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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눈앞에 있는 건 분명히 산하사직도에서 마주쳤던 그 복희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미청년! 넋을 잃을 정도의 미(美)의 극치는 헷갈릴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복희에게 대꾸했다.
“오랜만이라고요? 설마 산하사직도에서의 기억이 남아있는 겁니까?”
설마해서 질문하자 복희는 훗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서두르지 말게. 긴 이야기가 될 테니 우선 거기 앉아.”
탁
나는 그의 말이 끝난 순간 나와 복희가 동시에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있고 서로를 마주본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우우 -
사방은 어느 새 고풍스러운 육각의 정자(亭子)로 바뀌어 있었고 운무(雲霧)가 가득한 고봉준령 한가운데라서 운치가 있었다.
‘현실조작….’
신적 존재들이 종종 하는 일이다. 하물며 이곳은 복희의 공간이니 그는 이 공간 내에서 절대신이나 다름없다. 나는 살아오며 이런 일은 자주 겪어왔기에 놀라지 않고 복희를 빤히 바라보았고, 복희가 손가락을 튕기자 내 손에는 따뜻한 찻잔이 들려 있었다.
“바깥에서 꽤나 간난신고를 겪은 모양이더군. 목이 마르진 않나?”
“…그다지요.”
차향이 좋으나 지금은 차의 맛에 신경쓸 여력이 없다. 나는 앞의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저를 산하사직도에서 보신 기억이 남아있으십니까?”
“하긴. 자네에게는 중요한 문제겠군.”
복희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음미하더니 대답했다.
“있지. 아니…. 최근에 ‘생겼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을 듯 하군.”
“음!”
역시!!
‘오랜만’이라는 표현은 괜히 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내심 경악하고 있자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본디 그대와 나는 [큰 굴레]가 시작될 때까지 일면식도 없는 사이. 당연히 나는 최근까지 백웅이라는 인간이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네. 하지만 어느 순간 [굴레]가 변화되며 또 다른 기억이 내게 스며들어오더군.”
“네? 그게 무슨….”
“쉽게 말해주지. 자네가 산하사직도에서 이뤘던 업적은 현실에 반영되었던 것일세.”
“……!!”
그런가…!!
여와는 예전에 내가 서왕모를 찾아갔을 때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서 왠지 저 사실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굴레를 움직이는 자여….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혼돈이여.]
[그대는 우주의 [꿈]에 간섭하여… 여의 의지에 변혁을 일으켰다….]
[본디 여는 지금 서왕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을 테고…. 그대들은 전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여는 그리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그대가 만들어낸 사소하지만 거대한 인과율의 변혁. 황제조차 읽어내지 못한 혼돈의 결과물이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명확히 인지를 하지 못했지만, 약간 경과를 두고 생각해 보니 그건 결국 보패 산하사직도 내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 여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복희의 말을 통해서 완전히 확인받은 것이다.
나는 긴장해서 복희에게 말했다.
“…그 말은, 보패 산하사직도 내부에 들어가면 과거의 실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말인 겁니까…!!”
“…….”
“그건 어떤 의미에서 [큰 굴레]를 조작하는 게 아닙니까?!”
내 외침에 복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흐음…. 그 말도 어찌보면 맞겠지만, 이건 관점의 차이라고 해야겠군.”
“네?”
“사실 내게 있어서 산하사직도 내부에서 있었던 일은 인위적인 거라고 명확히 인식되어 있네. 정말로 [큰 굴레]의 과거가 조작되었다면 그 대상인 나는 그 변화조차 인식하지 못해야 정상이겠지? 역사가 뒤바뀔 경우 대상자는 인식하지 못해야 그 변화가 의미있다는 역설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일세.”
“음….”
“허나 나는 그게 바로 백웅 자네의 의지에 의해 변혁되었다는 걸 알고 있다네. 여와 또한 마찬가지. 역사는 바뀌었지만 바뀐 게 아니야.”
“……?”
엥?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복희의 말이 이어졌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상합니다….”
“결국 산하사직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꿈]이었던 것일세.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時間)의 등위로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 것이지. 즉… [꿈]이 현실에 끼어들어 난입한 것일 뿐 역사 그 자체는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았던 게야.”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안 갑니다.”
