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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지남거를 대뜸 찾으라는 무리한 제안에도 대충 내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맨땅에 들이박아서 보물이나 단서를 찾아보았던 경험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지남거가 중화문명 태동기의 전설이라면 아무리 대웅제국의 정보력이라 해도 쉽게 찾는 건 불가능해.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해. 우선은 전국옥새를 써서 찾아보거나 선지자에게 가서 묻거나 하면 되겠지.’
하지만 전국옥새는 산하사직도 내부에 바치고 온 상태라서 지금 갖고있지 않다. 나는 곧장 선지자에게 가보려 하다가 멈칫했다.
“…….”
선지자에게 뭔가를 바치면 즉시 괜찮은 대답을 주긴 하지만 그건 무조건 거래이다. 거래라는 건 내가 가진 걸 줘야 한다는 뜻이고, 선지자가 지남거에 대한 조건을 얼마나 요구할지 모르겠다.
‘껄끄럽군….’
물론 이렇게 망설일 필요 없이 그냥 가 버려도 되지만 왠지 찝찝하다. 선지자를 지금 만나도 왠지 괜찮은 거래가 안 될 것만 같은 직감! 왜 그런지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내 직감은 무수한 위기에서 날 구해준 적이 있었기에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지자에게 다짜고짜 묻는 것보다 다른 좋은 방법이 있을까?
“…그래!”
파앗
나는 곧장 옥황상제의 권능을 사용해서 천계의 옥좌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는 근처에 있던 선관(仙官)을 불러서 말했다.
“구천현녀에게 가겠다.”
[옥황거(玉皇車)를 대령하겠나이다.]
퍼엉!
잠시 후 네 마리의 영수가 이끄는 으리으리한 거대한 마차가 소환되었고 나는 그 안에 들어갔다. 그러자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쿠르르릉 -
영수들이 권능을 부리며 옥황거를 끌고 날아가기 시작했다. 천계에서도 드문 존재인 영수를 넷이나 써서 마차를 몰게 할 수 있는 게 바로 옥황상제의 특권이자 옥황거라는 특수한 보패의 능력이었다.
번개와 천둥이 몇 번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구천현녀가 지금 거처하고 있는 옥녀동(玉女洞)에 도착해 있었다. 본디 구천현녀는 대궁에서 대소사를 보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탑의 시련이 끝나자마자 옥녀동이라는 선동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구천현녀를 만나자 그녀가 말했다.
[옥황상제여.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구천현녀! 긴 말 하지 않겠소. 내가 물어볼 것은 세 가지요.”
지금 나는 옥황상제이기에 구천현녀에게 존대보다는 평대를 쓰기로 했다. 나는 구천현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첫째. 황제가 치우를 쓰러뜨릴 때 사용했다는 지남거(指南車)의 행방을 알고 있소?”
[저는 알지 못합니다. 황제의 소유물이기에.]
저 대답으로 이미 구천현녀를 찾아온 용건이 허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둘째. 당신은 치우를 상대해봤을 것이오. 전승에 따르면 당신과 응룡이 황제를 도움으로써 황제가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었소?”
[…….]
이건 중대한 질문이다.
치우의 엄청난 힘은 현재 예측조차 되지 않는 상황인데, 도대체 무슨 수로 구천현녀나 응룡이 그를 봉인하는데 손을 거들 수 있었을까? 물론 그들도 만만한 존재는 절대 아니지만 하필 그들이 황제를 도운 게 치우의 패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전승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옥황상제로서 그 전투의 내막을 알아야겠소.”
구천현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반문했다.
[세 번째 질문도 마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두 번째 질문과 함께 대답해드리고 싶군요.]
“좋소. 세 번째 질문은 조금 직설적이니까 마음의 각오를 하시오.”
나는 구천현녀를 다소 강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황제의 수하이자 만신전의 일원인 게 아니오?”
