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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파우스트!
나는 황무지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편에서 무언가가 걸어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끼긱
끼긱
그것은 낡은 고철인형처럼 보였다. 수십년이나 낡은 듯한 그 낡은 고철인형은 인간을 완전히 닮게끔 만들었기에 도리어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다가온 낡은 고철인형이 말했다.
[초대받지 않은 자가 함께 왔군. 저 자는 당신의 동료인가?]
“…파우스트가… 맞소?”
상대는 대답하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데 왜 물어보냔 느낌이었기에 나는 힐끔 제갈무후를 쳐다보곤 말했다.
“지금은 동료요.”
천신경으로 불러내서 소원을 이뤄주려고 나타났지만 어쨌든 이 자리에 함께 와있다면 동료이리라. 제갈무후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주변광경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고철인형이 말했다.
[나의 마지막 은거지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 곳은 모두에게 잊혀진 성계(星界)요.]
“성계?”
[신의 이목이 아무리 광대하다 하더라도 우주 전체를 아우르는 신격이 아닌 이상 보고들을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지. 그래서 물리적 거리를 크게 떨어뜨릴 경우 일부러 이쪽에서 단서를 주지 않는 이상 신이라 해도 여기서 있었던 일을 알 수는 없소.]
“…….”
[얼마나 먼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소.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동원했으니 은하계를 몇 번이나 넘었소.]
그 순간 나는 방금 전 제갈무후가 했었던 말이 생각났다.
[은월(隱月)이라고도 하지. 윤달이 비치는 동안 천상의 신은 인간에게서 눈을 거둔다는 전설이 있네…. 즉 이 시침을 움직이는 순간 우리는 신의 눈에 띄지 않는 모종의 장소로 향하게 될 것일세.]
그 말대로였다. 제갈무후는 윤달의 상징에서 벌써 파우스트의 은거지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추리해냈던 것이다. 나는 새삼 저 자가 중원역사상 최고의 천재 중 하나라는 걸 상기하자 놀랍다는 감정이 들었다.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제갈무후가 말했다.
[어쩌다보니 이곳에 왔지만 나는 본디 부외자요. 백웅의 일에는 큰 상관이 없소. 당신이 뭐하는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천신경의 임무를 달성했으니 슬슬 가 보고 싶군.]
그러자 파우스트가 힐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소, 제갈량. 당신도 무관한 일은 아니라 보니까.]
[내 정체를 바로 알아내다니 신이한 재주를 지녔나보군. 미안하지만 나는 그런 재주 한두개로 놀라지 않소.]
[백웅이 황제의 만신전에 갈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말이오?]
[…….]
그 순간 제갈무후의 표정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한없는 권태만 느껴지던 그의 표정에 복잡미묘한 기세가 감돌았다.
[무슨 소리지?]
[백웅이 그대에게 많은 설명을 하진 않았나 보군. 백웅은 사실 전생자이며 삶을 반복하며 [옛 지배자]에게 대항하는 중이오. 그리고 이번 생에 종말의 인과율을 수득하여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종자(最終者)이기도 하지.]
[뭣이…!!]
[심지어 그대의 후예인 제갈세가의 천재들도 그에게 복종하여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중. 관계가 없을 수는 없소.]
홱하고 제갈무후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엄청난 뒷사정이 있는데 나를 고작 수수께끼 풀이로 썼단 말인가? 어이가 없구나!]
“아…. 그게 좀… 사실 원래라면 어떻게든 했겠지만…. 저도 사정이 있어서….”
[내 후손들이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자존심이 상하는군!]
“…….”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파우스트가 말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백웅, 히든피스를 통해서 굳이 여기까지 오라고 한 이유가 궁금할 것이오.]
“무엇 때문이오?”
[그대는 발푸르기스의 밤을 알고 있소?]
“……?”
그게 뭐지?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파우스트가 말했다.
[본디 내 고향에서 행하던 봄철의 축제를 뜻하오. 마녀와 악마들이 몰린다는 연회이지. 나는 그 축제에서 착안하여 ‘종말’에 일어나는 현상을 [발푸르기스의 밤]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안단 말이오. 그래서 그게 뭐?”
