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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아수라의 암야참이 뻗어나온 것과 항우의 패왕권이 부딪힌 것은 완전히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항우의 주먹이 뻗어나온 순간을 보지 못했던 나는 그가 [작은 굴레]의 힘을 써서 인과를 뒤틀었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놀라운 것은 암야참이 정확하게 둘의 거리 중간에서 패왕권의 진격을 막았다는 사실이었다.
쩌엉!
콰콰콱
다음 순간, 아수라의 몸이 뒤로 날려가며 그의 검 또한 산산조각나서 부숴지고 말았다. 아수라는 곧장 신법을 발휘해서 자세를 잡았으나 명백히 아수라가 항우에게 밀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수라는 전혀 기가 죽지 않은 듯 말했다.
“명색이 오대명검(五大名劍) 담로(湛盧)인데 아깝게 됐군. 처음 얻은 이후로 한 번도 부러지지 않고 잘 썼는데.”
오대명검 담로!
'저거 분명 예전에 제갈사가 빙의했던 그 전생에서 노예시장에서 봤던 물건이군!'
오대명검이라 칭하는 모든 검은 신검까지는 아니었으나 일반적인 제작검의 부류에서 최상의 균형과 품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 또한 무사이기에 전생하면서 종종 탐이 났었지만, 어찌되었든 칠요급의 무기는 절대 아니었으므로 굳이 찾아 다니지 않았다. 그런데 아수라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연히 얻게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항우의 일 권을 아수라가 어찌되었든 부상하나 없이 막아내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항우의 패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내가 전력을 끌어모았는데도 항우에게 조그마한 부상을 입히는데 그쳤으니, 사실상 지금까지 투선이라 해도 일격에 죽였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검마도 검령으로 도저히 그의 권력을 막을 방법이 없어서 당했던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대륙조차도 일격으로 가볍게 쪼갤 수 있는 게 현재 항우의 힘이다.
그런데 암야참으로 어떻게?
암야참은 특수한 성질을 지닌 절대지경이라서 강대한 힘의 구현은 아니지 않았던가?
내가 이해불가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자 항우가 말했다.
“재밌군. 진정으로 검예(劍藝)의 극한에 도달한 자인가...?“
“과찬이군.”
“이 초라한 세상에 너같은 녀석도 있었던가.”
“초패왕이여. 살다보면 별 놈이 다 있는 법이지.”
“좋다.”
스윽
콰칭!!
갑자기 항우가 허공에 손을 뻗자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거검(巨劍)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어 항우의 손에 잡혔다. 그 거검은 화려한 비취색의 문양이 검집에 새겨져 있었으며 선명한 붉은 빛의 보석이 검신에 박혀 있었다. 거검을 든 항우가 처음으로 검술 자세라는 걸 잡으면서 말했다.
“본왕, 검술로 너와 대적해 보지.”
...뭐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항우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외쳤다.
“항우!! 당신은 권법이 주력기가 아니었소!”
“내 힘을 버틸만한 검을 찾기가 귀찮아서 권장법을 썼을 뿐이다.”
“......“
항우가 슥 하고 검극을 아수라에게로 향했다.
“허나 아수라, 너 정도라면 본왕이 성좌로 만든 검으로 상대해줄 만하군.”
성좌로 만든 검이라고?
자세히 보니 저 검은 반투명해서 물질계에 존재하는 게 아닌 듯 했다. 아마 그의 말대로 압도적인 성좌의 권능으로 구현화시킨 검으로써, 성좌 그 자체이리라. 그런게 아니라면 지상의 그 어떤 신검도 항우의 전력을 감당할 수 없다. 당연히 저 검을 구현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힘이 소모되는 건 분명하다.
우우우우
가공할 기세를 뿜어내는 항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수라가 말했다.
“그렇군. 그게 바로 검선 여동빈 천둔검법(天道劍法)의 원류인 항우 당신의 가전검술인가? 이거 귀한 구경을 하는구만.“
“......!!”
