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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전투의 시작은 후예의 적궁백시로 시작되었다. 순식간에 그의 시위가 매겨지고 곧장 수백 발의 백시가 기린을 향해 발출되었다.
‘곧바로 최강의 일격을 가하지 않는다고?’
나는 뜻밖에 후예가 가볍게 전투를 시작하는 걸 보자 흠칫했다. 강적이니 당연히 한 번에 백시를 적시로 만들어서 수만배 위력의 필살기를 가할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선공필승이 싸움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내 후예의 생각도 옳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잉
기린의 뿔이 빛나더니 갑자기 후예가 날린 수백 발의 백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소멸시킨 기린을 물끄러미 보던 후예가 말했다.
[역시 그렇군.]
“뭐가?”
[고대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방어막이다. 저기에 걸리면 인과역전, 왜곡, 소멸, 전이, 파쇄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나지. 저 정도 급수의 위상이라면 저런 방어를 언제나 치고 다닌다. 아무리 화살의 위력이 강해도 먹히지 않는다.]
“으음….”
[저걸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강대한 신격과의 싸움은 얘기가 되지 않는다. 설령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힘이 있어도.]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위력을 무시하고 모든 공격을 차단하는 고대신의 방어. 그래서 일발의 위력만으로 승부를 보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후예에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신의 공격을 회피하면서 버텨내다가 한 방에 역전을 노려야 한다. 적시란 건 원래 정면에서 상대를 깨부수는 용도가 아니라 신에게 비수를 꽂기 위한 최후의 일격이니까.]
“흠, 이해됐어.”
적궁백시의 본디 쓰임새는 바로 백시로 견제하고 적시로 마무리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다만 순차적으로 위력이 쌓일 경우 갑자기 적의 약점이 보여도 찌를 수가 없기에, 후예는 견제를 하다가도 갑자기 적시를 이용해 필살의 일격을 날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듯 했다.
나는 후예가 강력한 신과 싸워본 경험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신중하게 말했다.
“이번 모의전에서 최대한 경험을 쌓아야겠어. 나는 뭘 하면 되지?”
후예는 싸늘한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다가 말했다.
[훔치는 기술을 써라.]
“뭐?”
[네 쌍요공명도 강력해 보이지만 저런 급수의 상대에게는 치명타라고까진 할 수 없다. 대신에 네가 날 보조해서 훔치는 기술로 적의 균형부터 무너뜨려라. 그게 가장 나을 거다.]
“…좋았어.”
쌍요를 이용해서 방어막을 먼저 깨야하나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내게는 만상지투라는 유용한 기술이 있다. 후예 또한 백전노장이니만큼 만상지투의 효용성을 간파해서 내가 그를 만상지투로 보조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옆에 있던 검마가 말했다.
“알았네. 그럼 나와 독고성은 백웅이 만상지투를 쓸 틈을 만들지.”
[너희 실력이면 거치적거리진 않겠군. 셋이 나를 잘 보조해 봐라. 그럼 간다.]
파앗!
갑자기 후예가 거대한 비차(飛車)를 소환하여 비차 옆에 달린 날개를 휘저어서 크게 하늘을 날았다. 본신도 비상능력이 있지만 저 비차 자체가 후예의 고유한 권능인 듯 비차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엄청난 속도군!’
500년 후의 세계에서 보았던 비행기라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 말 그대로 빛이 왔다갔다하는 느낌이었다. 후예가 거리를 잡자 나는 검마에게 눈짓을 했고, 이윽고 검마와 독고성이 나와 함께 영귀에게 접근했다.
기린으로 변신한 영귀가 머리를 살짝 앞으로 들이대며 말했다.
[기린의 약점은 바로 이마에 있는 일각(一角). 그대들은 이걸 노리십시오.]
자기 약점을 자기가 말해주는 게 이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기린에 대처할 능력을 기르기 위한 모의전! 약점을 알아챈 우리는 거의 동시에 원거리에서 의념으로 어검(御劍)을 생성해서 뿔에 날렸다.
