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51화 (1,148/1,615)

1151====================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곧장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단순히 힘의 문제라면…. 천마 사공린을 천계로 불러서 항우를 상대하게 하는 게 옳겠지.’

지금껏 사공린이 천계 탐사대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불명이다. 다만 정황상 그녀가 천마라는 사실이 천계 고위층에 다소 꺼림칙하게 느껴졌을 것이며, 그녀 자신도 탐사대에 직접 달려들기에는 지상의 균형을 잡아야 하는 역할을 먼저 수행해야한다는 난점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혹시나 인과율의 문제도 있을까?

그렇다 하더라도 천마의 힘이라면 항우에게도 충분히 대적할 수 있으리라. 사실상 그녀의 힘 또한 항우와 마찬가지로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원래라면 사공린이 뜻하지 않게 황제의 손에 휘둘릴 수도 있다는 점 때문에 이런 무리수는 두지 않았겠지만, 지금 나는 온갖 제약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

‘어차피 내일 죽는다는데 뭐.’

황제가 무슨 수를 쓰든 다음 번 전생을 시작하면 그 음모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사공린의 힘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 듯 했다.

‘흠. 하지만 그래도 일단 아수라와 전뇌자에게 한 번 상의해보는 게 맞겠지.’

파앗

나는 아수라에게 가서 흑요석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아수라는 흑요석을 받고는 완전히 머리가 띵해진 표정이 되었다.

“…이건 대체 뭐냐? 도대체 뭘 하면 일이 이렇게 꼬이는 거냐?”

그의 표정에 서려있는 건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었다. 나는 왠지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미안…. 어쩌다보니 내일까지 항우를 없애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아수라가 진심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그게 아니잖나. 지금 상황의 요점조차 모르고 있다니.”

“……?”

“후…. 아니다. 잠깐 생각 좀 하자.”

아수라는 한숨을 쉬며 잠시 근처의 신전계단 위에 앉아서 명상하는 듯 했다. 천축식 가부좌를 틀고 한참동안 정신을 집중하던 아수라가 이윽고 눈을 뜨며 말했다.

“백웅. 왜 거기서 도망치지 않은 거냐?”

“뭐?”

“항우를 상대하려 할 때 처음 그를 대응하는 전략은 우희를 이용해서 그를 당황시키고 교섭해서 넘어가는 거였다. 하지만 그 전략은 통하지 않았지. 항우와 대화가 안 통한다 싶으면 곧장 동료들을 챙겨서 후퇴부터 해야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나.”

“…….”

“알고 있다. 후예가 워낙 막강하니 네가 후예와 연계해서 동료들과 힘을 합하면 어떻게든 항우라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거였겠지. 그러나 막상 후예와 합공하기 위해 별다른 전략조차 짜놓지 않았기에 후예는 너를 걸림돌으로 생각해 버렸고 무인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배제했다.”

“그, 그랬지.”

“여기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알겠나?”

나는 아수라의 말이 감이 잡히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빨리 도망치지 않은 게 잘못된 거였나….”

“아니. 그건 결과일 뿐이지. 중요한 건 네가 자신의 힘보다 타력(他力)에 의존했다는 사실이다.”

“뭐?”

“넌 후예에게 너무 의존했다. 후예는 어디까지 장기말일 뿐 결국 항우와 결판을 낼 수 있는 건 네가 전생자로써 지니고 있던 기량이었단 말이지. 그걸 잊고있었으니 갑작스러운 전투상황이 되자 큰 사단이 나버린 것이다.”

“…….”

“아무리 강력한 동료라고 하더라도 결국 네 자신의 힘은 아니야.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힘을 믿어야 한다, 백웅. 그 힘이란 게 설령 무력이 아니라 입털기나 협잡이라 할지라도 결국 자신의 힘인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서 깨닫는 게 있었다.

‘그렇군…!!’

처음부터 항우를 내 힘으로 해결하려 했다면 교섭이 안 먹히는 즉시 몸을 뺐으리라. 그렇게 했다면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후예의 힘에 의존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냉정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실책을 범한 것이다.

“미안하다.”

“흐음. 깨달았으면 됐다. 다음부터 잘 하면 되지.”

아수라는 묘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너를 도와 항우와 싸우고 싶지만 아무래도 내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그러면 전뇌자를 불러서 상의하자.”