그 순간 나는 과거 여동빈의 회상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천계가 지겨워서 지상에 나들이할 겸 탕마행(蕩魔行)을 하기 위해 화룡신검을 만들어서 함께 내려왔다. 그리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요괴들을 잡던 중에 패왕 항우의 무덤을 찾아냈고, 항우가 쓰던 가전검술을 손에 얻었다.]
[그 검술은 내가 보았던 중 가장 훌륭했다. 아마 초나라 왕가의 비전 검예이기 때문이었겠지. 다만 항우 본인이 타고난 힘이 너무 강해서 검술을 더 발전시키지 않아서 미완성인 상태였다.]
[화룡진인께서 항우의 가전검술을 발전시키셨군요.]
[그렇다. 천둔검법이란 이름으로 정리하기까지 대략 백 년 정도 걸렸지.]
화룡진인과 여동빈의 대화. 본디 천둔검법이라 불리는 여동빈의 절기는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화룡진인이 고대 초나라 왕가의 비전검술인 항우의 검술을 입수하여 백여 년 동안 다듬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둔검법은 본디 패왕의 검이라는 별칭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지금 바로 항우가 그 원류(原流)의 검술, 초 왕가의 비전검술을 시전한다는 것!
꿀꺽
나는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힘 하나만으로도 항우는 무적이다. 그런데 그가 기술까지 갖추게 되면 범이 날개를 다는 것과 같다...'
과연 아수라가 버틸 수 있을까? 압도적으로 유리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듯 항우가 오연한 기세로 말했다.
“이름은 패왕검법(覇王劍法), 천지멸절(天地滅)의 검(劍)이다.”
“...흐흐.”
“받아낼 준비를 하라...”
“흐흐, 흐, 흐하...”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수라가 어깨를 들썩거리더니 마침내 크게 광소를 터뜨렸다.
“흐하하하하하하하!!!”
“......“
“천지멸절의 검? 크크크큭... 큭...큭큭.”
아수라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기색이었다. 그런 아수라를 딱딱하게 굳어진 눈으로 항우가 쳐다보고 있자 아수라는 실쭉 웃음을 맺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이거. 예상도 못했잖나.”
“왜 웃지.”
아수라가 슥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검을 달라는 의미였으므로 나는 월요를 모두 그에게 주었지만 아수라는 그 중에서 천총운검만 집어들었을 뿐이었다. 사공린은 왠지 칠요를 받기 싫어하는 기색이었으므로 나는 남은 월요 두 가지를 천우진에게 줬다.
“초패왕이여.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이어진 말에 좌중이 크게 동요했다.
“패왕검법으로 덤벼보시게. 그럼 나는 삼 초식 내에 당신의 팔을 잘라주지.”
뜻밖의 선언! 그러자 항우는 냉막하게 굳은 인상으로 대꾸했다.
“죽어라.”
쿠웅!!
다음 순간, 항우의 검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둘러졌다. 그것은 내가 전력을 다해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며, 물질의 한계에 도달한 게 아닌가 싶은 힘과 속도였다. 항우의 말도 안 되는 거력이 실린 일 검이 반투명한 성좌의 힘을 담고 패왕의 기운을 내뿜자 하늘이 천천히 쪼개어지는 듯 했다.
섬짓하다. 도대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저런 힘을 가지는 게 가능할까? 조그마한 [옛 지배자]나 다름없어 보인다.
말 그대로 무차별적 폭력!
신이라도 죽여버릴 듯한 무한한 천살성의 살기가 느껴졌다.
슈욱
아수라의 검은 약간 뒤늦게 움직였다. 아수라의 전신이 항우의 검력에 휘말려서 갈가리 분해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호신강기를 두르거나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귀일검해(歸一劍解)
역린섬(逆鱗殲)
잠깐동안이었지만 아수라의 인간형상에서 여덟 개의 투명한 팔이 주변에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여덟개의 서로 다른 검형(劍形)이 중앙에서 조합되는 듯 하더니, 이윽고 과거에 압도적인 위력을 뽐냈던 절기인 역린섬을 발출했다.
