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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신투지존은 그렇게 말하자마자 하늘로 뛰어올라서 [옛 지배자] 쪽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곤혹스러워졌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신투지존이 귀환할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나는 자살로 이 굴레를 마감하기 전에 여동빈의 신역절기를 보고싶은 마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과연 신투지존을 이대로 놔둬도 좋은 것일까?
내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옆에서 천우진이 불쑥 말했다.
“잘 됐군. 두 명치 신역절기를 볼 수 있겠어.”
“아…!!”
맞다!
신투지존도 신역절기를 성취한 자였지!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서 잠시 떠올리지 못했던 사실에 내가 아차하자 천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불청객이 하나 더 있군….”
“저놈 말이군.”
나도 방금 전에 눈치챘다.
천우진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자 그 곳에는 북극의 거대한 빙암절벽 위에 전신에 검은 망토를 두른 무사가 서 있었다. 그 무사는 청색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등에는 다섯 자루나 되는 대검(大劍)을 차고 있어서 무척이나 기이한 무장을 장비하고 있었다. 보통 대검을 다섯 자루나 갖고다니지는 않는 것이다.
‘강하다.’
지금까지 투기를 아예 무(無)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 자의 존재를 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미미한 존재감을 깨달은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신투지존의 존재에 반응해서 기척을 흘리고 만 것이리라.
완벽하게 갈무리된 의념과 천주.
틀림없는 절대지경!
설마 대웅제국에서 양성했던 절대지경 고수 중에 한 명인 걸까? 나는 저 청색 가면의 무사가 누구인지 못내 궁금했지만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체간(體幹)이 이상하네…?’
뭔가 묘하게 인체의 균형이 맞지 않고 허우대가 상당히 큰데도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의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형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가 기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천우진이 말했다.
“끝까지 관전만 할 거라면 여기서 더 나서지 않는 게 좋다. 여동빈이 패배할 것을 감수하겠는가?”
“…….”
나는 그 말에 침묵하다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다! 여동빈이 패배할 것 같으면 돕겠어.”
순수하게 종말에 대적하는 무예의 가능성을 알아본다고 친다면 여동빈이 패배해서 잡아먹히더라도 도우면 안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여동빈이 잡아먹히다니…. 그 꼴은 볼 수 없다.’
무인 대 무인의 대결이라면 여동빈의 패배를 존중하겠지만 [옛 지배자]는 토벌해야할 대상일 뿐이니, 여차할 경우 끼어들어 여동빈을 돕는 게 인간으로서의 의리이리라.
천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한결같군. 그러면 여차할 땐 바로 튀어나갈 수 있게 해 주마.”
“고마워.”
우우웅
이윽고 천우진의 결계가 우리 주변을 막는 게 느껴졌다. 아마도 기척차단을 함과 동시에 전투의 충격에 휘말리는 걸 막아주는 결계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천우진의 술법이 적용되었는지 곧장 나는 천리안이라도 시전한 것처럼 여동빈이 존재하는 전장을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가 있었다.
화룡진인을 화룡신검으로 바꾸어 들고 있던 여동빈은 어느 새 곁에 와 있는 신투지존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투지존인가.”
신투지존이 껄껄 웃었다.
“아주 오랜만이군, 여동빈! 좌(座)에 올랐을 때 잠깐 보았던가?”
“…….”
여동빈은 그 답지 않게 처음으로 어이없게 웃는 듯 했다.
“후. 신을 잡으러 왔나?”
“두말 하면 잔소리. 못 잡을 것도 없지.”
신투지존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뭐, 나는 또 하나 훔치고 싶은 게 있어서 여기로 돌아왔다.”
“그게 뭐지?”
“지켜보는 놈들이 있어서 지금은 말해줄 수 없겠는데~.”
스윽
신투지존이 품 속에서 단검을 꺼내어 [옛 지배자] 쪽을 겨누었다.
“저 놈을 잡고나면 얘기해 볼까.”
“좋을대로.”
쿠구구….
이윽고 여동빈과 신투지존이 허공에 떠서 나란히 투기를 방출하는 형태가 되었다. 여동빈이 혼자 잡는 걸 고집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일이었다. 여동빈에게 있어서 신을 혼자 잡든 여럿이 잡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닌 듯 싶었다.
[옛 지배자]가 기성(奇聲)을 울리며 신언을 발했다.
[하찮은 자들이여! 종말에 내게 유희를 선사해주어 고맙구나…. 그리고 죽어라!]
