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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제갈사의 말에 나는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질문했다.
“제갈사. 어떻게 여기에 온 것….”
“그건 좀 있다 얘기해 주지. 지금부터 해야할 말이 너무 많거든.”
“…알았어.”
제갈사는 손깍지를 끼고 한쪽 무릎을 몸 쪽으로 당긴 자세로 드러눕듯 앉아서는 항아를 권태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그냥 내 혼잣말이니까 대답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말라구. 큭큭큭.”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항아는 제갈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은 불청객입니다. 당장 나가주세요.”
제갈사가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싫은데? 어디 쫓아내 보시지?”
“…….”
“네 입으로 이 곳은 모든 사바세계의 힘이 봉인되는 장소라 했었지. 마찬가지로 네놈도 [단말]일 뿐이기에 여기서 행사할 수 있는 힘은 한계가 있다는 소리. 나같은 불청객을 쫓아내는 건 처음부터 가능할 리가 없어. 내가 그걸 모르고 찾아온 줄 아나?”
“단언해서 좋을 건 없을 텐데요.”
제갈사가 항아를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단언하겠어. 너는 여기서 아무 짓도 할 수 없어.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백웅을 세뇌하거나 직접 조종했을 테니까.”
“…….”
“할 수 있는 거라곤 저 우둔한 백웅을 말빨로 조져서 현혹하는 것 뿐이겠지. 하긴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칠 정도로 상황을 조종할 수 있지만.”
항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이상함을 깨닫고는 말했다.
“…제, 제갈사. 어떻게 그걸 알고 있어? 어떻게 항아가 했던 말을….”
뭔가 이상하다.
제갈사는 방금 전 항아가 했던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는 듯 말했다.
[더욱이 이 공간은 수련이 안 되니까요.]
[신력과 기력을 모두 끌어내 보시길.]
[이 곳은 윤회의 도정이에요. 사바세계의 모든 힘은 무효화되고 오로지 인과율과 선택만이 남는 장소지요. 생각의 자유 외에는 통제됩니다.]
내가 지난 번의 [매듭]에서 이 윤회의 도정 내부에서 무한히 머무르면서 수련해서 강해지겠다고 말했을 때 항아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무리 수련하려 해봤자 모든 힘이 무효화되기 때문에 생각의 자유 외에는 통제되는 공간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항아는 말했었다.
[주인님께서는 이 공간에서 일어났던 일을 공유할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서의 의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윤회의 도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동료들에게 흑요석으로 기억을 담아 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이런 전후사정을 아는 동료들도 매우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어떻게 500년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제갈사가 항아와의 대화내용을 이렇게도 상세하게 알 수 있다는 건가?!
그러자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백웅.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나? 어째서 뇌신류 절세무공 구궁파천뢰의 근간이 이혼대법인지. 내가 어째서 무공에 배교 궁극비전인 이혼대법을 제공해 줬는지를.”
“……?”
“이혼대법의 원리를 생각해 봐라.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은 제갈사의 혼일진대,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는 이 공간에 어떻게 해서 혼이 찾아올 수 있는지를.”
그 순간 나는 뭔가를 번뜩 깨닫고는 눈을 부릅떴다.
“백(魄)……?!”
“큭큭큭큭…. 정답이다.”
이, 이럴수가!
나는 제갈사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는 멍하니 읊조렸다.
“백이 혼을 끌어당기는 이혼대법의 원리…. 서, 설마 너는 나를….”
“구궁파천뢰는 뇌혼(雷魂)을 형성하여 체내에 휘돌게 하는 원리로 이뤄져 있지. 그리고 그 수련이 어느정도 성취를 넘어서게 되면 혼백의 형성이 조화를 이루려 하여 시전자 스스로가 백(魄)의 성질을 띄게 되지. 이혼대법 고급과정에서 나한테 이런 걸 배운 적이 있었을 텐데.”
“…….”
어…. 배운 거 같긴 한데 전혀 생각이 안 났어….
어떻게 그런 상황을 상상이나 하냐고….
