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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연등도인의 말이 언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연등도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신선의 목상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옥황상제여. 이 목상은 신선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표상이오.]
“어떤?”
[반고(盤古).]
“……!!”
반고가 여기서 나온다고?
나는 황당해서 연등도인에게 말했다.
“질서의 창세신 반고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증거가 있소?”
[이 수레에 앉아 목상의 등쪽을 보면 태고(太古)의 문장이 새겨져 있소. 이는 우주적 위계에서 반고를 가리키는 공식과 다름이 없소.]
나는 연등도인의 말대로 뒤편을 살폈다. 그러자 마치 삼원(三圓)이 겹쳐진 듯한 기이한 피얼룩이 있었는데,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문장인 건 사실로 보였다.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반고를 상징하는 태고의 문장이라고 치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요?”
[이 문장에는 불가해(不可解)한 힘이 깃들어 있는데 그 힘은 혼돈과 질서의 성향에 반응한다는 것까지 알아냈소. 그런데 어쩐지 [거리]에 관계가 있다는 직감이 들어서 방금 전 시험을 해 보았던 것이오. 그리고 가설이 맞았소.]
“거리?”
연등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지남거는 혼돈을 적대하여 그 힘을 약화시키거나 없애는 능력이 있소. 하지만 그것은 모든 혼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오. 바로 현세(現世)와의 거리에 비례하여 더욱 먼 거리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우주의 힘일수록 큰 피해를 주게끔 되어있소.]
“멀리 있을수록 타격을 받는다고? 자, 잘 이해가 안 되오만.”
연등도인이 껄껄 웃었다.
[허허 그럴 리가… 이렇게 쉽게 설명했는데…. 농담을 잘하시는 옥황상제시구려.]
“아니 정말로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오.”
[…….]
연등도인이 아직도 못 알아듣는 나를 보자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내가 불쾌해하는 표정을 짓자, 급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흠…. 새로운 옥황상제께서 술법과 혼돈에 대한 이해가 덜하신 듯 하여 추가로 설명을 드리겠소. 혼돈이라 하는 속성은 모든 것의 근원이며 시초이니, 이 근원속성은 수많은 하위속성으로 분화되오. 그리고 우주의 심도(深度)에 따라 완전히 성질이 달라지는 것인데, 이 지남거는 혼돈의 심도분화를 이용한 신기(神器)요.]
“신기? 이게 보패가 아니라 신기라는 말은….”
[신이 직접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만든 물건. 보패와는 격을 달리하는 것이며 큰 범주에서는 신체(神體)라고도 볼 수 있소. 우주적으로 무척이나 희귀한 존재요.]
“……!!”
백련교 사대신기 이외의 신기가 있었다니!
그게 바로 탁록대전에서 활약한 지남거였다니!
나는 생경한 경험에 꽤 놀랐지만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는 넓고 무수한 신격이 존재한다. 보패 수준에서 만족하지 않고 신들의 전용병기같은 것도 당연히 존재하겠지. 하물며 탁록대전에서 치우와 맞서싸우려면 황제도 그만한 출혈을 감수하지 않았을까?’
내가 생각을 거듭하고 있을 때 연등도인이 말했다.
[내 지식으로 살펴본 결과 이 문양의 삼원은 현실세계를 중심점으로 하여 세계를 원구로 파악하고 있소. 그리고 원구의 중심이 되는 현실에서 머나먼 이계에 존재하는 혼돈일수록 지남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게끔 되어있는 구조요. 왜냐하면 먼 곳에 존재하는 혼돈은 심도가 높은 혼돈 특유의 개별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오.]
“…저기…. 말이 더 어려워지는데…. 좀만 더 쉽게 얘기해줄 순 없소…?”
[이것보다 더 쉽게는….]
“쓰읍…. 그럼 복잡한 말은 집어치고 이거만 좀 설명해 보시오.”
나는 녹아내린 이형의 신선들의 모래흔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 곤륜십이대선, 사흉 등은 멀쩡한데 어째서 저 자들만 녹아내렸는지!”
[오오…. 과연 그걸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겠구려.]
연등도인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저 자들이 변질자라는 뜻이오.]
