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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염라대왕의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에게 물었다.
“명계의 혼을 먹어치우던 [옛 지배자]? 그게 무슨 말이지?”
[말씀드린 그대로…. 명계가 마비되었을 때 삼황오제와의 추악한 거래를 통해 그 동안 저승에 온 필멸자들의 혼을 그대로 빨아들여 먹어치우던 존재가 있었으니, 그 자 또한 [옛 지배자]였소.]
아 그러고보니!
죽은 이의 영혼이 그 놈의 뱃속에 가는 상황이었었지!
내가 말을 알아들은 표정을 짓자 염라대왕의 말이 이어졌다.
[그 존재는 죽은 이의 혼이 나락에 떨어지면 곧장 자신의 뱃속과 이어지게끔 차원을 연결해 두었지…. 허나 당신께서 부활하시고 명계의 시왕이 자신의 자리를 찾으면서 저절로 그 연결은 끊어지게 되었소.]
“흠. 그게 부활시키지 못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오?”
[자신의 먹이가 끊겨서 화가 났는지 그 존재가 명계 전체를 둘러싸는 결계를 만들어서 우리의 업무를 방해하고 있소.]
“……!!”
[보통의 환생과 윤회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으나, 그 때문에 부활같은 특수한 권능은 발동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소.]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당황해서 염라대왕에게 말했다.
“그 결계를 해제하려면 그 [옛 지배자]와 담판을 지어야한다 그 말이 되는거군.”
[그렇소. 아마 그 자가 이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을 터….]
염라대왕이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말했다.
[그대의 힘이 온전한 상태라면 굳이 교섭에 응하지 않고 그 자를 퇴치할 수 있을지도 모르오. 허나 지금은 그 존재와 정면으로 맞서는 건 힘들 것이오. 우리도 부활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대를 돕기 힘드오.]
“생사부를 써서 그 자를 소멸시키겠소!”
[아니 될 것이오.]
“왜?”
[보통의 신격과 달리 그 존재 또한 [죽음]에서 파생된 존재이므로 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오….]
제길. 골치아픈 상황인 건가?
금성의 신격들조차 몰아서 잡아버렸던 생사부가 통하지 않는 적이라니!
본래라면 이런 골치아픈 상황에 굳이 [옛 지배자]같은 강대한 놈과 교섭하기 보다는 그냥 포기하고 가버렸으리라. 하지만 나는 지금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포기해 버리면 죽은 이들은 계속 저승에 있게 된다…. 환생시키지 않을 수 있지만 결국 전력을 잃어버린 채로 종말까지 진행되겠지.’
원래부터 대라신선급 술력을 지닌 영혼이었던 제갈량의 경우는 그저 이승으로 위치를 옮겨서 다시금 본인의 역량으로 육체를 창조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제갈량같은 역량을 지닌 게 아니다. 정도령이나 전술무력요원들, 그리고 고대인들 모두가 그저 영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내가 곤란함을 느끼고 말문을 닫자 상황을 지켜보던 제갈량이 말했다.
[백웅. 우리는 그냥 저승에 놔두어라. 나도 현세에 가지 않고 여기 남겠다.]
“뭐? 그럴 수는….”
[네가 전륜성왕이니 우리가 명계에서 혼을 보존할 수 있게끔 할 수 있겠지. 어차피 우리의 힘은 말세에 큰 의미가 없으니 굳이 우리 때문에 [옛 지배자]와 마찰을 일으키는 건 악수라고 할 수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우리는 중요한 동료는 아니야.]
“…….”
[아니, 어쩌면 현세에 있는 게 우리에겐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너는 몇 년의 시간을 두고 전륜성왕의 힘을 회복한 후에 다시 교섭을 시도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게 내가 낼 수 있는 헌책이다.]
제갈량은 지금 명계의 혼을 먹던 [옛 지배자]와 충돌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륜성왕의 힘이 바닥인 상태에서 강적과 싸우게 되면 뒷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제갈량 네가 저승에 남으려는 이유는 뭐지?”
[줄곧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래서 저승에서 조사하고 싶은 게 있고, 또한 지금 네 상황에서 굳이 뛰어난 계책이 필요하진 않을 것 같더군.]
“마음에 걸리는 것?”
[전륜성왕이 봉인된 전말에 대한 것이다. 내게 저승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자료를 조사할 권한을 다오. 거신족의 도서관과 연계하여 알아내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러지.”
나는 한숨을 쉬며 다른 자들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살려내고 싶었는데 사정상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겠군. 대신 명계에서 안전히 있을 수 있도록 하겠다.”
[하하. 죽은 자가 또 죽을 순 없다는 거군요.]
전술무력요원 서열 3위, 유성객 고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주현성 부대장에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알았어.”
파앗
나는 일련의 과정을 처리한 후 지상으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비등을 쓰는 순간, 나는 뜻밖의 시꺼먼 공간에 빨려들어와 있는 걸 깨달았다.
“…….”
