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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꿈?!
꿈이라고…?!
나는 경악하며 외쳤다.
“말도 안 돼!! 꿈일 리가 없어!! 그 모든 일들이 꿈이라니... 이렇게 생생한 꿈이 어떻게...”
“산하사직도와 같아.”
내 말을 냉정하게 자른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그 꿈을 꿈이라고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현실]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 뿐. 그 외의 모든 오감으로는 절대 구분할 수 없지. 또한 꿈에서 일어났던 일이 고스란히 현실에도 반영되는 성질을 생각하면, 마냥 [가짜]라고 부정 할 수만도 없는 거다. 속을 수밖에.”
“…….”
“그렇다면 네게 [꿈]을 여행하게 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속일 거 같나?”
“어떻게냐니….”
“네가 산하사직도에서 구분 안 될 정도로 실감나는 체험을 하면서도 그게 꿈이라고 인식했던 건 현실과 완전히 다른 초고대의 시공간이었기 때문이었지. 인류문명이 시작되기 전의 선사시대니까 당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 아냐? 하지만 만일에 지금의 현실과 똑같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꿈에 덮어씌운다면 너는 절대 구분할 수 없지 않겠나.”
“…허억….”
“그게 바로 지금이다. 넌 이미 꿈 속에 있었어.”
나는 제갈사의 말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 그 말 대로야.’
산하사직도에서는 내가 [현실]에서 [족자] 내부로 들어갔다는 확실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꿈의 세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이 현실과 똑같은 시공간의 꿈으로 들어간다면 나는 절대로 알아차릴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죽음]이라는 과정을 자주 겪는 네가 [굴레]를 돌린다는 핑계로 재시작을 한다면 [꿈]이 시작된 걸 눈치챌 수 있을 리가 없지…. 하도 그런 건 익숙해져 있으니 그러려니 할 수밖에.”
“…….”
제갈사가 힐끔 항아 쪽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저 녀석은 또한 네게 [단서]를 줄 때 이렇게 말했었다. [매듭]에서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넌 그렇게 움직일 운명이었다고….”
“그랬었지.”
“난 그걸 듣고 정말 이상하게 느꼈다. 왜냐하면 넌 이미 영귀에게 인증을 받았거든.”
“응? 무슨 말이야?”
“무무(無無)의 괘(卦). 기억나지 않나?”
“아!”
내가 제갈사의 말에서 뭔가를 깨닫고 얼굴이 딱딱하게 굳자 제갈사가 싸늘하게 웃었다.
“점술사에 있어서 최종의 괘이자 점술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절대적 중립과 절대적 혼돈을 의미하는 괘. 그건 바로 그 어떤 존재도 이제 백웅 너의 운명을 읽거나 판단하거나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였지.”
“…그, 그렇지만 항아의 말대로라면….”
“모순(矛盾). 앞뒤가 안 맞지. 최종의 괘는 절대적인 운명의 혼돈을 이야기 했는데, 어째서 [매듭]에서 모든 게 정해져있다고 말할 수가 있지?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항아가 뭐 있어보이는 신비한 존재라지만 우주최고의 점술사 중 하나인 사대신수 영귀가 내놓은 최종의 괘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해석을 할 순 없다.”
“그렇군….”
“항아는 이 매듭 내에서 전생자처럼 마음껏 행동하거나 힘을 쌓을 순 없지만 [매듭]이 일방통행이라고 잘라서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이 시공간이 정상적인 시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이 모순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오로지 [꿈]뿐이라고 생각했었지. 설마 항아가 삼황오제나 모든 신격을 속일 수 있는 [큰 굴레]를 진짜로 돌린 것도 아닐 테니 가능성은 그것밖에 남지 않아.”
제갈사의 말이 이어졌다.
“당연히 [매듭] 내에서의 운명은 정해져있을 수밖에. [꿈]이잖아? [꿈]을 꾸게 만드는 존재가 누군가와 작당을 하고 너를 몰이사냥하는 중이라면 당연히 하나의 방향으로 몰아넣는 중이겠지? 바로 거기에서부터 깨달은 거다. 바로 항아가 네게 [꿈]을 꾸게 만들고 있는 존재라는 걸.”
“……!!”
나는 제갈사의 말을 그제서야 이해하고는 전율을 느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넘어갔던 항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교묘하게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고, 나는 항아를 싫어하고 의심하면서도 정작 이 [현실], 그리고 [죽으면 안 된다]라는 명제를 의심할 수는 없었다.
‘항아는 도리어 내가 자신을 미워하고 의심하길 바랐던 거 아닐까? [상황] 그 자체를 의심할 수 없도록…!!’
