 것처럼 흔들리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걸겠다. 지금 승천에 관해서 내가 했던 말은 모두 황제 공손헌원의 이름을 걸고 진실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우웅
그 순간 내 몸 안에 있던 신력이 강렬하게 감응하며 공명하는 게 느껴졌다. 황제 공손헌원의 이름을 건 진실의 맹세가 너무 강력하여 내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바로 그 공명이야말로 황제의 말에 엄청난 진실성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
지, 진짜란 말인가?
승천이란 게 그런 의미가 있었다고!!
내가 멍하니 있자 천마가 마치 속삭이듯이 말했다.
“날 얕보지 마라, 전생자. 이 순간을 위하여 억겁의 세월을 준비해 온 것이 바로 나이니….”
“…….”
“자아, 조금은 생각이 달라졌느냐?”
“뭐가 달라졌냐는 거냐….”
천마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승천을 하게 되면 그대는 천상에서 외신만큼 거대한 힘을 손에 넣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해서 나와 함께 [기어오는 혼돈]을 함께 척결하면 모든 우환이 해결되지. 실로 당연스러운 수순이 아닌가?”
“뭐, 뭐라고.”
“그대들의 동료들을 해치운 것은 미안하게 생각하지. 하지만 앞서 그대에게 내가 물었지. 앞으로 몇 번을 전생할 거냐고.”
천마가 아무런 감정도 없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대가 전생하는 횟수마다 그대의 동료들은 죽고 고통 받지. 그것도 앞으로 일만 번, 아니 일백만 번을 넘을지도 모르는 무한의 굴레 속에서. 그 무수한 굴레의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서 내가 불가피한 희생을 일으킨 것에 불과해. 원한다면 몇 번이든 사죄해 주지.”
“…….”
“정녕 그대가 이번 회차에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리고 진정한 해방과 평화를 만들어낸다면…. 다음 회차부터 그대들의 동료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도 않겠지. 그 자체로 속죄가 되지 않겠나?”
그럴듯하다.
정말로…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리고 만신의 소멸을 이뤄낼 수 있다면 앞으로 더 이상 동료들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저 짜증나는 놈이 하는 말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유혹.
하지만 나는 저 말을 아직도 의심하면서 천마에게 말했다.
“나는 산하사직도에서 당신이 최후의 한 수로 [기어오는 혼돈]을 소환하여 삼황오제를 없애는 걸 직접 보았다. 소환을 할 수 있다는 건 당연히 그 존재와 [계약]을 했다는 뜻이겠지. 당신이 [기어오는 혼돈]의 수하인 게 명백한데 어떻게 그런 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지?”
“뭐가 거짓말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천마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과거에 그 존재를 소환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지. 허나 그것은 내 근원 때문에 생겨났던 능력일 뿐, 나는 [기어오는 혼돈]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뭐? 근원?”
“…….”
천마가 왜인지 말을 꺼리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더 자세한 것은 네가 내 뜻에 동참한다고 [약속]해 준다면 모든 진실을 이야기해 주지. 내 근원에 대한 것은 섣불리 네게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흥. 잘도 신뢰할 수 있겠군.”
“자, 보아라.”
우우우우
천마가 양 손을 들어올려서 한손에는 무형의 구(球), 반대편에는 칠흑의 구체를 소환해 냈다.
“기(氣)을 응축하여 한계까지 몰아붙인 의념의 힘. 그리고 이건 보다시피 혼돈의 힘이다.”
“어쩌라는 거야.”
“본디 융화되지 않을 두 개의 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지….”
츠즈즈즈
파앙!!
잠시 후 두 개의 구체가 서로 합쳐지더니 완연한 백광(白光)을 뿜어내는 강렬한 구체가 나타났다. 나는 그 모습을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기에 기억을 더듬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아! 저건!’
망량선사한테 계퇴(鷄腿)를 먹여줬을 때 놈이 보여줬던 것 같은데?!
