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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항아의 말에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어째서 [매듭]을 다시 시작해 주겠는가. 이번에 재시작하면 어떤 함정을 파서 내 전생을 끝내버릴지 모르는데! 제갈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항아의 말대로 망량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망량이 무슨 생각으로 전륜성왕의 권능을 내게 줬는지 듣고 싶다.
그 이유는 믿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망량이 나를 배신했을 리가… 없어.’
저 놈도 자신의 구구절절한 억측이라고 했다. 저 놈의 말이 틀렸다는 걸 망량의 입으로 듣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심중에서 끓어오르는 믿을 수 없는 생각을 눌러버리고 싶다.
알면서도 솔깃하게 되는 함정.
항아는 내 마음의 빈틈을 정확하게 찔러버린 것이다.
“…….”
내가 주먹을 꾹 말아쥔 채 침묵하자 항아가 도리어 여유롭게 의자에 몸을 뉘이며 말했다.
“전에도 말했죠? 여기서 시간은 넉넉하다고…. 충분히 고민하고 답을 주세요.”
“잘난 체 하지 마.”
“후후, 제가 이미 진 상황인데 잘난체 할 게 뭐가 있을까요.”
항아가 싱긋 웃었다.
“오로지 [당신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세요. 그거면 돼요.”
“…….”
못 당하겠다. 저 녀석은 확실히 고단수다.
어설프게 자신의 권능과 격에 취해있는 신성들과는 달리, [약자]의 입장 또한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놈이며 무엇보다도 똑똑하다. 저렇게 교활한 놈을 상대로 으름장놓고 분노해봐야 나만 손해인 것이다.
‘아, 그래!!’
순간, 나는 좋은 생각이 나서 제갈사를 돌아보며 외쳤다.
“제갈사!”
“왜 부르냐?”
“여긴 [꿈]이니까 원하는 대로 뭐든 나온다고 했지! 그러면 망량을 이 자리에 불러 줘!!”
“호오….”
제갈사는 무표정하게 의자손잡이에 궐련을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내 외침에 항아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명백히 동요한 표정이었기에 나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놈 말대로 [매듭]을 재시작할 필요도 없이 그 망량을 통해 진심을 듣겠어!”
이것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후욱
그러자 제갈사가 궐련에 불을 붙이고는 한 모금 빨았다.
“백웅 치고는 간만에 머리를 잘 굴렸군. 칭찬해주지. 평소라면 절대 떠올릴 수 없을 발상일 텐데 이것도 대우주의 의지라는 건가.”
무언가 취한 듯한 얼굴의 제갈사가 내 말에 대꾸했다.
“허나 정말 그걸로 좋은가, 주군?”
“뭔가 문제라도 있어?”
내 반문에 제갈사가 천천히 말했다.
“[매듭]이 [꿈]이며 그 꿈을 꾸게 만든 게 항아라면 그 꿈의 주도권은 저 놈에게 있다. 또한 나도 일개 등장인물일 뿐이니, 내가 꿈속에서 불러낸 망량은 결국 내가 생각하는 망량의 이매지너리 아바타(imaginary avatar). 내 주관이 듬뿍 반영된 나만의 표상(icon)으로서의 망량일 뿐이다.”
“……? 무슨 말이야. 어려워서 잘 이해가 안 돼.”
“즉, 내가 불러낸 망량은 내가 평소에 알고있던 망량일 뿐. [꿈] 내부에서 실제로 활동하던 망량 그 자체일 수는 없어. 그래서 내가 망량을 불러낸다 하더라도 망량의 진의(眞意)는 알 수 없단 거다.”
“……!!”
“꿈이란 게 원래 그렇지. 꿈에서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걸 마음껏 구현할 수 있으나 그게 실체의 존재와 같은 존재는 아니잖나. 꿈에서야 황제 공손헌원 불러내서 뺨도 때릴 수 있겠지만 그게 진짜는 아니지.”