“그래. 너는 구궁파천뢰의 성취가 높아질수록 인간형태를 한 거대한 백(魄)으로 변화했던 거다. 나는 네 백을 따라서 혼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지, 크크큭.”
나는 아연해서 중얼거렸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게 가능….”
설마 구궁파천뢰를 익힐 수록 나 스스로가 혼백 중 백의 성질을 띄게 된다니!
제갈사가 말했다.
“불가능할 게 뭐가 있지? 그게 바로 이혼대법이다. 네 녀석이 이상한 놈한테 따라갈까봐 내가 미리 만들어 둔 보험이기도 했지. 결국 네게 변고가 생기게 되면 다른 동료들이 흑요석으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니까.“
“그, 그렇다면 설마…. 네가 항아와의 대화를 모두 알고 있다는 건….”
나는 황당해져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내가 구궁파천뢰를 익힌 순간 네 이혼대법에 걸려있었다는 말이야?!”
따악!
제갈사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마주치며 말했다.
“바로 그거다! 그 덕에 나는 지금까지 백웅 네가 보고들은 것들을 모조리 알고 있지. 처음에 구궁파천뢰를 만들 때 넣어놓은 이혼대법의 요결에 나 제갈사가 종사(宗師)로서 인과율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
“흑요석 줄 필요가 없어서 편하지?”
뭐, 뭐가 이런….
절세무공 구궁파천뢰 그 자체가 제갈사가 만들어둔 이혼대법용 미끼였다니?!
내가 황망해져서 입을 떡 벌리자 제갈사가 킬킬 웃었다.
“큭큭큭…. 구궁파천뢰의 위력 자체는 진짜니까 걱정마라. 어쨌든 본론으로 되돌아가서.”
제갈사의 시선은 어느 새 다시금 항아를 향하고 있었다.
“아수라가 했던 말을 어떻게 생각하지?”
“응? 나한테 말한 거야?”
“백웅. 그 녀석이 네가 [매듭]에 대해서 말하니까 한탄하면서 했던 말이 생각나겠지.”
“어…. 그러니까 분명히….”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냥 죽어서 29번째 삶을 시작하는 선택지가 있다고 했었어….”
“그래. 나는 이혼대법으로 지켜보면서 그 녀석이 제일 눈치가 빠르다고 생각했지. 확실히 권능에 의존하지 않는 놈이라서 그런 쪽의 발상 전환이 빨라.”
“…뭐? 그럼 정말 여기서 매듭을 시작하지 않고 죽어버리는 게 정답이란 말이냐?”
“그래. 뭘 어렵게 생각하는 거냐. 전생자 주제에.”
제갈사가 여전히 항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항아의 꼬임에 넘어가서 첫 번째 [매듭]을 시작해 버린 게 실수였던 거다. 코꿰인 셈이지.”
“…….”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으러 내가 온 거고.”
“뭐, 뭐가 실수라는 건지 모르겠어.”
나는 조심스럽게 항변했다.
“내가 매듭을 시작한 덕분에 천계 항우의 시련을 통과했고, 옥황상제와 전륜성왕의 힘을 동시에 손에 넣었잖아! 치우의 몸도 두 부위 빼곤 다 찾아냈고 이대로 종말까지 힘을 키우기만 하면 공손헌원을….”
“물리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거냐? 치우를 부활시키거나 별의별 짓을 다하면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 어떻게든 될 거 아닌….”
내 말에 제갈사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크크큭!!! 이 멍청아. 그깟 항우의 시련 통과 못하면 뭐가 어떻다는 거냐.”
“…응? 아, 아니 그 때 영귀의 점괘 때문에 하루 후에 죽을 운명이라서 도저히 안 할 수는….”
“잘 생각해 봐라. 네가 죽으면 어떻게 되냐?”
“어…. 28번째 삶이 끝나고 29번째 삶이 시작되겠지.”
제갈사가 멀뚱히 나를 쳐다보았다.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
엥?
“그 시점에서 네 녀석은 이미 구궁파천뢰도 얻었고 아이테눔 문디 공략법도 알았고 사공린이 천마로 각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500년 내에 있었던 수많은 정보를 얻었다. 심지어 아수라에게서 암야참까지 배웠잖나? 무엇보다도 산하사직도에서의 경험 하나로 얻을 건 다 얻은 셈이지. 그 때 죽었어도 전혀 아쉽지 않았단 소리야.”