“변질자?”
[저 자들은 자신들이 그저 편한 형태를 취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변화한 이형의 모습은 머나먼 혼돈의 이계(異界)에서 힘을 받아들여 본질을 뒤바꾼 것이었던 거요. 저 자들은 신선인 척 하는 고위이족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오. 고위신선과 고위이족의 결합체같은 거였지.]
“……!!”
[현실에서 너무 멀어서 웬만해서는 소환주문조차 듣지 않을 정도로 머나먼 악몽같은 혼돈과 촉수의 성계. 천계가 현실에서 멀어졌다고 해서 그 혼돈계의 힘을 받아들인 자들은 지남거에 최악의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음, 그런가….”
[저 자들을 놔두었다면 언젠가 혼돈계의 힘을 천계에 소환하여 재액을 만들어내었을 것. 해치워버리는 게 맞소.]
나는 대충 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말했다.
“잠깐! 저기 묶여있는 사흉 놈들도 혼돈 그 자체가 아니오? 어째서 저 놈들은 멀쩡하단 말이오.”
[방금 전 설명했듯, 혼돈의 심도분화에 따라 피해를 주게끔 되어있소. 사흉은 혼돈이긴 하지만 어찌되었든 선계와 인간계에서 태어난 존재들. 이계의 혼돈이 아니기에 지남거는 사흉에게 아무런 피해도 줄 수 없소.]
“엥? 그러니까….”
나는 경악해서 말했다.
“먼 차원계에 존재하는 혼돈의 존재에게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무기란 건가?”
[그렇소. 처음부터 그렇게 설명했었는데 이제야 알아먹으시는군….]
“그럼 팔부신중에게도 피해를 줄 수 없소? 요괴들한테도?”
[당연한 말이오.]
“그, 그럼 인간이나 곤륜십이대선한테도 피해를 못 주는 이유는….”
[애초에 지남거는 [질서]의 존재에게는 피해를 줄 수 없소. 우리 천계의 대라신선들은 삼황 복희님을 정점으로 하여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에게서 뻗어나온 일맥. 정상적인 천계의 존재들에게 지남거는 무용지물인 것이오.]
“…….”
나는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오로지 머나먼 이계에서 비롯된 우주적인 혼돈에게만 거리에 비례해서 피해를 줄 수 있는 신기(神器)!
당연히 물질계 출신이나 지구에서 가까운 차원계에서 태어난 자들은 설령 그게 혼돈의 존재라고 해도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고 질서의 존재들에게는 아예 의미조차 없다.
“개판이잖아! 명색이 황제 공손헌원의 신기인데 뭐 이렇게 제약조건이 많다는 말이오? 정상적인 상황에선 써먹기 힘들 것 같소.”
아닌 게 아니라 다음 생부터 지남거를 얻어낸다 해도 사실상 현실세계에선 거의 쓸 일이 없다! 머나먼 혼돈의 차원계에서 소환되는 적은 도리어 드문 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지남거는 치우 전용으로 특화되어 만들어진 것 같소. 그리고 특화된 병기일 경우, 수많은 제약조건이 붙어있으면 도리어 위력이 급증한다는 특징이 있소.]
나는 뜻밖의 말에 희한하다고 느꼈다.
“응? 제약이 있으면 위력이 세진다고?”
[그것 또한 인과율의 법칙이오. 그리고 이 지남거는 그 제약조건을 모두 달성한 경우…. 말도 안 되는 파괴력을 보일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소. 왜냐하면 지남거의 삼원에는 위대한 신적 존재들의 계약이 걸려있으며 반고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듯 하오.]
“흠. 반고의 힘을 직접 빌려오는 신기라는 건가….”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긴 하오.]
“이상한 점?”
[삼원이 흐려진 건 여기에 부가되어 있는 특수한 기능과 관련이 있는 듯 한데…. 희생(希生)과 관련있는 기능이 하나 더 있소. 허나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겠소.]
“……?”
희생기능? 그게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연등도인을 비롯한 십이대선과 좀 더 회의를 하다가 일단 회의를 파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구천현녀를 찾아갔다.
