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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화룡진인은 여동빈의 옆에 이전까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절대적인 미모를 지닌 고대의 복식의 여인!
화룡진인이 말했다.
[천계에서 이리도 많은 자들이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지?]
“화룡진인. 화룡신검의 힘을 회복하신 겁니까?”
[일전에 여동빈에게 날 건네줬던 인간이로군. 백웅이라 했던가?]
화룡진인은 어렴풋이 날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습니다.”
[여동빈은 얼마 전부터 이 백두산 천지의 용맥에서 내 힘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용맥이 머금고 있는 엄청난 화력 덕분에 지금 힘을 많이 되찾았다.]
“음.”
나는 여동빈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여동빈. 설마 십이율주와 손을 잡은 겁니까? 이 곳은 십이율의 심장같은 장소. 그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용맥의 기운을 써서 진인을 회복시키는 일은….”
여동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허락을 받았다.]
“……!!”
역시!
나는 여동빈을 날카로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그가 절대 맨입으로 해주진 않았을 텐데요.”
[그렇다.]
“어떤 대가를 바랬습니까?”
이어진 여동빈의 말은 뜻밖이었다.
[내게 무예 대련을 해 달라고 했다.]
“…네?”
[십이율주를 비롯하여 그가 내세우는 자들과 무예 대련을 해 주기로 했다. 며칠 전까지도 하고 있었다.]
“그, 그건….”
황당한 일이다. 십이율주가 검선 여동빈과 대련을?
하지만 황당한 만큼이나 결과가 궁금했기에 나는 검선 여동빈에게 물었다.
“…십이율주와 싸워서 결과가 어땠습니까?”
이 질문에는 탐사대 거의 전원이 이목을 곤두세우는 기색이었다. 무인이라면 기대되는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검선 여동빈이 말했다.
[늘 비겼다.]
“……!! 그 말은 십이율주의 무위가 검선과 대등하다는….”
[아니. 생사결이라면 그에게 백전백승할 수 있다.]
여동빈이 뭔가 언짢은 듯 말했다.
[그가 자신의 천의무봉을 갈고닦는 연습대로 쓰이는 게 싫어서 늘 비겼다.]
“……?”
[그는 계속해서 나를 통해 신역의 경지를 염탐하려 들었다.]
그런 건가.
나는 십이율주가 어떤 의도로 여동빈을 받아들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여동빈에게 말했다.
“여동빈. 당장 내일 여와때문에 세상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앞의 파수꾼인 항우를 쓰러뜨리는데 힘을 빌려주십시오.”
나는 전후사정을 여동빈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여동빈이 말했다.
[말하면서도 목소리에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는구나. 그가 두려운가?]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여와의 지원을 받아 무한한 힘을 쓸 수 있는 그 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정도의 강적이라면 내가 도와준다 해서 이긴단 보장은 없으리라.]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옆에 있던 아수라를 힐끔 쳐다보곤 말했다.
“제가 아는 중 가장 뛰어난 무인 중 하나가 당신이야말로 항우에 대항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
여동빈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말했다.
[좋다. 그대에게 시간이 없다면 기꺼이 돕겠다.]
“감사합니다!!”
그 때였다.
“이런. 여동빈이시여. 그러면 제 주군과의 약속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천지 근처의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 나이가 딱 20대 청년 정도였고 머리 가운데에 은색 꽁지머리처럼 염색을 해놓은 게 특이했다. 정장을 입고 안경을 착용한 그 기이한 청년이 말을 이었다.
“천지의 용맥은 공짜가 아닙니다만.”
여동빈이 그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돌아오겠다. 내일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다면.]
“푸하핫. 정말 할 말 없게 만드시는군요.”
그러더니 청년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다면 저도 동행하도록 하지요. 단(檀)의 일족으로서 세상이 망하는 걸 막는데 한 손 거들어야하지 않겠습니까.”
흠칫
나는 그 순간 놀랐다.
‘단의 일족?!’
나는 나도 모르게 청년에게 물었다.
“단의 일족이라고? 너도 500년 전부터 살아오고 있는 건가?”
“아뇨. 전 고작해야 33살밖에 안 됩니다. 단의 일족이 된지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
“고대 대웅제국의 초대황제인 백웅폐하, 정식으로 소개드리지요.”
