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69화 (1,166/1,615)

1169====================

사신지혼(四神之魂)

내가 빛과 함께 나타난 장소는 일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장소였다.

거신족의 왕궁!

이곳은 산하사직도에서 복희를 따라서 신농을 만났을 때 도달했던 장소였다. 물론 산하사직도가 꿈의 세계이니 현실에서는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셈이지만, 복희의 말대로라면 큰 상관은 없는 듯 했다.

다만 분위기가 전에 봤던 것과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신화의 요람이라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모든 궁궐의 기둥이 부식되고 허물어져 있었으며 사방에 가득하던 거신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휑하게 비어있는 이 궁궐은 차라리 폐허라고 할 수 있었으며 나와 서문혜는 폐허를 걸어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잠시 걸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그 곳에는 신농이 옥좌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신농의 모습은 본체가 아니었다. 제의에 나타나듯 제관을 쓴 고대의 제왕 같은 모습이었기에 나는 내심 의아함을 느꼈다.

‘이곳은 거신족의 본 차원계. 최상위 신격인 신농이 본질을 숨길 이유는 없을 텐데 어째서 저 화신의 모습으로?’

나는 의문을 잠시 묻어두고 고개를 숙여 신농에게 예를 표했다.

“위대하신 신농을 뵈옵니다.”

내가 고개를 더 숙이려 하자 신농은 손을 저었다.

[거기까지. 그대는 삼계의 제왕이니, 내게 과한 예를 갖출 필요는 없지.]

“아….”

[옥황상제는 모르겠지만…. 전륜성왕의 힘을 갖고 있다면야…. 그대는 같은 제왕으로 예우를 받아 마땅하다.]

아무래도 신농은 옥황상제보다 전륜성왕 쪽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기에 굳이 그 사실을 캐어묻지 않고 신농에게 말했다.

“저를 부르신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경청하겠습니다.”

[…….]

신농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말해줄 것과, 제안해줄 게 있어서 불렀다.]

“어떤 것입니까?”

신농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던 서문혜에게로 향했다.

[먼저 저 아이의 존재는… 태초부터 시작되었던 본왕의 계획이자 치우의 마지막 의지라고 해 두지.]

“……?!”

뭐, 뭐라고?!

뜻밖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하지만 지금까지 놀랐던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까? 나는 금세 평정심을 회복하고 말했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선조회귀라고 하는 현상은 본디 우주의 섭리로써 극히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사실 거신족의 혈맥을 물질계에 남기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 우주에서 손꼽히는 상위종족이기에 우리의 피가 하나라도 남아서 전승될 경우 지상의 모든 균형과 인과율을 뒤섞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피를 옅게 이어받았다 하더라도 인간 따위는 아득히 넘어서지.]

“음….”

[그렇기에 탁록대전의 패배 후 황제 공손헌원은 치우와 모든 거신족의 전사를 봉인하면서 인간과 피를 섞은 반인반신들을 모두 외부차원으로 추방해버렸다.]

“…….”

[하지만, 본왕은 치우가 마지막 의지를 남겼던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가 인과율을 읽었다 하더라도 치우는 그걸 넘어서는 존재였기에 치우의 혈맥이 언제고 부활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나는 신농의 말에 의아함을 느끼고는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치우가 황제의 권능을 무시하고 자신의 혈맥을 부활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

신농은 옥좌의 손잡이를 꾸깃, 하고 강하게 잡으며 말을 이었다.

[놈은 그게 가능한 녀석이었지…. 아주 사소한 인과의 뒤틀림, 허나 황제는 그걸 인지하고도 손쓰지 못했겠지. 왜냐하면 치우의 권능이 그를 압도적으로 넘어서고 있기에 손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인과율을 읽는 능력의 한계라고 할 수 있지….]

“……!!”

[본왕은 거신족의 왕으로써 치우의 의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치우의 혈맥이 언젠가 부활할 거란 사실을 느꼈기에…. 그 힘이 온후한 상태에서 발현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본왕의 신력 또한 그 혈맥에 발현하도록 안배해두었던 것이다. 본왕의 힘은 저 혈맥이 핍박받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역사에 영향을 끼쳤지.]