이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구천현녀가 너무 강력한 조력자이기에 섣불리 그녀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제는 그녀의 정체성을 확실히 해야하는 것이다.
구천현녀는 무언가 생각하듯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과거엔 그랬습니다.]
“과거라고…. 그럼 지금은 아니란 것이오?”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치우와 겨룰 때의 탁록대전까지는 만신전의 소속으로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응룡은 만신전에 남았고 저는 만신전을 나왔지요.]
“믿을 수가 없구려. 구천현녀 당신이 아직도 황제의 지배하에 있으며 천계를 간접적으로 그의 지배권에 넣는 게 훨씬 말이 되지 않겠소?”
[믿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황제의 수하였다면 좀 더 일찍부터 천계를 제 손에 넣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저는 대지를 수호하는 것만이 관심사…. 황제에게 마음속까지 굴복한 적은 없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
나는 뭔가 찝찝해서 구천현녀에게 질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신은….”
일요의 수호자가 아닙니까?
움찔!
나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래서 튀어나오려던 말이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삼켜져버리고 말았다.
‘왜지…. 으음…. 이걸 물어보면 확실해질텐데.’
나는 나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생하면서 얻었던 정보에 따르자면 구천현녀는 [일요의 수호자]이자 지구의 대지모신이자 정령신! 그 정체를 알고 있기에 나는 구천현녀가 황제와 인연을 끊었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정말로 인연을 끊었다면 어째서 구천현녀가 일요의 수호자로 소환된다는 말인가? 태초에 칠요가 만들어질 때부터 구천현녀가 수호자로 내정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미심쩍은 건 마찬가지다.
이렇게 생각하면 당연히 물어봐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밖으로 질문이 나오지를 않는다.
이 질문은 뭔가 아니라는 직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유가 뭐지?
왜 이 질문을 하면 안 되지?
“…….”
빌어먹을…. 머리로는 이유가 잘 생각이 안 나….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직감대로 간다. 구천현녀에게 자세한 사정을 캐어물으면 훨씬 더 편하겠지만 지금은 좀 더 조심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험. 좋소. 그렇다 치고 치우와 어떻게 싸웠는지를 말해주시오.”
[제게 향해진 의심은 앞으로 그대를 도우면서 풀어나가도록 하지요, 옥황상제.]
파아앗
구천현녀가 섬섬옥수를 뻗어 허공에 새하얀 공 같은 걸 소환했다. 그리고 그 공이 점차 커져서 수박만해지더니, 공에서 빛이 뻗어 나와서 여러 가지 형체를 만들었다. 그 형체는 하나하나가 무언가를 상징하는 듯 했다. 나는 개중 용의 형상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응룡인가.”
아무래도 탁록대전의 주역들을 보기 쉽게 형상화시킨 주술인 듯 했다. 구천현녀는 빛의 형상을 움직이며 설명했다.
[황제는 말 그대로 치우를 상대로 백전백패(百戰百敗)했습니다. 단 한 번도 이기지를 못했고, 사실 전투가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치우가 황제의 화신이나 사도를 너무 많이 찢어버려서 나중에는 도망치기에 바빴지요.]
“…….”
[황제는 저와 응룡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도와준다면 우리의 소망대로 [옛 지배자]가 잔뜩 강림해있는 판도에서 질서와 생명에 최소한의 삶을 제공하겠다고…. 그래서 저와 응룡도 참전했지요.]
“거기까진 알고 있소. 중요한 건 당신과 응룡이 어떤 수를 부렸길래 황제조차 찍어 누르는 치우를 상대로 승기를 제공할 수 있었냐는 것이오.”
구천현녀는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저와 응룡은 황제의 요청으로 참전하여 탁록에서 황제가 술법을 완성할 때까지 버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치우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데 성공했고 그게 황제가 승리한 원동력이 되었죠.]
“……?”
[저희의 역할은 시간끌기였던 것 같습니다.]
