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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죽어야 했다. 천마가 신역절기의 고수들과 싸우는 동안에 생긴 틈을 타서 자결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첫째로 내가 천우진에게서 받은 무위의 검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움직일 수 없어.’
생각과 언어의 자유만이 허락되었다. 이미 나는 황제의 권능에 당해버렸다. 단순히 황제가 내 자결행위를 막는 걸 떠나서 이미 내게 움직일 수 없게끔 속박을 걸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하나 - [옛 지배자] 중에서도 정점에 가깝다 하는 황제 공손헌원이 무공으로 신역절기에 대적하는 모습이 마치 악몽처럼 느껴진 것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신역절기야말로 [옛 지배자]를 물리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는데…. 정작 신이 신역절기를 익혀서 절대고수들을 도살해버리다니!!
화악
내가 망연자실해 있을 때 천마의 눈에 넘실거리던 황금빛 안광이 줄어서 인간의 금빛 눈동자로 변화했다. 금안(金眼)으로 변모한 사공린의 머리카락 또한 함께 황금빛으로 변해서, 마치 눈이 부실 것만 같은 찬란함이 느껴졌다.
‘아름답다….’
이런 상황에서 해선 안 될 생각이었지만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간이 지닌 미적 기준 중에서도 황금에 대한 선망을 이토록 충족시킨 미(美)가 존재하기는 할까? 온갖 절세미녀들을 보아온 안목으로도 경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것은 아마 황제의 신격(神格)이 통상적인 미를 초월한 절대성을 이루었기 때문이리라.
천마가 입을 열었다.
“전생자와 거래를 할 생각이다. 그러니 무의미한 반항을 거두거라, 망량선사의 사도여.”
눈은 내 쪽을 보고 있지만 그 말은 틀림없이 그의 등 뒤편에 서 있는 천우진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천우진의 옆에는 어느 새 아수라가 서 있었고, 아수라는 천우진을 지키듯 중단세로 검을 든 채 천마를 겨누고 있었다.
천우진과 아수라 - 본디 그들 정도의 힘이라면 [옛 지배자]라 해도 두렵지 않겠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는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신역절기의 고수들이 이미 다 당해버린 상태에서 이제 그들 둘이 싸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러자 천우진이 말했다.
“황제여. 이 모든 건 당신의 실수요. 전생자에게 미움받는 존재가 어찌 승천할 수 있겠소!”
천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천우진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그저 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천우진을 무시하는 듯한 그 행동에 천우진이 다시 한 번 강한 어조로 외쳤다.
“망량선사의 사도인 나조차도 백웅의 전생(轉生)을 봉인할 수는 없소. 당신 또한 마찬가지란 말이오. 억지로 백웅을 가두어 괴롭힌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결국 장대한 굴레의 흐름 속에서 당신은 필패(必敗)하게 될 것이오!”
그제서야 천마가 대꾸했다.
“느껴지지 않는가?”
“무엇이 말이오.”
“네가 말했던 거대한 굴레의 흐름이 바뀌어, 이제 망량선사의 권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
“[종말]이 시작되었으니 이젠 경계를 침범할 수 있다.”
두근!!
후와아아아악
그 순간 저 멀리 명계의 지평선에서 불길한 어둠의 기운이 마치 심장고동처럼 번져나오며 시꺼먼 암류를 만드는 게 보였다. 그 어둠의 기운 한가운데에서 마치 눈처럼 생긴 게 비쳐보였던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크흑!! 지상에서….”
그리고 그 고동과 같은 어둠의 파장이 뻗어나온 순간, 천우진이 갑작스럽게 심장에 통증을 느낀 듯 자신의 심장을 움켜잡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나는 천우진을 보며 외쳤다.
“천우진!!”
“이… 이럴 수가…. 당신은 정녕 미쳤소?”
천우진이 숨을 헐떡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천마를 보았다.
“대결계를 파괴하려 하다니…. 후환이… 두렵지 않소!!”
“…….”
“아무리 스승님이 당신들의 방해물이라지만, [그것]은 당신들에게 있어서도 재난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닌가…!! 오만한… 한없이 오만한 짓을!!”
천우진의 말 뜻은 명백했다.
황제 공손헌원이 무언가 수를 써서 낙양의 대결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결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그 대결계와 동화된 망량선사 또한 소멸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결과 출현할 것은 바로 [기어오는 혼돈]!
천우진은 황제가 그 존재를 풀려나게 하려 한다는 걸 믿을 수 없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자 천마가 말했다.
“당황하지 말라, 우매한 자들이여. 이건 모두 올바른 결과를 위한 것이다.”
“올바르다고? 당신이 어찌 그런 말을….”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던 절대자들의 기(棋)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 뿐.”
