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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여기서 저놈이 왜?!'
크리슈나의 등장에 나는 크게 긴장했다. 너무나 난데없는 등장이었고 저 놈이 얼마나 중대한 위치를 가진 신적 존재이며 화신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끈
동시에 저 놈 때문에 내 동료들이 죽어갔었다는 걸 상기하자 갑작스럽게 내면에서 울컥하며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크리슈나의 또 다른 모습인 투신 아르쥬나! 그 놈 때문에 대웅제국의 병사 수십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수 많은 동료들이 죽었다.'
하지만 왠지 지금 당장 그걸 따지면 안 될거라는 직감이 든다. 왜냐하면 방금 전에 놈이 했던 말투 때문이었다.
'저 놈은 지금 나를 명계의 지배자 전륜성왕으로 대하고 있다. 신적 존재에게 껍데기 따윈 중요하지 않으며… 방금 전 생사부에 코토아마츠카미들의 진명을 봉인하여 죽음을 내린 권능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즉, 전륜성왕의 빙의는 방금 전 풀린 상태이지만 놈은 그 사실을 지금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나를 백웅이 아닌 전륜성왕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잘 이용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휴전이라고?”
크리슈나가 말했다.
“그렇소. 만신전은 황제 공손헌원에 대한 그대의 적의가 충천해 있음을 짐작하고 있으나, 잠시 서로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고 있소.”
“……“
“그 몸의 주인인 백웅과 어떤 관계 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여기서는 과한 분쟁을 멈추지 않겠냐는 말이오. 이것이 황제의 뜻이니 현명한 대답을 바라오.”
“현명한 대답이라.”
나는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현명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쩔 셈이지? 당장 눈 앞에 있는 네놈을 죽여서 만신전에 선물로 보내도 되지 않겠는가.”
스윽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사부를 들었다. 그러자 크리슈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동요하며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급히 자신의 한쪽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그만! 삼안(三眼)을 열어 나를 보지 마시오. 내가 무례하게 느껴졌다면 사과하겠소, 전륜성왕이여.”
“……?”
펄럭
내가 생사부를 한 장 뒤적거리는 척 하자 크리슈나의 동공이 약간 작아졌다.
움찔
어? 왜 저래? 크리슈나가 내 위협에 제대로 반응한 것 같긴 한데 뭔가 이유가 다른 것 같다. 생사부 그 자체보다는 전륜성왕의 삼안이 더욱 신경쓰이는 기색이었다.
'흠… 크리슈나 또한 [옛 지배자]의 화신일 뿐이니 삼안에 진명이 노출되어도 본체의 진명이 보이는 건 아닐 텐데? 왜 저렇게 겁을 먹는 거지?'
뭔가 [옛 지배자]들끼리만 알고 있는 전륜성왕의 무서움이 따로 존재하는 듯 하다. 아쉽게도 나는 망량에게 권능을 계승받을 때 그의 기억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은 전륜성왕의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여기 이 자리에서 크리슈나를…’
여기서 도박으로 크리슈나를 공격해 볼까.
아니면 일단 대화를 이어나가 볼까.
'…아냐. 생사부를 아직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도박은 금물이야. 제대로 쓰는 법을 알고 나서야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고민하다가 일단 대화를 이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휴전이라 함은 지금 복희와 여와를 공격하고 있는 광성자 또한 복희 암살에서 철수한다는 이야기겠지?“
크리슈나에게 성질만 내봤자 남는 건 없다. 당장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지만 일단 이 상황에서 실익을 얻어야만 나를 돕는 자들이 안전해질 수 있다. 내가 단체의 수장이라면 수장으로서 먼저 해야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그 일을 신경쓸 줄은 몰랐구려. 하긴 그대가 옥황의를 입고 있는 걸 보면 백웅이 옥황상제가 된 듯 하고…”
크리슈나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좋소. 광성자는 곧 물러갈 것이오. 어차피 복희를 지금 죽여봤자니까.”
“선심쓰듯 말하는 것인가? 광성자가 여와를 이긴다는 보장은 없을 텐데.”
“후후! 고대였다면 여와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였겠지만 지금은 말세(末世). 그녀는 더 이상 압도적인 존재가 아니라오.”
크리슈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광성자와 여와가 겨루는 광경이 잠시 비쳐보였고, 광성자가 이윽고 우주공간에서 몸을 물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대의 청대로 했소. 이제 휴전을 받아들여주는 거겠지.”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고작 그걸로 되겠나? 나는 두 가지 요청이 더 있다.”
“…욕심이 과하구려.”
“싫다면 말아라. 본왕은 당장 황제 공손헌원의 모가지를 잡아 비틀고 싶으니까!”