엥?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는 황당해서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2대 1로 싸웠다지만 치우의 힘은 황제조차 찢어버릴 정도로 강한데 그를 상대로 버텨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힘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응룡도 구천현녀도 정령신의 본질을 드러내면 오제에 준하는 존재들이지만, 황제의 힘만 하더라도 그런 오제보다 훨씬 위에 있으며 치우는 그런 황제를 패대기칠 수 있으니 애초에 성립이 되지 않는 싸움이다. 둘이 같이 덤볐더라도 치우에게 단숨에 찢겨죽었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러나 구천현녀는 자신과 응룡이 합심하여 치우를 상대로 발목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하다니!
구천현녀가 말했다.
[거짓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치우는 이상하게 저와 응룡을 상대로는 평소에 보여주던 압도적인 괴력을 보여주지 못했지요.]
“혹시 당신들이 치우에게 무언가 봉인의 술법이나 권능을 쓴 게 아니었소?”
[치우에게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었지요. 그냥 있는 대로 싸웠습니다. 다만 뭐라고 해야 할지….]
구천현녀가 뭔가 예전 일을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양 손을 묶고 상대하는 듯 부자연스러워보였습니다. 평소에 황제와 그 부하인 사제들에게 보여주던 무한한 힘이 아니었지요.]
“…….”
[그렇다 해도 너무 강력했기에 시간만 끌었을 뿐 그 자에게 상처 하나도 내지 못했습니다. 저도 응룡도 그때 만신창이가 되어서 소멸할 뻔 했지요…. 응룡은 그때 치우에게 뜯겨나간 상처가 아직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치우를 상대로 봉인술을 쓰지도 않았는데 치우가 알아서 약해졌다고?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웃하자 구천현녀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지남거가 그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심증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남거는 황제가 탁록대전이 끝난 후 제곡에게 지남거를 맡겼으니 아무도 행방을 알지 못합니다.]
“지남거의 구체적인 권능이 뭔지 모른단 말이오? 전설상에는 단순히 남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보패라고 알려져 있는데.”
[네. 모릅니다. 그 전승조차도 그저 추측일 뿐…. 황제 공손헌원은 그 누구에게도 지남거의 구체적인 권능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설마….”
[지남거는 아마 황제의 비밀병기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 구천현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짐작가는 곳이 한 곳 있기는 합니다.]
“그게 어디요?”
[묘족(苗族)의 성지(聖地)인 쌍신산(雙神山)입니다. 그 당시에 제곡이 지남거를 가지고 쌍신산으로 갔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는 아마 거기에서 치우의 신체를 봉인했을 것입니다.]
“묘족? 쌍신산…?”
나는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생전 처음 듣는 곳이군. 아무튼 고맙소.”
파앗
나는 구천현녀에게 단서를 얻은 후 전뇌자에게 갔다. 그리고 말했다.
“전뇌자. 묘족의 성지인 쌍신산에 대해 알아봐 줘.”
치잉 -
전뇌자는 가상의 홀로그램을 띄운 채 잠시 뭔가 검색하더니 말했다.
[쌍신산은 묘족의 창세신인 두 마리의 신조(神鳥)가 마지막으로 잠들었다는 산을 의미한다. 두 마리의 새는 세상의 창세를 끝낸 후 하나의 장소에서 마주치게 된다는 전승이 있어. 그리고 묘족의 장로나 부족장이 대대로 묘족의 무사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쌍신산을 향해 공양을 치렀다고 되어있네.]
“신조? 아무튼 그래서 쌍신산이 어디야.”
[쌍신산은 묘족의 구전(口傳)으로 전해져내려오는 전설일 뿐이야. 전세계의 전뇌넷을 다 뒤져봐도 이 이상의 정보는 없어.]
나는 전뇌자의 말에 팔짱을 꼈다.
“직접 가서 물어봐야 한다는 소리겠군.”
파앗!