나는 제갈사의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이 공간은 현실과 완전히 괴리되어 있다는 건가?”
“처음부터 깨닫지 못했나? 이혼대법을 쓰지 않으면 나조차도 네가 이 공간에 오는 순간을 절대로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꿈]이면서 현실과 독립되어있다는 건 사실이야. 그러므로 네게 전륜성왕의 자리를 넘겨주고 나서 소멸했던 망량을 여기에 소환할 방법따윈 존재하지 않지.”
“…….”
나는 참혹해진 얼굴로 제갈사의 말을 듣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런 것까지 다 설명해 주는 거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환해줬다면, 그걸로, 그걸로 되는 거였잖아!!”
“뭐가 된단 말이지?”
“그냥, 그렇게, 납득하고…. 29번째 생으로 넘어가면 되는 거였잖아!! 대체 왜….”
지금 제갈사가 해 준 설명은 도리어 항아에게 유리한 것이다. 제갈사가 딱히 저 설명을 해 주지 않고 시키는 대로 망량의 표상을 소환해 줬다면, 거기서 망량의 속내를 듣고 나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제갈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실을 털어내어서 손쉬운 길을 봉쇄해 버린 것이다.
대체 왜?
그러자 제갈사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난 이기적인 놈이라서 나중에 네게 책잡힐 짓은 하고 싶지 않아. 지금 설명 안하고 대충 넘어가면 손쉽게 항아를 이길 수 있겠지만, 결국 너는 계속해서 찝찝함을 지닌 채 전생하게 되겠지.”
“아, 아니 그건.”
“그 때 진짜 망량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냐는 생각이 계속될 거다. 수천 년이고 수만 년이고 머릿속에서 수십만 번 맴돌겠지…? 마지막에 가서 네가 가장 원망하게 되는 건 결국 항아나 망량이 아니라 나겠지. 왜 나한테 그 때 설명하지 않았느냐고 원망할 거야. 너라면 틀림없이 그러겠지.”
“……!!”
“내게 진실의 책임을 떠넘기지 마라, 주군. 할 거면 확실하게 진실과 마주 보고 이겨내란 말이다.”
크윽…!!
나는 제갈사가 가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내게 자기자신을 성찰하고 편법을 이겨내길 원한다는 마음도 느껴졌다.
그러자 듣고 있던 항아가 웃었다.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군요, 제갈사. 당신 스스로도 백웅이 진짜 망량을 대면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 지는 짐작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요?”
“크크크!! 인정하지. 이렇게까지 몰아붙였으니 저 빡대가리가 지금 무슨 선택을 할진 나도 잘 모르겠다.”
순순히 항아의 말을 인정한 제갈사가 궐련의 타들어간 끝단을 톡톡 털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군을 믿는 게 일류 책사라는 거지. 너같은 삼류는 하지 못할 선택이겠지만.”
“…….”
도리어 한 방 먹은 표정을 지은 항아였다.
나는 하나의 방법이 막힌 걸 생각하자 의자에 앉아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방금 전 말한 것 이외에는 딱히 진짜 망량의 마음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과거의 내 동료가 [큰 굴레]를 넘었던 사례가 없었던 건 아냐. 과거 미호가 굴레를 넘어서 내 앞에 나타난 적이 있었어. 하지만 그게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었던 건지는 전혀 알 수가 없어….’
문제는 앞으로도 내 전생의 횟수가 쌓이게 되면 더더욱 과거 전생의 망량을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이다. 의도해서 과거의 동료를 소환할 방법이 없는 이상, 이 [매듭]을 포기하면 망량의 진짜 뜻을 확인할 방도가 사라지는 건 어차피 같다.
나는 문득 생각나서 다시 한 번 제갈사에게 말했다.
“…제갈사! 어차피 [매듭]은 [꿈]이라고 했잖아. 그럼 내가 [매듭]을 재시작한다고 해도 거기에 등장하는 망량도 진짜 망량은 아니지 않을까?”