‘구천현녀라면 뭔가 알지도….’
나는 구천현녀에게 지남거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지남거의 희생기능이란 게 뭔지 혹시 짚이는 게 있소?”
[…그건 아마도 기백천사가 소멸한 것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응? 기백천사? 그건 황제의 사도가 아니오.”
구천현녀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탁록대전 당시 그 지남거에 탑승하고 있던 게 기백천사였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술법이 발동하기 직전, 기백천사는 어느 순간 지남거에서 모습을 감춰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황제의 술법에 말려들까봐 피했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
[아마도 황제의 사도인 기백천사가 스스로를 희생해서 지남거의 특수한 기능을 발동시켜서 끝까지 치우를 억제했던 것이겠지요. 그런 걸로 추측됩니다.]
“지독하군. 기백천사는 엄청나게 강력한 존재인데 겨우 치우를 잠시 막으려고 신기 지남거에 잡아먹혀서 소멸해버렸단 말이오?”
나는 과거 산하사직도에서 보았던 기백천사의 위용을 생각해냈다. 그 때 기백천사는 내가 감지조차 하기 힘들었으며, 멀리서 보아도 엄청난 힘을 뿜어냈었다. 격하의 존재가 감지하지 못할 정도의 고위존재라는 뜻이며 삼황오제에게도 크게 꿇리지 않고 대화를 할 정도였으니, 기백천사의 격은 삼황오제 바로 밑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그런 고위존재가 치우를 잠깐 붙잡으려고 희생해야 했을 정도라니!
그러자 구천현녀가 도리어 당혹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백웅…. 그건 치우를 직접 보지 못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기백천사가 그렇게라도 잠시나마 치우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게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
[치우는 격이 다른 존재입니다. 만신을 파괴하는 자라는 명칭은 과장된 게 아니죠….]
그 순간 나는 구천현녀의 몸이 잠시 떨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 반응을 보자 나는 내심 놀랐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구천현녀가 평정을 잃을 정도라니….’
치우는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음, 아무튼 지남거는 내가 가져가겠소. 혹시 이게 내게 쓸모있을지도 모르지.”
[새로운 신기를 얻으신 걸 감축드립니다.]
“그런데 제곡이 숨긴 지남거는 탕왕의 무덤에서 발견했지만 정작 치우의 신체부위는 거기서 발견하지 못했소. 거기에 같이 숨긴 게 아니었던 것이오?”
[중대한 물건을 한 곳에 몰아놓지는 않겠지요. 나머지 부위는 따로 찾으셔야 할 듯 하군요.]
“제길….”
소득은 있었지만 막상 치우의 신체부위를 찾지 못하자 허탈감이 일어났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이만 가 보겠소.”
파앗
나는 지상으로 돌아가 지남거를 얻은 일을 제갈량에게 전했다. 그러자 제갈량이 말했다.
“전설의 지남거가 그런 물건이었다니 놀라운 일이군. 이토록 간단하게 고대의 비밀을 캐어내다니 전생자란 경이로운 존재구나….”
감탄하듯 중얼거린 제갈량이 백우선을 부치며 말했다.
“우선, 선지자에게 안 찾아간 것은 잘 했다. 왜 잘 한 건지는 말 안 해도 알지?”
“응? 왜?”
“…….”
“…….”
“아두같은….”
뭔가 내뱉으려던 제갈량이 억지로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듯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나서 말했다.
“기억 안 나나? 네 녀석은 선지자와 거래할 때 선지자에게서 고급정보를 듣는 대신 대가를 주기로 약속했지.”
“아…!!”
“선지자는 네가 탑의 시련을 공략하고 여와복희에게 받은 ‘대가’를 8대2로 나눠받기로 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갈량은 골치아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여와복희에게 받은 것은 바로 천계의 지배권과 옥황상제의 자리. 그걸 2할 나눠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선지자에게 천계의 2할을 넘겨줘야 한다는 소리다.”
“…….”
나는 그 말에 잠시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 그렇게 큰일은 아니지 않을까? 어차피 천계가 원래 내 것도 아니었고 선지자한테 2할쯤 떼준다 해서 뭔 일이 생기진 않을 것 같은데.”