나는 전뇌자에게서 현재 묘족의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인간들이 몰려사는 군락의 좌표를 받은 후 곧장 거기로 이동했다. 그런데 묘족들에게 장로의 위치를 질문하자, 그들은 하나같이 난색을 표했다. 왠지 말하기조차 껄끄럽다는 태도였고 이윽고 누군가가 귀띔하듯 말해줬다.
“그녀는 하남성 전 시장인 장륵병(長肋倂)이 2조 5천억대 신도시 개발 부동산 비리를 저지른 걸 고발하는 바람에 연금되었소….”
“엥 많이도 해처먹었군..”
“장륵병은 무기징역을 받아서 인생이 끝났고…. 다행히 묘족에는 화가 미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예언능력을 경계해서 군에서 연금한 거요.”
“그래서 어딜 가면 된다는 소리요?”
“저기 언덕 위쪽에 군인들의 통제구역. 우리가 늘 그녀를 면회하곤 하오.”
나는 좌표 근처에 대웅제국의 군인들이 마을과의 경계를 지키고 있는 걸 보고는 사공린에게서 받은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일대를 담당하던 비귀 중장(中將)이란 자가 깜짝 놀랐다.
“허억!! 실례했습니다.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나는 현대양식으로 지어진 조그마한 3층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묘족의 장로를 만나게 되었다. 묘족의 장로는 롱패딩 옷을 입은 30대 초중반의 여인이었는데 왜인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흥. 예언으로 정치인 부패를 고발했다고 나를 7년째 감금하다니…. 언제까지 이럴 셈이냐.”
그녀는 면담실에서 곱지 못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 아, 아니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영력이! 보통 주술사의 수십만… 수백만 배…?!”
그녀 또한 보기 드문 강력한 주술사 같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지닌 힘의 수준을 알아채고는 경악한 듯 했다. 그녀가 경악하자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나는 백웅이라 한다. 당신이 아는 묘족 쌍신산의 전설을 내게 모두 알려줬으면 좋겠군.”
“…….”
“아는 걸 모두 말해준다면 당장 당신의 연금을 풀어주고 충분한 대가를 주겠다.”
묘족의 장로는 홀린 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인터넷에 올라오지 않은 묘족의 비밀스러운 신화와 전승을 모두 들을 수 있었고, 이윽고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걸 하나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쌍신산에 갈 수 없다는 이유가 대체 뭐지?”
그녀는 내 영력에 기가 죽었는지 불안한 눈빛으로 움츠려서 조심스레 말했다.
“…당신이 신적 존재란 건 알겠어요. 아, 아, 아마도 전설의 대라신선, 아니 그보다 더한….”
잠시 공포에 사로잡힌 표정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설령 신이라 해도 쌍신산에는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현실에 쌍신산이 출현하는 건 아주 잠깐이기 때문이에요.”
“쌍신산은 계속 허구의 차원에 머물다가 한 순간 지상에 출현한다는 말이군. 그게 언제인데?”
“머무는 두 마리의 신조(神鳥)가 서로를 감싸안는 순간이죠. 과제(科啼)는 과거에서 날아오고 악제(樂啼)는 미래에서 날아오는 새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로지 한 점에서만 만날 수가 있어요.”
“……?”
“그래서 묘족 역사상 그 누구도 쌍신산엔 가본 적이 없어요….”
나는 황당해서 반문했다.
“무슨 소리야? 과거에서 날아오는 새랑 미래에서 날아오는 새가 어떻게 만나는데? 말이 안 되잖아?”
“저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승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그 한 순간에만 나타난다고….”
“…아무튼 좋아. 정보 고마워.”
나는 바깥에 있던 비귀 중장을 불러서 말했다.
“당장 저 분을 풀어드리고 그 동안 연금해서 죄송하다고 간부들이랑 다 같이 무릎 꿇고 사죄해.”
“뭐…뭐라고. 아무리 황궁의 특급귀빈이라지만 그런 명령은 들을 수 없소. 내가 누군지 아는가.”