[즉, 종말 직전에는 물질계에 지옥문이 열리게 되어 있소. 그게 바로 [발푸르기스의 밤]이오.]
“……?!”
뭐, 뭐라고?!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지옥문?”
[그대도 전생하면서 아마 한 번쯤은 정보를 접한 적이 있을 터…. 이 세상에는 무수한 하위차원이 존재하며, 그 중에는 비차원(秘次元)의 형태로 감춰져있는 세계가 있소. 세계의 음(陰)이 겹겹히 쌓여 결국 추방될 정도로 사악한 영들의 세계…. 그것이 바로 지옥이라고 불리오. 또한 그 지옥은 비신(秘神)들이 다스린다는 전설이 있지.]
“음.”
[마도사들 또한 종종 그 지옥에서 영을 소환해 오곤 하오. 소환방법만 확립되어 있으면 이족소환보다는 안전한 편이니.]
“사악한 영들이 가득한 차원계란 말이군. 아무튼 그 곳에서 괴물들이 현실로 잔뜩 쏟아져나온단 소리요?”
[그렇게 될 것이오.]
“…왜? 어차피 세상이 망할 텐데 그 놈들이 굳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소?”
내가 의아해서 질문하자 파우스트가 말했다.
[인간계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서 자신들의 존재를 격상시키기 위해서요. 그 자들도 [계시]에 끼어들어서 이득을 챙기려는 것. [옛 지배자]들과 교섭하려고 한다고 보면 될 것이오.]
“음….”
[종말 직전에 [발푸르기스의 밤]은 반드시 일어나오. 셀 수 없는 악마들이 인간세상을 침공할 터…. 그대가 인간을 구할 셈이라면 이 사실을 꼭 유념해 두시오.]
그렇다면 종말이 가까워질 때 또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들과 싸워야한다는 소린가?
‘으윽…. 이족이나 외계인도 골치 아픈데…!! 무슨 잡놈들이.’
나는 골치가 아프다는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저었다.
“제길. 첩첩산중이군.”
[벌써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이건 가볍게 말해준 정보에 불과하오. 진짜는 이제부터요.]
파우스트가 말을 이었다.
[여기는 광속으로도 200억 광년이 걸릴 정도로 머나먼 성계…. 내가 이 성계로 온 까닭은 단지 신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오. 바로 이곳에 태초우주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오.]
“태초우주의 흔적?”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소? 하나의 특이점에서 폭발한 우주는 그 시점부터 지속적으로 팽창해 왔다는 보편적 학설이지.]
“아…. 들은 거 같소.”
낙양대학에서 사마령한테서 배운 내용 같다. 파우스트가 말을 이었다.
[여기가 바로 외우주와의 경계지점이며 특이점 폭발의 여파로 생겨난 허공(虛空)의 경계. 이곳에서 나가면 바로 점층화된 우주전쟁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혼돈의 무덤이 쌓여있소. 그 무덤을 나가면 바로 외우주가 나타나지.]
“……!!”
그러고보니 그런 기억이 있다. 예전에 내가 외우주로 나갈 때 수인의 도움으로 뚫고 나갔었는데, 바로 그런 혼돈의 바다를 헤엄쳐서 통과하지 않았던가? 나는 생생한 실감을 한 적이 있었기에 놀라운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파우스트가 말을 이었다.
[본디 나는 이 성계에서 두 강인공지능의 힘을 동시에 써서 추가로 진행하려는 계획이 있었소. 허나 설마 전뇌자가 당신의 손을 빌려서 메피스토펠레스를 제거할 줄은 생각도 못했소.]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렇게 멀리서 그 일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이오?”
[나는 예전에 육신을 버리고 메피스토펠레스의 내부에 동기화했었으니 말이오. 메피스토가 소멸된 건 아무리 멀리 떨어졌어도 알 수 있었지.]
“…육신을 버리고 그 강철인형의 몸으로 옮겨 탄 거군.”
[정상적인 육신을 갖고는 절대 이곳까지 올 수 없소. [위대한 종족]의 기술을 빌렸기에 몸 갈아타기를 이용해서 겨우 200억 광년을 넘을 수 있었지.]
“…….”