“불러서 상의한다고? 어떻게?”

“내가 매번 전뇌자와 접선할 때마다 대웅제국 심장부로 가야했다고 생각하냐? 당연히 이쪽에서 불러내는 게 가능했지. 예전에 너를 처음 만났을 때도 비슷한 방법을 썼다.”

우웅

아수라가 신전 내부에 감춰두었던 둥그런 조각같이 생긴 기계를 꺼내오더니 누르는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영사되면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우우우….

파앗!

잠시 후 전뇌자의 형상이 반투명한 홀로그램이 되어서 나타났다. 내가 놀라서 쳐다보자 아수라가 중얼거렸다.

“전뇌자는 전세계 전뇌세계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소멸 후에는 더욱 큰 지분을 갖게 되었지. 이쪽의 존재만 알고 있으면 언제든 전뇌신호를 이용해서 광속으로 나타날 수 있지. 전자기기만 있으면 말이다….”

전뇌자가 너구리 인형을 안은 채 말했다.

[무슨 일이지?]

아수라가 말했다.

“전뇌자. 혹시 그 동안 천계에서 있었던 일을 관측할 수 있었나?”

[아니. 먼 차원의 일이라서 알 수가 없었어.]

“그러면 백웅의 흑요석으로 기억을 전송하는 수밖에 없겠군. 네가 흑요석을 받아들일 방법이 있겠나?”

[위대한 종족의 기술이 적용된 전송기술 말이군.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어댑터(adaptor)를 제작해볼게.]

위이이잉

다음 순간, 허공에서 빛이 모이더니 촤좌좍 하는 소리와 함께 온갖 복잡한 기계덩어리가 허공에 나타났다. 그 기계덩어리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서로 부품의 연결부위를 맞추며 빠르게 조립되더니 이윽고 액체처럼 꿀렁거리는 금속덩어리를 뿜어내며 형태를 크게 바꾸었다. 그렇게 약 반 각이 지나자 생전 처음보는 기계가 생겨났는데 자기덩어리 원판처럼 시꺼멓고 둥근 기계였다.

[올리면 된다.]

“…여긴 기계고 뭐고 없는 허허벌판에 외딴 신전인데 어떻게 이런게 가능하지?”

[퀀텀 크래프트(Quantum craft)는 원래 이런 게 가능해.]

아무래도 전뇌자가 엄청난 존재라는 걸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지금까지의 기억을 담아서 흑요석을 올렸고, 이윽고 전뇌자의 환영이 부르르 떠는 듯 했다. 너구리인형을 꼭 안고 쪼그려 앉아있던 전뇌자가 잠시 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했다.

[너무 멍청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외통수만 맞을 수가 있어?! 혹시 뇌가 우동사리로 만들어진 거야?!]

엥? 이 녀석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이윽고 전뇌자가 평소의 냉담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망량선사의 조언이 옳을 확률은 98.65퍼센트. 항우의 시련을 포기하고 하루동안에 최대이득을 얻을 플랜을 짜는 중이니 기다려.]

“자, 잠깐. 난 항우에 대적하는 걸 포기할 생각이 없어.”

[항우에 대적해서 여와복희를 만났는데 그들도 당신의 죽음을 막아줄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하려는 거지? 스스로 덫에 뛰어드는 것밖에 되지 않아.]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너무 억울하다고. 검마와 동료들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 개죽음이라는 것밖에 안 돼.”

순간 전뇌자가 약간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 개죽음을 만든 건 바로 당신이야. 그들은 당신의 대의에 목숨 걸다가 죽은 거지. 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거야?]

“…….”

[제갈사가 억지로 슬퍼하는 척 하지 말라던 조언을 또다시 무시했군.]

갑자기 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 안 난다. 막막해져서 입을 닫자 전뇌자가 이윽고 말했다.

[당신의 뜻대로 천마 사공린, 천우진, 아수라 등의 전력을 모두 데려가서 항우에게 승리할 확률은 89퍼센트 정도. 하지만 그 순간 ‘내일의 죽음’을 극복할 확률은 0이 되어버려. 모든 변수와 가능성을 소모해서 항우를 이겨봤자 남는 게 없다는 말이야.]

“…그런가.”

[하지만 평소 당신의 성향을 고려해보면 우리의 조언을 무시하고 자기뜻대로 밀어붙일 확률이 90퍼센트 이상…. 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

전뇌자의 표정이 염세적으로 변했다.