위잉 - !!
퓨부부붕
그와 동시에 천공에서 셀 수도 없는 빛이 번쩍였다. 가히 수만 개를 훨씬 넘어 보이는 그 빛덩어리는 이윽고 광선포처럼 변해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광선은 백열을 이루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멸했다.
츠아아
빛덩어리가 북극의 빙암을 통째로 소멸시키면서 바다에 닿인다. 그러나 바다 또한 광선에 맞자 그대로 증발하듯 소멸되었고, 부드럽게 대지에 파고든 파멸의 광선은 이내 세계를 새하얗게 만들기 시작했다.
고고고고….
조용한 죽음의 빛. 삽시간에 빛이 사라진 북극해 일대는 해저까지 깊숙이 파여서 마치 거대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바닷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증발해버렸다. 수백 리 이상의 범위가 실시간으로 소멸한다.
우우우
“……!!”
해신도 저런 공격을 했었지만 차원이 다르다. 지금 저 공격 한 번으로 북극의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가 모조리 초토화된 것 같다. 대륙 하나 크기의 범위가 사멸해버린 것 같았다. 필멸자는 주술이나 마법으로 저런 위력을 내는 게 불가능했다.
끔찍한 빛덩어리가 덮쳐와서 북극에 정적이 감돌았을 때였다.
[옛 지배자]가 갑작스럽게 비명을 터뜨렸다.
[크아아아아악.]
퍼엉!!
아주 멀리에 있지만 똑똑히 보였다. [옛 지배자]의 등 뒤편에서 일선(一線)이 관통하면서 한 개의 신형이 그의 몸을 관통해서 뚫고 나오는 광경이!
그리고 허공에는 마치 거대한 돌덩어리가 떠 있는 듯한 형상이 보였고, 그 수십 장 크기의 돌덩어리의 바로 뒤편에 있던 누군가가 씨익 웃고 있었다.
“이 심장은 이제 내꺼다!”
신역절기(神域絶技)
일수탈심(一手奪心)
신투지존이 신역절기로 일격에 신의 심장을 빼내어 버린 것이다!
‘저렇게 쓰는 기술이었구나!’
신의 심장을 일격에 훔치는 기술이었던 것이다!
내가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옛 지배자]가 분노하며 신언을 갈(喝)했다.
[시간이여 되돌아가라!]
우웅
[작은 굴레]가 되돌아가며 방금 전 신투지존이 꿰뚫고 나온 일수탈심의 궤도가 시공의 역전으로 원상복구되는 게 보였다. 나는 저 강대한 권능을 보자 그만 속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그래. 신역절기로 일격을 먹이더라도 [작은 굴레]는 도대체 어떻게 저항한다는 말인가?’
신이 현실계에 현현한다면 육체가 존재하기에 어떻게든 의념절기로도 일격은 먹일 수 있다. 그러나 신의 몸을 둘러싼 무수한 가호와 권능, 그리고 [작은 굴레]의 조작 때문에 타격을 먹인 게 무의미해져 버린다. 이 모순을 순수한 인간의 무예로 해결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신투지존은 그 권능 때문에 몸이 끌려가듯 지나왔던 시공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순간, 신투지존이 낄낄 웃는 것처럼 들렸다.
“하하하, 심장이 싫다면 대가리를 따 주지!”
신역절기(神域絶技)
일수탈두(一手奪頭)
푸콱!!
그 순간 - 시공간의 왜곡을 갑자기 꿰뚫고 신투지존의 신형이 이번에는 [옛 지배자]의 가오리같은 머리 부위를 절단해 버렸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도(手刀)가 손날치기로 잘라버리는 듯한 일격!
[옛 지배자]는 이번에는 진짜로 혼비백산했는지 허공에 날아가는 대가리가 무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버, 벌레같은 놈이 대체 무슨 힘을 쓰는 것이냐! 어째서… 회복이!]
“흐흐흐. 안 붙지?”
[크아아아악!!]
츄와아악
[옛 지배자]의 몸 절단면에서 갑자기 무수한 촉수와 시꺼먼 액체같은 게 치솟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수한 조그마한 가오리들이 생겨나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역시 신이라서 그런지 머리를 잘라도 결코 치명상은 되지 않는 듯 했다.