“아….”
“치우의 몸뚱이가 어디있다느니 하는건 몇 번 더 전생을 반복하면 알 수 있는 정보고, 나머지도 그렇게까지 필수적인 것들이었나? 얻고보니 이득이라고 생각할 뿐, 정말로 전생여정을 크게 단축시킬 만큼 대단한 게 있었나?”
“저, 전륜성왕의 권능을 얻었잖아.”
“전륜성왕의 권능…. 대단하지. 하지만 그것조차도 결국은 네가 죽지 못하게 하는 함정이 되어버렸지. 그리고 권능으로 행할 수 있는 게 많을 뿐, 그 권능으로 파생된 중요단서는 그리 많지 않아. 그렇지 않나?”
“…….”
제갈사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마치 나를 비웃는 듯한 미소였다.
“윤회가 되살아나고 촉룡신, 생사부의 존재를 알면 뭐하지? 그건 사실 알든 모르든 큰 상관은 없어. 훗날 강대한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힘을 쌓는 계단으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생을 반복하는 전생자에게 있어서 두번다시 얻지 못할 무언가는 결코 아니란 소리다. 망량이 이번 생에 어떻게든 명계 전륜성왕의 시련을 통과한 이상 언젠가는 충분히 통과할 수 있으니.”
“그…그건….”
“삼황 복희의 조언과 홍균도인, 가면에 대한 해석은 좀 훌륭한 성과긴 하군. 하지만 그 또한 언젠가 복희를 만나면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이제 와서 우리가 복희나 여와 하나 구워삶지 못할까? 다음생부터 우리가 널 돕는다면 길어도 3회차 내에 복희를 면담하게 해줄 수 있다.”
“…….”
“결국…. 매듭 이후 네 행보는 그저 500년간 쌓아왔던 힘을 결집시켜 성과를 얻는 것 이외엔 없었어. 네 전생을 끝낼 수 있는 함정에 걸린 것 치고는 별로지.”
“그, 그런.”
“그리고 그 시점에서 굳이 해법을 말하자면 네 상황을 여와에게 솔직하게 다 말해버리는 방법도 있었어. 그럼 네가 전생자이며 유일한 해법이라고 생각한 여와는 인과율 손해 따위 감수하고 그냥 네 죽음의 운명을 무마해줄 수도 있었겠지.”
“여와가 그랬을 거라고?! 설마….”
제갈사가 피식 웃었다.
“안 했을 것 같나? 안되면 큰 굴레 돌려버리겠다는데 지가 뭘 어쩔거야? 큰 굴레 따라올 힘도 없으면서? 결국 이건 배짱싸움이었어.”
“배짱?”
“여와도 무척 아쉬운 처지였다. 복희가 처절하게 봉인되어 죽어가고 얄미운 황제의 승리를 목전에 둔 자가 뭔들 못하겠어? 충분히 유리한 처지였는데도 넌 그 당시에 전혀 전생자답지 않았어. 죽어도 아쉬울 것 없다는 장점을 발휘하지 못하고 여와의 속내에 끌려다녔다고.”
“…아니.”
“결국 배짱싸움에서 밀려서 여와 좋은 일만 시켜준 거지. 그 당시 서로 쥔 패나 아쉬움을 비교하면 네가 손해 본 거야.”
“…….”
“우리 선조님 제갈량도 당연히 이 정도는 생각했겠지. 하지만 뭐, 현명한 제갈세가 선조답게 주어진 상황 하에서만 최선의 계책을 짰던 모양이군. 빡대가리에 별로 정도 안 가는 네 녀석을 위해 공감해주고 도와줄 생각도 없었겠고. 나랑 달리 딱히 전생동료도 아니셨잖아? 처음부터 넌 제갈량을 이용만 하려 했던데다가 너보고 아두같은 놈이라고 욕을 몇 번 하셨던 걸 보면 속내를 대충 알 것 같군.”