우드득
내가 주먹을 피가 나올 정도로 세게 말아쥐자 크리슈나는 약간 떫은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짐짓 전륜성왕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데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마지못해 대꾸했다.
“좋소. 말해보시오.”
나는 내심 웃으면서도 겉으로는 분노한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백웅의 기억은 모두 읽었다. 그 중 네가 말했던 [단서]라는 것… 그건 [종말의 때에 모든 가면은 벗겨지리라]는 말이었지.”
분명히 기억난다. 동료들의 회상을 보았기에, 제갈사가 요구한대로 크리슈나는 본디 내게 의뢰했던 [단서]를 이야기했었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그 의미가 너무 애매모호해서 책사들도 명확하게 단정짓지 못하는 단서였다.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서의 의미를 명확히 하면 황제의 음모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크리슈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정보 중 하나이리라.
“……“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말하라. 이게 첫 번째 요구이다.”
그러자 크리슈나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전륜성왕이여. 그대가 그 의미를 알려고 할 줄은 몰랐구려. 명계의 주인인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일 것인데.”
“그건 본왕이 판단한다.”
“좋소. 어차피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흉신 때문에 판은 이미 깨졌으니.”
이어진 크리슈나의 말은 조금 충격적이라서 나는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삼황오제가 쓰고 있는 모든 가면은 종말이 찾아오기 직전, 황제가 자의로 벗겨서 자신의 만신전으로 소환할 수 있다는 의미요.”
“……?!”
“물론 쓰고있던 자들은 그 소환에 대항할 방법이 없소. 그 어떤 권능으로도. 왜냐하면 가면을 태초에 쓸 때부터 스스로 소환에 동의한 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오. 인과율으로 무조건 우선권이 앞서버리지.”
“가면이 벗겨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자 크리슈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오제는 본질을 찾게 될 것이며 삼황은 혼돈의 존재로 탈바꿈 되겠지. 간단한 일이오.”
“……“
“물론, 흉신이 난장판을 치러버린 지금은 그 가면조차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소. 황제는 흉신을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천마를 세상에 내보낼 정도가 되었고 이 세상의 압도적 승리자가 된 것이오.”
별다른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
그것은 [가면]이란 삼황오제에게 걸어둔 황제 공손헌원의 저주이자 함정이란 뜻이다. 물론 삼황오제 대부분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만 구체적인 함정의 내용을 지금 듣게 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십이율주의 세계에서 삼황오제가 모조리 실종상태였던 건 [가면]이 강제로 만신전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이란 말인가?
'이럴수가. 저 말대로라면 삼황오제는 종말을 앞두고 있을 때 언제든 소멸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산하사직도 내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다.
산하사직도 내에서 황제 공손헌원은 만신전 내부로 쳐들어온 삼황을 상대로 다른 꼼수를 쓰지 못하고 오제를 소환하여 정면으로 힘싸움을 해야만 했다. 나는 그 싸움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황제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기에 삼황과의 전면결전을 택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함정이 있었다면 진작에 썼을 것이고, 마지막에 외신 [기어오는 혼돈]을 소환하는 초강수를 두면서 비장의 패를 소모하지도 않았으리라.
게다가 그 뿐만이 아니다. 나는 전생경험이 있기에 그 초고대 뿐만 아니라 500년 전에도 다른 삼황오제들은 종종 황제 공손헌원의 뜻을 거스르거나 앞을 막아설 때도 많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황제는 별다른 개입을 하지 못했으며 그저 인과율만 읽을 뿐 직접적인 수단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삼황오제에게 씌워진 [가면]의 함정은 아무리 황제가 강력하더라도 아무때나 발동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나는 오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뭔가 [제약]이 있는 것인가? 그 제약은 아마 종말에만 발동할 수 있다는 종류일 텐데.'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가지 가능성 때문에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말에 신호탄이나 다름 없는 하나의 사건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라면 황제는 이미 중화문명이 시작되던 수천수만년 전부터 압도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리라.
내가 생각하느라 침묵하고 있자 크리슈나가 말했다.
“마지막 요청을 듣고 싶구려, 전륜성왕.”
“…마지막으로.”
어차피 휴전을 하긴 해야한다. 전륜성왕의 권능은 명계를 부활시키면서 일시적으로 소멸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지만 눈앞의 크리슈나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 상황에서 알아서 휴전을 요청해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나는 그 틈을 타서 요구조건을 최대한 얻어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지막 요청을 뭘로 할지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어차피 휴전요청에 불과하기에 너무 과한 이야기는 상대가 들어주지 않을 것이고 더 억지를 쓰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렇기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게 현명하다.
'뭘 요청하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크리슈나여. 넌 왜 위선자인가?“
아차. 이건 왠지 별로 같은데?
하지만 왠지 다른 질문이 떠오르질 않았다…
“……!!”