“아두같은 놈. 영토 2할이란 건 우리 쪽에 긍정적인 해석이다. 선지자같은 현자가 겨우 천계의 땅덩어리를 탐내진 않겠지. 애초에 그 종족의 힘 자체가 천계에 맞먹을 정도이기도 하고.”
“그럼?”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옥황상제 권능의 2할을 내어놓으라 하겠지. 무늬뿐인 영토보다 그게 훨씬 가치 있을 테니까.”
“윽…!!”
“직접 써 봤으니 옥황상제의 권능이 얼마나 편리하고 강력한지는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골치 아프다는 거고.”
“제길…. 진짜?”
“물론 더 최악의 경우도 있다. 선지자가 그걸 요구하진 않기를 바라야 하겠지만.”
나는 표정이 굳어졌다.
‘제기랄…. 정보료로 너무 많이 떼어준 느낌이잖아!’
옥황상제의 권능은 직접전투에 쓰이는 건 별로 없었지만 부가적인 권능이 굉장히 편리했다. 잘만 사용하면 세상을 주무르는 건 일도 아닐 정도였다. 만일 선지자가 정보료로 핵심적인 권능을 가져가면 앞으로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선지자는 찾아가지 않겠어!”
그러자 제갈량의 목에 핏줄이 쫙 잡혔고 그의 얼굴이 살짝 벌겋게 변했다. 그리고 제갈량이 크게 고함을 쳤다.
“아두같은 놈!! 넌 정말 생각이란 걸 하는 거냐? 선지자에게서 정보를 안 받고 종말까지 제대로 운용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 정말 필요한 정보를 사야할 땐 어떻게 할 거냐! 이미 거래약속을 해버렸다면 줄 건 줘야한다는 걸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
“억…. 그, 그런가….”
“선지자에게 미움받으면 넌 1년도 못 버틴다. 네가 갑을관계의 갑이긴 하지만 놈은 마음만 먹으면 네게 얼마든 엿먹일 수 있단 말이다. 갑을이자 공생관계라면 충분한 대가를 주는 게 전제가 된다.”
“하지만 옥황상제 권능의 2할을 주는 건….”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머리를 써야하는 것이다. 다른 대가를 주면서 그 자와 원활한 협상을 해서 이쪽의 피해를 줄이고, 다음 정보교환의 물꼬를 트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맨입으로 권능 2할을 줘야하는 상황을 대비하는 거지.”
“그렇군…!!”
나는 제갈량의 말에 감탄했다. 제갈량이 말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잘 듣고 따라해라.”
나는 제갈량에게서 계책을 들은 후 곧장 선지자에게 갔다.
파앗!
“선지자!! 거래다!”
스스스
선지자가 내 부름에 나타났다. 선지자가 촉수를 일렁이면서 말했다.
[옥황상제이자 전륜성왕이 된 걸 축하한다….]
“하핫, 고마워! 근데 넌 나한테 존댓말 안 하냐?”
내가 은근슬쩍 반문하자 선지자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하…. 웃기지 마라. 농담을 잘하게 되었구나….]
“…….”
…왠지 저 자식은 내가 진짜 신이 되어도 절대 존댓말은 안 할 것 같다….
내가 흙씹은 표정을 짓고 있자 선지자가 말했다.
[약속대로…. 천계의 시련을 통과하여 대가를 받았으니…. 그 대가의 2할을 받아가겠다…. 동의하는가…? 뭐…. 동의하니까 여기까지 찾아온 거겠지….]
“잠깐 잠깐. 난 아직 준다고 안 했는데.”
[뭣이….]
나는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선지자, 네가 받고싶은 2할이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말을 해라. 그 당시에는 대가의 2할이라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뭘 줄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네게 무엇을 줄지 선택할 권한이 있잖냐?”
[…꽤나 책사의 조언을 받고 왔나 보군. 뭐 좋다…. 계약서를 썼던 것도 아니었으니.]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내가 받고 싶은 건…. 바로 생사부(生死簿)다.]
“……!!”
[별로 어려운 건 아니겠지…. 당장 다오….]
제길!