“봉인된 상태에서 그게 가능하셨습니까?”

[…조력자가 있었지….]

“조력자?”

신농은 거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듯 말을 돌렸다.

[그러나 본왕의 예상과는 달리 종언에서 500년이나 이전의 시대에 여성체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건가….]

“대명제국의 시대에 나타난 게 이상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본디 치우의 혈맥은 종언이 가까울 때 나타날 것이라 여기고 있었으며, 남성체로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나타나봐야 지상에 지배체계를 구축해놓은 천계나 삼황오제에게 견제만 받을 게 뻔하니까….]

“아….”

신농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하긴 외양간에서 전생을 시작하던 시점을 감안하면 나 또한 천계나 신격들에게 굉장히 많은 방해를 받곤 했었다. 대명제국의 중세시대는 고대만큼 신화시대의 힘은 강력하지 않으나 아직 신비한 권능과 술법, 천계의 힘이 이어지는 시대라서 방해가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이 가까워진다면 삼황오제의 힘도 쇠퇴하게 되니 당연히 치우의 혈맥이 종말 가까운 시점에 태어날 것이라 예측하는 게 당연하리라.

그렇다면 왜?

어째서 치우의 혈맥은 서문혜로서 나타난 것인가?

단순한 오류인 걸까 무언가 이유가 있는 걸까?

신농이 서문혜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서문혜야말로 치우의 후계자이며 거신족의 후예라 할 수 있다. 너는 우리 일족이다.]

“…….”

서문혜는 신농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잠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다른 외계종족과 달리 서문혜는 거신족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는 듯 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본질적인 동질감과 조화를 느낀다는 게 보였다. 그녀는 이미 어느 정도는 인간과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리라.

나는 조심스럽게 신농에게 말했다.

“신농이시여.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안하실 것은 무엇입니까…?”

[한 가지 묻겠다, 백웅이여. 그대는 치우가 혈맥을 남긴 이유가 뭐라 생각하나?]

“음…. 자신의 후예가 황제 공손헌원에게 복수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본왕 또한 처음에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노라.]

신농은 무언가를 생각하듯 옥좌에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놈은… 그 당시 탁록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

[본체가 저토록 강하게 봉인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치우이기에. 어쩌면 불가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그대를 급히 이 자리에 부르게 된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스르륵

신농이 자신의 제관을 벗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잠시 후 그의 몸이 급격히 팽창하며 은빛의 거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후오오오!!

하지만 은빛의 거인은 기껏해야 일 장 정도의 크기였으며 예전에 보았던 어마어마한 크기가 되지 못했다. 신농이 그 모습을 한 채로 말했다.

[이 보잘것없는 몸뚱이를 보라.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어서 화신으로 변해있는 궁벽한 상황을…. 보다시피 내 힘은 바닥이 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크게 놀라서 외쳤다.

“아니! 어찌 그런…. 신농 님은 분명 여와의 봉인이 풀린다면 힘을 되찾아서 강력해지는 게 아니었습니까!”

나는 알고 있다. 그 동안 여러 번 전생하면서 신농의 봉인을 풀었던 회차도 있었고, 그 때마다 신농은 순식간에 수해의 관리자를 짓누르거나 해신을 불태우는 압도적인 위용을 보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신농이라는 강력한 대신이 부활하면 내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약화되어 있었다니?!

내 놀란 외침에 신농이 말했다.

[나의 힘을 빼앗아간 것은 바로 천마(天魔)의 당(堂). 그 장소에서 본왕이 부활하자마자 그 힘을 강탈해 갔다. 거부하려면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

“무, 무슨 말씀이신지…. 천마의 당이 무엇입니까?”

[치우(蚩尤)가 봉인된 장소이다. 그 장소는 우주에서 가장 엄중한 봉인이 이뤄져 있지.]

“어 그건….”

그 순간 문득 내 머릿속에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 맞아 그 때….’

축융족과 만났던 거신족의 유적으로 향했을 때 나는 선지자의 허락을 맡고 그 유적을 견학할 자격을 얻었었다. 그리고 축융족들이 내게 그 유적 내부를 안내시켜 주었는데, 그 당시에 보았던 괴이한 풍경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마(天魔)의 당(堂). 봉신의 당에서 생겨난 모든 동력이 천마의 당에 있는 수백만 개의 봉인장치를 보조해준다. 그 덕분에 겨우 저 자를 가두고 있지.]