위잉
기린의 뿔이 신비한 빛을 내자 어검이 순식간에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하긴 후예의 백시도 잘 안 먹히는 판에 이런 견제용 공격이 쉽사리 먹히진 않으리라. 독고성이 호탕하게 웃으며 공격해 들어갔다.
“어디 이것도 없애보아라!”
검뢰(劍雷)!
쩌엉 -
엄청난 뇌령지기가 실려있는 독고성 필생의 검뢰가 그대로 기린의 전면을 타격했다. 그러나 독고성의 검뢰는 마치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고, 검뢰와 의념이 사라져 버리자 독고성은 허공에 칼춤을 추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허업!”
깜짝 놀란 독고성은 공격이 무효화되자 뒤로 급히 물러서면서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무효화되는 게 아니다. 범위 내에 들어가면 완전 소멸당한다.”
“무슨 말입니까?”
“의념뿐만 아니라 우리가 직접 근처에 가기만 해도 사라질 것이다. 당연히 무기도….”
“……!!”
“근접전이 안 통하는 상대다.”
뭐 그런 방어막이 다 있단 말인가?!
접근한 것을 모조리 소멸시켜버리다니!
‘개, 개사기잖아!’
해신조차도 저런 종류의 방어막은 치지 못했기에 나는 머리가 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말대로라면 일개 무인으로서 기린을 쓰러뜨릴 방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검마가 말했다.
“내가 검령으로 견제를 해 보지. 소멸방어막의 간격을 살펴야겠어.”
스스스스 -
검마의 검에서 희뿌연 검령이 흘러나와서 형태를 이루었다. 잠시동안 정신을 집중하던 검마가 이윽고 눈을 부릅떴고, 검령은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서 사라져서 기린의 목젖을 찌른 후였다.
쿠우우…
기린은 검마의 검령을 손쉽게 제거할 수 없는 듯 목을 저으며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기린의 목젖에서 피 몇 방울이 새어나오는 게 눈에 보였다.
‘통한 건가?’
검령은 저 소멸방어막을 통과해서 피해를 입히는 게 가능한 듯 했다. 하지만 나는 이윽고 옆에 있던 검마를 보자 흠칫 놀랐다.
사아아아!!
“거, 검마!!”
놀랍게도 검마의 손과 팔이 통째로 회백색으로 굳어서 딱딱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크흑.”
검마는 각혈을 한 번 하더니 급히 검령을 뒤로 물렸다. 검마의 주위로 되돌아온 검령은 검신에 빨려 들어갔고, 검마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자리에 굳은 듯 섰다. 그러자 검마의 굳어가는 회백색 팔이 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기 시작하는 듯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영귀가 말했다.
[기린은 적의 공격을 저주로 바꿔서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의 검술로 기린에게 상처를 낸 건 참 대단하군요….]
“…영귀님.”
[왜 그러시는지.]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저히 접근할 자신이 없습니다. 만상지투 그냥 한 번만 맞아주시면 안될까요….”
잘못 접근했다가는 내가 방어막째로 소멸당하는 꼴이 날 것이다. 게다가 반사저주 능력까지 있다고 하니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그러시지요.]
제기랄… 굴욕적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의 진형으로는 기린을 상대로 공격을 성공시킬 도리가 없었고, 여기서 힘을 다 쏟아버리면 오늘 하루의 시간동안에 할 일이 너무 많을진대 괜한 낭비나 다름없다. 여기서는 다시 자존심이 상해도 모의전을 빌미로 최대한 이득을 취하는 게 나으리라.
과연 기린에게 만상지투가 통할까?
‘훔친다면 당연히 뿔이지!’
기린의 약점이 뿔이라고 대놓고 말하지 않았던가!
파밧!