[할 거라면 확실히 해. ‘항우에게 승리한다’는 명제와 ‘내일의 죽음을 극복한다’는 명제를 동시에 달성할 방법은 현 시점에서 존재하지 않으니까. 본디 확률은 50퍼센트에 수렴했으나 망량선사와 진소청으로 인해 그 가능성이 0이 되었어.]

“…으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일단 ‘내일의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존재하는 건가?”

[조금 냉정해졌네.]

“내일 죽지 않는다면 시간을 들여서라도 항우를 잡을 방법은 있겠지. 그게 아니라도 할 일이 많아질 테고.”

그리고 이렇게까지 동료들이 반대하는데도 계속 밀어붙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아직 검마가 죽은 원한이 마음속에 맺혀 있지만 조금 머릿속이 냉정하게 가라앉은 듯 했다.

내가 대꾸하자 전뇌자가 말했다.

[현 시점에서 당신에게 추천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플랜은 선지자를 찾아가는 거야.]

“선지자!”

[사대신수 영귀의 예언으로 인해 죽음의 인과율이 당신에게 적용되었다면 어느정도 초월자의 격을 지닌 선지자는 그걸 극복할 방법을 알 가능성이 높아. 무작정 사공린을 찾아가서 항우를 쓰러뜨려 달라고 떼를 쓰는 것보다는 현실적이겠지.]

“좋아. 그렇게 하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문득 생각나서 말했다.

“그러고보니 지상에 망량이 내려왔을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 갔을까? 혹시 전뇌자 네 힘으로 망량을 찾아줄 수 있겠냐.”

[잠시만 기다려.]

우우우 -

전뇌자가 너구리인형의 겨드랑이를 손으로 잡아 들어올리더니 전신에서 빛을 내었다. 잠시 후 전뇌자가 말했다.

[현재 지구상의 모든 데이터베이스와 전산자료에는 망량의 흔적이나 목격담이 존재하지 않아. 어딘가에 술법을 이용해서 숨어 있으리라 추측해.]

“…왜 그러는 거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망량을 찾고 있겠어. 빨리 갔다와.]

“그러지.”

파앗

나는 아스타나에 있는 선지자를 찾아갔다. 대사원 내부로 들어가자 역시나 선지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선지자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또다시 무슨 일로 찾아왔지?]

“저번에 칼비오그를 상대해줬던 일은 고마워. 오늘은 또 하나 부탁이 있는데….”

[우리의 관계가 ‘부탁’이라는 단어를 쓸만큼 친밀하지는 않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들며 말했다.

“알았어. 선지자, 거래다.”

[후후후…. 이야기를 해 봐라.]

“흠. 일단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 때 선지자가 뜬금없이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드는군…. 제대로 네 인과율을 봐 주지….]

“뭐?”

흑요석도 안 줬는데 뭐라는 거야?

[이번은 특별히 공짜다.]

선지자가 그러더니 주문을 외웠다. 아주 긴 주문으로 보였다.

웅얼웅얼

잘은 모르겠지만 대단한 주문인 듯 싶었다. 웬만해서는 주문 외우는 걸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던 선지자가 일부러 저렇게 길게 주문을 외울 정도라니. 주문은 무려 반 각이 넘도록 계속되었고 조금 기다리기 지루할 때쯤 주문이 완결되었다.

[부르노니 외신 알 카르다흐의 문이여. 위대한 굴레를 보여주소서.]

키잉!

갑자기 선지자의 몸 뒤편에 마치 집체만한 이형(異形)의 외계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거대한 항성계를 상징하는 듯한 원형의 무언가가 쉴새없이 떠다니고 기괴한 수백 개의 눈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외계장치에서 둥그런 알 같은게 선지자의 몸 앞에 드리워졌고, 선지자는 그 알을 쳐다보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 머리를 끄덕이고 있었다.

잠시 후 선지자가 말했다.

[백웅…. 그대에게 존재하던 정향의 인과율은 어느 새 다 소모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나?]

“엥?! 뭐… 다 써가는 것 같긴 했는데.”

잠깐, 그렇다면 영귀가 나한테 호의를 가지고 있던 게 정향의 인과율 때문이 아니었다고?

내가 뜻밖의 사실을 알고 놀라고 있을 때 선지자의 말이 이어졌다.