[저 존재는 대체 무엇이오?]

[극비이니 말할 수가 없다.]

그 때는 봉신의 당과 천마의 당을 보고 그냥 신비롭다는 생각만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지금 신농의 입에서 천마의 당이 언급될 줄이야?

‘그랬구나…!!’

축융족이 거신족의 유적에서 봉인하고 있던 천마의 당.

그 천마의 당에 갇혀 있었던 단 하나의 거인 - 그것은 바로 치우였던 것이다!

설마 그렇게 일찍부터 치우를 보았을 줄이야?!

내가 머릿속에 둔중한 충격을 받은 듯한 느낌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말했다.

“그건 축융족이 만들어놓은 봉인이 아닙니까? 축융족은 어째서 치우를 봉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자들은 우연히 우리의 전쟁에 말려들었다. 황제는 그들이 본의 아니게 끼어든 것을 인정하고 패배자로서 학대하는 대신, 그들에게 우리 거신족의 봉인과 숙청을 맡겼다. 또한 거기에는 치우의 봉인 또한 포함되어 있었고, 그 자들은 우주에서 거의 유일하게 치우를 봉인할 역량을 지닌 자들이긴 했지.]

“…….”

과거의 기억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배신이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 주제에 감히….]

[배신이 아니다. 절대로!]

[우리는 애초에 삼황오제와 적대할 생각조차 없었다. 우리는 본디 관찰자에 불과하며, [옛 지배자]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불상사가 일어나는 바람에 황제와의 싸움터로 끌려들어갔던 것이다.]

[…돌연변이가 나타나 버렸던 거지.]

[우린 삼황오제와 불필요한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정상으로 되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세상의 순리를 거부하는 거인족을 제압해서 전쟁을 끝낸 것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거인족을 최대한 살려서 거두었으니 우리는 도의적으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거인족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일 뿐이다. 우리가 축융족에 속한 건 우연일 뿐이었단 말이다.]

마르길이라는 인간여자의 몸을 빌렸던 그 축융족은 내가 거신족을 왜 배신했냐는 질문에 격렬하게 반응하며 저렇게 반박했었다. 나는 그 당시 왜 이렇게 배신이라는 말에 민감한지 의아했었는데, 지금이라면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떨결에 전쟁에 휘말렸는데 결과적으로 황제 공손헌원이라고 하는 우주적인 대신격에게 패배자로서 학대받을 처지가 되었다는 게 바로 축융족의 상황! 그 상황에서 최대한 생존을 추구했던 자기자신들에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것이리라.

나는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신농에게 말했다.

“신농이시여. 그렇다면 천마의 당에서 신농 님의 힘을 가져갔다는 건 설마 치우가….”

[그대의 생각대로다.]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치우는 이미 부활하려 하고 있다. 그 준비로서 내 힘을 요구했고 본왕은 그의 요구에 응했지. 지금쯤은 축융족들이 곤란해하고 있을 것이다.]

“…네?!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치우가 깨어나는 건, 어, 저한테는 좋을 수도 있지만…. 신농 님께 좋을 일이 뭐가 있단 말입니까? 종말이 코앞인 상황에서 그 힘을 회복할 수도 없잖습니까!”

신농의 힘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황제를 제외한 오제 하나하나보다 더 위에 있는 수준이라고 판단되었다. 당연히 그 힘은 우주적으로 강력한 것이며, 은하계를 좌지우지할 수도 있으니 천상천하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저렇게 힘 대부분을 누군가에게 덜어줄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어차피 내 힘으로는 이제 황제 공손헌원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지. 치우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세의 판도를 뒤집으려는 게 그리 이상한가?]

“…….”

[만신전의 힘은 역대 최강. 현 시점에서 대우주의 그 어떠한 신전도 황제의 세력에 비하면 초라할 지경이 되어버렸다. 정면승부가 불가능해졌으니 이 힘을 갖고있다 하여 쓸데가 없다.]