'안 돼. 저걸론...’
아무리 역린섬이라 해도 지금의 항우가 지닌 힘은 차원이 다르다. 호법사자를 찢어버리는 힘 정도로는 항우의 힘에 일 푼조차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역린섬이라면 내 무량단으로도 충분히 와해시킬 수 있었기에 나는 아수라의 검형이 찢겨나갈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진 일은 내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구궁일여(九宮一如)
패왕살(覇王殺)
퍼버벙
얇은 파공음과 함께 하나의 빛살이 갑작스럽게 항우의 검력이 휘몰아치던 공간을 꿰뚫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마치 폭풍이 와해되는 듯 했고, 항우가 멈칫하는 짧은 경직을 놓치지 않은 아수라가 그대로 천총운검을 자연스럽게 상하로 내려 그었다.
촥!
항우의 검이 허공을 날았고 팔 또한 함께 빙글거리며 하늘로 날아갔다.
투둑 하는 소리가 현실을 일깨워준다.
세 걸음 물러서서 땅에 떨어진 팔을 검으로 가리킨 아수라가 말했다.
“이런, 미안하군. 삼 초식이 아니라 일 초식이었어.”
“......!!“
나는 땅에 떨어진 항우의 팔을 보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저럴 수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항우의 힘에 비하면 아수라의 검에 담긴 힘은 일 할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어떻게 역린섬으로 항우의 힘을 상쇄시키고 곧장 팔을 베어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을 부릅뜨자 항우가 물끄러미 그 팔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과연, 검술로는 네 상대가 되지 않는군...”
아수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터. 패왕검법이라고 해봤자 여동빈의 천둔검법에 비하면 그저 속세의 절세검법에 지나지 않지. 심검에 비하면 저질이야. 그런건 아무리 당신의 힘이 강해도 눈감고 파해할 수 있다.”
“......“
“당신은 검사로서는 그저 그래.”
아니, 아수라 너만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
나는 방금 전 그 공격을 무쌍패로 막는 것 외에는 할 수가 없다고...
“그냥 주먹 휘두르면서 싸우면 상대하기 힘들 텐데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셨는지 모르겠군.”
“그저 여흥이다.”
후우웅!
다음 순간 항우의 잘려나간 팔이 감쪽같이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마 성좌의 권능으로 바로 회복한 것이리라. 항우가 약간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네가 세계최고의 검신(劍神)이란 건 인정하지만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흐음... 거 참... 골치아프군. 패왕씩이나 되면서 무슨 호승심을 갖고 그러시나.”
“넌 그럴 만한 상대다.“
아수라가 짖궂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뭐... 내게 공격을 집중해 주신다면 최대한 어그로를 끌어 보도록 하지. 그게 공대장의 역할이니.”
“받아라!”
파밧!
항우가 이번에는 성좌의 검을 소환하지 않고 그저 맨몸돌격을 하며 일 권을 내뻗었다. 속도와 힘 자체는 아까와 다를 바가 없어보였으나, 아수라는 이번에는 귀일검해를 이용해서 파해하지 못하고 재빨리 삼보절기로 피하면서 암야참을 크게 날렸다.
타앙
아까처럼 또다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아수라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이리되니 버겁군....”
파바밧
수세에 몰린 아수라가 온갖 기이한 동작과 요가를 취하면서 항우의 압도적인 공격을 피하거나 흘려내기 시작했다. 약 십여 초 동안 아수라는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지만 항우의 공세를 틀림없이 상처 하나없이 대적하는 것이다. 나는 아수라가 무슨 수를 쓰는지 파악조차 안 되고 있었다. 삼보절기에 근간한 기술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수라의 무공은 본질적으로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 저게 정말 절대지경의 절기가 맞긴 한 건가?'
아수라는 대체 무슨 수로 투선을 일격에 찢어죽이는 항우를 상대로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거야!
