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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홍길동과의 첫 수 교환 직후, 내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그것은 전혀 뜻밖의 상황을 맞이했는데도 당황하기보다는 능란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홍길동이 나타났다? 그 말은 홍길동이 바로 성주(星主)이며 태백산으로 향하는 출입구를 관리하는 혈맥이라는 뜻….’
나는 홍길동과 약간의 거리를 둔 채 먼저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군.”
그리고는 도발했다.
“나한테 한방에 죽었던 기분은 어때?”
“……!!”
홍길동이 애써 평정을 찾으려 했으나 이미 스스로 분노를 폭출했기 때문이었을까? 얼굴의 일그러짐을 통해서 크나큰 감정의 뒤틀림이 느껴졌다. 절대지경 무인으로서의 수양으로도 누르지 못할 정도의 분노가 일어나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절대지경은 절대지경이라는 걸까? 홍길동은 금세 평정을 되찾고는 힐끔 내 옆에 있던 정도령을 보곤 말했다.
“여동빈을 감시하라고 놔뒀더니 배신했구나, 정도령!”
그러자 정도령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훗! 기회가 되면 언제든 배신해도 된다고 십이율주 본인이 이야기했으니 그 말대로 했을 뿐이다.”
“네가 아무리 정도령이라도 십승지의 힘을 하나도 얻지 못한 주제에 내 상대가 될 것 같나.”
홍길동은 정도령을 꽤 여유롭게 대하고 있었다.
“큭….”
정도령은 십승지라는 말에 꽤 가슴 아픈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윽고 내게 말했다.
“언제까지 떠들게 내버려두실 겁니까?”
“…….”
나는 홍길동과 대치한 채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홍길동에게 말했다.
“이봐. 솔직히 말해서 내가 널 죽인 게 잘못한 거냐?”
“뭐라고?”
“너는 내가 아이의 몸이라고 방심하다가 일격에 당했고 또한 대놓고 대웅제국에 도발을 걸러 왔었지. 죽어 마땅하지 않았느냐? 또한 방심해서 당한 게 네놈 잘못이니 나를 원망할 필요는 없겠지.”
홍길동이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나는 홍길동에게 끌어들이는 듯한 손동작을 했다.
“옛날의 원한은 잊고 내 부하가 되어라. 그럼 선처해 주마.”
“…….”
“너 정도면 괜찮은 부하가 될 것 같다.”
홍길동은 멍하니 서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껄껄 웃었다.
“크하하하!! 과거에 네가 날 이긴 게 진짜 실력이라고 생각하나? 네놈이 절대지경의 고수란 걸 알았다면 당연히 거기에 맞게 상대해 줄 것이다. 내가 그 때 이후로 얼마나 절치부심해서 무공을 연마했는지 모를 것이다….”
홍길동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 했다.
“다시 일대일로 붙자. 그럼 내가 이긴다!!”
“흐음….”
나는 홍길동의 말에 내 마음 속을 한 번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마음속에서 결론을 내리곤 말했다.
“싫어. 널 상대로는 그다지 호승심이 생기지 않는군.”
“뭐?”
이어진 내 말에 홍길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난 너한테 이겼잖아? 1승 0패잖아? 뭐하려고 도전을 받아줘?”
부들부들
홍길동은 더 이상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하는지 어깨가 강하게 떨리는 듯 했다. 그리고는 이를 악물곤 외쳤다.
“…개자식, 그런 식으로 날 도발한다 이거지. 그럼 네가 도전을 받게 해 주마.”
파아앗!!
다음 순간 홍길동의 신형이 사라졌다. 동시에 태백산의 산야에 온통 자욱한 환무(幻霧)가 일렁였고 한 치 앞도 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술법을 전개한 홍길동이 안개 속에서 광소를 터뜨리는 게 들렸다.
[하하하!! 이 환무진은 내가 삼백 년이나 연마한 것이다! 이 진을 깰 때쯤이면 백웅 네놈의 체력이 거의 다 소진되리라. 그 때를 각오해라!]
후우우
‘확실히 대단한 진법이군. 낙혼별부보다 직접적인 파괴력은 약하지만 지속력과 끈기는 몇 배나 강할 것 같다.’