크리슈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만신전의 개라면 개답게 처음부터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으면 너도 편했을 게 아닌가? 어째서 어린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고아를 돌보고 러시아 수도의 인간들, 가련한 생명을 위해주는 양 위선(爲善)을 행했던 것인가.”
크리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놓고 계속 했던 짓은 결국 서방의 죄없는 평범한 인간들을 마도(魔道)에 휘말려 죽게끔 만들고 대웅제국의 병사와 인재들을 투신의 힘으로 학살한 것. 이게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의외구려. 전륜성왕 그대가 지배자 답지않게 선악의 가치를 중시하는 자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자리에서 화신의 행위까지 선악을 따질 줄은.”
“대답하라. 너는 어째서 선과 악을 표리부동하게 오갔던 것인지.”
“……“
크리슈나가 침묵하고 있을 때 나는 그를 뚫어져라 주시했다. 그리고 내가 나도 모르게 이 영양가 없어 보이는 질문을 한 이유를 깨달았다. 어쩌면 나는 크리슈나의 악행 그 자체보다는 위선에 의문을 강하게 품고 있었던 것이리라. 재수없는 놈이긴 하지만 어쩌면 좋은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전생 동료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뒷통수를 맞았고, 크리슈나가 왜 그런 위선적인 행동을 했는지를 알고싶어진 것이다.
어쩌면 지금 눈앞의 이익보다 적아(敵我)를 구분하는 게 전생자인 내게 더 중요할지도 모르니까.
잠시 후 크리슈나는 입을 열었다.
“종말 이후가 존재한다면 믿으시겠소?”
“뭐라고?”
크리슈나가 왠지 슬퍼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행한 건 틀림없는 위선.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유지]였소. 유지를 위해서라면 선악은 중요치 않았소. 왜냐하면… 모든 생명은 살아가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오.”
“살아가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그렇소. 이 우주는 유지되어야 하며, 모든 생명은 선악을 불문하고 살아가며 그 흐름을 이어나가야 하오. 생이 고통인 것은 섭리이며 숙명, 나는 그들의 고통에 불쌍함을 느끼고 측은지심을 발휘할 수 있으나 신으로써의 의무를 다해야 하오.“
“……“
“아주 머나먼 옛날… 초고대문명이 신의 분노로 멸했으며 나 또한 밀려드는 혼돈의 지배자들에게 한 차례 패배를 맛보았을 때. 황제 공손헌원은 질서진영의 패배가 예정되어 있음을 내게 설득했소. 그리고 종말 이후에 자신이 승천을 하게 된다면 이 세계를 유지시키며 필멸자들에게 최대한의 자비를 베풀 것을 약속했지.”
그렇게 말한 크리슈나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스스스
잠시 후 크리슈나의 모습은 광성자의 모습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모든 필멸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라면 나는 그 길이 위선이든 위악이든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나, [유지하는 자]가 황제 공손헌원에게 협력하는 이유이다.”
천계의 대라신선일 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광성자는 자신의 기다란 지팡이를 내게 향하며 말했다.
“대답이 되었는가, 백웅?”
“……”
중간에 눈치챈 건가…
광성자이자 크리슈나가 내 정체를 알아챘다는 걸 느끼자 나는 도리어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를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불행한 채 무한의 고통을 영겁토록 반복할 뿐이라면… 그 반복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학대받은 채 질질 끌려가는 건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광성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단호하군. 또한 모든 살아가는 존재들의 노력을 무위로 깔아뭉개는 말이군. 그것은 전생자만이 말할 수 있는 오만이다.”
“오만이 아니야.”
“백웅이여, 그렇다면 말해보라.”
파아앗!
광성자의 지팡이 끝에서 강렬한 빛이 치솟아 올랐다. 광성자의 신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위압적인 권능이었다.
“네게 이 우주에 존재하는 필멸자들의 생의 의지를 꺼뜨릴 자격이 있단 말이냐? 네가 아무리 전생자라 하더라도 세계의 멸망을 고할 자격이 있단 말이냐!”
도리어 준엄하게 내게 호통을 내지른 광성자에게 나는 쩌렁쩌렁 외쳤다.
“할 수 있어!! 왜냐하면 나는 이 세상을 모조리 죽여버릴 테니까!”
“……!!“
광성자가 흠칫하고 놀라자 나는 말했다.
“몇 번을 반복하는 간에…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네 뒷배에 황제가 있다 하더라도 나는 포기하지 않아. 황제가 있다면 황제를 죽여버릴 것이다. 설령 일천 번 전생하는 한이 있어도!”
“웃기는구나. 황제의 뒤에는 더욱 거대한 존재가 있다.”
“알고 있어. [기어오는 혼돈]이지.”