융합의 경지다!
내가 놀라고 있자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우주멸망에 출현하는 진정한 섭리를 응용한 힘…. 두 개의 힘이 쌍소멸(雙消滅)했을 때 제 3의 성질이 출현한다. 그것이 바로 혼연(混然)이며, 나는 [옛 지배자] 중에서 유일하게 그 힘을 다룰 수 있다.”
“……!!”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 천마신공도 혼연에서 파생된 일부일 뿐.”
천마가 갑자기 눈에서 황금의 광채를 뿜어내며 말했다.
[소멸되는 혼돈의 양이 커질수록 그에 비례해서 태허로 변화하며 생겨나는 혼연의 힘은 더더욱 커지지. 백련교주 따위의 힘으로도 그만한 위력을 보였거늘, 혼돈의 정점에 도달한 나의 힘을 모두 태허로 변화시킨다면….]
그의 말이 신언(神言)으로 변했다.
[[기어오는 혼돈]이라 해도 죽일 수 있지 않겠는가?]
엄청난 압력!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수백 배나 강대해진 천마의 존재감에 나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삼황오제의 본체를 눈앞에 두었던 경험이 꽤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압박감은 말 그대로 전신의 세포가 한올 한올 눌려서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지끈지끈 눌러오는 무시무시한 밀도의 힘은, 분명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황제 공손헌원이 천마를 통해 발휘하는 힘은 - 보통 삼황오제의 경지를 월등히 초월하는 것이라고!
“…….”
하지만….
내가 그래도 망설이자 천마가 말을 이었다.
“정 동료들의 희생이 아쉽다면, 내가 승천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은 후 그대의 동료들을 모두 부활시켜 주지.”
“…그게 가능한가?”
“명계의 지배자는 과거에 내가 죽였다. 그저 명계를 내게 귀속시키면 끝인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두를 부활시킨 후, 향후 억겁의 세월동안 그대와 동료들에게 무한의 안위와 행복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마.”
“…….”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지 아니한가? 어차피 승천 후 그대는 강대한 힘을 얻어 그 이후 신을 없애든 말든 멋대로 하라. 나는 내 이득을 얻을 터….”
천마의 눈이 매혹적인 황금빛을 뿜어내며 내 마음을 가라앉히는 듯 했다.
“함께 이길 수 있다…. 나와 그대는 영원한 동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제 그대에겐 죽음이라는 선택지조차 없으니, 내 말을 받아들이거라.”
동료….
나는 그 말에 혹해서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황제 공손헌원처럼 무시무시한 놈과 싸우지 않고 그냥 동료로 받아들여서 이 고난을 넘겨버릴 수가 있다고? 그리고 모든 것이 최상의 결과를 맞이할 수가 있고 동료들도 모두 부활한다고?
이렇게 쉽게 끝을 낼 수 있다니.
이번 생 내내 고난과 고통만이 계속되어 모든 게 끝장날 것 같았는데…. 이렇게 간단히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오다니.
그 순간 나는 입을 열 뻔 했다.
“…나는 받….”
하지만.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망설이자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천마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나 말해줬는데 알아듣지 못하는가? 언제까지 승리의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무모한 전생을 반복할 셈인가.”
“…….”
“그대가 모든 신의 소멸을 주장하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과정의 일부로써 힘을 얻기 위해 나와 협력하자는 것 뿐.”
천마가 빨리 결론짓고 싶은 듯 재차 말했다.
“자. 결정을 내리거라.”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입을 열려다가 멈칫거렸다.
“…….”
안 돼….
할 수 없어….
“우유부단하군.”
천마가 처음으로 짜증을 표현하는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내 망설임이 그저 우유부단함일까…?
정말 우유부단하다면 이토록 달콤한 제안이 내밀어지면 더더욱 거부해선 안되는 게 아닐까.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동료들의 한 마디가 스쳐지나가는 걸 느꼈다.
