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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출발하기 전에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아직도 내게 백련교주의 유지를 말해줄 생각은 없는 건가?”
“…….”
“천마 사공린의 시험을 통과해서 천계의 탑도 끝냈잖아.”
예전에 아수라는 내게 백련교주의 유지를 알려주려면 저 시련을 통과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막상 그 시련을 통과하고 아수라 밑에 수련 받으러 다시 왔던 이번 한 달 동안 그 유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서방 조디악 멤버들과의 교섭은 꽤나 중요하게 느껴졌기에 그 일을 하기 전에 아수라에게 이야기를 들을 필요성이 느껴졌다.
아수라가 말했다.
“암야참 만상검류(萬象劍流)의 수련에 좀 진전이 있으면 말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가 없군. 내 욕심이 과했어.”
“무슨 소리야?”
“네가 암야참의 기초를 닦아놓고 나서 말해주고 싶었다는 거다. 천계 운운했던 건 그냥 핑계고.”
“음…. 무인의 욕심이란 거냐.”
“그런 셈이지. 뭐 이제 와선 할 수 없군. 고작 한 달으로 네 녀석의 성취가 급증할 리도 없고….”
아수라는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백련교주를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지. 잘 들어라.”
* * *
회색빛의 세계.
우주적으로 강력한 사도 [할치올레이푸라]에 맞설 때 백련교주가 만들어 낸 [원영신의 폭주] 공간! 그 공간에서 아수라는 귀일무극참(歸一無極斬)을 이용해 홀로 무(無)의 장막을 돌파하여 들어갔고, 백련교주를 마주쳤었다.
혼돈화된 육체가 원래대로 돌아온 상태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던 백련교주 독고운천은 아수라와 대화를 나누었다.
“백련교주.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지? 지금 이 장소는 우주창조의 혼연이 뭉친 장소같다. 오래 있어서 좋을 곳이 아니니 빨리 빠져나가자.”
아수라에게 몇 가지의 문답을 건넸던 백련교주가 대답했다.
“아니. 나는 나갈 수 없다. 원영신의 폭주는 현재진행형이니까. 나는 이미 원영신의 계약에 따라, 옥좌를 지키는 수호병이 되어버렸다….”
“뭐라고?”
“찾아와줘서 고맙다, 아수라. 좀 더 해줄 말이 많다…. 쿨럭!”
치지직
그가 입에서 기침을 토하자 갑자기 그의 전신에 혼연의 힘이 감돌았다. 그 혼연은 마치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리는 절망과 같았다.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려면 아직 힘이 약할 때 나를… 그대가 날 끝장내줘야 해. 부탁한다….”
후두두둑!!
독고운천의 옷이 찢어지며 그의 몸이 서서히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수라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저것이 바로 원영신의 폭주가 가져온 말로(末路)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좋다.”
귀일무극참(歸一無極斬)!
아수라의 일 참이 쏟아진 순간이었다. 백련교주의 명치 한가운데에 아수라의 참흔(斬痕)이 새겨졌고 실같은 자국이 백련교주의 정수리에서 단전까지를 그대로 내려베는 게 보였다.
스팟
그러나 아수라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
분명히 백련교주의 몸을 반으로 갈랐는데 백련교주의 기세가 줄어들었을 뿐 그의 몸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공격이 먹히지 않은 게 아니라 먹혔는데도 백련교주의 몸 자체가 순식간에 피해를 회복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던 것일까? 부풀어오르던 몸이 서서히 줄어들던 백련교주가 여전히 합장을 하고 있던 상태에서 체념한 듯 말했다.
“…역시…. 혼연(混然)의 힘이 이미 나를 잠식해 버렸구나.”
“기다려봐라.”
우오오오 -
아수라가 필생의 힘을 다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귀일무극참이란 난무할 수 있는 절기가 아니었고 이미 기력을 많이 소모했으나 여기서 목숨을 걸 작정이었다. 그러자 백련교주가 손을 저었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라. 지금은 나를 못 벤다. 혼연으로 채워져버렸기 때문이다.”