이런 제길… 비등을 쓰다가 다른 차원으로 납치당한 건가?
그리고 불길한 예감에 침묵하고 있자 잠시 후 어둠의 저편에서 ‘무언가’가 말을 걸어왔다.
[새로운 전륜성왕…. 반갑군….]
음산하고 어두운 목소리.
보통의 필멸자가 들었다가는 즉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섬뜩한 광기와 마기(魔氣)가 뒤섞인 목소리. 나는 어둠의 저편에서 끔찍한 형상이 마치 잠시동안 달빛에 비친 것처럼 꿈틀거리는 걸 확인할 수가 있었다.
틀림없이 [위대한 존재].
나는 상대의 정체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큰일났군!’
제갈량이 피하라고 조언했던 상대.
굳이 피하려고 노력했는데도 상대 쪽에서 만나러 와 버렸다.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난다.
[전륜성왕이 된 걸 다시 한 번 축하하며, 한 가지 경고해 두지….]
[머지않아 네게 누군가 위대한 존재가 찾아올 것이다.]
[네가 죽음의 제왕으로써 넘어야 할 문턱이 찾아오리라….]
선지자가 [대가]를 받아가면서 해 줬던 충고.
그건 설마 이 상황을 이야기했던 것일까?
우웅
그래서 나는 즉시 생사부를 소환해서 손에 쥔 채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동안 명계에서 영혼을 먹어치우던 존재인가?”
내 질문에 상대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랬지…. 그대가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내가 명계의 윤회를 부활시켜서 화가 난 건가?”
[분노하느냐는 질문이라면 그건 아니다…. 난 그대에게 호기심이 생겼지….]
스르르륵
상대가 마치 흘러내리듯이 질척거리는 기름덩어리로 변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기름덩어리가 마치 인간과 같은, 하지만 딱 기름인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형상으로 변했으며 동시에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초록색 불길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기묘한 형상의 화신(化神)을 드러낸 존재가 웃는 듯 했다.
[그대… 황제 공손헌원과 겨룰 생각인가…?]
“…….”
[두려워 마라…. 나는 그저 전생자(轉生者)라는 희소한 존재를 보게 된 기쁨에 가득 차 있으니….]
“씨발!!”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와 버렸다.
어떻게 된 게 개나소나 내가 전생자라는 걸 알고있단 말인가!
예전에는 이 정체를 숨기려고 미친듯이 노력했던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만나는 신격마다 당연히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런 건 누가 말한 거냐! 왜 동네방네 소문이 난 거냐고!”
[만신전에서 아는 놈이 알려줬다….]
“…….”
아 진짜 그 새끼들…!!
[그걸 알게 되자…. 본디 함정을 파서 그대를 잡아먹으려 했으나…. 주의깊게 상황을 살피며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기로 생각했지….]
이제 보니 내가 부딪히는 걸 피하려고 했어도 어차피 맞닥뜨릴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선지자는 그걸 알고 있었기에 미리 경고를 해준 것이었을까?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싶다는 거냐.”
[말했듯…. 황제와 겨룰 생각인지를 알고 싶구나….]
상대는 말을 이었다.
[윤회를 부활시켜…. 현세의 인과율을 빠르게 축적하여…. 황제의 승리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뒤집어엎겠다는 것…. 그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 훌륭한 계책이다….]
“…….”
정확히 말하면 그건 내가 계획한 게 아니라 망량이 계획한 판도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걸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상대가 말했다.
[그리하여 흥미가 생겼다…. 그대… 그대는 황제 공손헌원을 꺾게 되면 무엇을 하고싶은 것인가….]
“내가 왜 말해줘야 하지?”
[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명계를 침략하여 전쟁을 치러주지…. 우선 그대를 붙잡거나 큰 부상을 입히고…. 충분히 곤란하게끔 만들 수 있다….]
“이 자식….”
[말해라….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라….]
내가 껄끄러워하는 상황을 이미 파악한 듯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놈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공손헌원을 없앨 수 있다면…. 그 후엔 종말을 유예시킬 거다.”
[어찌되었든 인류를 위한다는 말이군…. 하지만 그대라면 굳이 인류를 존속시키지 않아도…. 이미 [지배자]의 반열에서 세상을 굽어볼 터…. 어째서 인류를 살려야 하지….]
“몰라 씨발! 하고싶다는데 왜 지랄이야!”
나는 끌려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었기에 상대를 노려보며 말했다.
“싸울거면 싸워! 하지만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거다!”
어떻게든 되겠지!
안되면 자살하면 되고!
어차피 [매듭]도 있겠다 더 이상은 숙여주지 않겠어!
그러자 상대가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과연 전생자….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그 패기….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상대가 기이한 제안을 해 왔다.
[그렇다면… 나와 손을 잡지 않겠나…? 전생자.]
뜻밖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라고?”
[그대라면 나와 손을 잡을 자격이 있다…. 아니…. 내가 그대의 결말을 곁에서 보고싶다는 거지…. 후후….]