피융
독문절기(獨門絶技)
무영탈주(無影脫走)
신투지존은 잠시 후 서생탈주의 진화형인 그의 최대신법, 무영탈주를 시전해서 천공을 뒤덮은 [옛 지배자]의 육탄공격을 한끝차로 모조리 회피해냈다. 가히 삼보절기에 못지않은 회피능력이었고, 신투지존이 수백 번 움직여서 [옛 지배자]의 공격을 피하는 도중에 왼쪽 손에 들려있는 단검을 오른쪽으로 넘기면서 왼쪽 손을 한 번 흔드는 게 보였다.
‘저건!’
만상지투(萬象之偸)
공간절도(空間竊盜)
허공에 경계가 나뉜다. [옛 지배자]가 어느새인가 마법을 써서 천공에 다시 무수히 날아들던 수만 개의 빛이 그 [벽]에 도달하자 갑작스럽게 굉음과 함께 [옛 지배자]의 육신이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번쩍 -
퍼버버벙!!
[크아아아아악.]
나는 저게 어떤 원리로 생긴 일인지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
‘천공의 면(面)을 뒤집어서 훔쳤어!!’
그리고 뒤집은 면의 공간이 [옛 지배자]의 본체에 이어지게끔 해 버린 것이다! 나는 공간절도의 저런 활용을 생각지도 못했기에 멍하니 쳐다보았고 [옛 지배자]가 광분하며 허공을 더더욱 시뻘건 색으로 물들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카하, 크하, 하으하아하하하하하!! 나 [적리(赤籬)의 목자(牧者)]가 너희같은 벌레에게 당할 것 같은가!! 이 종말의 [계시]를 눈앞에 두고!]
콰과과과
문제는 스스로를 적리의 목자라고 밝힌 [옛 지배자]가 지금까지 당한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며 발광(發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분리된 머리와 몸통이 동시에 떠오르면서 시뻘건 빛으로 태양마저 옥죄는 듯한 환영을 일으켰다.
정말 엄청난 맷집이다.
저렇게 당했는데도 아직도 새발의 피로 보이다니.
‘역시 [옛 지배자]는 격이 다르구나….’
종말이니까 저런 놈이 앞으로도 수십 수백 마리씩 출현하리라. 내가 내심 암담함을 느끼고 있을 때, 어느 새 휙하고 뒤로 물러서 있던 신투지존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쩝쩝 다셨다.
“음. 역시 나는 도둑이라서인지 살생에는 서툴다니까~ 너무 착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군. 마음씨까지 착한 나는 너무 완벽한 도둑인 듯 싶다네.”
…….
저 인간 하나도 안 변했군. 저걸 말이라고….
그러더니 신투지존이 어느 새 옆에 와 있던 여동빈에게 시선을 옮겼다.
“검선(劍仙)이시라면 내가 양념친 거 잘 받아먹을 수 있겠지~?”
유들유들하게 말하는 신투지존의 넉살에 여동빈은 무덤덤하게 검을 앞으로 겨누며 대꾸했다.
“신투여. 간을 볼 필요 없다.”
“왜?”
“그대가 염려하는 상대는 아마 이런 소소한 전장에는 나타나지 않을 터이니.”
그 말에 신투지존이 처음으로 흠칫하고 놀랐다.
“…뭐야, 알고 있었나?”
“그대가 신조차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을 초월한 자가 상대겠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일. 또한 외우주마저 뛰어넘어서까지 공포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저 낙양에 봉인된 존재이리라.”
“…….”
여동빈의 안광이 번득 하고 빛났다.
“이 일검으로 백좌의 전장(戰場)이 시작됨을 알리겠다.”
파아아 -
그 순간, 여동빈은 화룡신검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리고 화룡신검이 점차 새하얗게 물들면서 강대한 힘을 내뿜기 시작했고, 허공에 떠오른 화룡신검이 이윽고 어검지세(御劍之勢)로 허공의 중천(中天)을 관통했다.
투웅
화룡신검이 관천(貫天)함과 동시에 천공에서 거대한 용의 형상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그 용은 황혼(黃昏)의 용(龍)이었으며, 출현함과 동시에 [적리의 목자]는 자신의 가오리같은 동체를 떨면서 놀라는 듯 했다.
[응룡!!]
일순간 응룡의 모습이 적야(赤夜)에 드리워졌을 때, 응룡의 시선이 여동빈에게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응룡의 앞에는 화룡진인의 모습이 떠올랐고, 응룡은 그런 화룡진인을 힐끔 보았다가 도로 여동빈을 응시하며 말했다.