신농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리고 여와와 복희를 만나서 그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난 후 마음이 한층 굳어졌다. 전생자인 그대가 있다면 황제는 결코 순탄하게 승리를 거둘 수 없을 테니까.]

“으음…. 과대평가십니다. 그보다 본론이 무엇인지….”

[잘 듣게. 지금부터가 그대의 선택이 중요한 부분이니까.]

신농이 서문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치우는 저 아이의 몸을 빌려서 부활하려 할 것일세. 자네는 치우가 그렇게 부활하려 한다면 반드시 막아주길 바라네.]

“……!!”

[이게 그대를 여기 부른 이유이며 본왕의 제안일세.]

이, 이게 무슨 말인가!

치우가 서문혜의 몸을 빌려서 부활한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신농의 말에 나는 고개를 크게 저으며 외쳤다.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치우가 왜 자신의 혈맥을 통해서 부활한다는 말입니까?! 그게 왜 서문혜가 되는 거고….”

[이미 설명할 건 다 했네. 치우는 처음부터 그런 용도로 인과율을 뛰어넘어 자신의 혈맥을 남겼을 가능성이 있어. 단순히 혈맥이 자신의 피를 각성하기를 바랬다기엔 너무도 치밀한 안배였으니.]

“…….”

그런 말도 안 되는….

내가 할 말을 잃자, 신농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본왕이 바라지 않는 결과일세.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치우가 부활한다면 현재의 만신전을 이길 순 없기 때문이지.]

“왜입니까?”

[자신의 몸뚱이가 아니기 때문일세.]

쿠구구….

신농은 천천히 서문혜에게 다가갔고, 서문혜의 일 장 앞에 멈춰서서 말을 이었다.

[아무리 진정한 상위 신들이 육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치우 정도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치우의 육체는 그 자체로 삼황오제와 싸울 수 있는 어마어마한 괴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놈의 정신은 그 육체의 잠재력 이상으로 강력했다. 치우는 전 우주에서 유래가 없는 존재였고, 그 강력함은 놈의 특수한 육체에도 기인했지.]

음?

뭔가 이상한데….

“특수한 육체라는 건 일반적인 거신족의 신체가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 놈은 처음에는 거신족으로서 자라났으나 이후 거신족의 육신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육체를 재구성하여 키워나갔고, 종래에는 별개의 것이 되었다.]

“…흐음.”

[아무리 치우라고 해도 그 육체가 없다면 지금의 황제와 만신전을 상대로는 힘들 게 분명하니….]

신농이 서문혜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서문혜에게 들어오려 할 경우 치우를 내쫓아주길 바라겠네.]

“치우가 부활하기 위해서 서문혜의 몸에 빙의(憑依)를 할거란 말씀이십니까?”

[그럴 가능성이 있네.]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치우는 지금 봉인당했지 않습니까! 그의 본체가 천마의 당에 수백만 개의 봉인장치로 지켜주는 상황에서 정신만이 빠져나오는 게 가능할지….”

[천마의 당에 가본 적이 있나 보군.]

“아 네. 예전에 한 번….”

그러자 신농은 뜻밖의 말을 했다.

[자네가 보았던 그것은 본체이지만 육체가 아니야. 그게 바로 치우의 정신일세.]

“……!!”

[천마의 당은 치우의 정신만 뽑아내어 가둬두는 장소.]

정신이라고?!

그게 실제 육체가 아니었다는 말이구나!

나는 신농의 말을 듣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어서 외쳤다.

“서문혜가 치우의 혈맥이니, 혈맥의 인과율을 이용해서 그 봉인을 뚫고나와 서문혜에게 빙의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이제야 이해했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으으…. 군신(軍神)이라 하던 치우가 어떻게 그런 쪼잔한 짓을. 자기 후손의 몸뚱이를 빼앗는 게 어디 있답니까?!”

내 항변에 신농이 말했다.

[본의가 아닐 것일세.]

“네?”

[혈맥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치우가 만들어놓은 마지막 한 수. 치우 본인도 당연히 자신의 본체를 찾아서 부활하는 걸 원하고 있으나, 일정한 조건이 만족되면 자동으로 빙의하게끔 무의식에서 설정되어 있는 주술(呪術)이라 할 수 있네.]