그가 다소곳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삼족오(三足烏) 클랜의 부길마인 율천(律天) 정도령(鄭道令)입니다. 계룡산 클랜을 이끌다가 단의 일족에 들어왔습니다. 잘 부탁드리지요.”
정도령이라.
뭔가 고려에서 지내던 시절에 비슷한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정도령에게 말했다.
“난 받아들인다고 한 적 없는데. 어쨌든 나와 너희 십이율은 적대관계 아닌가? 내 정체도 알고있는 것 같은데 너희 대장로인 홍길동을 베어버린 내게 큰 원한이 있을 터.”
“내일 세상이 망한다면서요? 그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세상이 멸망할 때 십이율만 피해가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홍길동이 죽은 건 500년 전 일이라서 저랑은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런데.”
“단의 일족 전부가 십이율주에 맹종하는 부하는 아닙니다. 대의를 따르고 있지만 제 자유의지는 어찌할 수 없지요. 하물며 저는 환생자니까.”
응? 방금 뭐라고?
정도령이 싱긋 웃었다.
“데려가 주십시오. 이래봬도 초상능력에는 자신 있으니.”
“…….”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좋다. 대신에 내게 십이율주와 십이율에 대한 정보를 말해줘야 한다.”
“그거야 뭐 상관없습니다.”
파앗
우리는 여동빈과 화룡진인, 정도령을 동료로 한 후 황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사공린이 궁중에 보관되어 있던 토요를 꺼내며 말했다.
“백웅. 신공표도 동료로 데려가는 건 어떻습니까?”
“흠. 그거 괜찮겠….”
그러자 제갈량이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신공표를 봉인에서 풀어서 설득시킬 시간이 없다. 그렇게 아집이 강하고 멍청한 놈에게 흑요석을 줘서 기억을 전하지 못하면 말로는 백 마디를 해도 절대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오늘 하루의 시간 중에 세 시진을 보냈고, 남은 건 두 시진 뿐이다.]
“…그렇겠군요.”
제천대성도 쌍성계에 못들어오는 제약때문에 도와달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끌어들이는 건 포기해야 했다.
이걸로 전력은 대략 다 갖춰진 듯 했다. 제갈량이 아군을 다 모아놓고 내게 말했다.
[백웅.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나?]
“네. 갖출 건 다 갖춘 것 같군요.”
[그럼 시작하지.]
제갈량이 히든피스를 자기 손 위에 들었다. 그리곤 내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천신경의 술법을 써서 근처 영혼을 아무나 다 불러서 숫자를 모두 소모해라. 그리고 부른 영혼들을 모조리 히든피스 근처에 대기시켜라.]
우우웅!!
나는 제갈량이 시키는대로 했다. 이윽고 많은 영혼들이 천신경의 술수에 불려왔고, 그들은 하나같이 생전에 뛰어난 영웅이거나 장군이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하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했다.
“정말 이렇게 하면 해법이 된단 말입니까?”
[보면 안다. 이제 부른 자들에게 소원을 빌어라.]
제갈량의 눈이 순간 차갑게 빛났다.
[히든피스에 들어가 달라고.]
“……?!”
[빨리 해.]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 시키는대로 했다.
“고대의 영혼들이여! 나 천신경에 의해 그대들에게 소망을 비오니, 모두 히든피스 내부에 들어가십시오.”
우우우…
영혼들이 황금회중시계인 히든피스 내부에 들어가자 제갈량이 즉시 히든피스를 내 손에 떠넘기며 말했다.
[지금이다. 히든피스의 시침을 내가 말하는대로 조종해라.]
끼리릭 끼릭!
나는 제갈량의 지시대로 시침을 움직였다. 그리고 시침이 어떤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나자, 갑자기 히든피스에서 거대한 황금빛이 터져나왔다.
후와아악
그 황금빛은 하늘 높이 치솟더니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기둥을 만들었다. 이 현상이 어찌된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자 제갈량이 말했다.
[천신경의 술수로 불러낸 영웅들의 혼을 히든피스에 먹이로 주었다. 그 혼을 매개로 [다중우주]의 시공간을 잇는 기둥을 소환했다. 보고 있는 나도 기가 막힐 지경이로군…. 인간이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니. 태초우주의 경계에 오랫동안 있으면 가능한 건가?]
“아니…?! 그건 인신공양을 했다는 소리입니까!”