“흐음. 넌 자꾸 내가 항아를 변호하게끔 만드는군. 뭐 상관없지만….”
제갈사가 궐련을 한모금 빨아들인 후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꿈]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독립된 자의식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지. 진짜 망량의 의지를 확인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항아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네게 승부를 건 것이고.”
“뭐? [꿈]인데 어째서….”
“백웅. 이것까진 굳이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만….”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나도 방금 전까지 [매듭]에 속해있던 꿈속의 등장인물이다. 하지만 항아의 의지를 무시하고 나타나서 이 공간에 모습을 드러낸 거지. 항아 자신이 꿈의 존재를 모두 통솔할 수 있다면 굳이 나같은 놈을 조작해서 자폭을 하진 않겠지? 미치지 않은 바에야.”
“……!!”
“산하사직도 내부에 있던 복희도 마찬가지였지. 그 자는 꿈 속의 존재였지만 완벽하게 자의식을 지니고 황제를 엿먹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싸웠다. [꿈]이긴 하지만 그 꿈 내부의 존재를 통솔하고 조종할 능력은 항아에게 존재하지 않는 거다. 그저 [시작]할 권한밖에 없는 거고.”
그 말에 항아가 신경이 거슬린 듯 눈썹을 꿈틀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나는 항아의 표정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말을 더듬거렸다.
“아, 아니 그건….”
“큭큭큭… 뭐 문제라도 있나?”
나는 아연해져서 제갈사에게 말했다.
“네, 네가 꿈 속의 인물이란 걸 인식하고도…. 어떻게 그렇게 멀쩡한 거야?! 그 말은 내가 [매듭]을 무시하고 29번째 생을 시작하게 되면 제갈사 너는 그대로 소멸한다는 말이잖아!!”
“그렇게 되겠지.”
“뭐가 그렇게 담담해?!”
내가 경악하고 있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크크큭…. 내가 딱히 특별한 건 아니야, 주군. 어차피 네 전생(轉生)의 기억을 보아왔던 네 동료들은 지금과 다를 바 없는 기분을 처음부터 느낀 셈이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뭐?”
“네가 죽으면 세상이 끝나고 새롭게 모든 게 시작된다. 이전 회차의 [나]의 기억이 그대로 전승되는 것도 아니니까 전생동료의 눈에는 이 세상이 처음부터 [매듭]처럼 보이는 현상이 생기게 되지. 본의 아니게 처음부터 전생동료들은 [액자]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게 크나큰 마음의 충격이 되진 않는 거다.”
“…….”
“복희의 말이 딱 이 상황을 설명해 주지. 액자가 현실인가 꿈인가…. 단지 그 차이일 뿐. 그것조차도 내가 현실과 꿈의 차이를 인식할 수도 계승할 수도 없다면 무지몽매(無知蒙昧)하며 무의미하지 않나.”
“그렇지만….”
“뭐 흑요석의 마법이 강력한 덕에 정신방어기능으로 좀 더 그 위화감을 수월하게 넘긴 감은 있겠군. 이건 전생동료의 특혜라고도 할 수 있어.”
제갈사의 말투가 무척이나 염세적이었기에 나는 가슴이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없이 덤덤하게 말하고 있지만 결국 나는 흑요석을 넘겨주는 순간 모든 전생동료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는 셈인 것이다.
내가 할 말을 잃자 제갈사가 말했다.
“자, 제반설명은 거의 다 된 것 같군. 이제 선택할 시간이다.”
“잠, 잠, 잠,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아니. 이미 시간은 충분해. 도리어 이런 결정은 항아 말처럼 쓸데없이 질질 끌게 되면 좋지 않다고 책사로써 단언하지. 장고 끝에 악수를 둘 뿐이야.”
“…….”
제갈사의 눈빛이 뱀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네 마음대로 하다가 죽어라. 그것이 바로 전생자의 특권이다!”
“……!!”
빌어먹을…!!