“혼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아수라여. 그대의 귀일무극참 덕에 폭주가 가라앉고 약간 시간이 생겼으니 이야기를 해 주겠다. 잘 들어라. 이것은 조금 전에 깨달은 나 자신의 운명….”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원영신이 폭주해버렸을 때 내 몸은 한 순간 무한의 혼돈때문에 쉴새없이 찢기고 터져나갔었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어쩌면 은하조차도 멸할 무량대수의 혼돈 때문에 그대로 소멸하는 줄 알았지…. 허나 그 단계를 넘어서자 혼돈의 융폭은 줄어들었고 대신에 나 자신이 옥좌가 이 세계에 강림할 매개체로 변해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아수라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옥좌가 세상에 강림한다고?”
“그렇다…. 그 어떤 전승에서도 전해지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 [옥좌] 그 자체의 살아있는 의지를 들을 수 있었지…. 내 몸이 혼연의 덩어리로 채워졌고, 내 영혼의 크기만큼 혼돈의 옥좌가 현실에 내려올 수 있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나는 앞으로 영겁토록 옥좌를 배회하며 침입자를 배제하는 파수병으로 살아가게 되겠지.”
“혼돈의 옥좌가 강림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
그 말에 백련교주가 서서히 서늘한 안개가 깔린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에서 춤추는 존재들이 보이는가…?”
아수라는 안력을 돋우었다. 그러자 혼연으로 그득한 안개의 너머에서, 새까만 잔영같은 것들이 춤을 추듯이 서서히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수라가 말했다.
“보인다.”
“…저 존재들이, 내가 만든 통로를 통해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
“지상으로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 건가?”
“백웅의 29번째 생이 시작되겠지…. 지금 백웅이 어떤 시공간에 있든 무의미.”
“…….”
“어쩌면 내 원영신을 폭주시킨 [옛 지배자] 비류가 의도한 게 그것일지도 모르지…. 비류의 주군이야말로 그걸 가장 바라고 있을 존재일 터.”
세상이 멸망한다는 뜻이로군.
아수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자 백련교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아수라. 이 멸망은 유예할 수 있다. 나는 이제부터 끊임없이 옥좌를 향하여 걸어가며 나 스스로를 마모시킬 것이다. 내가 깎여나가면 옥좌가 만들어낸 통로는 닫힐 것이다.”
아수라는 망설이며 말했다.
“꼭 그래야 하겠나. 그건 기약없이 무한히 너 스스로를 고문하는 고행이 아닌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공간이 미친 공간이란 건 불문가지였고, 악몽과도 같은 [아버지]의 존재 앞에서 백련교주 따위는 티끌만도 못한 것이었다. 저 바깥에서 돌고 있는 시꺼먼 존재들도 차마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들! 결국 저 무시무시한 존재들에게 고문당해 깎이고 깎이며 무한대의 고통을 겪다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처참하게 소멸하게 될 것이리라.
백련교주가 말했다.
“그것이 백웅의 동료가 져야 할 업이겠지…. 후회는 없다.”
“…….”
“또한 혼연의 성질에 대해 설명해 주마…. 이 혼연 속에서는 그 어떠한 혼돈의 존재도 버틸 수 없으며….”
백련교주는 자신이 알아낸 혼연의 성질에 대해 아수라에게 잠시동안 설명했다. 아수라가 끝까지 주의깊게 들어서 이해한 듯 하자 백련교주가 말했다.
“적응이 되서 심천무량의 요령으로 조금이지만 혼연을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다…. 최대한 나 자신을 채우는 혼연을 약화시킬 테니 마지막 일참으로 나를 베어 다오.”
“그러면 죽일 수 있는 건가?”
“아니…. 혼연의 파수병으로서 영혼은 여기 남는다. 이 공간이 해제되면 내 육체가 남을 뿐….”
“…….”
결국 껍데기만 베는데 아수라가 전력을 다해야 하는 셈이다. 아수라는 터무니없는 상황에 잠시 전율했지만 이내 냉정을 찾았다.
“알았다. 준비해라.”
“아수라, 네게 부탁이 있다….”