그렇게 말한 천마가 슥 하고 내게 손을 뻗었다.
“전생자여. 거래를 제안하겠다….”
번쩍 - !!
그 순간 검광(劍光)이 천마의 목을 베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암야참(暗夜斬)!’
틈을 노리고 있던 아수라가 천마를 습격해서 암야참으로 벤 것이다! 그러나 회심의 암야참에 분명 목이 잘렸어야 할 천마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저 거슬린다는 듯 힐끔 등 뒤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암야참을 펼친 아수라가 일 장 거리에서 다시금 참격자세를 잡으며 눈을 반개하고 있었다. 아수라의 자세는 중단베기였고 자신의 일격에 아무런 의심이 없다는 듯 깔끔했다.
황제가 그런 아수라를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옛 신하를 섬긴 자여. 네가 그리 싫지 않아서 살려두었거늘 끝내 비참한 죽음을 청하느냐?”
“위대한 분이시여. 죽을 자리에서 죽지 못함은 무사의 수치이옵니다.”
아수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부디 그 손으로 제 목숨을 거두어 주소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한참 후 천마가 서서히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좋다.”
아까 신역절기의 무인들이 전력을 다할 때 생겼던 침묵의 공간이 다시금 생겨나는 게 느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신역절기가 충돌하면 인간의 인식과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절대적인 일합이 오가는 것이다.
긴장과 침묵이 고조되는 가운데 나는 점차 정신이 마모되어가는 걸 느꼈다. 이미 절대적인 절망을 느낀 상태에서 이제 곧 패배할 게 뻔한 아수라의 모습을 지켜보려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 시간이 길어지는 듯한 그 순간에 내 귀에 아수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와중에 아수라의 의지가 뇌리에 날아와서 박혔다.
[백웅. 아마 이게 진짜 마지막일테지.]
아수라 본체의 시선은 전혀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먼지 한 톨 조차 멈춰져 있는 듯한 시공간의 정지가 고스란히 느껴졌고, 나는 이 상태를 아수라가 의도해서 만들어냈다는 걸 눈치챘다.
[여동빈의 신역절기인 무형검로에는 형태가 없다. 형태가 없으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무형검로는 본디 무적(無敵)이며 무쌍패의 극의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수라의 인식영역과 의념의 경지가 나보다 훨씬 고차원에 이르러 있기 때문에, 이 찰나 동안에 나는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공간의 법칙을 무시한 의념의 전달법만의 특징이었다.
아수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혼돈의 검로 또한 베는 순간만큼은 하나의 형태를 정해야만 한다. 아무리 신의 무예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결과. 그것이 인과율의 힘을 담고 있는 이상 더더욱 제약은 탈피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여동빈의 무예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결점이었던 것이며, 천마신공(天魔神功)이 무형검로를 패퇴시킬 수 있었던 이유다.]
잠시 침묵하던 아수라가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신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신역절기를 파해하기 위한 것이 바로 천마신공. 신(神)의 간계(姦計)가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필멸자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실로 황제 공손헌원은 두려운 존재다.]
방금 전 여동빈과 천마의 결전을 분석하는 말이 틀림없다.
무슨 의미인 걸까?
언어의 이해만으로는 뜻을 알 수 있었지만 무학의 경지에서는 아수라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간단한 말 속에 수백 년 수천 년에 이르는 절대적인 무인의 깨달음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안다고 했다가는 큰일나게 된다. 내가 당장 오성(悟性)으로 아수라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음을 깨닫고 그의 말을 외우는 것에만 전념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황제에게 속지 마라, 백웅. 신역절기의 패배가 무(武)의 패배는 아니다. 마음이 꺾이면 모든 게 끝장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희망을 얻은 게 아니라 또 다른 절망을 느꼈다. 아수라가 내게 힘을 북돋아 주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따뜻한 마음만으로는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저 놈을 이길 방법이 보이지 않아!! 이젠… 노력해서 이기겠다는 한 마디 만으로는 안 된다고! 도대체 난 어떻게 해야하는 거냐고!!]
포기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신이 무공을 익혀서 신역에 이르러 신역의 무인들을 때려잡는 상황에서 어찌 내가 제정신일 수가 있을까! 그게 황제의 속임수라고 할지언정 위력만큼은 진짜가 아닌가!!
미쳐버릴 것 같다.
제발 대답해 줘.
더 이상은 제정신으로 못 버티겠어!!
그러나 내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의념의 왜곡으로 생겨난 시공간은 빠르게 풀려나기 시작했고, 섬광같은 아수라의 일섬이 천마에게 정면으로 날아드는 게 보였다.