“못 듣겠다고? 좋아 잠깐만 기다려.”
나는 품속에 있던 스마트폰을 꺼내서 사공린한테 전화했다.
[백웅. 무슨 일이죠?]
“사공린. 지남거를 찾다가 이런 일이 있었거든….”
나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한 후 비귀 중장에게 전화를 넘겼다.
“야. 전화 좀 받아 봐.”
내 전화를 받은 비귀 중장이 이윽고 이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외쳤다.
“위대하신 사공린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비귀 중장은 사색이 된 채 한동안 그저 충성하겠다는 말을 연발하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내게 무릎을 꿇었다.
“모,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모든 간부들과 함께 와서 사죄하겠습니다…. 그리고 황제폐하의 명령대로 금전적 배상 또한 하겠습니다…. 제발 제 처자식만큼은 봐 주십시오…. 제발 사형만큼은….”
사공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기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던가….”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고는 그대로 그곳을 나가버렸다. 이곳에서도 뭔가 이야기와 사연이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 내게는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이제 정보도 좀 모았겠다 선지자한테 쌍신산에 대해 물어보러 갈까? …아니야. 아직 감이 좋지 않아.’
여기서는 제갈량에게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취합해서 알려주는 게 옳을 것 같다.
파앗
제갈량은 내게서 정보를 듣고는 말했다.
“쌍신산의 위치는 대충 짐작이 가는군. 한반도에 있는 태백산(太白山)일 것이다.”
“엥? 그걸 듣고 어떻게 바로 단정지을 수가 있어?”
내가 놀라서 반문하자 제갈량이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너, 예전 도가의 기억 중에 혹시 삼신산(三神山)에 대한 게 기억나느냐?”
“그거야 기억나지.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그 중에서 봉래산은 봉래도에 있고 오거천문의 입구가 거기에 있고 지금까지 전생하면서 여러 번 가봤잖아.”
“그래. 하지만 너는 삼신산 중에서 영주산과 방장산은 가보지 않았지.”
그렇게 말한 제갈량이 말을 이었다.
“영주산(瀛洲山)은 천시(天時)와 지시(地時)가 만날 때 모습을 드러낸다는 전승이 도가에 전해져 온다. 그리고 천시는 미래, 지시는 과거를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이니…. 딱 쌍신산의 전설과 맞아떨어지는군.”
“영주산의 전설과 쌍신산의 전설이 같은 전설이었단 말인가?”
“그저 추측일 뿐이지만, 삼신산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 그곳을 관리하는 성주 외에는 그곳의 실체를 알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마치 봉래도에 오거천문이 존재했던 걸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삼신산 하나하나는 별격의 이계(異界). 천계에서조차도 삼신산의 모든 걸 알지는 못해.”
제갈량이 백우선을 펼치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게 결정적이지만 너는 이미 과거에 영주산의 진짜 정체를 봉래도주 이흥패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느냐?”
“어? 어….”
나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제갈량이 어떤 기억을 말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으음…. 봉래도에서 바로 가는 방법은 없소. 알고 있겠지만 이 봉래도에는 삼황오제 전욱의 어전인 만귀전이 있기 때문에 자칫했다가는 만귀전에서 다른 삼신산을 침략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오. 허나…. 지상계에는 그 입구가 있소.]
[영주산은 반도의 태백산(太白山), 방장산은 반도의 백두산(白頭山)이오. 그곳에 차원을 겹쳐놓았으며, 이 봉래도와 마찬가지로 성주(星主)가 대대로 삼신산의 입구를 관리하고 있을 것이오.]
아 맞다…!!
“……!!”
내가 깨달은 표정을 짓자 제갈량이 훗하고 말했다.
“영주산은 한반도의 태백산.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성주를 만날 수 있다면 영주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 하지만 확실한 게 아니잖아. 그저 전승이 비슷한 것뿐이고 완전히 다른 장소일 확률도….”