나는 내심 침음성을 흘렸다. 최소한 상급 술수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주문이나 동작도 없이 이런 강력한 진법을 전개할 수 있다는 건 홍길동이 술수에 있어서도 대주술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이었다.
나는 옆에 있던 정도령에게 말했다.
“정도령. 혹시 홍길동과 싸워보고 싶나?”
정도령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길고짧은 건 이미 압니다. 그래서 그다지 싸우고싶진 않습니다. 제가 그보다 약한 건 사실이니.”
“좋아. 그럼 간다.”
나는 옥황의를 이용해 손에 신력을 모으며 외쳤다.
“생사부(生死簿)여 모습을 드러내라!”
퍼엉
이윽고 전륜성왕의 징표인 생사부가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언령을 외쳤다.
“홍길동 죽어라!”
스스슥
언령에 반응한 생사부에는 저절로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적히기 시작했다. 마지막 ‘동’의 글자가 적히는 순간이었다.
“커… 어어억….”
화아앗
다음 순간 환무진이 풀리면서 약 이십 장 떨어진 곳에서 칼을 들고 있던 홍길동의 신형이 떨어졌다.
풀썩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들려있던 칼이 튕겨나갔고 홍길동의 얼굴은 핏기 없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술자(術者)가 죽으면서 진법이 동시에 깨어진 현상이었다.
“흠. 내 주변을 돌면서 기습을 가할 생각이었나 보군.”
확실히 환무진과 이런 전술이 가미되면 나라고 해도 위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홍길동의 절기는 실체와 환상을 거의 구분할 수 없다는 특성을 갖고 있었기에 한 순간만 잘못 판단해도 그의 기습에 치명타를 맞고 말리라. 아무리 내가 절대지경이라지만 안개 속에서 홍길동의 절기를 모두 간파할 순 없다.
“근데 이제 와서 너랑 드잡이질 하고 싸우기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거든.”
나는 여기에 놀러온 게 아니다.
삼신산 중 영주산으로 추정되는 태백산에 빨리 진입해서 황제의 보패 지남거를 찾아내야만 한다. 괜히 홍길동과 수준 맞춰서 싸워주다가 놈이 탈주해서 십이율에 상황을 알리거나 하면 골치아파진다.
“홍길동. 내 제안을 거절했으니 네게 이 수법을 쓰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진 않는다.”
나는 죽은 홍길동에게 다가가서는 그의 시체에 손을 대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혼대법(異魂大法)!
슈슈슉
홍길동의 시체에서 백(魄)이 뽑혀서 내 손 위에 새하얀 형태가 되어 떠올랐다. 나는 동시에 백을 이용하여 흡인력을 발휘해서 홍길동의 혼(魂)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우….
홍길동의 혼 위에 언뜻 홍길동의 얼굴이 겹쳐보이는 듯 했다. 이것은 이혼대법이 완숙에 이르렀을 때 대상자의 영혼이 표상을 드러내는 현상이었다. 동시에 상대의 혼이 거의 다 끌려왔다는 뜻이었으므로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파앗!!
“큭?”
하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격렬한 반발력! 나는 그 힘 때문에 이혼대법에 향하고 있던 힘을 갑자기 세게 땡길 수밖에 없었고, 두 개의 상반된 인력이 부딪히자 그 결과는 당연히 찢어지게 되었다. 나는 내가 수습한 혼을 제외한 부분을 다시 한 번 이혼대법으로 당기려 했지만 그 순간 눈앞에 거대한 환영이 보이는 듯 했다.
거목(巨木)의 뿌리.
그 뿌리에 홍길동의 혼이 빨려들어가서 흡수되는 환영이 보였다. 나는 그 거목을 상대로는 내 이혼대법의 성취가 초라해서 더 이상 강탈을 시도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엄청난 힘…!!’
저 거목의 정체가 만일 세계수인 신단수라면 더 이상 시도해봤자일 것이다.
슈우욱….
이혼대법이 끝나자 내 손 위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덩어리가 떠올라 있었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정도령이 질문했다.
“폐하. 그 은빛 덩어리는….”
“홍길동의 반쪽짜리 혼. 다 얻어내진 못했군.”
그렇게 대꾸한 나는 나직이 말했다.