아수라의 암야참은 마치 흑월(黑月)이 반쪽으로 쪼개어져서 공간을 먹어치우는 듯한 형상이었고, 암야참의 간격에 들어온 천마는 그대로 몸뚱이 전체가 갈가리 찢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영겁지무(永劫之舞)
투쾅
천마는 암야참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맞찌르기를 택한 듯 했고 아수라의 상반신이 천마의 쌍장(雙掌)에서 뿜어나온 기운에 휘말려서 날아가 버렸다. 너무나도 맥없이 일 초만에 결판이 나 버린 것이다.
우웅
하지만 다음 순간 아수라와 천마의 위치가 처음 그 위치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수라는 방금 전 천마에게 당해서 죽었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 장 거리에서 다시금 참격자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
저게 어떻게 된 거지?
뜻밖의 현상에 천마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망량선사의 사도답군. 관측을 달리하면 무한대의 가능성이 파생되는 원리를 이용해서, 아수라가 이길 때까지 이 시공간을 무한히 반복해서 관측하는 술수인가?”
천마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수인(手印)을 맺은 채 눈을 감고 집중하는 천우진의 모습이 있었다. 왜인지 천우진이 지금껏 존재감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비장의 수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차하구나. 몇 번을 반복한다고 해도 아수라가 내게 일격을 먹일 가능성은 없다.”
그러자 천우진이 눈을 감은 상태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구차하다면 당신은 대체 뭐요? 정말로 당신이 다 이긴 거라면 우리의 싸움을 받아줄 이유도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리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찢어발기는 걸 백웅에게 보여주려는 이유가 있는 거겠지!”
“…….”
천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아수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천우진의 술법으로 부활한다 해도 고통은 남을 터. 그 생지옥은 네가 선택한 것이다, 아둔한 자여.”
아수라는 그저 웃었다.
“하하!!”
암야참(暗夜斬)
다시 한 번 아수라의 일격이 천마에게 날아들었지만 천마는 똑같이 영겁지무를 써서 암야참을 무시하고는 아수라의 어깨와 목을 동시에 터뜨렸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치명상을 입은 아수라의 피가 허공으로 비산하자 천마는 이번에는 수도(手刀)를 써서 그의 명치를 관통했다.
푸욱
너덜너덜해진 아수라의 시체가 잠시동안 천마의 팔에 꽂혀서 대롱대롱 매달렸다. 그러나 잠시 후 감쪽같이 천마와 아수라의 위치가 원상복구되었고, 아수라는 다시 참격자세를 잡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비명을 질렀다.
“그만해!! 그만하라고!!”
천마는 몇 번이라도 아수라를 계속 죽일 생각이야!!
아무런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지만 아수라는 계속해서 덤벼들 것이고 천마는 그런 아수라를 갖가지 방법으로 참살할 것이다!
촤좌좍
몸이 열 토막 나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아수라였지만 그는 잠시 후 천우진의 술수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끔찍한 고통이 이어지고 있을 텐데도 아수라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또 다시 웃었다.
“하하하하!!”
퍼버벅
말 그대로 참극(慘劇). 순식간에 도살의 횟수는 삼십여 번이 넘었으며, 보통인간이라면 열 번은 커녕 한두 번만 겪어도 정신이 붕괴될 정도의 끔찍한 죽음이 이어졌다. 그걸 움직이지 못한 채 눈알만 굴리면서 쳐다보는 나는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기를 무려 오십여 번 - 아니 백여 번.
퍼버벅
사람이 벌레를 밟아 죽여도 그 정도면 지칠 법 했지만 천마는 지칠 기색이 없어보였고 아수라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계속해서 자살하듯 덤비기를 계속했다. 그러자 나는 점차 아수라가 죽는 비극을 보는 게 무감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이래서는 안 되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보고 있으니 아무런 생각도 안 든다. 처음에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경악했지만 이제는 마치 놀이를 보는 것 같다.
휘익!
그러자 뜻밖에도 천마가 처음으로 아수라의 공격을 받아주지 않고 피해버렸다. 정확히는 아수라를 일 초만에 쳐죽이는 걸 그만둔 것이었는데, 천마가 왜 저러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천마가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인간을 위하는 척 하지만 인간과 동떨어진 무리들이구나.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나?”
“하하하…. 그게 바로 인간의 본성이 아니오?”
아수라는 지금까지 계속 죽었던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처참한 살육도 계속되면 감흥이 없어지는 법이지. 과연 인간을 잘 이해하고 계시는구려.”
“…….”
“백웅도 이제 머리가 식었을까.”
설마 아수라는 처음부터 지켜보는 내가 무감각해질 때까지 계속 죽을 생각이었던 건가?
나는 아수라의 말에서 그걸 깨닫고는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미… 미쳤어….’