쉬익
바로 그 때 천우진이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환암정주(幻暗精奏).“
항우의 전신이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에 감싸이는 듯하더니 갑작스럽게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없어진 자리에서는 어둠이 나타나서 공간자체를 먹어치우는 것 같았는데 잠시 후 항우의 주먹이 차원을 부수며 재차 모습을 드러내었다.
꽈앙!
그 모습을 본 천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반절의 술력이라지만 [경계를 다루는 술법인데 순수 완력으로 뚫다니... 전성기의 힘을 되찾아도 저 괴물을 멈출 순 없겠군.”
천우진이 힐끔 사공린을 보며 말했다.
“나는 도움이 안 되겠다, 사공린. 이제 슬슬 마음을 정하고 백웅과 합공해서 저놈을 죽여라.”
“......“
그 때까지 아수라가 항우를 감당하는 걸 지켜보고 있던 사공린이 말했다.
“어쩔 수 없겠군요. 그럼.”
쩌엉!
사공린의 황금안(黃金眼)이 크게 빛났다. 그와 동시에 천마(天魔)의 역량을 각성한 사공린이 전장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그녀를 뒤따라서 칠요를 동시에 뽑아들고 덤벼들었다.
우리 둘이 합세해서 동시에 항우를 공격하자 항우는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전신에서 성좌의 힘을 강하게 격발했다. 그것만으로도 은은한 오색 방어막이 생겨났고 나는 빠르게 대해방 칠요를 교차시켜서 방어막을 파괴시켜야만 했다.
콰칭
쌍요의 공명과 함께 십자의 상흔이 생겨났다. 방어막은 다행히 단번에 파괴되었지만 순식간에 항우는 자신의 몸을 둘러싸는 방어막을 하나 더 만들어냈다.
'제길...!!'
힘의 단위가 달라! 무슨 [옛 지배자]도 아니고 이게 가능해?! 나는 1차 방어막을 깨는 것만도 약간 힘을 소모한 느낌이었기에 항우의 말도 안 되는 잠재력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 때는 사공린이 찰나의 염을 남기며 항우의 전면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잘 했어요, 백웅.]
천마와 초패왕의 일대일 대결!
[각오하시길!]
사공린의 일검이 크게 뻗어지며 항우의 정면을 향해 찔러갔다.
[오거라!]
항우는 똑똑히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그대로 주먹을 날려서 정면대결을 하려 했고, 사공린의 검에 눈이 아릴 정도의 선명한 황금빛이 맺히는 듯 했다.
콰칭
갑작스러운 신력(神力)의 파도! 강대한 파장과 함께 사공린의 팔까지 빛이 전이되었다. 그녀의 검이 검신(劍身)에 푸른 광채가 흐르고 있었으며 살아있는 듯한 황룡(黃龍)이 음각된 검으로 변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 검을 쳐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저 검은...!!”
대웅제국의 황제 자리를 두고 백련교주와 겨뤘던 대결에서 사공린이 소환했던 검이 아닌가?
사공린의 안광에서 차분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적삼검(無敵三劍)
영겁지무(永劫之舞)
꽈광
무시무시한 속도로 항우의 권이 정면으로 사공린의 얼굴을 타격하는 게 보였다.
“아니!”
나는 그 순간 숨을 헛하고 들이쉬었으나 다음 순간 항우의 신형이 크게 휘청하더니 지상으로 떨어져내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쿠궁
땅에 떨어진 항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격당한 건가!'
설마 항우의 저런 모습을 볼 날이 있을 줄이야!
'이게 천마의 힘...’
그리고 항우에게 정면에서 일격을 먹은 사공린에게서는 이해불가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슈슈슈슉
사공린의 얼굴 부분만 완전히 사라져 있다. 하지만 그 사라진 부분에는 혼돈의 안개가 감돌고 있었고, 그녀는 잠시 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마치 방금 전에 보았던 것이 환영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사공린에게 외쳤다.