“해서 나쁠 것도 없잖나? 무엇보다도 네 말대로 선지자에게 가는 게 예감이 좋지 않다면 그 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는 수밖에.”
나는 태백산으로 바로 가 보려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제갈량에게 말했다.
“정도령을 데려가도 괜찮을까?”
“그 놈은 아직 의심스러운 놈인데 일부러 화를 자초할 필요가 있느냐?”
“하지만 정말로 십이율주의 간자라면 단의 일족에 대한 핵심정보를 다 털어놓을 리가 없어. 어느 정돈 믿어줘도 좋지 않을까? 그리고 녀석이 한반도에 대해 잘 알 테니 내 안내역할도 잘 해줄 거고.”
“…그렇다면야.”
나는 이윽고 정도령을 데려갈 수 있게 되었다. 정도령이 빙긋 웃으며 내게 포권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설마 데려가 주실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배신하면 안 돼.”
“하하하. 옥황상제이자 전륜성왕을 배신하는 멍청한 짓을 왜 하겠습니까. 죽고 나서는 좀 편해지고 싶으니 도리어 잘 보여야죠.”
능숙하게 대꾸한 정도령이 말을 이었다.
“태백산의 지리는 잘 알고 있으니 바로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파앗
나는 정도령과 함께 예전에 갔었던 해인사로 갔다. 비등으로 가 봤던 가장 가까운 위치가 여기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정도령은 해인사를 보자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여기도 오랜만이군요.”
“온 적이 있나?”
“술수수련을 하러 잠깐. 여기서부터 태백산이라면 축지법을 쓰면 금방일테니 잘 따라와 주십시오.”
파파팟
나와 정도령은 한 식경이 채 지나지 않아 태백산의 초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 나는 제갈량의 계책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영언을 외웠다.
[나 옥황상제 백웅이 명하노니, 영주산을 이끄는 성주(星主)의 혈맥은 소환되어라!]
우웅!
그러자 눈앞에 녹색빛의 휘광이 몰아치며 한 명의 인영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과연!’
지금까지 삼신산은 천계가 혼란스러워지면서 모든 관리감독이 끊겼지만 천계의 제왕인 옥황상제는 삼신산의 감독관을 소환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다. 성주라고 불리는 위대한 혈통 그 자체를 눈앞에 불러내어서 직접 삼신산으로 들어갈 수 있는 왕의 권능인 것이다. 지금까지 성주의 혈통을 찾아내는 게 너무 귀찮고 번거로운 작업이라 하지 않았지만 옥황상제의 자리를 손에 넣은 덕에 손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파아아앗…!!
이윽고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영주산을 이끄는 성주의 혈통!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저, 저 새끼는… 어째서….
“…….”
상대방 또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사앗!
나와 상대방은 거의 동시에 허리춤에 있던 검을 쥐었다. 그리고 정도령은 영문을 모르는 듯 눈을 데굴데굴 굴렸는데,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넘치는 가운데 먼저 출수한 것은 상대방이었다.
[죽어라, 백웅 황제!!]
절대지경(絶對之境)
공령백팔환(空靈百八幻)
처절한 원념과 함께 절대지경의 의념이 발출되어오는 게 느껴진다. 나는 그 공격에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마음을 텅 비운 상태에서 최강의 일 초식을 뻗어내었다.
무량단(無量斷)!
꽈과과광
절대지경의 일격이 부딪히는 파괴의 현장에서 토괴와 섬광이 번쩍이며 날아다녔고, 수십 장의 넓이가 통째로 붕괴되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나도 상대방도 계속해서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불신 가득한 기색으로 그 자의 이름을 불렀다.
“홍길동.”
율도국왕(栗島國王)이자 만하령문의 대장로(大長老).
또한 이번 생 초반에 방심하다가 내게 일격에 살해된 그 절대지경의 고수가 눈앞에 소환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