“이익.”
“다른 동료들이야 이런 발상은 잘 못하지. 아무리 네가 전생자라고 하더라도 이번 생의 자기 생은 현실이니까 네게 인생을 재시작하라는 얘기는 쉽게 할 수 없어. 어쨌든 네가 죽는 순간 자기도 죽는 거니까.”
“그, 그런….”
나는 이를 악물었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다.
‘설마…. 내가 이렇게나 상황에 휘둘리고 있었다니….’
내가 멍하니 있자 제갈사가 중얼거렸다.
“물론…. 이건 네 책임만은 아니지. 이 상황은 또한 그 녀석의 의지기도 하다….”
“응?”
“…….”
제갈사는 조금 복잡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항아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항아. 넌 처음부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무슨 거짓말인지 내가 어디 맞춰볼까?”
항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제갈사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뿐.
제갈사는 그게 도리어 만족스럽다는 듯 실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넌 서(書)의 의지로 각성했지만 천암비서와 소통따위 하고 있지 않아. 그렇지?”
“……?!”
나는 옆에서 듣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경악했다.
“어?! 뭐, 뭔 말이야?! 그건 대체….”
“항아. 대답해라.”
그러자 항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눈치 챈 거죠?”
“……!!”
엥?!
항아의 대답에 도리어 내가 놀라자 제갈사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너무 부자연스럽잖아. 28번씩이나 전생한 백웅에게 있어서 지금 항우의 시련보다 훨씬 중요한 시점은 몇 번이나 있었다. 잘만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전생을 축약시킬 뻔한 적도 있었어. 그러나 그 어느 때도 난데없이 [매듭]이라고 하는 새로운 체계가 출현한 적은 없었다.”
“…….”
“[매듭]을 언급하고 따라야 하는 것처럼 주장한 건 천지천상에 오로지 항아 너 뿐. 당연히 네가 중간에 진실을 호도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걸 짐작하지 않겠나?”
“어떻게 호도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거죠?”
“이를테면 말이지, [매듭]을 반복할수록 액(厄)이 반복된다느니 하는 얘기 말이다….”
제갈사가 킬킬대었다.
“거짓말쟁이인 내가 볼 때는 대놓고 거짓말 같은데? 크크크크크큭!!!”
“근거 없군요. 그건 사실이니 억지쓰지 마세요.”
“좋아, 그럼 어디 해 보자고.”
이어진 제갈사의 말에 항아의 얼굴이 크게 창백해졌다.
“천암비서의 이름에 걸고 맹세해 봐. 그 말이 사실이라고.”
“…….”
“왜 그러지? 천암비서의 단말이라면 아주 쉬운 일 아닌가?”
하지만 항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무릎 위에 주먹을 올린 채 꾹 쥐고만 있을 뿐이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항아를 보고 있던 제갈사가 새하얗게 웃으며 그녀를 조롱했다.
“절대 못 하겠지. 현실세계에 [항아]로 존재할 때라면 몰라도 여기서 그런 맹세를 하는 순간 너는 소멸될 테니까…. 적어도 네가 천암비서의 단말이라는 것만큼은 사실일 테니 말이다.”
“…….”
“날 우습게 보지 마라. 칠계를 지배하는 마왕이 되면서 온갖 일을 다 겪어왔으니 너 따위는 잔챙이나 다름없어.”
“그래서 어쩌라는 거죠?”
“크크크크!! 아직도 모르겠나? 네 계획은 이미 끝났단 말이다.”
제갈사가 미친듯이 웃었다.
“크흐흐흐…. 좀 더 솔직히 얘기해 줄까? 네 녀석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서 백웅을 속이고 이번 생에 그의 전생(轉生)을 끝장내는데 협력하기로 한 거다. 그래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걸로 백웅을 속였지.”
나는 듣고 있다가 경악한 마음을 추스리며 간신히 제갈사에게 물었다.
“제, 제갈사. 저 녀석이 날 속였다니 뭘? [매듭]을 반복하면 액이 생긴다는 것 말고도 또 속인 게 있다는 거냐?”