“자네는 필멸자라서 시간의 개념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잘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요는 [경계]가 흐려졌다는 말일세.”
복희는 어느새 고풍스러운 용머리가 장식되어 있는 기다란 청색 담뱃대를 들고 넓은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난간의 교란에 걸쳐있는 고대의 의복에 운무가 스쳐가자 순간 누군가가 이 정자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급히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뻐끔
그는 우아하게 한 모금을 피운 후 말했다.
“산하사직도 내부의 [꿈]과 우리가 있는 이 고대의 [꿈], 그리고 현실…. 그 모든 것에는 층위나 차위가 존재치 않네. 자네는 우연히 [경계]를 흐트러뜨려서 진입한 것이었고 흐트러진 경계만큼 인과율이 동화한 것. 거기에는 [과거]도 [미래]도 존재치 않아. 그렇기에 나와 여와는 자네의 개입을 명확히 인식했다는 말일세. 이런 현상이 가능한 건 바로 그 꿈의 봉인자가 망량선사이기 때문이겠지.”
“……?”
“아마 가장 억울한 건 황제일 걸세. 최대한 열심히 판을 짰는데도 [꿈]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비장의 패가 소모되어 버렸으니…. 인과율을 읽는 능력과는 상관없게 된 셈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흐음. 너무 어렵게 설명했나. 어차피 백웅 자네의 동료들이 똑똑하니 굳이 자네가 알아듣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네.”
나는 너무나 직설적인 복희의 말에 우거지상이 되었다.
“아, 아니 그래도 좀 알아듣게 말씀해주십시오….”
“이것보다 더 쉽게 얘기해주긴 힘들군. 자네의 지능을 상승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
으으… 할 말이 없군….
그러더니 복희가 껄껄 웃었다.
“뭐 과거를 바꿨다 생각해도 될 걸세. 어찌되었든 자네가 황제의 비장의 한 수를 밝혀내고 봉인하기까지 한 건 사실이니까!”
나는 짚이는 게 있었기에 일단 정신을 다잡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하. 어쩐지 예전에 봤던 성격과는 많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그 때도 제멋대로이고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그 때와도 다른 느낌이다. 좀 더 자기 하고싶은 말을 다 해버리는 성격이 된 것 같다.
“그 때부터 최소한 오천 년은 흘렀지. 나는 그 동안 봉인되어 있었으니 또 다른 성격으로 변모할 수밖에.”
“진정한 신에게 오천 년은 찰나의 시간이 아니었습니까?”
“본디 그러하지만, 이 봉인에 갇힌 건 억겁을 살아온 나로서도 예삿일이 아니었어.”
그가 뻐끔 하고 담배를 피고는 말했다.
“외신에 의해 [가면]을 강제로 각성당했으니 말이야.”
나는 그 말에 흠칫하고 놀랐다.
“[가면]? 그 일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
복희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백웅. 자네는 자네에게 또 다른 인격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네?”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하다가 복희의 얼굴이 진지하자 일단 최선을 다해 대답했다.
“어…. 그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고 그런 징후도 전혀 없었다.
“나도 그런 건 본디 없네.”
“없다고요? 화신은 제각기 성격이 다르잖습니까.”
“그건 일종의 유희에 가깝네. 마치 ‘나’라고 하는 완벽한 존재에게 그런 인격이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것과 같지. 화신이 아무리 파격적인 모습이라도 결국 근원은 바뀌지 않으며, 본체의 성향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어. 화신이 독립적인 개체같지만 결국 본체와 합쳐질 경우 한 순간의 꿈이었던 것처럼 취급되게 마련일세.”
“흠….”
그렇다면 화룡진인의 올곧은 성향 또한 응룡이 지닌 성격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인 걸까. 내가 열심히 복희의 말을 이해하고 있을 때 그의 말이 이어졌다.
“허나 [가면]을 각성하는 건 그것과 차원이 다른 일일세. 말 그대로 또 다른 인격이 강제로 생성되지. 심지어 그건 신(神)조차도 예외가 아닐세.”
“이중인격이 된단 말입니까?”