나는 약간 당황해서 말했다.
“무, 무슨. 네놈은 명계의 영혼을 빼앗겨서 내게 분노한 거 아니었나? 그리고 너랑 손잡는다 해도 절대로 네놈에게 영혼을 줄 일은 없….”
[그런 건 그저 여흥거리…. 어차피 삼황오제가 권능으로 생성한 영혼덩어리를 아무리 먹어봐야 내 격의 향상엔 큰 도움이 안 되지…. 하찮은 필멸자들 따위….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안 줘도 돼….]
“…….”
[나는 그저…. 종말이 올 때 까지 영혼이라는 간식을 먹으며 옆에서 구경하고 싶었던 자이다…. 이해했나…?]
[옛 지배자] 중엔 이런 놈도 있었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내 얼굴이 일그러지자 상대가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전생자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나는 그대를 도와…. [계시]에서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싶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대에게 전적으로 협력하도록 하지….]
“웃기지 마. 너 같은 마신(魔神)과 협력할 거 같냐?! 지금까지 네가 먹어치운 영혼의 숫자가 몇 개인데.”
[크큭…. 그런 하찮은 이유인가…. 그런 건 삼황오제가 생성해 낸 하찮은 영혼덩어리일 뿐인데….]
신 특유의 절대적 오만이 느껴졌기에 나는 극심한 짜증을 느꼈다.
“꺼져!”
나는 눈에 불꽃이 튀듯 놈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그런 말 할 거라면 지금까지 처먹은 영혼 다 뱉어내!!”
[…….]
“너 같은 놈과 협상은 없어!”
이번 매듭은 여기서 끝인가. [옛 지배자]와의 직접전투가 벌어지면 지금 상태로는 승산이 없으리라.
‘쳇…. 다음 매듭은 더 잘해봐야….’
나는 전투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각오했지만 뜻밖에 상대는 바로 공격해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뜻밖의 말을 했다.
[정말로 다 뱉어내면 나와 손을 잡을 텐가…?]
“……?!”
[약속할 수 있나…?]
이, 이건 무슨 상황이야.
하지만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네 뱃속에서 고통받는 영혼들을 다 뱉어내면 고려해 보지.”
[…그래…. 그 약속을… 믿겠다….]
후오오오!!
다음 순간이었다. [옛 지배자]의 기름인간같은 화신이 갑자기 거대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녹색 불꽃이 일렁이면서 어둠의 공간을 메웠다. 마치 거대한 녹색 양초처럼 변한 그 존재가 갑자기 입을 쩍하고 벌리기 시작했으며 이윽고 엄청난 크기로 부풀어올랐다.
쿠구구구
나는 어느 새 내가 명계의 상공에 떠올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천공을 가득 메울 정도로 거대해진 [옛 지배자]가 기름바다를 하늘에 펼치면서 쩍 벌린 입을 통해서 무언가를 내뿜기 시작했다.
콰과과
[크오오오….]
빛의 파도!
그 존재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섬광의 파도가 일순간 명계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번쩍이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전륜성왕의 삼안이 저절로 떠지면서 그 빛의 파도가 사실 수백 조(兆)에 이르는 영혼들 그 자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정말로 다 뱉어내는 건가?!
유사이래 저 놈이 처먹었던 모든 영혼을!!
콰과과과과과
빛의 파도는 약 한 식경동안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고, 이윽고 어두컴컴하던 명계는 영혼의 빛 때문에 가득 차서 눈이 부실 지경이 되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영혼들이 허공을 부유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영혼을 모두 뱉어낸 듯, [옛 지배자]가 방금 전의 화신으로 되돌아오며 내게 말했다.
[이 행성의 중심에 거하는 그 존재가 먹은 것은 돌려줄 수 없지만…. 적어도 내가 먹은 것은 다 돌려주었다….]
“중심에 거하는 존재? 그건 뭐지?”
[나만이 영혼을 먹을 권리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직접 전륜성왕을 약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그 존재…. 그 자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영혼을 먹고 있었지….]
“…….”
[전생자… 약속을 지켜라….]
나는 뜻밖에도 [옛 지배자]가 이런 약속을 지킬 줄은 몰랐기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극히 악독하고 잔인한 저 사악한 존재가 설마 이런 요구에 따를 줄이야?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일단 너와 손을 잡는 걸 고려해 보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해본다는 거다!”
[후후후…. 그걸로 좋다….]
확답을 주지 않았는데도 놈은 기분이 좋은 듯 웃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나는 우주의 귀고(鬼姑)에서 탄생한 존재…. 복희를 따라 이 세상으로 흘러든 용(龍)….]
슈르르륵
시퍼런 녹염(綠炎)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옛 지배자]가 녹색 빛의 잔광과 함께 사라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필멸자들은 나를 촉룡(燭龍)의 신(神)으로 불렀나니…. 종말에 가까워졌을 때 그대의 [계시]를 도우러 나타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