[위대한 무(武)의 화신들이여! 나는 봉납(捧納)을 받아들이노라.]
“감사하오.”
[그러니 무의미한 발버둥은 그만두어라! 그대들의 힘이 우주적 근원을 갖고있다 하여도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만신전에 종속하여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감이 어떠한가?]
아무래도 여동빈이 화룡진인의 본체인 응룡이 만신전 소속임을 알고 그에게 화룡신검을 봉납하는 과정을 거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 해도 천하제일의 신검 중 하나로 꼽히는 화룡신검을 설마 이런 마지막 전장에서 알아서 버려버릴 줄이야!
“그럴 수는 없소.”
여동빈은 응룡의 시선을 똑바로 맞받으며 말했다.
“스승과의 연을 끊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수라(修羅)의 길! 그대가 태초부터 존재했다 한들 우리 무인의 의지를 측정할 수는 없소.”
[광오하구나. 정녕 인간의 검으로 신을 벨 수 있겠는가!]
응룡이 호통을 치자 여동빈이 허공에 손을 뻗었다.
“보여드리리다. 그리고 믿게 할 것이오.”
스스스스 -
여동빈의 의념이 집중되어서 잠시 동안 무형검(無形劍)을 이루는 듯 했다. 그러나 무형검은 아주 잠깐동안 형태를 맺었다가 소멸되었고, 여동빈은 눈을 반개하며 나직이 외쳤다.
“조만간 이 검이 만신(萬神)을 베어버릴 것임을!!”
여동빈의 신명(神明)이 이마에 맺히는 게 보인다. 여동빈의 집중력이 절대지경을 초월하여 계속해서 깊어지더니 알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하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여동빈의 전신에 가득하던 ‘힘’이 점차 사그라들어 무(無)로 변하는 것을 보자 흠칫하고 놀랐다.
‘저… 저건…. 뭔가 비슷해.’
어째서일까.
아수라가 전해주었던 암야참(暗夜斬)이 왜 생각나는 거지?
꾸욱.
여동빈의 손이 마치 검을 쥐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무검(無劍).
심지어 의념으로 만든 검조차 들려있지 않았기에, 여동빈은 완벽히 허깨비와 같은 무형(無形)에 도달해 있었다. 저것은 무(武)의 상식으로는 용납할 수조차 없는 허무이며 괴무(怪舞)였다. 그가 무예를 다 잊어버렸다고 비난하기에 족한 일이었다.
끼이이이 -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옛 지배자]는 즉시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며 무인의 반사신경으로 회피할 수 없는 마법을 날려왔다. 무쌍패 정도가 아니면 결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으리라. 지금 신투지존처럼 날아다니며 궤적을 흐트러뜨리는 것도 아니니 이미 끝장난 것이다. 무쌍패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펼치기엔 늦어버렸다!
여동빈은 이미 외통수를 맞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죽음 뿐.
그러나 - 나는 그 순간 볼 수가 있었다.
원(圓).
신명을 이룬 여동빈의 등 뒤에 누군가가 서 있다. 그 ‘누군가’의 뒤에는 또 누군가가 서 있었고, 그런 식으로 행렬이 쭉 이어져 있었다. 환영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행렬의 선두에 서 있는 여동빈의 몸이 그 자체로 거대한 원의 시작이자 끝임이 느껴졌다.
검을 들고 있는 여동빈은 이미 완성된 존재였다.
그의 검은 원의 시초였다.
…저것은 실로 굴레가 아닌가.
무검을 든 여동빈은 검무(劍舞)를 시작했다. 분명히 검은 없는데도 여동빈은 검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번의 움직임을 이루었고, 그 움직임은 원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반원을 그린 일 검의 동작이 소리없이 전방을 베는 게 보였다.
스각
단 한 번의 베기.
그 베기는 낭비투성이에 제멋대로였으나 - 자연(自然).
추측할 수 없는 혼돈이 깃든 한 번의 베기에서 검선지경(劍仙之境)이 먼저 느껴졌고, 그 다음으로는 무형검로(無形劍路),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결론은 한 번의 참격이었으나, 그 짧은 순간에 느껴진 것은 수만 개의 검로였다.
신역절기(神域絶技)
무형검(無形劍)
그 일참에 베여나가는 것은 [옛 지배자]의 육체가 아니었다. 여동빈의 무검이 무무(武舞)를 이루며 직선으로 내려베는 그 순간, 마치 칼끝에 묻어나듯이 혼(魂)이 깔끔하게 썰려나가는 게 보였다.