“사공린! 서, 설마 인간을 버리고 마도종족이 된 것...“
“아닙니다, 백웅. 이것이 바로 무적삼검 영겁지무입니다. 항우를 상대로는 힘을 아낄 수가 없군요.”
“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법리를 뒤흔드는 혼돈의 춤.... 백련교주의 그 표현이 가장 영겁지무를 잘 설명하고 있겠군요.”
그렇게 대꾸한 사공린이 천천히 쓰러져있는 항우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렇다 해도 이건 치사하지 않나요......?”
치사하다니?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건 바로 다음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쿠구구구
우우우우우우
오색의 빛이 항우의 몸을 감쌌고, 항우의 몸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억지로 일으키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의식을 되찾은 항우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빌어먹을... 나가라!! 승부에 끼어들어 이토록 추잡한 짓을...”
그러자 허공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방금 전 네가 내 지원을 일부러 거부하고 본신의 힘만으로 싸웠던 걸 알고 있다, 항우. 그러나 시련관의 계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여는 네 소원을 절대 들어주지 않으리라.]
[자아, 신좌의 권세를 받아들여라... 그리고 절대적인 절망을 보여줘라.]
“닥쳐라... 절대 네 뜻대로는...”
[넌 거부할 수 없다... 네 힘의 근원인 성좌... 그건 결국 신좌에 속하는 힘이니까.]
그러자 황룡이 음각된 검을 들고 있던 사공린이 허공을 검으로 겨누며 말했다.
“치사하군요, 시조신 여와. 이런식으로 나올 거라면 뭐하러 시련을 만들었단 말입니까?”
[......]
“그냥 본신으로 강림해서 다 때려죽이지 그랬습니까. 이건 시련도 뭣도 아닙니다.”
그렇다.
시조신 여와가 시련에 직접 끼어드는 상황!
항우에게 여와의 힘이 불어넣어져서 원래의 힘보다 몇 배나 강력해져 있기에 정상적으로는 절대 못 이기는 상황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을 항우가 억지로 자기의 힘만으로 싸우려다가 여와의 강제개입을 불러와 버린 셈이었다. 무한한 여와의 지원을 받아서 모든 성좌를 개방한 항우! 끔찍한 악몽 그 자체인 것이다.
[시련이 맞다.]
여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너희에게서 보고싶은 것... 그것은 천상의 간교한 지혜에도 맞설 수 있는 가능성...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력...]
“......“
[이 정도를 넘어서지 못해서는... 여의 숙명을 해결해줄 수 없어... 여의 적수는 너희가 생각하는 차원을 넘어선 존재니까...]
탄식하듯 중얼거린 여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천마여... 너는 여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 너 자신이 이미 황제의 증거이니... 그 누구보다도 심각히 관여해놓고 선.]
“난 모르는 일입니다.”
[그럴 리가... 천마. 넌 내게 가장 큰 방해물 중 하나다.]
“......“
[아무리 네가 황제의 가장 강력한 패라고 해도, 여라면 널 억제할 방법이 있지.]
잠시 침묵하던 여와의 목소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자아.... 할 수 있겠나... 너희가 과연 격이 다른 힘을 상대로 무엇을 할지 지켜보마!!]
쿠구구구!!
“크으으으... 크아아아아아아...!!"
항우의 전신에서 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혈기(血氣)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나는 그 광경을 보자 전율하고 말았다.
'아까 힘의 폭발보다 정말 열 배는 더 강해... 이, 이건 이제...'
감당 안 된다.
저건 [옛 지배자]다. 그것도... 여태껏 우리 일행을 압도적으로 압살해왔던 그런 수준의 존재나 다름없다. 우주적인 악몽이 드디어 도래했다!
못 이겨.
내가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항우가 억지로 천살성의 힘을 누르며 우리에게 말했다.
"너희... 도망가라... 이런 건 본왕이 원하는 게 아니다...”
사공린은 전혀 힘에 눌리지 않는지 차분히 대꾸했다.