“옥황상제의 권능으로 명한다. 필멸자의 혼이여, 내 힘을 받아 형상을 갖출 지어다!”
우우우우!!
잠시 후 홍길동의 반쪽짜리 영혼이 옥황의에서 뻗어나온 신령스러운 칠채의 빛에 감싸이자, 마치 생전의 홍길동을 연상시키는 듯한 육체로 변화했다.
‘이것이 옥황상제의 권능 중 하나.’
혼에게 육체를 부여하는 권능!
언뜻 사소해 보이지만 옥황상제는 별다른 인과율의 소모나 술력소모 없이 무형의 혼에게 육체를 구현화시켜 만들어줄 수 있었다. 또한 그 반대도 가능했다.
주로 천계 신선들의 상벌이나 인계 파견에 사용하는 권능이었는데 이혼대법과 결합이 되자 굉장히 편리한 권능으로 느껴졌다. 왜냐하면 이혼대법으로 계속 백으로 혼을 끌어당기는 상태를 유지할 필요 없이, 제압권을 유지한 상태로 이혼대법을 해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혼대법으로 심문을 할 때는 백의 흡인력 유지를 해야했기에 제약이 있었는데 그 제약이 사라진 셈이다.
마치 인형처럼 서 있는 홍길동의 모습을 본 나는 천천히 말했다.
“홍길동. 내 질문에 답하라.”
“알겠습니다….”
“너는 태백산을 관리하는 성주의 혈맥인가?”
그 질문에 홍길동이 영혼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사실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20세에 율도국왕이 되었을 때부터….”
“그럼 지금부터 수백 년 전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그럼 태백산이 영주산인가?”
“그렇습니다….”
“천계에서 영주산으로 파견나온 자들이 있었을 텐데 그 자들은 어떻게 되었지?”
봉래도에는 봉래도주 이흥패를 비롯한 수십 명의 신선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다른 삼신산에도 거기에 상응하는 천계의 신선들이 있었으리라. 천계에서는 어느 순간 그들과의 연락이 끊겨서 통제력을 상실했으므로 정확한 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자 홍길동이 말했다.
“…그 자들은 율도국의 백성이 되었고…. 동시에 단의 일족으로 환생했습니다….”
“……?!”
이게 뭔 소리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무슨 말이지. 그 자들은 신선이었을 텐데 단의 일족이 되었단 말인가? 어째서?”
“이 세계에 정해진 종말을…. 십이율주가 해결해줄 수 있다는 말을 믿고…. 구원을 위해 동참했습니다.”
“천계의 기록으로는 영주산에서는 봉래도와는 달리 한동안 계속해서 연락이 왔다고 되어 있었다.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영주산에 있던 신선 전원이 율도국 백성이 되며 십이율에 가담했으므로…. 다같이 짜고 천계를 속였으나…. 의심이 강해지자…. 그냥 연락을 끊었습니다….”
“율도국이란 건 대체 뭐지? 근원을 말해라.”
이어진 홍길동의 말에 나는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율도국의 시초는 바로 영주산에 있던 신선들…. 저는 신선과 인간의 혼혈으로 반인반선(半人半仙)으로 성장하며 무예와 술법을 배웠고…. 제가 장성하자 저를 국왕으로 앞세워 모든 이들이 율도국을 창건했습니다….”
“…….”
즉 삼신산 중 영주산에 파견된 신선 모두가 천계를 배신했던 것인가!
나는 황당해서 홍길동에게 말했다.
“잠깐. 그렇다면 네가 성주의 혈맥을 지니고 있는 까닭은 뭐지? 신선과 인간의 혼혈이라면….”
“제 아버지는 영주산주이며 일파의 우두머리였으며 어머니께서 성주의 혈맥을 지니고 있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신선일파가 삼신산의 출입권을 자유롭게 얻기 위하여 어머니와 혼인하셨습니다….”
“…음, 그게 가능한가? 아니 뭐 가능한 거군.”
실제로 내가 성주의 혈맥으로 홍길동을 소환하니 그가 튀어나왔다는 건 왈가왈부할 여지도 없이 홍길동이 성주라는 걸 입증하는 것이었다. 나는 홍길동에게서 전혀 새로운 정보가 튀어나오자 계속 질문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정도령이 말했다.