“인간의 용어로 풀이한다면 그리 되겠군. 이중으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복희는 처음으로 짜증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운무를 쳐다보았다.
“가면은 증식할 수도 있고, 또한 본체를 먹어치워 자신이 진짜가 될 때까지 멈추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일세.”
“…….”
“내 본체의 힘을 분할해서 가져가기 때문에 상대하기도 버거웠지.”
나는 방금 들린 말이 믿기지 않아서 반문했다.
“네?”
“그게 바로 [가면]을 각성당했을 때의 부작용이라네.”
나는 혹시하는 생각에 복희에게 말했다.
“그, 그 말대로라면 복희 님은 고대에 홍균도인에게 암습당했을 때 홍균도인과 싸운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그 말이 맞아.”
복희는 한숨을 쉬었다.
“홍균도인이 아무리 강력한 화신으로 각성했다 하더라도 본체가 아니면 나와 여와가 힘을 합쳐서 몰아낼 수 있는 존재. 외신이라 할지라도…. 아니 외신이니까 더더욱 인과율을 어길 수가 없다는 제약이 있지.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어.”
“으음.”
“그럼에도 내가 강제로 봉인당한 것은…. 홍균도인이 내 [가면]을 각성시켜서 나 스스로의 가면을 현실에 만들어내 버렸기 때문이었네.”
“……!!”
“나는 그 [가면]을 홀로 이겨낼 수가 없었네. 그건…. 말 그대로 또 다른 나 자신이었으니까.”
[가면]!
나는 뜻밖에 밝혀진 고대의 진실에 황당함을 느꼈다.
‘화신으로 각성한 홍균도인이 막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가면] 쪽이 더 중대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런 가능성도 책사들이 염두에 두긴 했지만 가능성 낮은 쪽이 현실이 된 느낌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복희에게 말했다.
“홀로 이겨낼 수 없었다면 옆에서 여와가 도와주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불행 중 다행이었지.”
그는 약간 우울해진 목소리로 담뱃대를 난간에 통 하고 두들겼다.
“본체로 돌아가서 모든 힘을 다해서 그 [가면]과 맞서싸웠지만 싸울수록 내 뺨을 내 주먹으로 때리는 기분이 들더군. 놈의 모든 지능과 힘, 술수, 권능…. 모든 게 나와 대등했네. 그런 [가면]에게 당할까봐 내 제자들을 바깥으로 내보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던 중 여와가 내게 음양(陰陽)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고, 나는 모든 신성(神聖)을 포기하는 대가로 [가면]을 퇴치할 수 있었던 것일세.”
“…….”
“만만찮은 대가였지. 나는 지성을 모두 포기했고 신좌에서 갓 태어났던 육체 그 자체의 인격에만 의존하여 우주 한켠의 봉인계에서 떠돌아야 했네. 차라리 육체를 파괴당했다가 부활하는 게 나을 정도로 신성의 소모가 심각했어.”
복희가 문득 짖궂게 웃었다.
“…그 모습이 자네에게는 미친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지만.”
“아….”
나는 과거에 전생 도중에 천제단을 이용하다가 여와때문에 복희가 있는 아공간으로 소환당해서 복희의 숨결에 일격에 소멸당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어떻게든 부활하긴 했었지만 그 때의 경험 때문에 복희를 광룡(狂龍)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뻘쭘해져서 말했다.
“보자마자 용의 숨결을 뿜어서 소멸당했는데 그걸 어떻게 정상으로 보겠습니까….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네들 표현으로 치자면 나는 이성이 붕괴되어 미친 괴인일지도 모르지. 허나 신으로서의 본질은 한켠에 유지한 채 지성과 권능의 회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네. 제대로 비유하자면 침대에 누워있는 식물인간 쪽이 맞을 게야.”
“식물인간이라니….”
“식물인간이 되어 격리되었고 나를 간호하고 보호해주는 건 오로지 쌍둥이 남매인 여와뿐인 궁벽한 처지일세.”
복희는 빙긋 웃으며 담뱃대로 자기자신을 가리켰다.
“부디 다음 생부터는 자네가 불쌍한 나를 긍휼히 여겨주길 바라겠네.”