나는 기린에게 접근해서 그대로 뿔을 훔치기 위해 만상지투를 시전했다. 그러자 내 손에 ‘뿔’의 질량과 부피가 고스란히 담기는 게 느껴졌고, 만상지투가 절반 이상 진행되었을 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때였다.
퍼억!
“크아아아악.”
파, 팔이 날라갔어!
피분수를 뿜으며 팔죽지에서 피가 철철 흘렀고 팔이 허공을 날았다가 떨어졌다. 내가 경악하고 있자 영귀가 말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기린의 전투방식대로 하다보니 이리 되었군요.]
“대체 무슨….”
[만상지투로 ‘뻗어내는’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으나 물건을 환수하려 할 때 차단하는 건 가능합니다. 기린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
만상지투로 뿔을 잡는 것까진 가능했다. 하지만 다시 가져가기 전에 도둑의 손을 잘라버림으로써 만상지투를 봉쇄했단 걸까?
“크흑.”
나는 땅에 떨어진 팔을 주워서 이를 악물며 환부에 붙였다. 그리고 고통을 꾹 눌러 참으며 기를 이용해서 팔을 임시로 부착시킨 후 혈도로 지혈해서 의념으로 움직이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금세 다시 팔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기에 나는 고통만 호흡으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 소멸장 자체를 훔쳐보겠습니다!”
만상지투(萬象之偸)
공간절도(空間竊盜)!
그 순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서 내 오른손이 뭔가를 훔쳐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개념적으로 내 손에 마치 그물망 같은 무형의 실 같은 게 잡혀있다는 걸 알 수 있었는데, 다음 순간 기껏 붙여놓은 팔이 끝단에서부터 소멸되어가는 걸 느꼈다.
파악
나는 임시로 붙인 팔을 재빨리 떼버렸다. 그러자 팔이 땅에 내동댕이쳐진지 몇 초만에 그대로 흔적도 없이 모래처럼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걸 보자 곤란함을 느꼈다.
‘소멸장을 훔치는 건 가능하지만 그 대신 만상지투를 시전한 팔이 사라지는 것도 각오해야 해.’
정말 까다롭다. 이렇게 까다로울 수가 있는 건가.
내가 복잡한 심정일 때 갑자기 천공에서 커다란 포효가 들려왔다.
[잘했다! 마무리해 주마.]
쿠구구구구…!!
천공에서 어마어마한 위력의 적시(赤矢)가 쏘아져 온다! 지금까지 계속 틈만 보고 있던 후예가 소멸장을 훔친 순간이 기회라는 걸 간파하고는 필살의 일격을 발사한 셈이었다.
기린으로 변신한 영귀는 그 적시를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갑자기 외뿔에서 신령스러운 빛을 방출했다.
만수지황(萬獸之皇)
영롱대원천상(玲瓏大元天上)
키이이이이 -
신령스러운 빛이 적시와 부딪히는 순간, 그 빛에서 무수한 영혼의 파장이 방출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이혼대법을 펼쳐서 그 영혼의 파장을 알아보았는데, 파장의 숫자가 무려 수십억 단위를 넘어가는 걸 느끼고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파앙!!
외뿔의 빛이 적시를 완전히 이겨내지는 못했다. 계속해서 밀리면서 힘겹게 버티는 기색이 역력했다.
우웅
그래서 기린은 한동안 빛을 발사해서 대치하다가 별안간 환영에 휩싸여서 사라졌고 다른 장소에 공간이동해 버렸고, 비어있던 자리에 적시가 파괴의 장관을 만들어내었다.
콰과광
‘최강의 적시에 완전히 대적할 정도는 아니지만 저건 대단한 능력이다.’
어찌되었든 평소에 치고다니는 소멸장은 사대신수의 전용방어막이다. 그걸 만상지투로 걷어냈다면 맨몸이나 다름없는데 거기서 적시에 대적할 수 있는 게 가능하다니! 적시보다 강력한 공격은 사실상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무시무시했다.