“말해라.”
백련교주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아마 세계 최고의 고수일 것이다. 그런 네가 백웅을 신역절기로 인도해 다오.”
“…….”
“그걸 위해서 또 하나 부탁하고 싶은 것…. 그건 사공린을 경계하는 하나의 쐐기가 되어 다오.”
“사공린을 경계하라고?”
“그녀는 천마. 영겁지무를 사용할 경우 지상의 그 어떠한 존재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 만일 그녀가 백웅을 배신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내 목을 베어 백웅 일행의 적이 되어라. 그리고 천마 사공린이 섣불리 행동할 수 없게끔 암중에서 활동하라.”
“…….”
“어려운 일이지만 해줄 수 있겠나.”
아수라는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못할 것 없지. 네 유지를 받들겠다.”
“고맙다….”
“백련교주. 혼연덩어리가 된 너라고 해도 진정한 신역절기라면 아마 벨 수 있을 것이다.”
불끈
아수라의 눈에서 안광이 크게 일어났다.
“약속하마! 백웅을 반드시 신역의 경지로 이끌어 주겠다. 그리고 그를 데려와서 진짜 네 목을 베어주마!”
아수라가 거친 표현을 썼으나 백련교주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죽음과 소멸만이 자비가 되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스아아아!!
백련교주의 전신이 마치 기화하듯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혼연의 힘이 백련교주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서 모조리 연소되는 듯한 형상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일 뿐이었기에 아수라는 극한의 집중력을 소모해서 백련교주를 벨 수 있는 한 순간을 탐색했다.
[날 베어라…!!]
백련교주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귀일무극참(歸一無極斬)
그리고 다음 순간 - 아수라의 일 참이 쏟아졌고, 백련교주의 목이 그의 광검에 날아갔다. 혼연이 약화된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간이 빠르게 분리되면서 백련교주의 영혼이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날아가는 게 아수라의 눈에 새겨졌다.
그와 동시에 혼연의 결계가 걷혔다.
아수라는 뒤를 돌아보며 아주 잠깐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사공린을 견제하는 쐐기이자 백웅을 인도하는 자로서의 역할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금세 표정을 가라앉히고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백련교주는 내가 죽였다.”
* * *
일련의 이야기를 맺은 아수라가 말했다.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어. 백련교주가 고통받고 있다고 해 봐야 네 마음만 무거워질 테니까.”
“…….”
“당장 구하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수라가 지금까지 백련교주와 만났던 뒷 얘기를 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백련교주는 살아있는 거군.”
그는 옥좌의 혼연에 귀속된 존재가 되어 지금도 옥좌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겪으며 영혼이 부숴져나가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 덕분에 혼돈의 옥좌가 강림할 뻔한 재앙에서 세상이 지켜진 것이다.
아수라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최소한, 네가 암야참을 습득한 후에 해주고 싶은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 혼연의 공간에서 먹히는 건 암야참과 신역절기 뿐일 테니까.”
“뭐?”
“백련교주가 내게 설명해 준 혼연의 성질을 말해 주마.”
아수라는 내 옥황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혼연의 공간에 진입하면 그런 보패는 모조리 소멸될 거다. 또한 혼돈의 존재들도 즉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소멸하게 되지. 신기라 하더라도 혼돈의 힘에 기반한 신기 또한 예외가 없을 것이다. 모든 권능 또한 사용불가가 된다.”
“……!!”
“그리고 혼연에 물든 존재는 같은 혼연의 속성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피해를 입지 않는다. 혼돈으로 공격하면 도리어 힘이 흡수되어 강해진다고 교주는 추측했지. 그러므로 사실상 그 공간 내에서는 [옛 지배자] 조차도 파수병을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소멸당할 것이다.”
“뭐, 뭐라고?! 혼돈의 옥좌라는 게 그런 터무니없는 공간이란 말이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말대로라면 모든 존재의 힘이 봉쇄당하는 공간이란 뜻이 아닌가!
하지만 문득 나는 이상한 점을 깨닫고는 말했다.