항아 개개인에 집중하여 미심쩍어 할수록 그 외의 것을 돌아보는 건 힘들어진다. 실제로도 나는 언제 어떻게 항아를 내칠 수 있을지는 고민했지만 죽음이라는 명제 자체를 의심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사소한 모든 언행, 행동 하나하나가 항아의 계략!
그리고 제갈사는 그 계략의 허실을 짧은 순간에 간파해서 최선의 책략을 짜고 즉시 행동에 나선 것이다!
제갈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늪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으리라.
내가 멍하니 있을 때 제갈사가 손깍지를 꼈다. 그는 어느 새 손에 차가운 아이스티를 들고 있었다.
꿀꺽
제갈사가 여유롭게 아이스티를 한모금 마시자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야. 아까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런 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여기 의자는 어떻게 소환했고 아이스티는 어떻게…. 마법이냐?”
“멍청한 우리 주군.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라도 알아들었으면 좋겠는데…. 큭큭큭.”
제갈사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말했다.
“항아가 여긴 신력도 기력도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했지. 그건 맞는 말이야. 왜냐하면 여긴 꿈속이잖아.”
“……?”
“꿈이니까 상상만 하면 뭐든 나온다. 꿈이란 게 원래 다 그런 거 아닌가?”
우웅
어느 새 제갈사는 커다란 궐련 하나를 소환해서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아, 아니 의념도 안 써지는데 그게 무슨…. 난 그렇게 안 되는데!”
“단 - 한 가지 전제조건이 있지.”
“전제조건?”
“이게 [꿈]이라는 걸 인식할 것.”
“…….”
“윤회의 도정이니 뭐니, 너는 어쨌든 항아의 개소리 때문에 이걸 [현실]으로 인식하고 있었지. 그러면 안 되는 거다. 대충 마음 편하게 꿈을 즐기는 자가 이 공간에선 가장 강력하다는 거지.”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제갈사가 말한대로 이게 꿈이라고 의식해 보았다. 그리고서 내 동료들을 소환해보려 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제갈사에게 외쳤다.
“안 되잖아!”
“멍청한 우리 주군. 그렇게 허술한 거면 항아가 널 속일 수 있었겠나? [인식]이라는 건 진정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빗장을 허물고 신념할 수 있어야 하는 것. 머리로는 꿈이라고 생각해도 백웅 너는 아직도 이게 꿈이라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거다. 아직도 전륜성왕 권능이 어떻느니 개소리를 하고 있으니.”
“…….”
“뭐 당장 바꿀 수 있진 않겠지. 아직도 할 얘기는 남아있으니 얌전히 들어보라고.”
“알았어….”
나는 제갈사의 말에 다시금 의자에 풀썩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갈사는 음충맞은 표정을 지으며 항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다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기더군. 그건 바로 항아 네가 움직이는 게 과연 [천암비서] 그 자체의 의지인가…? 이건 정말로 중요했다. 만일에 천암비서 자체가 백웅을 적대하는 거라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힘들어질 수 있었거든.”
항아는 대답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제갈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의심은 곧 풀렸다. 왜냐하면 항아 네가 백웅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아 각성했을 때의 상황이 생각났기 때문이지.”
“무슨 상황을 말하는 거죠?”
“서(書)는 백웅의 부름을 반긴다고 했었지. 나는 이혼대법으로 백웅의 이목을 함께 하고 있었기에 기억이 난다. 그건 적대하는 자에게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
“…….”
“여기서부터는 합리적이지 못한 추측의 영역이지만, 천암비서 그 자체는 백웅에게 별다른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다만 백웅이 원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중립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지.”
“근거가 있나요?”
“항아 네가 이름을 지음받을 당시, 제관을 쓴 존재가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했었지. 그게 마왕인 내게는 소환(召喚)으로 보였다.”
소환?
듣고 있던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제갈사에게 말했다.
“소환이라고?”
“그래. 다른 놈들은 마도에 익숙지 않아서 발상을 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건 전형적인 공양의식 후 제물을 대가로 다른 피조물을 소환하는 모습이었다. 즉 천암비서는 제관을 쓴 존재를 소모하여 제물로 삼고 그 대신에 항아를 내려준 거지.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모르겠어.”
“아무리 악랄한 마도의 존재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공양의식으로 바쳐진 대가가 있다면 소환자에게 충분한 대가를 제공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주의 법칙. 하지만 만일에 적대적인 존재라면 처음부터 공양의식을 받아주지 않아. 왜냐하면 공양의식의 대가로 장난치거나 해꼬지를 할 경우 그 자신이 피해를 입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쓸 수 없다는 것.”
제갈사가 씨익 웃었다.
“소환의식이 성립했다는 것 자체로 항아는 네게 제공된 [이득]인 것이다. 천암비서는 적어도 이 시점에서 백웅 너의 적대자라곤 할 수 없어. 내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네가 산하사직도 내에서 각성했던 혼돈의 재능이 천암비서에 영향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지.”