“음…. 그렇다면 서문혜에게 빙의하려고 하는 건.”

스윽

신농이 은빛 거인의 팔을 뻗어 바로 앞에 있는 서문혜의 머리로 향했다. 굉장히 위압적인 듯 했으나 서문혜는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신농을 바라보고 있었고, 이윽고 그의 손이 서문혜의 머리를 기특한 듯 어루만졌다.

[이 아이의 힘이 치우가 혹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이지…. 주술이란 쏘아진 화살과 같으니 치우가 생각하는 육체의 기본조건을 충족한 자에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전될 것일세.]

“치우의 정신이 이 상황을 인식하고는 스스로 거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가능한 일이지. 그의 자존심이 허용치 않을 수 있지. 허나 나는 치우의 마음을 모르니,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예단할 수 없네.]

그는 왠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결국 본왕은 치우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끝내 몰랐지….]

잠시 침묵하던 신농이 말을 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서문혜에게 오는 일이 없게끔 우리가 미리 치우의 봉인을 풀어주어야 하네. 그가 자력으로 부활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준다면 모두에게 최악의 결말은 피할 수 있겠지.]

“네?”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축융족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또한 천마의 당은 그 자들이 목숨걸고 지키려 할테니 도저히 치우의 봉인을 풀 자신은….”

[천마의 당이 아닐세. 거기에는 정신이 봉인되어 있다고 말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치우의 육체는?]

“…아.”

내가 입을 다물자 신농이 말했다.

[정신과는 별개로 치우의 육체는 사제(四帝)가 전 세계에 각기 하나씩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육체를 통제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황제 공손헌원이 치우를 갈기갈기 찢어서 그의 육체부위를 사제에게 각각 나누어주었지. 사제는 그 봉인을 엄중하게 지키는 임무를 받았으며, 그걸 위해서 일부러 인간계에 왕으로써 강림하면서 물질계를 감시했던 것이다.]

“……!!”

오제가 번갈아가면서 인간계의 왕 노릇을 했던 이유.

그게 치우의 봉인 감시 때문도 있었단 말인가!

[누가 어떤 부위를 가져가서 어디에 봉인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자들이 네 갈래로 찢어서 가져간 부위의 봉인 중 한두 개 만이라도 풀 수 있다면, 본왕의 힘을 받은 치우가 자력으로 부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결론은 치우의 육체가 갈가리 찢겨서 봉인당했다는 말인가.

나는 그 말을 듣고는 신농에게 대꾸했다.

“제가 제 동료들과 힘을 합쳐서 지상에 있는 치우의 봉인을 풀어주기를 바라시는 거군요.”

[바로 그것이 본왕의 제안이다.]

“…….”

이제야 상황이 파악되는 것 같았다.

‘신농은 치우가 부활하길 바라며 치우의 정신에게 자신의 거의 모든 힘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본의 아니게 혈맥인 서문혜를 통해 부활할 수도 있는 상황…. 그건 아무도 바라지 않아. 그걸 막기 위해선….’

사제가 봉인하고 있던 치우의 육체부위를 찾아내서 봉인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인가!

나는 신농에게 말했다.

“봉인은 총 4개일 거라고 예상됩니다만 모두 풀어줘야만 합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하나나 두 개만 풀 수 있어도 지금의 치우라면 자력으로 탈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노라.]

“으음….”

원래 나는 인간계에서 최대한 대결계의 정보를 알아내려고 했는데 뜻밖의 일이 더 생겨버린 느낌이다.

‘이 제안을 무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 신농에 의해 어느 정도 활력을 얻은 치우의 정신이 천마의 당에서 탈출하려 할 때 서문혜를 노리고 빙의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서문혜는 정신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셈이니 서문혜를 소중히 여긴다면 이 제안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리라!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벌어져 버린 이상 어쩔 수 없겠군요.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맙네.]

“그 대신, 신농 님께선 제게 무엇을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시간과 여유가 없는 상태인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건방지게 보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서문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다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하기에는 종말까지 남은 여유가 촉박했다. 좋든 싫든 신농에게서 뭔가를 얻어가야만 동료들이 덜 고생하리라.