내가 경악해서 외치자 제갈량이 덤덤하게 말했다.
[죽은 놈 또 죽겠나. 어차피 천신경의 제안에 응했다는 건 이런 상황도 순응하기로 계약하기로 한것과 마찬가지다. 천상에 가기 위해 영혼의 미래를 팔았다는 건 그런 의미. 사역자인 네가 죄책감 가질 이유는 없어보이는데.]
“빌어먹을! 날 속이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제갈량이 지금까지 유려한 책략으로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기에 별 생각 없이 따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다니? 하지만 제갈량의 반응은 매우 무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널 속였으니 나만 욕하면 될거다. 다음부터 안 하면 되지. 그렇잖은가?]
“…….”
[싸우다가 몰리면 저 기둥에 들어가라. 그럼 불리한 상황을 역전할 수 있을 것이다.]
“…제기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 어쨌든 나를 위한 책략인 이상 일단은 현실에 따르기로 하자. 제갈량의 책략이 잘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는 이제 계획을 시작하기로 했다. 나는 모두에게 말했다.
“98층으로 가 주십시오. 저도 뒤따라가겠습니다.”
우우우!!
다음 순간, 모든 아군이 98층의 시련으로 향했다. 나는 따라가지 않고 곧장 신에게로 향해서 흑패를 사용했다.
“신이시여! 소원을 빕니다.”
[어떤 소원인가….]
나는 타신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걸 항우의 몸 속에 ‘없던’ 상태에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십시오.”
[호오…. 재밌겠군….]
후웅!
갑자기 이전처럼 신 앞에 여와가 나타나는 듯 했다. 시련에 타인이 개입하는 걸 막기 위해서인 듯 했다.
[이게 그리 큰일인가…? 층을 옮기는 것도 아니잖나…. 이건 정당한 시련해결법이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까지 내게 쫑알거리지 마라…. 여와….]
[……!!]
그러나 신은 이전과 달리 짜증스러워하긴 했지만 밀리지 않고는 여와의 환영을 물리친 듯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신이 말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파앗
나는 곧장 98층의 시련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한창 항우와 싸우기 직전의 대치상태에서 항우와 눈을 마주쳤다. 나는 항우에게 나직이 말했다.
“미안하지만 수단방법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치사하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항우는 몸 내부에 뭔가가 들어왔다는 걸 눈치챈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네놈….”
“갑니다.”
나는 과거 산하사직도 내부에서 태상노군에게 태극도의 수련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 때 겸사겸사 타신편의 발동법도 배우긴 했었다. 그렇기에 곧장 수인(手印)을 맺으며 외쳤다.
“보패 타신편이여! 그 몸의 신성(神聖)을 부숴라!!”
퍼버벙!!
다음 순간, 항우의 몸 안에 소환되어 있던 타신편이 빛을 내며 항우 몸의 성좌를 부수기 시작했다. 항우의 육공에서 오색빛이 환하게 터져나왔고, 항우가 몸을 꿈틀거리며 짐승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우오오오오오!!
쿠구구구
한 차례 흉성이 폭발해서일까? 항우 몸 내부의 신성이 연쇄적으로 터져나가는데도 항우의 힘은 도리어 몇 배로 강인하게 혈광을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와 함께 따라온 고대선인들이 삼재진의 형태로 항우를 포위하며 혈주를 소환했다.
치링!
용길공주가 주문을 외우며 말했다.
[고대부터 이어져오는 혼돈의 재능과 성좌의 봉인이여….]
그 말을 받아서 도덕천존이 마저 주문을 외웠다.
[온누리에 뻗치던 이 강대한 혈주의 봉인을 오로지 그대 항우에게만 새기노라.]
남극선옹이 마지막으로 외쳤다.
[영원토록, 그 힘을 봉하노니!!]
파지직 파직
혈주가 빛을 내더니 세 선인의 신형이 혈주 내부로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혈주와 함께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콰과광
그 빛은 세 선인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 혈주의 봉인을 완성했다는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항우는 방금 전까지 혈광을 빛내며 발악하다가 빛이 자신의 몸에 내려앉자 크게 힘이 감소한 듯 휘청거렸다.
털썩!
“…크윽….”
항우가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나는 그 모습을 응시하다가 외쳤다.
“다같이 공격!!”