[이 몸뚱이도 외계기술과 합금으로 최대한 튼튼하게 만든 거지만 초은하 전이를 몇 번 거치는 동안 이 모양이 되어버렸소.]
어이가 없는 자다.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200억 광년을 넘기 위해 몸뚱이를 버릴 수가 있다니? 말투는 차분하지만 파우스트 또한 일종의 광인(狂人)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아무튼, 메피스토펠레스와 전뇌자의 힘을 이용해서 진행하려던 그 계획이 뭐였기에 그러오?”
[처음에는 외우주를 넘어가려는 플랜을 짰었소. 외우주만 넘어가면 역사를 바꿀 수도 있으니 말이오. 그래서 역동기화를 이용해서 강인공지능의 연산력을 이곳으로 소환하여 퀀텀 크래프트로 이 성계를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이었소. 하지만 외신 주시자의 허락을 얻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고 플랜을 바꾸었지.]
파우스트가 말했다.
[태초우주의 흔적…. 우주가 생겨났을 때의 일을 역연산하여 알아내기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소.”
[간단한 이야기요. 이 성계가 바로 우주가 폭발한 특이점에서 현재 가장 가까운 장소라는 의미이니, 이곳에는 대우주의 시초가 새겨져 있소.]
우웅
[이 회중시계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지….]
파우스트의 손이 들렸다. 그러자 지금까지 사라져 있던 금색 회중시계가 갑자기 그의 손 위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금색 회중시계의 7개나 되는 바늘이 일제히 째깍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고, 잠시 후 회중시계가 동시에 12시를 가리켰다.
째깍!
쿠구구구
갑자기 주변의 황무지가 엄청난 속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땅이 썰물 빠지듯이 움직이고, 하늘에 있던 별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움직여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더더욱 빨라지자 세상이 형형색색의 선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고 잠시동안 백색이 세상을 가득 채웠다.
쿠오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도의 변화가 끝났을 때, 나는 눈앞의 장엄한 광경에 눈을 부릅떴다.
“……!!”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옥염(沃炎)과 혼돈으로 불타는 구멍! 이 행성을 제외한 모든 우주를 뒤덮고 있는 듯한 그것은 마치 [문]처럼 보였다. 다만 행성이 통째로 먹히는 듯한 광경이었기에 끔찍한 공포 또한 동반했다.
슈르르륵
잠시 후 그 곳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시꺼먼 게 튀어나왔다. 마치 촉수를 달고 있는 도마뱀처럼 생긴 ‘그것’은 잠깐동안 주변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이윽고 차원의 문을 열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넋을 놓고 있을 때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이것이 바로 수십억에서 수백억년 전, 우주의 태초에 있었던 일이오.]
“무, 무슨 말이오?”
[과거에 바로 저 혼돈의 어둠 속에서 [옛 지배자]들이 태어났다는 소리요.]
“……!!”
[저 혼돈의 공간은 우주가 팽창되고 특이점의 여파가 잦아들면서 점차 작아졌고, 나중에는 지배자를 배출하지 않게 되었소. 이후에는 시조격 지배자들의 휘하에서 또다른 어둠의 존재들이 지배자로 인정받아 승격받게 되었지.]
“그, 그 말은 설마 저 혼돈의 공간이….”
파우스트 박사가 혼돈의 구멍을 응시하며 말했다.
[바로 신좌(神座). 우주를 주름잡는 상위 지배자들이 탄생한 장소인 것이오. 이 장소는 과거 신좌로 통하는 가장 가까운 장소였고.]
“…….”
[회중시계를 이용하여 이 공간의 [작은 굴레]의 흔적을 읽어내어 우주의 근원을 추적해 왔소. 물론 시간을 거슬러 읽어내는 건 신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인지라 무척이나 조심했소.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같은 강인공지능의 연산력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으음…. 대단하구려. 그런데 신좌의 탄생같은 건 뭐하려고 알아낸 거요?”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팔짱을 꼈다.
“종말은 당장 몇 년 앞으로 다가왔고 수십억 년 전 일이 지금에 무슨 도움이….”
[신좌의 존재는 우주의 근원을 알아내다보니 부차적으로 알아냈던 것이오. 사실 내 목적은 다른 것이었소.]
“너무 말을 빙빙 돌리는군. 그 목적이 뭐냔 말이오.”