“폐하. 영주산의 신선 일파가 따로 있다면 여기에 오래 머무는 건 위험합니다. 홍길동을 제외하고도 이 근처를 지키는 지킴이나 파수꾼이 이곳을 순찰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빨리 영주산 내부로….”
“알았다.”
정도령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나는 홍길동에게 말했다.
“영주산으로 들어갈 수 있나? 할 수 있다면 문을 열어다오.”
“알겠습니다….”
홍길동의 육체가 비척거리며 움직이더니 기이한 수형(手形)을 열여섯 번이나 맺었다. 하나하나가 고도의 술법을 이루는 수인이라서 외우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그가 주문을 외우자, 잠시 후 눈 앞에 거대한 신선의 문이 나타났다.
쿠웅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과연 그 안은 인간계와 완전히 다른 광활한 산맥이 펼쳐져 있었다. 또한 선계에서 느꼈던 특유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곳이 태백산 내부에 숨겨진 신선들의 이계, 영주산…. 봉래도와는 다르군.’
봉래도는 해신에게 크게 침략당했었다는 걸 기억해 낸 나는 홍길동에게 물었다.
“봉래도는 해신에게 당했었는데 너희는 해신의 침략을 당하지 않았나?”
“당했었으나…. 율도국과 십이율이 긴밀하게 연락하던 중이었기에 단의 일족의 도움으로 금세 물리쳤습니다…. 내륙지방이라 해신이 직접 오지 못했던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그랬군. 이곳에 율도국이 있는 건가. 신선들은 인간과 결혼하여 자손을 낳고 사는 것이고?”
“그렇습니다….”
나는 고려여행 당시에 말로만 듣던 율도국에 대해 상기해 보였다. 민간의 풍문으로 떠도는 신비의 나라로써 그곳에 사는 백성들은 늘 굶을 일이 없고 행복하게 산다는 지상낙원이었다.
하지만 실체를 알고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신선이 인간과 섞여서 반인반선의 혈통을 잇는 비밀의 나라! 죄다 신선의 힘을 이어받고 있으니 불로장생하며 배고픔도 잘 못 느낄 것이리라.
나는 홍길동을 힐끔 보며 말했다.
“이제 본론이다. 고대에 삼황오제 제곡이 영주산까지 와서 직접 봉인했다는 황제의 유물, 지남거에 대해 들은 게 있느냐?”
“…….”
“수상한 게 있다면 모두 말해라.”
홍길동은 기억을 떠올리듯 멍청한 표정으로 한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제곡… 지남거…. 같은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하지만?”
“영주산에 밤이 찾아오면…. 탕왕(湯王)의 무덤이 산맥의 정상에 가끔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그곳은 마기(魔氣)가 강력하게 봉인되어 있어…. 누구도 최심부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
“저도… 20살에 성인식을 치를 때…. 지하 3층까지밖에… 의심스러운 곳이라면 아마 거기 뿐….”
탕왕의 무덤!
나는 그 말에 약간 놀라서 반문했다.
“탕왕이라고 하는 건 은(殷)의 초대 제왕이었던 탕왕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게 진짜 탕왕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주산에 최초로 산주가 파견되기 이전부터 성주의 혈맥에게 전승되어 오는 전설… 입니다….”
“…흐으음….”
나는 길게 장탄식했다.
‘홍길동 본인한테 정상적으로 이런 정보를 들으려면 엄청 고생했겠지. 그러니 이 정보를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문제는 탕왕의 무덤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홍길동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신선들도 탕왕의 무덤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모른다는 것 -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탕왕의 무덤이 굉장히 공략난이도가 높다는 뜻이겠지.’
천계에서 파견된 신선들이면 최소한 지선 이상들이며 산주 정도면 대라신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조차도 탕왕의 무덤을 끝까지 파고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만큼 무덤에 잠재된 마기가 엄청난 수준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홍길동에게 말했다.
“탕왕의 무덤에 들어가는 조건이 혹시 따로 있나?”
“없습니다…. 밤이 되면 이따금씩 출현한다는 것 뿐… 그리고 들어간 자는 마찬가지로 밤이 되기 전에는 무덤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에는 괴물 같은 게 출현하나?”