“백웅. 본질을 생각해 봐라. 그 거짓말을 왜 했을까?”
“뭐?”
“어떤 거짓말쟁이든간에 거짓말에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다. 매듭을 반복할수록 액이 생긴다는 부담감이 있다면 너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매듭을 반복하려고 하지 않겠지….”
“그건 무슨 뜻이지? 달리 말하자면 [죽음]을 최대한 피해서 연명하려 한다는 뜻이 아니겠나. 바로 그게 놈이 원한 거야.”
“……!!”
“너를 그렇게 유도한 것이다.”
나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가 죽지 않으려고 했던 게…. 항아가 그렇게 유도한 결과였다고?’
대체 왜?
내가 뜻밖의 상황에 아연해하자 제갈사가 말했다.
“전생자가 죽지 않으려 하는 것만큼 최악의 상황은 없어. [종말]을 본다는 명분, 그리고 외부의 위협을 제거해주는 [천마], 그리고 죽을래야 죽을 수 없게 만드는 [전륜성왕의 권능], 마지막으로 죽는다 하더라도 재시작할 수 있는 [매듭]…. 어찌보면 너는 죽고싶어도 죽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죽는게 너무 힘들어졌어.”
“…….”
“원할 때 즉시 다음 회차를 시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약해졌다는 거야. 적어도 전생자로서는.”
“하지만 옥황상제와 전륜성왕의 권능을 얻었….”
“멍청아. 그게 뭐? 그거 갖고 있다고 황제 공손헌원을 이긴다는 보장 있어? 전성기의 힘을 다 찾아도 가능성이 거의 없을 텐데. 전생자가 쌓을 수 있는 힘의 한계가 무한정이란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눈 앞의 사소한 이득이다.”
“…….”
“하긴. 다들 의도하고 그런 건 아니었겠지. 매듭의 존재와 희망의 끈 때문에 다같이 항아에게 놀아났을 뿐.”
그 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항아가 말했다.
“백웅을 이용하려 한 건 인정하지요. 하지만 그건 제가 천암비서와 소통이 안 된다는 유추의 근거는 될 수 없지 않나요?”
“물론 그렇지. 내가 그걸 눈치챈 건 다른 이유다.”
“어떤 이유죠?”
제갈사가 싱글거리며 웃었다.
“애초에 내가 어째서 하필 이 시점에 나서서 남극에 거대 차원문을 열면서 천마 사공린을 유도하고 백웅을 죽였다고 생각하나? 왜 이 시점이었을까?”
“당신이 제게 문제를 내는 건가요?”
“어차피 이 공간에서 남아도는 게 시간일텐데 어디 맞춰 봐. 나름대로 음모의 흑막이라고 주장할 거라면.”
항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를 눈치챈 듯 입을 열었다.
“…[단서]. 내가 백웅에게 말했던 그 이야기로 눈치를 챘단 말인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나 또한 무슨 말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건가?’
제갈사가 나타나기 바로 직전.
커피숍에서 주현성과 내가 이야기를 한 직후에 내가 항아를 불러서 이야기했던 그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 잘 알아맞췄어. 네가 그 이야기를 꺼낸 순간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지.”
“어째서? 겨우 그 정도 이야기로 이렇게 파격적인 행동을….”
제갈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지. 넌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야.”
“무슨 실수를 했단 말인가요?”
“정말 모르겠어?”
“…….”
“크크크크….”
제갈사가 약올리듯 느긋하게 시간을 끌었다. 그는 항아가 충분히 안달난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 때 네 녀석은 자기자신이 이 [매듭] 속에서는 자기자신이 전생자와 동급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모든 아귀가 맞춰지더군.”
“……? 무슨 말이죠?”
“못 깨달았나?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어. [큰 굴레]와 [작은 굴레] 사이의 중간 굴레같은 게 있다고 친다면, 그게 [매듭]이라고 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지.”
“왜 있을 수 없다는 거죠?”