“…그걸 알면서도 대항하겠다는 말인가?”
광성자가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백웅이여. 그대가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도 외신은 어찌할 수 없다. 무의미한 발악이라는 걸 아직도 깨닫지 못했나?”
“아니. 깨닫든 말든 나는 할 거다.”
“…왜? 헛수고를 반복하는 게 그대의 업인가?”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직 안 해 봤잖아.”
“……“
“안 해 보면 모르지!! 안 그래?”
광성자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이, 이런 미친…”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광성자에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 이 지랄을 했는데도 이번 생에 네놈들한테 패배할지도 모르지. 그게 내 운명일지도 몰라. 하지만 …”
콰악
나는 광성자의 지팡이를 맨손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허공에 떠올라 있던 빛무리가 뒤틀리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의식적으로 통제할 순 없지만 전륜성왕의 권능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된 듯 했다. 광성자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자 나는 씨익 웃었다.
“적어도 황제 얼굴에 한 방은 갈겨 줄 거다. 알겠냐.”
“……“
파앗!
광성자는 내 손을 뿌리치듯 순간이동하여 뒤로 멀찍이 이동했다. 그러더니 매우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정녕 광인(狂人)이구나. 그대의 힘으로는 만신전의 입구조차 넘지 못할 것이다.”
“그건 모르겠고 휴전할거냐 말 거냐?”
“…휴전은 이루어졌다.”
스스스스
광성자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며 신어로 말했다.
[그렇다면 좋다. 그대가 만일에 만신전에 도달한다면 나의 진정한 힘으로 상대해주겠다! 그대의 신념이 그릇된 것임을 알려주겠다!]
파앗
광성자가 사라졌다. 나는 놈이 사라진 자리를 보며 생각했다.
'흠. 도발이 먹힌 것 같은데…'
본디 광성자이자 크리슈나는 속의 끝을 알 수 없는 냉정함과 음흉함을 지니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마지막에 보인 모습은 내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왠지 크리슈나를 격동시켰다는 게 종말의 대전에 크게 작용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상황은 정리되었군. 휴전이 이뤄졌고 광성자도 물리쳤으니 이제 뭘 하지?”
나는 고민했다.
‘천계로 가야하나 복희에게로 가야하나?’
천계에는 내 동료들이 잔뜩 모여있고 복희에게로 가면 복희에게서 추가적인 정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쪽으로 가든 간에 제갈량이나 복희가 있기에 현명한 조언을 듣기는 쉬우리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언령을 외웠다.
“옥황의여. 천계로 나를 보내다오.“
지금 바로 복희에게 가는 것보다는 제갈량에게 조언을 듣는 게 나을 것 같다. 제갈량이 지금 내 상황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좋은 조언을 해줄 수 있으리라.
슈슈슉!
잠시 후 나는 천계 옥황상제의 옥좌 바로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복희가 설명해줬던 옥황의의 기능으로, 옥황의를 입은 자는 간단한 언령만 외우면 세상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바로 천계의 옥황상제 옥좌에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나는 어전에서 나가서 동료들에게 갔다.
“왔나, 백웅.”
그리고 제갈량과 동료들이 모인 앞에서 내가 겪은 일들을 약 한 식경 동안 설명하자, 제갈량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백웅. 다 좋은데 그걸 알고 있나?”
“뭘?”
“우린 지금까지 네가 없어진 동안에 그 때문에 시계만 보고 있었다.”
제갈량은 옆에 와 있던 사공린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공린이 내게 걸어오더니 손목시계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미 [오늘]은 끝나서 [내일]이 되었어요. 벌써 1시간 5분이 지난 참 입니다.”
“어, 그건 설마…”
사공린이 우려가 섞인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미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는 거죠.”
“……“
빌어먹을… 역시 그렇겠지?
내가 각오를 다지고 있자 제갈량이 말했다.
“아마 네 말대로 명계의 지배자인 전륜성왕이 되었으니 오늘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무의미해졌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이대로 조마조마해하며 기다리는 게 싫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그게 뭔데?”
제갈량이 문득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게 물끄러미 그 손을 보자 그가 말했다.
“그 전에 내 백우선 다오.”
“아, 맞다…”
망량이 소멸하고 그 자리에 떨어졌던 백우선을 목갑에 넣어두었기에 내가 그에게 백우선을 돌려주자, 제갈량이 만족스러운 듯 훗하고 웃었다.
“흠. 역시 이게 있어야 해.”
“아니, 됐고 그 방법이 뭔데?“
“간단하다.”
제갈량이 말했다.
“사대신수 영귀를 이 자리에 바로 소환해서 또다시 점을 쳐보는 거다. 그걸로 네가 죽음의 운명을 비껴갔는지 확실해지겠지. 지금 네 권능이면 가볍게 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