타신편으로 내면의 성좌를 파괴시키고 심지어 고대인의 혈주봉인까지 한번에 적용시켰다. 이렇게까지 한 명의 적수에게 약화와 봉인을 걸어본 적은 처음이다. 이러고서도 항우한테 지는 건 말도 안 돼!!
다음 순간 내가 모은 모든 전력이 항우에게 달려들어서 일시에 몰아치기 시작했다. 후예, 아수라, 여동빈, 사공린을 비롯해서 혼돈의 재능을 타고난 고대인들과 천계 탐사대, 그리고 정도령과 천우진 등 한 명도 남김없이 항우를 죽이고자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첫 발인 후예의 적시로써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미 이것만으로도 항우가 원래 힘으로 막아내기는 벅찰 정도였다.
뒤이어서 수많은 초능력과 주술, 그리고 무공과 의념이 몰아치면서 마치 태풍을 만들어낸 듯 했다. 그 폭열의 도가니 속에서 항우는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고, 검에 찢기고 주술에 날려다녔다. 휘몰아치는 광기어린 공격 속에서 항우는 마치 파도 위의 돛단배처럼 그저 당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틈을 한참 노리다가 동료들에게 외쳤다.
“칠요공명이다!!”
“그렇게까지…?”
“항우가 아직도 안 죽었어! 여와가 끼어든다는 뜻이잖아!!”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자!!”
우우우웅
내가 지닌 대해방 쌍요를 포함해서 월요와 토요가 각각 아수라와 천우진에게 쥐어졌고 네 개의 칠요가 동시에 공명했다. 그리고 셋의 힘이 모이자마자 거세게 항우에게 집중하여 들이박았고, 항우의 가슴 한가운데에 쌍요가 만들어낸 십자 상흔이 새겨지는 게 보였다.
쿠구구궁
먹혔다!
이러고도 안 죽으면… 말도 안 되잖아!!
나는 칼끝의 감촉이 매우 좋다는 걸 알아채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이제 항우의 시련도 그냥 돌파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항우의 몸은 여전히 피투성이지만 완전히 뭉개지지 않은 채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항우의 전신에서 가공할 달의 마력이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스스스스!
그 마력은 점차 외부의 공격에서 항우를 지키듯 둥근 방어막의 형태를 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씨…씨발….”
여와…!! 직접 끼어들다니!
정말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이렇게까지 해도 끝장을 못 냈다고…?!’
내가 암담해서 그만 쌍요를 늘어뜨린 채 멍청히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고 있자 옆에 있던 제갈량이 덤덤하게 말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일격필살을 노린 거였지만 여와의 출제의도를 생각해 본다면 어쩔 수 없는 거였지. 여와는 절대 항우가 한 방에 당하지 않게끔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절대적인 힘에 이겨내는지를 보고싶으니 꼼수는 싫어하는 것이다.]
“제갈량!! 쓸모없는 줄 알았다면 어째서….”
[네가 인신공양은 싫다하지 않았나? 황제소환 다음의 차선책이 이거였으니 불평 말아라. 이건 네 전력을 모을만큼 모으는 데 의미가 있었고 항우를 정공법으로 해치울 수 있는지 시험해보려는 거였다. 그리고….]
제갈량이 훗하고 웃었다.
[아직 히든피스가 남아있지. 이게 바로 파우스트가 남겨준 진짜 공략이다.]
“히든피스?”
콰과과광!!
그 때 항우가 전신에 혈광을 머금고 날아들어서 주먹을 날렸고, 그 주먹을 정면에서 천마 사공린이 황금빛을 뿜어내며 막아내었다. 그리고 뒤이어서 여동빈의 무형검로가 날아들어서 항우의 옆구리를 베었는데, 항우는 뜻밖에 그 검로에 맞자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너….]
잠시 항우가 정신이 들어서 여동빈을 바라보는 듯 했다. 여동빈의 무형검로에 그의 폭주를 끊는 힘이 있었던 것일까?
화룡신검을 든 여동빈은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패왕이여! 정신을 차리시오.]
[…크, 크윽….]
항우는 자신의 머리를 털면서 여와의 힘에 저항하려는 기색이었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전장을 지켜보던 제갈량이 말했다.
[백웅. 여와가 발작하기 시작하면 아까 히든피스로 소환했던 황금빛 기둥으로 들어가라.]