“도망간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겠군요. 이미 백웅의 죽음까지는 1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어차피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아군 전원이 전투태세를 갖추었고, 항우가 체념하듯 눈을 반쯤 감으며 한 마디를 남겼다.
[...그래? 내 손에 죽겠다면... 말리진 않으마...]
쿠우우우
의식을 잃은 항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시 한 번 돌격했을 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사공린이 또 다시 영겁지무를 시전하여 정면에서 항우와 맞섰고, 다음 순간 항우의 전신에서 일어난 혈광이 사공린이 있던 장소를 휩쓸었다.
파지지직!!
[큭... 여와... 항우...]
사공린의 전신이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혼돈과 금광(金光)이 뒤섞인 상태에서 허공에 떠 있었고, 낭패스러운 기색이 강했다. 그녀의 몸 뒤편에는 의문의 짐승이 소환되어 있었는데, 그녀가 천마로써의 모든 힘을 끌어내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도와야 해!!'
사공린이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상대의 조합이 워낙 강력해서 정면으로 오래 버티지 못할 듯 했다. 나는 급히 아수라와 천우진을 보며 말했다.
“아수라! 천우진!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삼요공명이다!”
“좋아.”
그 동안 삼요공명을 하면 몸이 터질까봐 쓰지 못했지만 월요를 나눠주어서 힘을 분산시킨 상태라면 충분히 저 힘싸움에서 도움이 되리라!
아수라와 천우진이 내 말에 동의하듯 월요를 들고 준비를 하는 듯 했으나, 뜻밖의 낭랑한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그건 아니지.]
나는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보고 외쳤다.
“제갈량!”
제갈량은 본디 하얀 부채를 살랑거리며 말했다.
[백웅. 넌 지금 예언을 따라가는 거냐? 아니면 예언을 극복하려는 거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내일'너는 죽는다. 그러므로 1시간 내로 죽는다는 게 싸우다 죽는다는 걸 뜻하겠나, 아니면 그 외의 요인으로 죽음을 뜻하겠나.]
“...그, 그건 모르지.“
[하지만 넌 스스로 전자를 택하고 있지.]
홱!
제갈량이 내 코앞에 부채 끝을 겨누며 말했다.
[그게 되겠나? 내가 봐도 모든 상황이 죽음을 가리킨다. 넌 저 항우를 상대로는 가능성이 무(無)인데도 무의식적으로 그걸 골랐다. 그건 네가 더 이상 상황을 극복할 의지를 갖고있지 않다는 걸 뜻한다. 재수 좋으면 이기겠지 정도의 생각이 아닌가.]
“......“
[이 싸움은 사실상 여와와 싸우는 셈이다. 못 이기는 싸움으로 판단되었고, 그럼 버리는 게 옳다.]
그렇게 말한 제갈량이 차분히 말했다.
[아직도 시간은 좀 있다. 천마도 어느 정도 버텨줄 테니 우회로를 찾을 수 있는지를 봐라.]
"우회로?"
[시키는대로 해 봐라.]
나는 이윽고 제갈량의 말대로 빠르게 전장을 이탈해서 흑패를 쓰러 갔다. 그리고 흑패를 이용해서 소원을 빌었다.
“신이시여, 내가 천계의 탑 99층에 없는 상태를 있는 상태로 바꿔주십시오!”
이렇게 된 이상 99층에 누가 있는 지나 알고 간다! 흑패가 아깝지만 죽기 직전이니 어쩔 수 없지!
[재밌는 이야기구나... 기다려라...]
파지직!!
그 순간 지배자의 앞에 여와의 환영 같은 게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둘은 뭔가 이야기를 나눈 듯 했고, 이윽고 지배자는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예민하군... 네 소원 때문에 저런 대신(大神)과 쓸데없는 싸움은 하기 싫군... 그 소원은 못 들어주니 가 보아라...]
“싸움이라뇨? 여와가 뭐라고 했던 겁니까?”
[너희의 시련에 그녀의 모든 존재를 걸고 있다... 어설픈 간섭은 할 수 없다.]