“…….”
비늘 한 장이 대륙크기만한 거룡 복희를 긍휼히 여길 정도로 통이 큰 인물이 되기는 힘들 것 같다….
내가 속으로 궁시렁거리고 있을 때 복희가 말했다.
“하여튼 이건 잘 알아두게. 화신으로 각성한 [기어오는 혼돈]의 가면에게는 상대의 가면을 강제로 각성시킬 수 있는 권능이 새롭게 생겨나게 되네. 이 권능에는 설령 나나 여와같은 격높은 대신(大神)조차도 저항할 수 없어. 왜냐하면 외신인 [기어오는 혼돈]만 지니는 특별한 권능이기 때문이지.”
나는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아, 아니 너무 사기적이지 않습니까?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서 싸우게 하다니…. 그 놈을 무슨 수로 이깁니까?”
복희조차 간신히 여와의 도움을 받아서 뿌리쳤을 정도면 또 다른 자기자신인 [가면]의 위력은 생각보다 더 무시무시할 것이다. 초월자조차 버티다 못해서 스스로를 광증에 가두어 봉인시킬 정도라면, 필멸자는 거의 무조건 스스로의 가면에게 당해서 먹혀버릴 것이다.
“가능하네. 왜냐하면 저 권능에는 위험부담이 따라오거든.”
“위험부담이요?”
“가능성은 낮지만, 만일에 가면의 권능에 당한 자가 자기자신의 가면을 쓰러뜨리게 된다면 그 자는 이전과는 격이 다른 힘을 갖게 될 것일세. 모든 인과율 중에서도 자기완결(自己完結)은 가장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에 거대한 성장을 보증해 주는 것이지.”
“……!!”
“그 힘을 이용해서 [기어오는 혼돈]의 화신을 쓰러뜨리기는 충분할 것일세.”
복희가 약간 흐려진 얼굴로 말했다.
“단지, 이렇게 말은 했으나…. 만일에 그 권능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앞두게 된다면 웬만해선 싸울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네…. 아직 덜 성장한 자네의 경우에는 그냥 자살하는 게 나을 걸세.”
나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음…. 또 다른 자기자신이고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전략이나 전술만 잘 짜면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옆에 동료들이 같이 있다면 동료들과 합공해서 이길 수도….”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싸워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군. 무슨 수를 쓰더라도 승산이 무척 낮은 싸움이 된다네.”
“왜입니까?”
“그건 %&^#&%^&@&$^@라서 일세. %^%^*@#^한다면 될 테지만, #&%^%를 첫 대면에 떠올리기는 힘들지.”
“……?”
엥? 뭐라고 한 거야?
복희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방금 전 복희의 입술모양을 통해 독순술로 말을 유추하려 했지만, 그 순간 그 기억조차도 알 수 없는 [어둠]에 휩싸이면서 먹칠당하는 게 느껴졌다.
금지(禁止)!
명백히 복희의 정보전달을 금지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아니…?!”
난데없이 일어난 현상에 내가 당황하자 복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여와에게도 발설할 수 없기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군.”
“[가면]의 공략법을 알려주시지 못하는 겁니까?”
“그게 아무래도 [기어오는 혼돈]이 자신의 권능에 걸어놓은 제약으로 보이는군. 한 번 이 권능에 당해서 이겨내지 못한 자는, 설령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그 공략법을 타인에게 알려줄 수가 없는 모양이야.”
“…….”
“뭐 타당한 제약으로 보이는군. 공략법을 실천하긴 힘들지만 외신의 화신을 상대하는 자 정도 된다면 실천 못할 것도 아니니까….”
제길… 아쉽다.
그걸 안다면 앞으로 [기어오는 혼돈]을 쓰러뜨리는데 큰 도움이 될 텐데!
내가 내심 아쉬워하자 복희가 말했다.
“이걸로 내 상황설명과 꼭 필요한 정보전달은 된 것 같고…. 이제 슬슬 본론을 시작해볼까, 전생자 백웅?”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나는 내심 각오를 다지며 대답했다.
“말씀하시죠.”