“…아수라, 같은 혼연속성으로만 혼연을 칠 수 있다면 어째서 네 귀일무극참은 백련교주를 벨 수 있었던 거지?”
“잘 알아차렸군. 그게 바로 교주가 네게 신역절기를 터득하길 바랬던 이유다.”
아수라가 자신의 검을 횡으로 들며 말을 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암야참, 혹은 귀일무극참은 혼연의 속성을 무시하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상극까지는 아니지만 대등한 속성이기에 그런 것으로 보여. 그러므로 네가 언젠가 혼돈의 옥좌에 가게 될 일이 생긴다면 암야참을 극성으로 터득하거나 혹은 신역절기를 익혀야 해.”
“신역절기도 귀일무극참같은 위력을 보인다는 보장은 없잖아?”
“아니. 틀림없이 그 이상의 위력을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귀일무극참도 암야참도 신역절기의 위력을 모방한 거니까.”
“……!!”
“장삼봉은 한 눈에 눈치챘었지. 과연 백좌의 일인 답달까.”
쓴웃음을 지은 아수라가 말했다.
“이제 궁금증은 다 풀렸나?”
“…아수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중대한 이야기면 미리 해줬어도 되는 게 아니냐? 이걸 모르고 죽었다면 하마터면….”
“말해주면 네 녀석은 만사 제쳐두고 옥좌에서 고통받는 백련교주를 구하겠답시고 모든 계획을 그 쪽으로 맞췄을 테니까. 그랬다면 천계에서 망량이 마련해 둔 전륜성왕의 기연을 받지도 못했겠지.”
“아….”
“그리고 재능도 바닥인 놈이 중압감만 잔뜩 지고 암야참을 수련하면 성취가 개떡처럼 느려질 게 아니냐.”
“…….”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암야참이 좋은 거라고 말해두니까 별다른 중압감 없이 수련할 수 있었겠지. 그 덕에 암야참에서 소성(小成)이라도 본 것이다. 그렇지 않나?”
맞는 말이다.
나는 괜히 멋쩍어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군…. 그러면 백련교주를 구하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은 마땅히 방법이 없다. 굳이 방법이라고 한다면….”
아수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종말]에 도달할 때까지 [옥좌]에 대한 정보를 더욱 알아내는 것 뿐이다. 잘은 모르겠지만 종말에 일어나는 현상 중에 옥좌 또한 큰 관련이 있는 걸로 보이니까.”
“결국은 법문을 모으는 걸로 귀결되는 거군.”
“그런 셈이지. 그게 아니면 그냥 깔끔하게 종말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만 보고 죽어도 돼. 어차피 세상이 멸망하면 백련교주도 구원받을 테니까….”
“…….”
백련교주 또한 세상이 멸망하면 구원받는 존재 중 하나가 되어버린 건가….
나는 백련교주에게 미안한 마음때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떴다.
“좋아. 어쨌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어.”
백련교주에게 닥쳐온 불행을 지금 당장 어찌해 줄 방법은 없다. 발만 동동 구르며 초조해 봤자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차분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면서 최선을 다해 진행해 나가야만 한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지름길일 테니까!
파앗
나는 전뇌자의 도움으로 서방 조디악 멤버들이 모인 회담장으로 향했다.
회담장에 도착하자 이쪽에서는 사공린을 위시한 내 동료들 여럿이 와서 앉아 있었고, 맞은 편에는 13인의 조디악 멤버들이 앉아있는 게 보였다.
‘익숙한 얼굴들이 있군.’
전에 패 줬던 바토리, 그리고 연금술사인 칼리오스트로. 그리고 베루스또한 한켠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게다가 서방수호자의 심처에서 보았던 마녀 비비안 또한 앉아있는 듯 했으니 비비안도 조디악 멤버라는 뜻이리라.
단지 13인의 자리가 모두 채워진 게 아니라 몇몇이 비어 있었다. 나는 멀린이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공석 두 자리가 누구의 것인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멀린과 파우스트는 참석하지 않은 거군. 멀린은 캄란의 스톤헨지에서 뭔가 큰 의식을 치르는 중이고 파우스트는 내게 금시계를 주고 소멸했으니까….’