아수라가 원한 건 그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냉정하게 버티는 것.
단지 그 단순한 전환만을 위해서 처음부터 몇백 번이고 죽으면서 황제의 압도적인 힘을 버텨낼 생각이었단 말인가! 아무리 자극적인 경험이라도 계속받으면 아무렇지 않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미친 짓이다.
내게 희망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마치 벌레가 꿈틀거리는 방법을 다르게 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닌가.
처음부터 아수라는 목숨을 떠나서 모든 것을 버린 채 이 싸움에 임하고 있었던 것인가!
“…….”
천마가 대꾸하지 않은 채 천우진을 보며 말했다.
“내가 여기 온 이상 백웅이 자살할 방법도, 탈출할 방법도 없다. 너희가 이런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지.”
“상관없소. 아무리 백웅이 바보라 해도 그는 인간의 왕. 이 정도면 우리의 진짜 뜻을 깨달았겠지.”
천우진이 눈을 감은 채 염불을 외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우린 당신이 엿먹는 것만 볼 수 있으면 세상이 망해도 좋소!”
천우진은 문득 씩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나, 백웅!!”
그 순간 나는 천우진과 아수라가 공유하고 있는 광기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부터 승리를 노릴 수 없는 입장이라면 처절하게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 죽음조차도 이용해서 끝까지 황제에게 저항하겠다는 광기! 그들은 삶의 의지를 버리는 대신 광기를 택해서 황제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천마는 처음으로 불쾌하다는 심경을 드러내었다.
“그나마 너는 격에 맞는 상대였건만 필멸자의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군. 더 이상 놀아줄 수가 없으니 이만 퇴장해라….”
우우우우
천마의 몸 전체에서 황금광(黃金光)이 격렬하게 뿜어져나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천우진이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본체의 힘을 쓰시는군.”
후와아악!!
황금광은 점차 온누리를 채우며 뿜어져서 천우진과 아수라의 몸을 집어삼켰고, 천우진은 그 빛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버티는 모습이었다.
파지직
[크윽….]
하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었던 것일까? 천우진과 아수라의 모습이 점차 황금의 빛에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천우진은 빛에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왕이여…. 마지막까지… 동료를 믿어라!]
파앗
잠시 후 천지를 가득 채우던 황금광이 사라지자 이 장소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천마가 황제 공손헌원의 진짜 권능을 써서 일격에 환신 천우진과 아수라를 없애버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 격렬하게 싸웠던 신역절기의 고수들조차 그 시체가 완전히 사라져서 허허벌판이 되어버렸다.
허무로 가득찬 명계의 대지에서 내가 멍하니 서 있자, 천마가 말했다.
“네게 남은 것은 이제 없다, 전생자여. 동료도, 힘도, 자유도….”
“…….”
“이제 나의 제안을 들어 보겠는가?”
나는 영혼없는 목소리로 멍하니 대꾸했다.
“말해 봐.”
천마는 사공린의 얼굴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사공린의 목소리로 말했다.
“전생자. 나와 함께 [기어오는 혼돈]을 죽여서 세상을 구하자.”
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충격적인 한 마디에 내가 반사적으로 천마를 돌아보자, 그가 허공 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 하면 그대와 내가 함께 천상(天上)에 오를 수 있지.”
“…….”
“그대가 약간만 협력해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가 너무 말도 안 되게 급전개가 되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천마에게 정보를 캐내려는 생각보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앞서서 차마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크크큭!!”
그리고는 허탈해져서 피식 비웃음을 지으며 황제에게 말했다.
“개소리. 내가 그딴 거짓말을 믿을 것 같나? 날 죽이든 봉인하든 마음대로 해라. 이번 생은 내가 졌으니….”
천마는 금안(金眼)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정상적인 반응이겠지. 하지만 어째서 위대한 혼돈의 신인 내가 태허를 기반으로 하는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하는가?”
“…….”
궁금하다.
“신역절기는 신을 죽이는 무공. 허나 보다시피 혼돈의 신인 나 또한 신역절기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 않느냐?”
“…….”
“내 힘을 보았던 너는 지금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
나는 대꾸하지 않으려 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호기심을 유발하는 황제의 말이 마치 뱀이 기어오듯이 내 심장의 혈관에까지 닿는 게 느껴졌다.
‘아.’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였구나.’
황제가 혼돈의 권능으로 일격에 다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과시하듯이 천마신공을 써서 신역절기의 고수들을 몰살시킨 이유.
“혼돈과 태허의 힘을 동시에 다루는 나라면, [기어오는 혼돈]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힘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으리라.
내 전생에 있어서 마지막 목표인 [기어오는 혼돈]을 죽일 수 있다는 희망을 내게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