나는 제갈사의 말대로 이젠 선택을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제갈사의 도움으로 승리를 확정하고 이 교묘한 함정을 피해서 29번째 삶을 시작하던가, 아니면 항아의 꾀임에 넘어가서 [매듭]을 시작하던가!
‘정말… 그것밖에는 없는 건가? 또 다른 선택은….’
양자택일의 순간 - 나는 멍한 상태로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아냐….
난 승복할 수 없어….
‘이것 또한 타인이 강요한 양자택일 아닌가…?’
아무리 제갈사가 나를 위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대로는 선택할 수가 없다.
…….
거부하겠어.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난 예전부터 양자택일은 정말 싫어…!!
제기랄!
뭐라도 생각해 봐!!
개소리라도 좋으니까!!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믿을 수 없는 말이 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항아. 넌 혹시 전생(轉生)하고 싶은 거야?”
그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궐련이나 뻑뻑 피우고 있던 제갈사가 처음으로 흠칫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앉아있던 항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내 질문이 천하의 제갈사조차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라는 걸 의미했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항아는 잠시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억측, 이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웃기네요. 제가 왜 전생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거죠?”
항아가 갑자기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기약도 없는 쳇바퀴를 수십 번씩 돌면서 주변사람들이 다 죽어나가고 종말을 막지도 못하는 걸 바랄 거라고 생각하나요? 구원자 행세를 하면서 남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다른 사람을 당신같은 광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요.”
“…….”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아의 말을 들을수록 뭔가 내가 단서를 잡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단지 그 단서가 머릿속에서 이성적으로 정렬되어서 결론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항아의 말에 대꾸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가 [꿈]을 시작할 권한만 있다면, 어쩌면…. 날 배신한 이유가 내 전생능력 때문이 아닐까 하고.”
“설마요. 그런 건 줘도 갖지 않아요. 자의식이 비대하시군요.”
“정말로 줘도 갖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 있어?”
“…….”
항아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낭패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옆에서 보고 있던 제갈사가 참지 못하고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런가, 그런 거였던가!!”
맹세할 수 없다는 것.
나는 뜻밖에 중요한 걸 캐어물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항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누군가]와 거래한 이유. 그건 그 놈한테 승리를 안겨주는 대신에 네가 전생자(轉生者)가 되려는 거였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완전히 되는대로 내뱉은 말인데 뜻밖에 맞아떨어진 것뿐이다.
하지만 그걸 알게 된 이상, 나는 위에서 말했던 양자택일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내가 그걸 깨닫고 연속해서 질문을 하려고 입을 열자 항아가 갑자기 빠른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일 것 같군요.”
후웅
갑자기 항아의 모습이 이 공간 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마치 울리는 듯한 소리가 이 공간 전체에 울려퍼지는 게 느껴졌다.
[난 백웅 당신을 인정할 수 없어요. 그 능력을 그렇게 썩히느니 내가 가지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뭣….”
[내가 그걸 가진다면 나는 [그 때]부터 다시 시작해서 훨씬….]
갑자기 항아의 말이 멎었다.
쿠구구구!!!
갑자기 이 공간 전체에서 시꺼먼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며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지진이 일어나서 부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
“예상대로 가는군.”
제갈사는 전혀 놀라지 않은 기색이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상대로라니?”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면 저 여우같은 놈이 태연하게 네 선택을 유도나 하고 있을 리 없지. 죽음이 해법이란 걸 알았어도 이 공간에서 목에 칼을 꽂는 것만으론 자살할 수 없단 거다. 완전히 이기려면 한두 번 더 모험을 해야했지.”
“에엥?! 그걸 알면 진작 말해주….”
“말하면 말하는 대로 저 놈이 대응했겠지. 반응을 좀 봐야 했어. 그리고….”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제갈사가 궐련을 손가락 사이에 쥔 채 말했다.
“백웅. 망량의 진짜 뜻을 알고 싶다는 마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나?”