[무혼(武魂)은 분명히 있어, 사제.]
진소청.
[굳이 내게 보답하고 싶다면…. 이겨라. 그리고 이겨서 너를 이용하려 한 모든 놈들에게 엿을 먹여줘라!]
제갈사.
[우리의 역할은 여기까지일세. 혜아를 잘 부탁하네….]
검마.
[왕이여…. 마지막까지… 동료를 믿어라!]
천우진.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정말 많지만…. 후후….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라오.]
…그리고….
[백웅. 내가 그러했듯…. 당신 또한 자기자신으로서 살아가야 할 날이 오게 될 것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포기하면 아니되오. 이 힘은…. 그런 당신을 위해 주는 선물이오.]
망량.
주르륵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울컥하고 진한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참을려고 해도 참을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요동치면서 내 마음속을 헤집는 게 느껴졌다. 모든 동료들이 힘을 다해서 성쇠하며 사라져갔던 이 거대한 굴레 속에서, 하필이면 마지막에 느껴지는 게 그의 한 마디라니.
어째서일까.
어째서 망량은… 그런 일을.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천마에게 소리지르듯 외쳤다.
“황제!! 망량을 끌어들인 게 사실인가? 정말 그를 이용해서 일부러 내게 전륜성왕의 권능을 얻게 한 건가!!”
“흠.”
내 말에 천마는 뜻밖의 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제 와서 그런 게 중요한 건가…?”
“대답해!!”
내가 대답을 재촉하자 천마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그렇다. 삼황내문 또한 나의 안배였으니 그걸 익힌 망량도 성취가 극한에 달하자 나와 접촉하게 되었지.”
“망량에게 무슨 말을 했던 거야!”
“그대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이야기를 했지. 모든 승리는 내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또한 그에게는 미리부터 내가 천마신공으로 신역절기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던 바가 있지.”
“……!!”
뭐라고?!
그 순간, 나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망량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지금의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은 절망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당연히 모든 희망을 꺾는 것이니 내게 말해줄 수도 없는 이야기였으리라!
내가 멍하니 있자 천마의 말이 이어졌다.
“꿈을 통해서 몇 번이나 천마신공으로 망량을 죽이며 수차례 위력을 보여줬던 바. 놈은 명계의 시련을 통과해서 전륜성왕의 권능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패배자의 힘에 불과했지. 나는 망량이 굴복할 때까지 계속 놈을 정신세계에서 죽였다.”
“…….”
“결국 놈은 그대가 죽음으로 회피하기 힘들게끔 전륜성왕의 권능을 부여하는 함정을 파게 되었지.”
“함정이라고….”
“알겠는가? 그대가 의지하는 망량조차 그대를 배신했다. 더 이상 그대에게 남은 길은 없어.”
천마의 황금빛 눈이 약자를 압제하는 광휘를 발휘하며 나를 압박했다.
“받아들여라. 이미 패배해버린 그대에게 동업자의 지위를 약속한다는데 어찌 이리도 망설이느냐.”
하지만 나는 천마의 압력보다도 한 가지 생각 때문에 거기에 집중해서 공포나 위압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망량이… 그랬단 말이지.’
…….
그랬구나.
천우진의 마지막 말은 그런 뜻이었구나.
나는 잠시 후 천마에게 입을 열어서 말했다.
“황제.”
“그래. 마음이 결정되었느냐? 어서 말하거라.”
“그 전에 내 움직임을 좀 풀어줘. 어차피 죽음으로 도망 못 치잖아.”
“그러지.”
황제가 권능을 해제했는지 잠시 후 내 몸에 자유가 되돌아왔다.
나는 자유를 만끽하며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자, 봐라. 위대한 황제 공손헌원이여.”
나는 천천히 손을 모으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서 내밀었다.
천마의 얼굴이 굳어지자, 나는 히죽 웃었다.
“난 동료를 믿겠다, 씨발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