그러자 신농이 차분히 말했다.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대결계의 정보겠지. 그대에게 이 황궁의 도서관을 마음껏 출입할 수 있게 해줄 터이니 원하는 대로 지식을 가져가게. 따로 차원이동의 술수를 쓰지 않아도 마음대로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네.]

“흠.”

[대결계의 정보뿐만 아니라 지금의 인간종족에게 꽤 도움이 될 정보도 많겠지.]

신농은 별로 내 말을 건방지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까 나를 군왕으로 인정해 준다는 건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심 한숨을 쓸어내리며 신농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이 황궁에 있는 보물들을 가져갈 순 없겠습니까? 보패같은 것도 있을 것 같은데….”

[이곳은 관리되지 않은지 오래되었으며 본디 내 권능으로 유지되던 보물들일세. 본왕이 건재할 때면 몰라도 지금은 별 힘이 없겠지.]

“윽….”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모로 내가 손해보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예를 갖추며 신농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신농은 다시 한 번 서문혜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듯 했다. 은빛 불길이 일어나는 손인데도 서문혜에게는 조금도 불이 붙는 기색이 없었고 그녀도 뜨거운 걸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아이야, 미안하구나. 본왕이 너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되었구나.]

서문혜는 물끄러미 신농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가녀린 하얀 손으로 신농의 손가락을 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빙벽에 갇혀있을 때 이따금씩 누군가의 모습이 느껴졌어요. 계속해서 망설이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고뇌하는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저를 부르지는 않았어요….”

잠시 침묵하던 서문혜가 말했다.

“저는 백웅 님께 모든 걸 다 바치기로 했어요. 그게 누구든 간에 백웅 님을 위해서라면 맞서싸우겠어요.”

신농은 서문혜의 말에 찬탄하듯 말했다.

[너는 훌륭한 전사로구나…. 자랑스럽다.]

후웅!

그 말을 끝으로 신농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앗!”

내가 놀라자 서문혜가 백발을 휘날리며 말했다.

“힘이 너무 약해져서 쉬러 가셨어요. 하지만 제게 도서관의 위치와 문을 열 권한을 주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서문혜를 따라서 거신족 황궁의 도서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도서관은 굉장히 거대했는데 지평선 너머까지 계속해서 펼쳐져 있는 건물이라서 마치 조그마한 나라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서문혜는 가볍게 손을 대었고 도서관의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셀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책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서문혜에게 말했다.

“정말 괜찮소? 갑자기 치우의 위협이라니….”

“괜찮아요, 백웅 님.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제게 강림한 치우가 백웅 님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리는….”

치우는 말 그대로 측정불가의 존재다. 삼황오제들조차 그 존재를 두려워하고 감히 대항하기도 힘들어했던 이른바 [재앙]같은 존재! 그 자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나와 마주보게 될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어마어마한 존재가 내게 협력해준다는 건 한낱 망상에 지나지 않으리라.

내가 머뭇거리자 서문혜는 빙긋 웃었다.

“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이 제 곁에 있으니.”

“…약속하겠소.”

나는 이를 악물고 서문혜의 손을 덥석 잡았다.

“모든 힘을 다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걸 막아내겠소!”

대결계를 조사하면서 치우의 육체부위를 찾아내어 봉인도 풀고 말겠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대웅제국이 아군이 되면서 전 세계의 절반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고 할 수 있으며 전뇌자는 전세계의 전뇌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 게다가 옥황상제가 되어서 천계의 신선들에게 자유롭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농이 거신족의 도서관까지 제공해 주었으니, 치우의 봉인은 어떻게든 찾을 수 있으리라!

내가 서문혜와 함께 대웅제국의 황궁으로 돌아온 후 동료들에게 신농과의 대화를 고스란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참동안이나 듣고 있던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제갈량이었다.

“백웅. 신농과의 대화는 잘 한 것 같군. 헌데 치우의 육체부위라 하면 바로 짐작가는 곳이 있지 않나?”

“응?”

“…나 말고도 눈치챈 거 같지만.”

제갈량은 백우선을 부치면서 눈을 빛냈다.

“그 말대로라면 지금 제일 먼저 조사해야 할 건 요동에 존재하는 [신의 무덤]이다. 지금으로서는 거기가 제일 의심스러운 장소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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