“혼돈의 재능…? 아!”
그러고보니 그랬었지!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의 도움으로 나 또한 혼돈의 재능을 각성하는 제단에 올라갈 수 있었는데, 그때 그들의 입으로 내게는 소환의 재능이 생겼다고 들은 바가 있었다! 내가 기억을 더듬거리자 제갈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아가 네게 해를 끼치고자 강제로 [매듭]을 강요한 건 사실…. 즉 천암비서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말이 제맘대로 움직이는 경우일 가능성이 크다. 소통이 되지 않는 거지.”
“으음.”
“항아가 네게 이름까지 지음받았는 데도 어찌 이런 배신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다. 이것만큼은 알 수가 없군.”
제갈사의 말을 항아가 그 때까지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훌륭하군요. 설마 그 조그마한 단서로 여기까지 유추해내다니.”
“크크큭…. 할 말이 있다면 해 봐. 어떤 수를 쓸지는 짐작이 되지만.”
“그러지요.”
항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문득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 망량이 당신을 배신한 이유를 알고 있나요?”
“…….”
뭐……?
나는 순간적으로 뺨을 후려맞은 듯한 충격에 정신을 놓고 말았다. 말 그대로 누가 칼로 찔러도 못 알아챌 정도로 넋이 나가버린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바보라도 들으면서 대충 눈치챘겠죠. 당신에게 전륜성왕의 권능을 밀어준 게 망량 - 제 계획을 거든 건 바로 그입니다. 망량이 돕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올 순 없었어요.”
뭐라고 하는 거야.
망량이 나를… 배신…?
옆에 있던 제갈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귀에 울린다.
“예상대로 나오는군. 의도가 눈에 딱 보여. 그렇게 마지막 역전을 노려보겠다는 건가?”
하지만 제갈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딱히 항아를 제지하진 않았다.
나는 그게 무슨 태도인지 잘 알고 있다.
제갈사는 - 여기까지 와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게서 왕의 자질을 시험하는 것이다.
“백웅. 내 말을 잘 들어요.”
항아는 빙긋 웃으면서 내 눈을 마주쳤다.
“나와 망량은 동료는 아니에요. 하지만 나와 손을 잡은 존재가 망량에게 아주 오랫동안 손을 뻗쳤죠…. 그래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이 사라졌던 수백년 내내, 황제의 유물을 수득해서 대성한 망량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 거예요.”
“…….”
“노골적이진 않았죠. 그러나 계속해서 망량의 정신은 계속 흔들렸습니다.”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항아의 말이 이어졌다.
“흔들린 이유는 당신에 대한 충성심과 의리가 약했기 때문이 아니에요. 도리어 그 반대였죠.”
“개소리하지 마.”
“백웅. 당신은 아직도 진공가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개소리하지 말라고!!”
쉬칵!!
나는 나도 모르게 검을 들고 항아를 베었다. 하지만 항아는 내가 벤 자리에서 환영처럼 사라져 있었고 반대편에 나타나 있었다. 다시금 천천히 걸어와서 어느 새 제갈사처럼 의자를 소환한 항아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 알고 있어요. 망량선사가 당신의 꿈에서 두 가지 제안을 했었다는 걸. 그 때 당신은 뭐라고 말했었죠?”
“기억 안나! 씨발!”
“[이 세계의 종말]과 [행복한 결말]. 당신은 아무것도 택하지 않았어요. 그건 달리 말하자면 인간이 종말을 유예하여 1만년 동안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거부했다는 뜻이었죠.”
“…….”
“왜 거부했나요? 정말로 이 세상의 진정한 구원을 위해서라면 현생인류 100억의 미래는 중요하지 않았던 건가요? 그들은 전생자가 아니기에 지금 자기자신의 생이 가장 중요할 텐데, 당신의 이상(理想)에 생존권을 짓밟힌 게 아닌가요. 오로지 전생자 당신만이 생존권을 결정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항아의 눈이 달빛처럼 휘어져서 웃는 게 보였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요이(妖異)하여 섬뜩하기까지 한 미소였다.
“벌레같은 인간들에게 [옛 지배자]가 외신이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문제일까요? 그것보단 당장 종말을 피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는 게 더 중요하겠죠.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악마도 될 수 있는 인간들에게 너무 고고한 잣대를 들이대신 게 아닌지요?”
“알았다. 더 개소리를 한다면 난 당장 자살하겠어.”
스릉
내가 목에 칼을 들이대었다.
아무리 내가 바보라도 지금 상황에서 뭐가 중요한지는 알고 있다.
바로 내가 자살하는 것.