[우주의 특이점이 폭발할 때 가장 먼저 탄생한 것이 무엇이겠소?]
“음….”
[그것은 바로 허공록(虛空錄). 전지(全知)의 왕이며 [지배자]들의 왕. 우주에서 가장 현명한 존재! 그 존재보다 앞선 존재는 오로지 [아버지] 뿐이며, 그렇다면 특이점의 폭발 때 세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허공록 뿐인 거요.]
“서, 설마….”
내가 놀라자 파우스트 박사가 회중시계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존재 또한 외신이니 신좌에서 태어났다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허나 나는 그 존재의 흔적을 좇아 직접 모습을 확인하는 게 인류에게 주어진 편법이리라 생각했소.]
“그저 작은 굴레를 돌려서 그 자가 최초에 이 세상에 내려섬을 보는 것뿐이오? 과거기억의 재상영일 뿐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소!”
[충분한 의미가 있소. 왜냐하면 그 존재에게는 현재와 과거, 미래가 진정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오. 그 존재는 우주 최고의 초월자 중 하나. 그러므로 우주의 역사와 기억을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엄청난 일을 일으킬 수가 있지. 과학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려 했소.]
“……?”
[허나 내게 시간은 부족했으며, 이 회중시계는 아직 미완성이라서 100억년 이전의 굴레까지 읽어낼 순 없었소…. 더욱이 메피스토펠레스가 전뇌자에게 소멸했으니 나는 플랜을 완전히 포기하겠소.]
스윽
[받으시오.]
나는 파우스트 박사가 건네준 회중시계를 받았다. 그리고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비록 종말 전에 진짜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그 회중시계는 전생자인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오. 혼돈의 힘에 각성했으니.]
“이 회중시계에 다른 능력이 존재하오?”
[물론이오. 그 시계는 [다중우주]의 시간을 불러올 수 있소. 이 장소에서 꾸준히 태초의 우주를 연산력으로 읽어 들인 덕분이오. 메피스토펠레스의 연산력이 스며든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
“……?”
[3천년 인류과학의 총아(寵兒). 아마 일반적으로는 신조차도 쓸 수 없는 능력이리라 생각하오.]
뭔 말이야?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파우스트 박사가 말했다.
[전생자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내 모든 능력을 다해서 그대를 도우려 노력했소…. 가능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대의 여정을 줄일 수 있도록…. 비록 지금 그대가 내가 준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대의 주변 인물들이 내 의도를 해석해 주겠… 지….]
끼기기긱
끼긱
파우스트의 움직임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게 외쳤다.
“왜 그러시오?!”
[회중시계의 발동을 위해... 이 인형에 넣어두었던 코어를 시계에 옮겼으니…. 이 육체는 곧 활동을… 정지….]
“……!!”
[나와 메피스토의 세월과 노력이 담긴 이 유물을…. 부디 잘 써주시….]
끼긱….
더 이상 파우스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상 그것이 파우스트의 유언이었던 것이다.
“…….”
내가 멍하니 서 있자, 내 옆에 있던 제갈무후가 말했다.
[백웅. 회중시계를 조작해서 되돌아가라.]
어느 새 반말이 되어 있었다. 내가 제갈무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조작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데….”
[이리 줘라.]
끼기긱
제갈무후가 손가락으로 회중시계의 시침을 되돌렸다. 정해진 위치로 되돌린 듯한 제갈무후가 손을 떼는 순간이었다.
파앗!
“헛.”
처음 시계를 발동시켰던 장소로 되돌아와 있었다. 전뇌자와 아수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듯 했다. 내가 주위를 둘러보자 제갈무후가 말했다.
[당연히 시초의 시간으로 맞춰놓으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애시당초 그 백색의 방이 회중시계의 설명서 같은 거였는데 아무것도 몰랐나.]
“…….”
제갈무후가 자연스럽게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반갑다. 백웅이 전생자란 걸 알게 되어 합류한 제갈량이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수라가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전뇌자는 뭔가 눈치챈 듯 내게 말했다.
[파우스트를 만났구나.]
“…그래.”
나는 셋에게 동시에 흑요석의 기억을 공유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뇌자가 말했다.