“…….”
“여기까지 왔으니 책사로서 네가 어떤 선택을 할지 보고 싶었다. 그것뿐이다.”
“솔직히…. 모르겠어. 지금도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는….”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말했다.
“하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야!!”
방금 전 항아와 대화하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나는 내 각오를 분명하게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마찬가지라니?”
“나는 그의 주군이다. 망량이 어떤 선택을 했든 그건 그를 동료로 받아들인 내가 감내해야 할 일이야! 그 선택을 신뢰하겠어!”
그 말에 제갈사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진심으로 널 배신했더라도 말이냐? 그 배신이 네 전생을 끝내버릴 수 있을 만큼 치명적이었다 해도 말이냐?”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 망량이 배신했더라도 그건 나 때문이야! 그러니까 난 돌아보지 않을 거다. 과거는 과거로 넘기겠어!”
“호오…. 진심으로 보이는군. 설마 등에 짊어진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나? 세상을 구하기 위한 명분으로 진실을 외면하는 게 아닌가?”
“아냐!! 내가 짊어진 것 따윈 상관없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난 망량을 믿어!! 그건 주변상황이 어떻게 바뀌든 달라지지 않아!”
“…….”
제갈사는 잠시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감돌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궐련의 재가 계속 떨어져서 손가락 근처가 시꺼멓게 되었을 때 궐련을 손가락으로 튕겨내며 말했다.
“천하의 바보천지. 실로 우둔한 주군이지만 그렇기에 나의 주군이구나…. 크크큭.”
“제갈사!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 줘!”
“큭큭, 좋아.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제갈사가 눈을 빛냈다.
“망량선사의 이름을 불러야만 이 공간에서 [자살]할 수 있는 거다. 기억나는가?”
“……!! 아!”
나는 그 순간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났다.
[네가 이제부터 어떤 일을 겪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 서(書)가 횡포를 부린다면 나의 이름을 불러라. 네가 [매듭]에 갇히는 걸 막아주겠다.]
[꼭 기억해 두어라. 네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나 또한 끝을 보지 못한다.]
내가 처음으로 죽음을 앞두고 진소청 앞에 갔을 때의 일.
그 때 진소청과 이야기를 한 후 망량선사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 때 망량선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이제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서의 횡포.
그것은 바로 항아가 내게 일으킨 반란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맞아. 하지만 그 이후 망량선사의 이름이자 진명을 알지 못하기에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었는데….”
“앞뒤 따질 때가 아니다. 그냥 있는 힘을 다 해서 불러버려.”
“뭘? 그냥 망량선사를?”
제갈사가 히죽 웃었다.
“그래. 생각해보면 당연하지 않나? 망량선사는 기억상실에 걸려 있다.”
“아!”
“자기조차 자기 진명을 알 리가 없지. 그럼 당연히 망량선사라는 가명을 부르라는 말인 거다.”
“그, 그렇군.”
왜 그렇게 간단한 걸 간과했을까? 아마도 망량선사이다보니 터무니없이 어려운 이야기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이었으리라. 나는 즉시 망량선사의 이름을 외쳐부르려다가 멈칫했다.
“…….”
“왜 그래? 빨리 해.”
“하지만 이걸 하면….”
[매듭]이라고 하는 [꿈] 속의 등장인물, 제갈사는 사라진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내게 최대의 도움을 주었던 동료가 소멸되는 것이다.
“큭큭큭…. 여기까지 와서 쓸데없는데 연연하는군.”
제갈사가 광소를 흘렸다.
“말했지…. 모든 전생동료는 어차피 액자를 인식하고 있다고. 지금 내가 사라지더라도 처음부터 그건 각오했던 일이다. 내가 한 줌의 꿈일지언정 꿈의 본질에 저항한 것만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크크…. 망설이지 마. 어차피 순탄하게 망량선사를 부르는 것만으로 끝나진 않을 거야.”
“뭐?”