투명한 유리가 스쳐지나가는 듯한 정밀한 일섬!
스겅
[크으… 이건…?]
뒤늦게 무형검에 베이고나서 깨달은 듯, [옛 지배자]인 [적리의 목자]는 잠시동안 어리둥절해 했다. 그는 뭔가 이변을 느낀 듯 몸을 떨었다.
[오오… 인과율이… 나를 부정하는가…. 이럴 수가….]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비명을 내질렀다.
[내 혼돈의 그릇이… 갈라지는구나!!]
퍼버벙!!
그것이 그 자의 마지막 말이었다. 단숨에 그의 신체는 허공에서 폭발하여 시꺼먼 혼돈을 가득 뿌렸고, 그 혼돈은 마치 뭉게구름이 빨려들듯이 허공의 한 점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적야(赤夜)가 멈추며 거대한 어둠이 물러가듯 일시적으로 북극의 천공이 맑게 변하는 게 보였다.
두근!
나는 심장이 떨리는 걸 느끼며 흔들리는 눈으로 여동빈을 응시했다.
‘세상에 어찌 저런 검이….’
두렵다. 정말 두렵다.
전륜성왕의 권능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인가 - 여동빈의 저 일격이 얼마나 신성(神聖)에게 치명적인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보통의 물리적 공격이 신격에게 있어서 갑옷을 타격하는 짜증을 주는 거라면, 무형검의 참격은 신성의 모든 권능을 무시하고 갑옷 밑의 뼈와 살을 동시에 분리시키는 것과 같았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게 그저 신성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것뿐이다.
무(武)의 차원에서 여동빈의 검이 어떤 원리인지는 파악할 수조차 없다.
일격에 [옛 지배자]를 멸한 여동빈은 잠시 후 아직도 천공에 머물러 있는 응룡을 향해서 말했다.
“위대한 신이여! 그대들이 홀로 싸우지 않듯….”
저벅
저벅
여동빈의 근처로 두 명의 신형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 명은 신투지존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아까까지 빙암 저편에 서 있던 청면의 무사였다.
“우리 백좌(百座) 또한 혼자가 아니오.”
겨우 세 사람.
저 위대한 응룡에 비견한다면 벌레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조그마한 존재들이었으나, 응룡은 그 셋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응룡은 거대한 황혼의 용체를 꿈틀거리며 말했다.
[공손헌원이 이미 그대들의 존재를 예지했음을 알고 있는가…? 그대들의 힘은 그가 읽은 인과율에서 벗어나지 못해….]
“상관없소.”
[…훌륭하군.]
응룡의 몸에서 확 하고 황혼의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응룡이 마치 선전포고하듯 외쳤다.
[그대들을 나의 적수로 인정해주지. 건투하라!]
화르르륵 - !!
거대한 정화의 화염이 휘몰아치며 주변의 마기를 정화했고 이윽고 응룡의 모습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현현했던 응룡이 만신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일련의 전투가 끝나자 나는 알 수 없는 감격으로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저것이 신역절기.’
진소청이 영문모를 재능으로 모든 것을 도살했던 그 압도적인 ‘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현묘함!
죽었다 깨어나도 진소청이 될 수는 없지만 수백 번 죽었다 깨어나면 언젠가는 신역절기는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나는 이번 생 내내 신역절기에 매달렸고, 드디어 그 결실을 본 것이다.
신살(神殺)은 신역절기로 이룰 수 있다!
그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서 보았다!
종말에 나와 함께 신과 싸워줄 100명의 절대고수들을 동료로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니 - 이 어찌 희망이 아닐까!
“살아있기를 잘 했어….”
바로 그 때였다.
“백웅. 당장 죽어라.”
옆에 있던 천우진이 날카로운 어조로 나를 노려보며 어디에선가 소환한 칼을 내 목에 들이대었다. 내가 눈을 꿈벅하고 있자 천우진은 칼날의 손잡이를 내 쪽으로 주며 크게 말했다.
“빨리!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왜, 왜 그러냐.”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래?
죽긴 죽을 건데 이렇게 허겁지겁 칼부터 내밀다니!
“빌어먹을…. 설마 이렇게까지 촉박할 줄이야. 네놈 판단이 맞긴 맞았군.”
“뭐?”
천우진이 이를 악물더니 천공을 보며 말했다.
“지금… 바로 여기에 황제 공손헌원이 강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