“왜?”
[여와를 진짜로 엿먹일 수 있다. 어차피 항우를 미리 약화시키고 시작했으니 이쪽도 쉽게는 당하지 않을테니 전멸 걱정은 하지 마라.]
“어떻게.”
제갈량은 썩은 미소를 지었다.
[잘 들어라. 적이 하지 말라는 걸 끝까지 성공시키는 게 바로 책사의 즐거움이다….]
쿠구구구!!
잠시 후 항우의 전신에서 은빛 마력이 퍼져나오며 본격적으로 여와가 항우의 몸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저 말도 안되는 힘을 보자 대번에 아군 대부분은 전의를 잃은 기색이 되었고, 그럼에도 최상위급 강자들은 항우와 맞서려고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듯 했다.
나는 여와가 덮쳐오기 전에 재빨리 뛰어서 히든피스의 황금빛 기둥으로 향했다.
‘에라이 모르겠다!!’
뭐가 됐든간에 지금 상황보단 낫겠지!!
파밧
내가 황금빛 기둥 내부로 뛰어든 순간이었다. 그 순간, 이전에 보았던 히든피스 내부의 공간이 눈 앞에 떠오르더니 무수한 시계들이 가득한 게 보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의 삭막한 풍경과 달리 시계 하나하나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중이었고 마치 황금의 물결이 흐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스스스!
그리고 눈 앞에 파우스트의 황금빛 환영이 떠오르며 말했다.
[다중우주의 시공간을 소환 중…. 제갈량의 조작의도에 따라 사용자의 시공간을 [천계의 탑] 99층으로 이동시키겠습니다.]
우우우우….
내 몸이 황금빛 격류에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격류 사이에서 은빛 손이 뻗어져 나와서 나를 붙잡으려는 듯 허우적대며 외쳤다.
[이 놈!! 내 시련을…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필멸자가 다중우주를 조작하는 물건을….]
“윽. 저리 가.”
휘오오오
은빛 손에서 엄청난 집념이 느껴졌다. 마치 울부짖는 듯한 애끓는 외침이 느껴지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 이래선 네게 신명을 맡길 수 없노라!]
“뭐?”
[이런 식으론 결코 그 자… 기어오는 자를….]
“저리 가, 가라고!!”
휙 휙
나는 애써 그 손짓을 피했다. 왠지 닿이기만 해도 위험할 것 같아서 열심히 피하고 있던 중, 문득 그 손의 정체를 알아챘다.
“여와?”
파앗!
“……?!”
다음 순간, 나는 생전 처음 보는 장소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눈 앞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왔구려.”
나는 그 자의 모습을 보자마자 멍하니 중얼거렸다.
“…망량?”
망량이 서 있다.
헤어졌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는 어찌된 일인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멀뚱히 망량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망량이 천천히 백우선을 내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천계의 시련을 모두 통과한 걸 축하하오. 실질적인 힘의 시련은 항우까지였으니, 나를 넘는다면 바로 여와와 복희를 만날 수 있을 것이오.”
스스스!!
망량의 몸 주위에는 황색 빛을 머금은 명계의 유물들이 둥둥 떠 있었다. 나는 그 유물들을 경계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말했다.
“설마….”
“그렇소.”
망량은 아무런 감정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99층의 시련관은 바로 나요.”
“뭐, 뭐라고….”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너무 뜬금없지 않소?!”
어째서 망량이 99층의 시련관이란 말인가?
내가 당황해서 외치자 망량이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현허궁주로 있었을 때부터 미리 이야기가 되었던 것이오. 나는 탑의 시련을 진행하던 도중에 여와와 접촉했고, 그녀에게 자격을 인정받아서 미리 탑의 시련관으로 내정되었소….”
“……!!”
“그 자격에 대해서는… 우선 이 시련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말해주겠소.”
망량은 잠시 차분하게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항우가 힘의 시련이었다면 나는 지혜의 시련. 단도직입적으로 여와와 복희의 진짜 마음을 담아 그대에게 묻겠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대는 여와와 복희의 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망량이 배신한 건가? 아닌 건가?
잠시 후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백웅. [기어오는 혼돈]은 지금부터 정확히 1년 후 강제로 망량선사의 봉인을 뚫고 낙양에서 탈출할 것이오. 당신은 외신(外神)을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