“네…. 고대의 이족(異族)이나 타 차원계에서 소환된 환수같은 것들이 많습니다….”
“좋아.”
나는 정도령에게 말했다.
“가자.”
그러자 정도령이 흠칫하고 놀랐다.
“…탕왕의 무덤을 단 둘이서 공략하잔 말씀이십니까?!”
“안 될 게 있나?”
“으음…. 다른 동료들을 데려오셔서 가시는 게 안전하실 듯 합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네 말대로 홍길동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면 머지않아 이곳의 경계는 강화될 것이고 단의 일족에서 조사하러 올 거다. 경계가 심해지면 여기에 다시 오긴 힘들어.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지금 가는 게 낫다.”
“좋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봤자 천계의 탑보다는 쉽겠지요.”
우리는 홍길동을 따라서 탕왕의 무덤이 출현하는 영주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혹시 괜찮은 보물이 없냐고 질문해서 홍길동의 집에 있던 가보(家寶)를 모조리 내 목갑 안에 털어넣었다.
이윽고 달빛이 비치는 밤이 되자 산의 정상에 월광이 내리쬐었고, 그 월광을 받은 거대한 돌덩어리가 쿠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여서 입구를 드러내었다.
저벅
탕왕의 무덤 안에 진입한 나는 홍길동에게 말했다.
“홍길동. 최선을 다해 먼저 달려가서 모든 함정과 괴물을 분쇄해라.”
“알겠습니다….”
타다닷
치리링!!
홍길동이 달려가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고, 그의 검강과 어검술이 펼쳐지며 어둠속에서 뛰쳐나오던 괴물들을 베어내는 게 보였다. 나는 홍길동의 무위를 지켜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혼이 반쪽짜리라서 걱정했는데 잘 싸우는군.”
“…….”
“응? 정도령, 왜 그런 눈으로 봐?”
“폐하. 사신(死神)이 되셨군요….”
“어차피 저 놈도 날 죽이려 했으니까 피장파장이야. 이런 걸로 하나하나 마음찔려하기에는 여유가 없군.”
정도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과연. 다들 폐하에게 기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군요.”
뭘 오래 기다려? 이상한 놈일세.
쿠콰콰
홍길동은 이후로도 2계층 정도는 잘 돌파했다. 그러다가 3층에서 4층으로 내려가자 갑자기 허덕이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족들의 촉수공격에 조금씩 부상을 입는 게 눈에 보였다.
“흐음! 괴물들이 딱히 더 강해진 것 같진 않은데….”
“쿨룩! 쿨룩!”
뒤에서 따라오던 정도령이 콜록거리더니 말했다.
“마기(魔氣)의 농도가 지나치게 강해져서…. 본신의 능력을 다 낼 수 없습니다. 일반인이라면 여기서 즉사할 것이고 고수라 해도 신체능력이 절반 이하가 되는 곳 같습니다.”
“……?”
어? 하나도 안 느껴지는데?
나는 어리둥절해하다가 홍길동에게 명령했다.
“뒤로 물러나!”
나는 홍길동이 뒤로 물러나자 옥황의를 이용해서 옆의 두 명에게 혼원지순의 술법을 연속해서 걸어주었다.
‘술법중첩을 여러 번 걸어주면 되겠지!’
혼원지순이 약 6중첩이 되자 둘은 마기에 영향을 안 받게 된 듯 했으며, 홍길동은 다시 내 명령에 따라 괴물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정도령도 합세해서 싸우는 걸 지켜보던 나는 생각했다.
‘옥황의가 대단한 보패구나. 모든 마기를 막아준다는 권능도 있다니.’
지금 상황을 봐서는 아직 나까지 싸우지 않아도 무난하게 통과할 듯 했다. 나는 뒤에서 구경하면서 계속 탕왕의 무덤 내부로 진입했다.
그렇게 약 5계층을 더 내려갔을까? 9층대로 진입하자 잡스러운 마물들이 하나도 출현하지 않았고, 대신에 신비스러운 외계의 마법진이 거대한 광장에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광장에 들어가자 외계의 마법진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고 무언가가 소환되었다.