영귀가 말했다.
[후예의 적시가 소모되었다면 더 이상 싸워볼 것도 없겠군요. 그대들이 기린을 쓰러뜨릴 방법은 이제 없습니다.]
“뭐라고요? 너무 섣부른….”
[모의전은 여기서 끝내는 걸 추천드리지요.]
휘익
후예가 비차를 타고 날아온 후 내려서는 말했다.
[동의한다.]
“후예! 아직 칠요를 써서 싸우면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나한테 칠요를 다 넘기면 그걸 이용해서 전투를 오래 끌 수는 있다. 하지만 기린에게 치명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칠요로 힘을 증폭시킬 순 있어도 적시만큼 내게 최적화된 기술을 빠르게 재충전시킬 순 없다. 그냥 버티기 쉬워진다는 정도지.]
“…….”
[어차피 진검승부가 아닌 모의전이라면 이 정도로 충분해. 기린의 약점도 비장의 한수도 알아내지 않았나? 게다가 주군 너는 지금 해야할 일이 쌓여있지 않은가?]
“음!”
후예의 말이 맞다. 모의전도 좋지만 너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해서는 좋지 않다. 전투의 흥분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던 모양이다.
‘사대신기를 쓰면 어찌될지도 모르지만 이런 데서 쓸 게 아니지.’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영귀에게 말했다.
“모의전을 해 줘서 고맙습니다.”
영귀는 기린의 모습에서 원래 청년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면서 대꾸했다.
“별 말씀을…. 기린이 그대들에게 지나친 살의를 품고 있어서 걱정입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왜 그러는 거랍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짐작가는 것도 없군요.”
“제길…. 썩을 놈.”
나는 투덜거리다가 영귀에게 말했다.
“영귀 님. 99층의 시련관이 누구인지 살짝 점쳐주실 순 없겠습니까?”
“안 됩니다. 여와께선 그렇게까지 관여하길 바라지 않으시니.”
“흠. 어쩔 수 없군요.”
아무래도 여와는 탑의 시련에 그 어떠한 신격의 관여나 편법도 인정하지 않을 모양이다. 나는 이게 은근히 골치아픈 제약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럼 98층으로 문만 열어두고 일단 퇴각하겠습니다.”
[팔은 치료해 드리지요.]
영귀의 호의 덕에 사라졌던 팔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또한 일행이 모의전에서 입은 부상이 모두 치유된 것 같았다.
파앗
우리는 다같이 본진인 팔괘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아군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일단 설명해두고 의견을 물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그러자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말했다.
“황제여. 그 말대로라면 우선 여동빈부터 아군으로 거두는 게 맞을 듯하오.”
“여동빈을?”
“아수라란 자는 엄청난 검술의 명인. 그가 항우와 부딪혀서 여동빈이 낫겠다고 느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되오.”
“흠 그렇군!”
“다만 여동빈의 행방이 묘연하여 찾기가 힘들다 여겨지면 제갈량과 히든피스의 각성을 먼저 얻는 게 좋을 것이오. 제갈량이라면 이 자리의 누구보다도 현명하니 효율적인 책략을 제시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좋아, 그렇게 하겠어!”
나는 천계에서 내려가서 곧장 아수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사정을 설명해주자 아수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매듭이 묶여서 주기가 되었고, 벌써 한 번의 매듭을 맺었단 말이냐?”
“그래.”
“…….”
아수라는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것 같지만, 백웅…. 네게는 그 암흑공간에서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었잖나.”
“응?”
“그냥 죽어서 29번째 삶을 시작하는 선택지.”
“……!! 아, 아니 그건 말도 안 돼! 지금 종말을 앞두고 얻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뜻밖의 말에 내가 항변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매듭이란 결(結)이니, 묶인 건 언제고 풀리는(解) 법이겠지. 하지만 항아는 네게 매듭의 해제법을 알리지 않았다. 그냥 선택하지 않으면 계속 그 공간에 머문다고만 했을 뿐이지.”