“잠깐, 그럼 칠요를 바칠 테니...”
[제물 같은 걸로 때우기에는 그 쌍둥이의 잠재력에 데일 것 같군...가라.]
파앗.
나는 강제로 그 공간에서 내쫓겼다. 나는 곧장 천계의 98층 전장으로 되돌아왔고, 제갈량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다음 주기의 가장 효율좋은 전략 인데 아쉽군. 하지만 '다음'이 아니라 지금 썼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효율은 챙겼다.]
“효율효율하는데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잘 들어라. 만일 다음이 있다면 흑패를 이렇게 써라.]
나는 제갈량의 흑패전략을 듣자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아, 아니 이번에 싸우고 있을 때 그렇게 쓰면 되는 거였잖아! 정말 이번 싸움은 버리는 거야?! 이 무슨......”
[어차피 여와가 강림했으니 지금은 써봤자였다. 타신편으로 부숴봤자 여와가 다 회복시킬 테니 의미없지. 항우가 대비 못하는 다음번에 그렇게 하란 소리다.]
“알았어. 아니 근데 다음이란 게 무슨 소리...”
[시간 없다. 마지막 전략을 시행한다.]
제갈량이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말했다.
[다음부터는 천신경을 다 써버리고 히든피스를 꺼내라... 그걸 이용하면...]
후와악!!
그 순간 항우의 혈광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제갈량은 그 혈광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되어 버렸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회피할 수가 있었다.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한 제갈량을 본 나는 비명을 질렀다.
“제기라아아알!!”
나는 급히 칠요를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수라가 훗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쉽군. 과연 중원 역대 최고의 천재 제갈무후...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다면 진짜 이 상황을 타개했을 지도 모르는데.”
“...이길 수 있을까?”
“못 이기겠지. 저건 항우가 아니라 이미 여와니까. 적어도 네가 3회차는 더 거쳐야 동료들과 들이대볼만한 상대다.”
“......“
아수라가 천총운검을 정면으로 겨누며 말했다.
"나도 제갈량처럼 조언 한 마디 해 주마, 백웅.”
“뭐?”
“다음에는 항우 상대할 때 여동빈을 불러와라. 직접 검을 부딪혀본 자의 감이야.”
“아니 잠깐...”
콰과과광!!
그 때 갑자기 폭음과 함께 사공린의 신형이 크게 튕겨서 날아갔다. 지금까지 끈질기게 항우를 일대일로 상대하다가 결국 못 버틴 듯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혈광을 가득 머금은 항우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후와악
“온다.”
다음 순간,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
퍼억.
“헉... 커헉...”
나는 마지막으로 항우의 손에 심장을 꿰뚫렸다. 내 심장을 산채로 뽑아낸 항우가 잠시 후 심장을 으적으적 씹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바닥에 쓰러진 채 사방에 널부러져 죽어 있는 동료들의 시체를 보았다.
아수라도 천우진도, 그리고 함께 데려온 초상기인들 모두가 다 죽어 있다.
시산혈해다.
뭔가... 이상해...
최후의 최후까지 다 싸운 것 같지만... 왜 사공린의 시체가 없지...
사공린도 아까 우리와 함께 항우와 맞서다가 일격에 사지가 분쇄되어서 쓰러진 걸 내 눈으로 봤는데...
왜...
스윽
내가 그 의문을 채 풀기도 전에 항우의 발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지는 게 느껴졌다. 항우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지 옛날이고 피만을 갈구하는 [옛 지배자]가 되어버린 듯 했다. 만일 내가 죽고나서도 세상이 존재한다면 아마 우주 전체에 악몽을 흩뿌리는 절대적 절망이 되리라.
“......”
억울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깨라고...”
여와 이 치사한 새끼...
퍼억.
그것이 내 28번째 죽음이었다.
......?
어...
여긴 외양간이 아닌데?
뭔가 이상하다고 여기고 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백웅.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완벽한 어둠(天暗) 속.
월궁 항아가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