제갈사는 마치 허공에 뭔가 존재하는 것처럼 노려보며 말했다.
“항아가 [꿈]을 시작한 존재라면 어떤 식으로든 반항을 하겠지. 전생자에게 한 번 반란을 시도한 이상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으니, 처절하게 반항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곧 사라질 나는 그 싸움을 도와주지 못할 거다.”
“…….”
“너 혼자만의 힘으로 이겨야 해. 항아의 힘을 생각해 보면 쉽지 않을 거다.”
그렇게 중얼거린 제갈사가 말을 이었다.
“굳이 내게 보답하고 싶다면…. 이겨라. 그리고 이겨서 너를 이용하려 한 모든 놈들에게 엿을 먹여줘라!”
나는 제갈사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 순간 - 나는 목이 터져나가라 외쳐 불렀다.
“망량선사!! 이 꿈에서 깨어나게 해 다오!!”
파지직
그러자 주변의 공간에서 마치 거미줄같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어둠이 저편에서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눈앞에 있던 제갈사의 신형이 마치 거대한 물결파장에 이지러지는 것처럼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정말로 이게 [꿈]이었기에 꿈 속의 제갈사는 소멸되는 것이다.
“……망량선사!!”
다시 한 번 외쳐부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뭔가가 목에서 차오르는 걸 느꼈다.
제갈사는 이미 소멸되었다는 걸 인지한 순간 - 그가 내게 무엇을 남기고 갔는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광기.
모든 도리를 무시하고 나아갈 수 있는 미친 정신이 내게 깃든 것 같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갈사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콰칭!!
세 번째 부름을 시도하기 직전, 모든 시공간이 깨어지며 마치 외우주로 넘어갔을 때 느꼈던 것 같은 새하얗고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곧이어 흑백(黑白)이 반전된 것 같은 기묘한 세상 속에서 발 밑에 무수한 구름의 대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지평선에서부터 [무언가]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한없는 백색으로 뒤덮힌 천녀(天女). 혼돈이라는 이름의 비단을 두른 듯한 얼굴없는 여인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그 천녀는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던 비단을 통해 색(色)을 부여받았고, 그 색깔로 인해 점차 칠색(七色)의 파장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 존재가 날개옷과 함께 구름의 대지에 발을 딛으며 말해왔다.
[나는 천암비서의 단말. 아무리 망량선사라 하더라도 더 이상은 [매듭]을 풀 수가 없어요. 천암비서가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아요.]
“…….”
[당신의 전생은 여기서 끝입니다.]
치링!
나는 양 손에 쌍요를 소환했다. 이걸 [꿈]이라고 제대로 인식했기 때문일까? 어느 새 토요와 월요는 내 주변에 둥둥 떠 있었다. 뭐든지 생각한 대로 소환할 수 있다는 제갈사의 말이 진짜였던 것이다.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널 죽이면 나갈 수 있다는 거군.”
[정말 그래야만 하나요? 나가봤자 기다리는 건 항우의 손에 피떡이 되어 죽어가는 현실뿐인데.]
“여기까지 와서 추하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가.”
[생각해 보시죠. 당신은 전륜성왕의 권능과 옥황상제의 지위를 얻어 삼계의 지배자가 되었어요. 종말만 잘 넘긴다면 일만 년이 아니라 십만 년이라도 영세영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존재가 될 수 있어요. 인류는 물론이고 무수한 외계종족과 이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우주의 절대자가.]
“…….”
[[꿈]과 현실에 무슨 차이가 있죠? 가장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데…. 당신이 수백 수천 번 전생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번만한 기회가 올 것 같습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항아의 말 속에서 필사적인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가장 행복한 꿈이라면… 그 꿈을 깨어날 때 가장 불행한 지옥이 찾아오겠지.”
[…….]
“잔말말고 덤벼라, 항아.”
나는 검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그토록 전생자가 되고 싶다면 선배로서 시험해 줄 테니까!!”
다음 순간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