“…어….”
“이건 함정이나 다름없어. 언뜻 좋아 보이는 제안이지만 매듭의 해제법이 없다면 넌 영원히 매듭을 반복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
나는 침묵하다가 아수라에게 말했다.
“하지만 말했듯이, 망량선사의 이름을 부르면 서의 횡포를 끝내게 해 준다고 했어. 그러면 괜찮은 거 아냐?”
“망량선사의 진짜 이름이 뭔지 너는 알고있단 말이냐?”
“…그건….”
“아무래도 가명(假名)만 불러도 가능할 듯 싶긴 하지만 찝찝한 건 어쩔 수가 없군. 제기랄….”
아수라는 한숨을 내쉬다가 말했다.
“백웅. 매듭을 무한히 거듭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마라. 도리어 넌 함정에 걸렸으니 최단기간 내에 탈출한다고 여겨라.”
“알았어.”
“천마 사공린에게 사실을 알리기 전에 일단 여산의 여동빈부터 찾아보고 가자.”
파앗
나는 아수라와 함께 여산으로 갔다. 허허벌판이 된 여산에 마지막으로 여동빈이 있었기 때문에 찾으러 온 것이다. 하지만 여동빈의 기는 어디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데 갔나보군.”
“흠….”
“백웅. 그럼 여동빈을 단말을 이용해서 불러라. 이전에 다시 이었으니까.”
“알았어.”
지금도 여산에 있으면 굳이 단말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거라 생각해서 직접 찾으러 왔지만 없다면 단말을 써야겠다.
“오시오, 여동빈!”
…….
그러나 단말을 통해 여동빈이 소환되지는 않았다. 무응답 상태였기에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왜 안 오는 거지?
아수라가 내게 물었다.
“여동빈이 아예 반응이 없는 건가?”
“아니…. 이 세상 어디엔가 있기는 한데 왠지 일부러 대답을 안 한다는 느낌이야.”
“아무래도 지금은 네 부름에 응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군. 수련이라도 하고 있다는 건가.”
아수라는 뭔가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나중에 부르자. 일부러 연락을 차단 중이라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알았어.”
우리는 아수라의 거처로 되돌아왔다.
우웅!
그리고 되돌아오자마자 나는 천신경의 술수로 제갈무후를 소환했다. 그리고는 제갈무후에게 곧장 전후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
“…이렇게 된 것입니다.”
[소설같은 이야기지만 세계의 진실과 나만 아는 이야기를 하니 믿지 않을 수 없군. 허나 정말 힘든 상황이야.]
제갈무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우선 그 히든피스라는 것부터 빠르게 얻고 생각하지.]
우웅
나는 히든피스의 시계공간으로 가서 제갈무후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풀고 파우스트가 있던 공간으로 가자, 제갈무후는 파우스트에게 손을 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
[파우스트여. 섣불리 히든피스에 동력을 공급하려 들지 말게. 우린 자네의 지식이 필요하다.]
[제갈무후여. 무슨 말이오?]
[그대가 이 성계에서 뭘 하려는지는 다 알고 있지.]
제갈무후는 미리 파우스트에게 그의 계획을 다 말해버렸고, 파우스트가 곤혹스러운듯 말했다.
[마치 시간을 반복한 듯 하군…. 설마 [큰 굴레]가 한 번 돌아간 것이오?]
[백웅이 천암비서의 힘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해가 가는가?]
[이런….]
[그래서 서방 제일의 현자인 그대 의견도 필요하다. 백웅이 천계의 탑 98층을 돌파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할지.]
파우스트는 강철 인형을 끼긱거리며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 생각은 역시 히든피스뿐이오…. 히든피스를 잘 활용하면 답이 보일 것이오.]
[과연. 이해했다. 하지만 내 해법과는 좀 다르군.]