자살해버려서 28번째 삶을 끝내고 29번째 삶을 시작하는 것 -
단지 그것만으로도 항아와 [누군가]의 계획을 박살내버릴 수 있다.
그걸 알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갈사가 시종일관 느긋하게 있었던 것이다. 이미 제갈사가 내게 항아의 계획을 다 설명해준 시점에서 이긴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 행동에 항아는 움찔하더니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생자 백웅. 당신은 100억이 죽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거예요. 이미 인간이 아니에요…. 그리고 망량은 당신의 길을 거부한 겁니다.”
“…….”
“인간이 아닌 길을 거부한 거죠.”
멈칫
나는 칼을 목젖 안쪽까지 밀어넣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도저히 항아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망량이 그럴 리 없어.”
“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망량에게도 흑요석을 줬어. 그리고 지금까지의 내 기억을 모두 받아들이고 내 진공가향에 동참하겠다고 했다고. 그게 500년 전의 일이다. 망량은 자기의 신념으로 내 길을 따라오기로 했던 거란 말이다!”
내 외침에 항아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정말 그럴까요? 방금 전 제갈사가 좋은 말을 했었죠…. 당신의 동료들에게 있어서 이번 생은 자기의 현실이기에 쉽사리 당신에게 자살하라는 권유를 하지 못한다고.”
나는 콧김을 뿜으며 항아를 비웃었다.
“겨우 그걸 갖고 말하는 건가? 내 동료 망량은 그렇게 그릇이 좁은 인간이 아니야. 자기자신의 목숨 따위는 초개처럼 여기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다!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날 배신하거나 하진 않는다고! 절대로!”
“…….”
“내 목숨도 걸 수 있어!”
내가 자신있게 말하자 항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요. 망량이 진정한 의인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당신을 배신한 거예요.”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뭐?”
항아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했다.
“의(義)란 무엇이죠? 기약없는 영겁의 싸움 속에서 우주적 존재들의 수싸움을 이겨내어 [옛 지배자]가 사라진 청정한 세상을 보는 게 정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나요? 그건 당신, 전생자만의 정의예요.”
이어진 항아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망량의 정의가 자기 눈앞의 가련한 100억 인류를 살려서 행복하게 만드는 거라면 그의 정의가 틀렸다고 할 수 있나요? [종말]에 처참한 운명을 맞게 될 그 자들을 구해주는 게 의(義)가 아니라 하실 수 있는 건가요?”
“…….”
“보통 인간에게 묻는다면, 100명 중 100명은 망량이 옳다고 할 거예요. 종말에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진정한 진공가향에 동조하는 인간은 얼마나 될까요?”
“무, 무슨….”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요? 망량에게 있어서 이번 생의 현실은 자기의 삶인 거예요. 그리고 자기의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100억이라는 목숨의 무게 앞에서…. 그걸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을 지닌 진정한 의인(義人)이었던 거고.”
항아가 살며시 웃으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시대에 광인(狂人)은 당신이에요, 백웅. 미친 주군을 배신한 책사를 원망할 수 있습니까?”
이, 이건, 무슨.
아냐.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진공가향이 진정으로 옳은 길이야. 그렇게 타협해서 살아가봤자 결국 자기위안에 지나지 않는걸 모르는 건가? 결국 [옛 지배자]들의 변덕 한 번으로 처참하게 당하는 처지는 달라지지 않아.
그 ‘손님’의 약속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결국 자기 멋대로 선택지를 줘놓고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농락하면 대체 어떻게 할 거야. 장난감을 어떤 식으로 갖고 놀지가 달라진 것뿐인데.
망량이 그걸 모를 리 없는데…. 망량은 어째서….
“난….”
말이 나오지 않는다.
평소라면 즉시 반박을 하겠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망량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는 현실이 믿겨지지 않아서 나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입으로 논리를 설파하는 걸 넘어서서 육중한 현실이 나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항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대로 당신이 죽는다면 망량의 진의(眞意)는 확인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
“제가 말한 건 구구절절한 억측일 뿐이니까요.”
“뭐라고….”
내가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에 얼굴을 들자, 항아가 전에 없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졌어요. 패배는 인정하죠.”
“…….”
“하지만 당신은 포기하지 말아요. 다시 한 번만 더 해보라구요.”
갑자기 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뭘, 말이야.”
“[매듭]을 딱 한 번만 더 해 봐요.”
그녀의 눈에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한 기세가 감도는 게 느껴졌다.
“이미 당신이 이겼어요. 그러니 망량과 한번 더 이야기해보는 게 어떨까요…?”
“…….”
“당신은 아마 당신을 배신한 이유가 듣고 싶을 거예요.”
그녀의 말이 이어지는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망량 자신의 입으로.”
이것이 나를 [매듭]에 가두려는 마지막 항아의 계략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