콰아아아!!
소환된 것은 눈이 세 개 달린 외계의 촉수괴물이었다. 그 촉수괴물은 차마 형용하기조차 끔찍한 모습이었는데, 사방에 책 같은 걸 둥둥 띄운 걸 보면 시몬 마구스의 변신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그 촉수괴물이 소환되자 우리를 향해 외쳤다.
[나는 비통에 메아리치노라! 나는 아킬레스 성단 최고의 마도사이자 옛 지배자의 사도인 [그늘을 따라 걷는 자]! 제곡과의 맹약에 의해 수호자로 소환되었도다! 그대들은 정당한 권리를 지니고 지남거를 찾아가러 왔는가!]
쿨럭!!
그 순간 홍길동과 정도령이 동시에 오공(五孔)에서 피를 뿜어내더니 비틀거렸다. 나는 놀라서 정도령에게 말했다.
“이봐!! 말만 듣고 왜 그러는 거냐?”
“폐, 폐하…. 저, 저게 말로… 들리십니까? 아무 말도 안 들렸습니다….”
“말하던데….”
“저희를 언령으로 공격… 한 것 같은….”
풀썩
정도령은 내공을 끌어올려서 버티려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눈이 까뒤집혀서 기절하고 말았다. 홍길동은 정도령보다는 강한지 계속 버티고 있었지만 한계가 찾아오는지 전신을 후들거리는 게 보였다.
‘이게 뭔 일이다냐….’
눈앞의 괴물 생각보다 대단한 놈인가?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나는 동료들이 갑자기 전투불능이 되자 황당했지만 일단 상대가 말을 걸어왔기에 대답해 주었다.
“[그늘을 따라 걷는 자]여! 나는 백웅이다! 권리고 뭐고 모르겠다만 지남거를 가져가려고 왔다!”
[…….]
그러자 촉수괴물이 세 개의 눈을 데굴거리더니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오오…. 그대는… 전륜성왕…? 위대한 존재셨군요. 제 무례를 용서하소서!]
촉수괴물이 자신의 촉수를 늘어뜨리며 뭔가 동작을 취했다. 나는 그게 용서를 비는 동작이라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알았어. 통과시켜 줘.”
[아 그건…. 그렇다 해도 맨입으로 통과시켜드릴 순 없습니다….]
어쩐지 공손한 태도였다. 나는 대화가 잘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권리가 필요한지 말해봐! 제곡한테 권리를 받아와야 하냐?”
팔랑
촉수괴물이 책을 꺼내서 한참 넘겨보더니 웬 외계어로 적힌 장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제곡에게도 지남거를 회수할 권리는 없습니다…. 황제의 대리인만이 허용된다고 계약에 적혀 있습니다.]
“황제 공손헌원?”
[그렇습니다…. 이 계약을 엄수하지 않는다면 저는 계약대로 최선을 다해 싸울 것입니다…. 위대한 분이시여.]
“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촉수괴물에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봐.”
파앗
나는 비등을 써서 대웅제국 황궁으로 갔다. 그리고 대웅제국 회의를 열고 있던 사공린을 데리고 다시 탕왕의 무덤으로 왔다.
“자, 여기 황제의 대리인!”
[……!!]
촉수괴물은 사공린을 보자 촉수를 부들부들 떨다가 말했다.
[오오…. 설마 천마를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감격스럽군요….]
“아 그래서 지남거 가져가도 되는 거 맞냐고.”
[물론입니다…. 천마 이상의 증거는 존재치 않습니다…. 문을 열어드리겠나이다….]
쿠르르릉….
마지막 10층으로 향하는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고, 촉수괴물이 사라졌다.
황제의 정식예복을 입은 사공린은 피곤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백웅…. 아무리 필요한 일이라지만 대웅제국 전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회의 방송에 나타나서 순간이동을 쓰시면 안 돼요.”
“응? 내가 뭐 잘못했나?”
“괜찮아요. 인식코드와 전뇌자의 힘을 이용해서 여론조작과 기억조작을 하면 해결은 되겠지요…. 미국에게 인권침해 비난을 받겠지만 어쩔 수 없겠죠.”
“…….”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
사공린이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도 지남거를 보고 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