[과연… 죽음의 운명…. 그리고 큰 굴레의 ‘매듭’이 묶여 있군. 나조차도 봉인주문을 소모해서야 알 수 있는 굴레를 단지 지켜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다니, 과연 망량선사는 과거 우리의 예측대로 ‘그 곳’에서…. 크크크….]

선지자가 왠지 흡족해하며 웃는 것 같았다. 나는 저 녀석이 왜 저러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때 선지자가 말했다.

[상황은 파악했다. 그래서 백웅 네가 제안하고 싶은 거래는 무엇인가?]

“…….”

제길. 저 자식 괜히 선심쓰듯 무료라고 했는데 사실 거래하기 전에 내 상태를 파악해서 거래에서 우위를 얻으려고 그런거였잖아!

‘그래도 정향의 인과율이 다 소모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긴 하군….’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지자에게 말했다.

“…흑요석을 굳이 안 줘도 되겠군. 보다시피 난 지금 좀 곤란한 상황이야.”

[그래서?]

“항우를 쓰러뜨릴 방법까진 바라지도 않아. ‘내일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부터 내게 알려줘!”

사실 영귀에게서 예언을 들었을 때 무리해서 다음 층으로 도전하는 것보다는 진작에 이랬어야 하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선지자가 말했다.

[피할 방법은 없다. 필멸자에게 씌워지는 굴레와는 격이 다른 운명…. 굳이 피할 방법을 말하자면 그대의 소중한 자를 한 명씩 산제물로 바친다면 그때마다 수명이 한 달씩 늘어나는 전통적인 인신공양 방법이 있다.]

“미쳤냐!! 내가 동료를 인신공양 할 것 같아!”

내가 펄쩍 뛰자 선지자가 웃는 듯 했다.

[훗훗훗후….]

“……?”

[난 아주 중대한 사실을 하나 알고 있지…. 네게 아주 유리한 사실을.]

“그래서 뭐.”

[사대신기를 네가 갖고 있겠지….]

선지자가 말을 이었다.

[그 중에 하나만 내게 양도해라…. 그러면 네가 항우도 물리치고 죽음도 극복할 수 있게끔 해 주마….]

“…….”

[아주 대단한 정보지….]

어쩌지?

나는 사대신기 중에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항우와의 싸움에서도 아껴뒀던 것이다. 선지자와의 거래에서 쓰기에는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분명했다.

“음 그건 좀….”

[후후…. 그 외에 네게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 정말 포기할 것인가….]

“으윽.”

[자아… 내놔라…. 방법이 없지 않느냐…. 내 이름을 걸고 확실히 좋은 정보임을 약속하지…. 빨리….]

나는 크게 혹했다. 선지자가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 거래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잠시 후 고개를 크게 저었다.

“아니, 사대신기는 안 돼! 차라리 다른 걸 달라고 해.”

[그럼…. 법문조각을 달라….]

“이 날강도같은 놈아. 너 양심 없지?!”

[거래를 하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거냐…. 여긴 뭐 하러 왔느냐.]

선지자가 잠시 후 선심썼다는 듯 말했다.

[좋다…. 그러면 칠요 두 개만 내놔라….]

“…….”

[내가 정말 손해만 보는군….]

나는 뭔가를 눈치챘다. 그리고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이제부턴 너랑 거래 안 해.”

[……?!]

“그동안 고마웠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내가 홱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선지자가 당황한 듯 말했다.

[다른 데 가면 이런 정보 없다…!! 이런 기회가 자주 올 줄 아느냐. 정말 실수하는 거다!]

“없으면 또 어때. 죽으면 그만이지.”

[크으으으…!!]

선지자가 뭔가 안절부절 못하다가 말했다.

[좋다…. 그렇다면 뭐 아무거나 하나 내놔봐라…. 일단 그걸로 만족해 주지….]

“아니 됐다니까? 너한테 그렇게 매달리고싶지 않아.”

[…….]

“그럼 안녕이다.”

나는 비등을 슥 들어서 만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선지자가 움찔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 그럼 이렇게 하지.]

“또 뭐야.”

[네가 탑의 시련을 공략하고 나면 여와나 복희에게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대가를 나 또한 공유하는 것…. 비율은 6대 4로 해도 좋다. 어떤가?]

“음….”