“자네는 [진정한 진공가향]을 이루겠다고 말했지. 맞는 말이야. 지금 상황에서 [기어오는 혼돈]을 막을 방법은 그것밖에 없지. 성공한다면 우주의 모든 혼은 구원받을 것이며 이 세계는 [기어오는 혼돈]의 광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
잔잔한 담배연기가 흘렀다. 뻐끔 하고 담배 한 모금을 태운 복희가 흐릿한 눈으로 안개구름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허나 어떻게? [만신을 파괴하는 자]를 어떻게 깨울 것이며, 그 자를 깨우고 나면 어떻게 설득하여 호법을 세울 것이며, 진정한 진공가향을 위해 필요한 재료인 법문을 어떻게 다 모을 것이며, 그걸 모으더라도 제물이 될만한 영혼은 어떻게 구할 셈인가.”
“…….”
“아무것도 정해진 것도 없고 이룰만한 것도 없어. 자네 여정의 궁극적인 목표를 1년 내에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윽….”
“도리어 하나하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수십 번의 생에 일천 년을 소모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으윽…!!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우물쭈물했다. 사실 그 시점에서는 방법이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말해봤던 것뿐인 것이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복희에게 말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 할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따악!
“아야.”
그 순간 복희의 담뱃대가 내 머리를 때렸다. 언제 맞았는지도 몰라서 내가 따끔한 머리통을 감싸자 복희가 훗하고 웃었다.
“이건 자네가 멍청한 소리를 했으니 스승의 자격으로 때리는 것일세.”
“…….”
“자, 이 봉인계까지 자네를 초대한 이유는 그런 근성론이나 들으려는 게 아닐세.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현실적인 이야기요?”
복희는 난간에 걸터앉은 채 자신의 옆머리를 살짝 쓸어넘겼다. 그것만으로도 비단같은 흑발이 쏟아지는 듯해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였다.
“사실 자네의 대답에 합격점을 준 것은 자네에게 작금의 사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자네가 1년만에 [기어오는 혼돈]의 음모를 분쇄하리라는 무모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네.”
“…….”
“그럼 우린 어찌해야 하겠나? 무슨 수를 써도 그 자가 대결계의 봉인을 푸는 걸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게 최선이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 대답을 여태껏 자네의 동료인 망량과 내 혈육인 여와가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고민해왔던 것일세. 그리고 조금이지만 대책이 세워졌지.”
“대책요?”
복희는 담뱃대로 운무가 가득한 허공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막을 수 없다면 막지 않는다. 대신에 그 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행동을 한다.”
“……?”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의 대책이라네.”
흥미?
‘세계가 망하게 생겼는데 흥미라니 대체 무슨….’
뜻밖의 말에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문득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당신이 밝혀낸 [기어오는 혼돈]의 약점에서 착안한 계획이오.”
나는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망량!”
어느 새 망량이 육각정자의 한 켠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방금 전과 달리 신선의 의복이 아니라 기이한 흑황(黑黃)으로 물든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에는 생전 처음 보는 왕의 제관을 쓰고 있었다. 망량의 특이한 복장에 내가 약간 놀라고 있자 망량이 천천히 말했다.
“그 자의 약점이란 바로 [재미있는 것] 이외엔 할 수 없다는 것이오. 전생자인 당신만이 발견해낸 유일한 약점이지.”
“……?”
“즉, 지금 태허천존이라는 가면을 움직여서 대결계를 풀려고 한다는 건 바로 그 행동이 제일 재밌으리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오. [기어오는 혼돈] 특유의 깽판치기가 다분히 반영되어 있는 행위이지.”
“그렇겠지. 근데 그게 무슨 약점이라는 말….”
“간단하오. 그 자가 벌이는 깽판보다 더한 깽판을 벌이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자는 관심을 갈구하는 존재니까!”
버럭 외친 망량의 눈빛에 광기가 흐르고 있었다.
“더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면…. 그 자는 더 재밌는 판에 끼어들기 위해 기존의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오.”
스스스스스
망량의 몸에서 황색의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는 약간 죽어있는 눈으로 말을 이었다.
“바로 백웅 당신이 천계의 지존인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되고, 또한 명계의 지배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어 삼계(三界) 전체를 지배하는 게 그 첫 단계가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