내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조디악 멤버 측에서 웬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 맨 중동인이 입을 열었다.
“아사신의 수장이며 조디악 멤버, 하산 이븐 알 사바흐가 그대들에게 말하오. 치우(蚩尤)의 팔이 있는 장소를 즉시 알려주는 대신에 그대들에게 [일곱 개의 나팔]을 받고 싶소.”
일곱 개의 나팔?
내가 어리둥절해서 반문하려고 하자 사공린이 손짓으로 나를 제지하며 머릿속으로 말했다.
[당신이 저들의 눈에 띄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우리가 저들과 대화하겠습니다.]
사공린의 말대로 내가 잠자코 있자 자리에 참석해 있던 천우진이 말했다.
“일곱 개의 나팔이란 건 설마 칠요(七曜)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소.”
“…….”
나는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 저 자식들 칠요를 노리고 있는 건가?’
이번에는 사공린이 나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칠요를 노리는 이유는 뭐죠?”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요.”
“어떻게?”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베루스였다.
“칠요를 모두 모으면 칠요의 시련이라는 게 출현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 칠요의 시련을 통과하여 삼황오제에게 이 세상의 멸망을 유예시켜줄 것을 부탁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오. 최소한 일천 년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오.”
“…….”
“종말이 멀지 않았으니 협력을 해주기를 바라오. 서로에게 손해될 것은 없는 제안이리라 생각하오.”
그 말에 사공린은 뭔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고, 함께 나와있던 천우진이나 제갈량은 잠시동안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치…. 칠요의 시련? 언제적 얘기를….’
하지만 옆에서 보고 있던 나는 나를 포함한 동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숨에 알 수 있었다.
‘이 놈들…. 뒷북치고 있구나!’
나는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갈량이 먼저 나서서 말했다.
“이 자리에 대마법사 멀린이 없군. 그 자가 수십 년 동안 공양의식을 진행한다고 하던데 설마 칠요의 시련을 위해 치르는 의식이오?”
“많은 정보를 수집했나보군. 그렇소. 콘월 캄란의 스톤헨지에서 팔리아스의 거신(巨神)을 깨우려는 의식을 진행 중이지. 그 일에 서방의 모든 마법사들이 동원되어 있소….”
베루스는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조디악 멤버의 힘과 팔리아스의 13거신의 힘으로 칠요의 시련을 돌파할 생각이오. 그대들도 협력해주면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제갈량은 백우선을 선선히 부치며 말했다.
“글쎄…. 그대들이 칠요의 시련에 도전하려는 이유는 아마도 서방의 수호자 때문이겠지.”
“…….”
“칠요의 시련이 완전한 해결책은 될 수 없음은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제 와서 억지로 도전하려는 건, 그만큼 서방수호자의 힘이 약화되어 힘들어졌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군. 더 약해지기 전에 세상을 구해보려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동시에, 조금이라도 질서를 향해 저울추를 기울이려는 건가….”
베루스가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대꾸했다.
“억측하지 마시오.”
“억측이든 아니든 우리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제갈량은 서늘한 눈빛으로 조디악 멤버들을 훑어보고는 말을 이었다.
“칠요는 절대 내놓을 수 없다. 너희야말로 세상을 구하려거든 조건없이 모든 정보를 내놓아라!”
“억지를… 정녕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와야겠소.”
제갈량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쪽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주군. 한 마디 해주시게.”
“으음….”
저벅…
나는 일어서서 상대측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칠요의 시련은 함정이니 시도할 필요 없소.”
“근거 없는 소리. 이 세계의 [종말]과 관련된 계약이 바로 칠요의 시련이며 그 사실을 이미 수호자님을 통해 확인했소. 비록 오제라고 불리는 존재들이 대다수 자취를 감췄으나, 칠요의 시련을 열게 되면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오.”
“…….”
“…아니, 그게 아니라.”
“부디 이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해 협력을.”
“…….”
이걸 참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건 내가 이미 한 번 깨 봤단 말이야. 이 새끼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