제갈사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렇다면 네 녀석이 스스로 나서서 힘을 쌓고 맘대로 행동해버리면 그만이거든. 전생자와 동급이며 죽어도 똑같이 [매듭] 내에서 재시작한다면 그렇지 않겠어? 너 스스로가 전생자의 힘을 가진 셈인데 왜 중립을 자처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지? [항아]로써 현실에 소환되어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이미 네놈의 반의(反意)는 확인되었는데.”
“…….”
“정답은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하지 못했던 거야. 왜냐하면 [매듭]은 [큰 굴레]도 [작은 굴레]도 아니기 때문이지. 전혀 별개의 무언가….”
항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졌다.
거기에 제갈사가 쐐기를 꽂듯 말했다.
“그래. 네 녀석이 만들어 낸 정해진 미래. 단 하나의 결론. 그것이 바로 [매듭]의 정체다.”
“…무슨 말을.”
제갈사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으며 싱글거렸다.
“큭큭큭! 딴에는 [종말]을 보는 것 자체가 함정이라고 자기한테 해가 될 법한 단서를 줘서 의심을 지웠다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런 데서 걸릴 줄은 몰랐겠지.”
“…….”
“넌 [누군가]와 모의(謨議)하여 백웅을 함정에 빠뜨리기로 작당했다. 언제인지는 몰라도 아마 네가 천암비서의 단말으로 각성한 순간이었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아마 천기(天機)를 변화시켜 전생자의 운명에 간접적으로 간섭했고, 죽음에 가까운 운명으로 몰아갔다. 사대신수 또한 인과율을 읽어서 자기도 모르게 백웅에게 접근하게끔 만든 거겠지. 영귀와 기린도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셈이겠지.”
항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제갈사의 말은 이어졌다.
“몰이 준비가 끝난 순간, 백웅이 항우에게 피할 수 없는 패배를 겪는 순간 너는 백웅에게 [매듭]이라는 미끼를 들이댄 거다. 단 한 번만 물면 빠져나오기 힘든 나락의 미끼였지.”
나는 듣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제갈사에게 외쳤다.
“제, 제갈사! 이해가 안 돼!! 그래서 도대체 [매듭]이 뭐라는 말이야?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게 [큰 굴레]가 돌아가는 게 아니었다면, 도대체 지금 내 현실은….”
“백웅. 말해두는데 이 세상에는 [큰 굴레]와 [작은 굴레]만 존재할 뿐 [중간 굴레]같은 건 없다. 그럼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단 말이지.”
“……?”
“잘 들어라. 백웅…. 넌 이미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산하사직도에서 말이다.”
“응…?”
제갈사가 손깍지를 끼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산하사직도 내에 들어갔던 그 때 만났던 삼황오제는 가짜였나…? 넌 확실히 그들을 가짜라고 할 수 있었나.”
“그건…. 음…. 잘 모르겠어. 지금 우리의 기준으로는 가짜겠지만 적어도 산하사직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현실에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니까…. 그때 봤던 그들의 권능도 진짜배기였고…. 망량선사도 그들이 가짜인지는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했던 거 같고.”
제갈사가 음충맞은 미소를 지었다.
“분간을 할 수 없지? 현실이랑. 그래서 산하사직도에서의 경험이 특별한 거고. 복희가 [액자]나 다름없다고 했잖아.”
“그렇지 뭐.”
제갈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직도 눈치를 못 챘나? 정말? 진짜 현실이랑 분간을 할 수 없다고. 멍청한 주군아.”
어라….
잠깐만….
“…어…? 서, 설마….”
“[매듭]은 굴레를 조종하는 게 아니야. 백웅 넌 항우에게 처음으로 죽었던 그 순간, [매듭]이라는 이름으로 분기(分岐)로 접어들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분기로 말이야…. 그게 아마 천암비서(天暗秘書)의 단말, 항아의 진짜 능력이겠지.”
“…….”
“망량선사가 굳이 나타나서 경고했던 것도 이유가 있지. 그가 다루는 것도 비슷한 영역이니까 말이야.”
…….
아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결론 때문에 전신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제갈사의 말 때문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큰 굴레]는 네가 천계의 탑에서 항우에게 죽은 순간부터 멈춰 있다. 지금 너와 나는 [꿈] 속에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