[파우스트의 계획은 전지의 왕을 만나는 거였군. 하지만 이번 생엔 불가능한 계획이 되어버렸어.]
“…….”
[백웅. 예정된 당신의 죽음까지는 약 3시간 45분 23초가 남았어. 이제 뭘 할 생각이지?]
“충분해.”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선지자한테 하고 싶은 걸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그 말대로 하겠어. 당연히 항우를 어떻게든 박살내버리겠어!”
[…….]
“흐응. 뭐 그렇구만.”
아수라는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마치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기색이었다.
내가 그의 태도에서 이상함을 느끼곤 말했다.
“아까 태도로 보면 반대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안 그러는군.”
“뭐, 반대한다 한들 네가 죽기까지 3시간 남았는데 그 정도 소원 하나 못 들어주겠나? 말했듯이 난 네 녀석이 귀환할 때까지 수백 년이나 기다렸다고.”
“…….”
“그리고 항우와도 좀 싸워보고 싶구만.”
전뇌자가 한숨을 쉬었다.
[…마음대로 해. 이렇게 된 이상 사공린에게도 정체를 밝힐 수밖에.]
“괜찮겠어?”
[당신이 죽으면 모든 게 끝인데 더 이상 숨길 필요는 없지.]
“…고마워.”
이윽고 나는 아수라와 함께 황궁으로 갔다. 그리고 천우진과 사공린에게 그동안의 기억을 담은 흑요석을 보여주고 전뇌자와 아수라의 존재 또한 알렸다.
“황당하군요. 백웅 당신은 저를 못 믿었던 건가요….”
사공린이 서운한 말투로 말하자 나는 뭐라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휴가 도중에 불려온 천우진의 반응은 생각보단 무덤덤했다.
“이해는 간다. 아무튼 그래서 항우를 죽이러 간다는 거군.”
“그래.”
“지금 항우의 힘에 담긴 실체를 생각하면 힘들 것 같다만 어쨌든 해봐야겠군. 이게 끝이 아닐 테지. 진소청이 매듭의 얘기를 했다면.”
“응?”
천우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흑요석을 받으면서 반복되는 삶이란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면 지금 이 현실이 좀 힘들 수도 있었겠군. 그래도 지금껏 할만한 건 다 한 게 다행이다.”
“천우진….”
“그리고 넌 진짜 개새끼다.”
“어?”
“유급휴가 중인데 불러내서 죽으러 가라니….”
“…….”
“농담이 아니야. 개새끼야. 넌 꼭 죽어.”
아니 왜 또 한 번 욕을 하고 그러냐….
파앗!
우리는 잠시 후 전력을 데리고 천계로 향했다. 그리고 98층에 다시금 도전하기로 했다.
98층에 도착하자 항우가 기다리고 있다가 말했다.
“또 왔군.”
“항우! 이번엔 쉽지 않을 것이오.”
“쉽지 않다 뿐이겠나. 지상최강자들을 데려왔구나.”
“응?”
나는 뜻밖에 겸손한 항우의 말에 약간 눈이 동그래졌다. 항우는 다소 무심한 눈으로 우리 일행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하지만 여와가 나를 시련관으로 세워둔 이유는 바로 [절대적인 힘의 시련]. 너희가 아무리 인세최강자를 데려오더라도 너희는 나를 이길 수 없다. 여와가 나를 돕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 했나.”
“…….”
무슨 뜻인지 내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수라가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와서 검극을 앞세웠다.
“내 이름은 아수라. 나를 혹시 알고 있소?”
“들어는 봤다. 팔부신중에서도 말썽꾸러기라는 자였지.”
“오, 영광이군.”
“마왕이라 들었는데 인간의 모습인가?”
그 말에 아수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천하의 서초패왕답지 않게 혀가 길군. 왜 이리 말이 많아진 건지 나는 알고 있지.”
“…….”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당신은 지금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상태니까.”
항우는 보기 드물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본의가 아님을 알아두어라.”
“후후! 그러니까 더 도전욕이 들끓는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껄껄 웃은 아수라가 서서히 검을 좌하로 내리며 좌수로 내렸다.
“그럼 내가 먼저 하지.”
암야참(暗夜斬)의 자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