[설마 당신은 황제를…?]
[알아차린 모양이군. 역시 현자 답구나.]
제갈무후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차분하게 해 보도록 하지. 그럼 이만 명을 다해도 좋네.]
[그럼 안녕히….]
파앗!
파우스트가 자멸하면서 또다시 히든피스에 동력을 공급하고 우리를 현실세계로 돌려보냈다. 우리가 되돌아오자 제갈무후가 내게 말했다.
[백웅. 후예와 사공린, 아수라가 다 힘을 합쳐도 항우를 못 이기는 건 알고 있겠지.]
“물론.”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항우가 아니라 여와나 다름없으니까.”
아마 첫 도전 때도 항우의 순수한 힘이 아니라 여와의 가호가 잔뜩 들어간 것이었으리라. 후예는 그걸 알았기에 일격이 통하지 않으면 삼황을 상대로는 답이 없다고 여겼기에 적시가 막히자 자진했을 것이다. 아무리 지상의 강자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아직 삼황을 상대로는 답이 없다.
[그렇다면 지금은 항우를 쓰러뜨리는 동료를 모을 때가 아니다. 그건 시간낭비지. 도리어 하루의 시간을 이용해 다른 걸 먼저 시도해보는 게 맞다.]
“어떻게 해야 하지?”
[천계에서 보패 원시천반을 얻어 여동빈을 빨리 찾아내면 좋겠지만 혈주의 봉인은 태공망이 없어도 경계수준이 만만치 않다. 원시천반을 얻는 일은 후순위로 미뤄두고 우선 해야 할 일은….]
제갈량의 눈이 번득였다.
[진소청에 대한 걸 천우진에게 의논하는 게 먼저지.]
파앗
우리는 천우진에게로 찾아갔다. 그리고 천우진에게 상황설명을 하자 천우진은 떨떠름한 기색으로 납득하는 듯 했다.
제갈량이 천우진에게 말했다.
[천우진이여. 진소청은 자신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대가를 줘야 한다고 말했으며 인과율에 걸리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그 자는 역시….]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게 맞을 거요.”
천우진은 턱을 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진소청은 분명히 필멸자를 벗어나 신(神)이 되었소. 최소한 미호에 버금가는.”
[과연….]
“미호와는 달리 여와는 진소청을 불러오는 일에는 제약을 걸지 않을 것이오. 미호와 달리 진소청은 스승님인 망량선사의 직계라 할 수 있으니 압력을 행사할 처지가 아니지.”
[좋아. 그럼 진소청이 항우를 이길 수 있겠나?]
“…….”
천우진이 한참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모르겠소. 그건 정말로 소환되어봐야 아는 문제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진소청이 소환되어서 또 다른 존재를 소환하는 건?]
천우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뭔가 흉계를 꾸미는 것 같군. 대체 뭘 할 생각이오?”
흉계?
모두의 시선이 제갈량에게 쏠리자, 그가 빙긋 웃었다.
[불확실하게 진소청의 힘에 의지하는 것보다 더욱 확실한 방법이 있네. 이번 매듭은 그렇게 가는 게 낫겠어.]
“그게 어떤 방법이오?”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겠군. 저기서 사공린이 듣고 있으니까.]
스윽
제갈량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어느 새 아무것도 없는 장소에서 사공린이 서 있었다. 나는 찔끔해서 사공린을 바라보았다.
“사공린. 다 들은건가?”
“…….”
사공린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웅. 여태껏 나를 그렇게 생각했군요….”
“윽….”
사공린이 천천히 연구소 내부의 서문혜가 갇힌 만년빙벽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해했습니다. 제갈량의 계책도 짐작했어요.”
[호오. 내가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길래?]
제갈량이 흥미진진한듯 되묻자 사공린이 그를 잔잔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이용해서 황제(黃帝) 공손헌원을 항우 앞에 소환할 생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