제갈량이 말했던 ‘최악의 경우’가 나와버렸잖아!
나는 떫은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제갈량에게 들은 대로 항변하기 시작했다.
“왜 그걸 줘야 하지? 내가 복희와 여와에게 받은 건 천계의 지배권이자 옥황상제의 자리야. 생사부는 그 일과 관련이 없으니 대가가 될 수 없어.”
[아니지…. 너는 100층에 도달함으로써 망량에게서 전륜성왕의 권능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전륜성왕의 권능 또한 대가에 포함이 되지 않겠나…? 그렇게 치면 내가 받을 수 있는 건 옥황상제와 전륜성왕의 권능 그 모든 것의 2할….]
“…….”
[상당히 많은 걸 얻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욕심이 없는지라…. 생사부 하나만 가져가겠다….]
“웃기지 마!! 2할이라고 했으면서 왜 생사부를 달라고 주장해?”
[두 개를 합친 분량의 2할이니…. 생사부 정도면 2할의 가치가 있지…. 딱 맞는 계산이라고 생각한다.]
이 새끼 선심쓰는 척 하고 있네!!
‘으…. 정말 제갈량 말대로네!’
나는 대비 없이 왔으면 꼼짝없이 뜯겼으리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제갈량에게서 이미 조언을 듣고 온 상태였기에 내심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선지자. 그럼 생사부와 함께 전륜성왕에게 가해진 금제도 같이 가져간다는 뜻으로 이해하겠다.”
흠칫!
선지자가 약간 놀라는 듯 했다.
[무슨 말이지…. 금제…?]
“뭐 별 건 아니고, 공손헌원이 전륜성왕을 봉인할 때 쐐기처럼 저주를 같이 박아놓았는데 그게 생사부에도 스며있지. 전륜성왕이 부활해도 마음대로 운신할 수 없게 하는 저주라고. 그래서 조금 껄끄러웠는데 네가 생사부를 가져가 준다고 하니 다행인 것 같아.”
[…….]
“당연히 생사부를 가져가는 거면 저주도 같이 가져가는 거 맞지?”
[거짓말하지 마라…. 그런 얘긴 들어본 적 없다.]
“그건 네가 알아서 판단하고, 그래도 거래할래?”
[…….]
선지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동안이나 침묵을 하더니 말했다.
[거짓말이든 아니든 나는 선택할 수 없게 되었군…. 나는 조그마한 의심이라도 있다면 선택할 수 없는 성격이니까…. 제갈량은 정말 머리가 좋구나….]
나는 뜨끔하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이 대비책을 제갈량이 줬다는 걸 눈치챈 것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좋다…. 그 지혜에 경의를 표해 생사부가 과한 욕심이었다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두 번은 이런 수법이 안 통할 것이다.]
선지자가 약간 분하다는 듯 자신의 촉수를 푸들푸들 떨더니 말했다.
[사흉(四凶)과 천계의 죄수 100명을 내게 내놓고 생사부의 2할을 다오. 그거라면 네게도 부담은 안 갈 것이다.]
“사흉을?”
[많이 양보했다…. 더 이상의 교섭은 없다.]
왠지 선지자의 말이 송곳처럼 느껴진다. 확실히 놈으로서는 양보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계약은 성립되었다….]
쉬아악!!
다음 순간 사흉과 천계의 죄수 100명이 순식간에 이 자리에 나타나 있었다. 아무래도 스스로 가져가겠다는 뜻으로 보였고, 나는 생사부에서 적당한 분량의 종이를 뭉텅 뜯어서 선지자에게 건네주었다.
위잉
선지자는 종이덩어리를 받자마자 곧장 수상한 마법으로 그걸 생사부처럼 책의 형태로 만들었다. 자기만의 생사부를 얻은 선지자가 말했다.
[전륜성왕이 된 걸 다시 한 번 축하하며, 한 가지 경고해 두지….]
“뭘?”
[머지않아 네게 누군가 위대한 존재가 찾아올 것이다.]
스으으으
선지자가 자기가 받은 [대가]와 함께 모습을 감추면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네가 죽음의 제왕으로써 넘어야 할 문턱이 찾아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