[굉장히 많이 양보한 것이다…. 좋은 정보라는 것은 진실이니까…. 이 정도는 요구해도 될 텐데. 비율대로라면 내가 얻는 게 결코 칠요 하나보다 나은 대가는 아닐 거다.]

나는 크게 고민했다. 왠지 이 녀석이 아까부터 나를 등쳐먹으려는 느낌이 들어서 튕겨보았는데 일단 교섭조건이 많이 내려간 것 같긴 하다. 등쳐먹는 건 아마 사실이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 만족하느냐가 문제였다.

‘한 번 더 튕기면 얘기 안 해 줄 거 같긴 하군.’

공짜로 얘기해주기 싫다는 장사꾼 특유의 근성과 오기가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현물을 받는대신 미래의 담보를 받겠다는 식으로 나온 듯 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7대 3.”

[뭐라고? 이게 얼마나 좋은 정보인데….]

“…8대 2.”

[아, 알았다. 그렇게 하자….]

“헛소리하면 정말로 거래를 끊어버릴 거다.”

[아무렴…. 그럼 계약은 성립되었다.]

“정보나 말해 봐.”

[그러지.]

이윽고 선지자가 말했다.

[네게 지어진 ‘매듭’과 ‘예언’은 인과관계다. 서로 상관이 없는 게 아니다. 즉 둘 중 하나를 해갈하게 되면 하나는 자연히 풀리는 관계…. 하지만 그걸 바로 푸는 게 이득인지는 네가 스스로 고민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매듭 또한 너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

“…….”

[…….]

뭔 소리야….

“그래서? 어떡하라는 소리냐?”

[어떡하기는… 하고싶은 대로 하다가 죽으란 소리다….]

“에라이 개같은…!! 너 정말 등쳐먹기만 할 생각이냐?!”

역시 날 속인거였어!

내가 버럭 화를 내자 선지자가 크게 당황했다.

[뭣이…!! 사기친 게 아니다! 정말 이건 좋은 정보이다….]

“닥쳐! 앞으로 너랑 거래 안할 거라고 정말로!”

[헉…. 이런 멍청한…. 설마 이렇게 쉽게 말해도 못 알아들을 줄은….]

선지자가 당황한 듯 촉수를 크게 꿀렁거렸다. 그는 이윽고 냉정을 되찾더니 말했다.

[그래! 정 그렇다면 단서는 주겠다…. ‘시계’의 시련을 먼저 해결해라.]

“뭐?”

[‘시계’가 큰 도움이 될 터…. 그럼 이만!!]

파앗

선지자는 사라져 버렸다. 나는 황망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니 또 무슨 개소리…. 시계라니 대체…. 어?”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시계.

‘파우스트의 금회중시계, 히든피스!’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시계의 수수께끼를 해결해야 지금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음 거짓정보는 아닐 거 같은데….’

나는 일단 선지자에게 얻은 정보를 전뇌자와 아수라에게 전했다. 전뇌자는 내 기억을 보더니 곧장 말했다.

[백웅. 지금은 목숨의 위협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야.]

“그렇다면….”

전뇌자가 말했다.

[당장 제갈무후를 초혼해서 그의 힘을 빌려서 히든피스의 비밀을 해석해.]

“…….”

[마지막 기회야. 예전에 계산했을 때는 목숨의 위협이 컸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없어.]

어둡다.

나는 지평선의 해가 이미 져서 밤이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오늘’이 끝날 때까지 세 시진도 남지 않은 것이다.

우웅

나는 천신경의 술수를 써서 제갈무후를 소환했다. 그리고 제갈무후가 소환되자마자 3개의 침을 움직여서 12시에 일직선으로 모았다.

지직

시간이 멈추는 현상이 일어났고 환한 빛과 함께 새하얀 빛의 문이 생겨난다. 나는 제갈무후에게 말했다.

“제갈무후. 저와 함께 가서 이 방의 수수께끼를 풀어주십시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군. 무슨 상황이지?]

“이 안은 ‘시간의 회로’가 가득한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시간의 회로의 원리는 팔괘와 통해있으니….”

[…아, 그쪽 지식인가. 생전에 조금은 공부해 두었으니 괜찮겠군.]

“알고 계십니까? 연금술의 모든 정수가 들어있는데….”

[먼저 들어가게.]

파앗

나는 제갈무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히든피스 내부 시계의 방으로 들어가자 예전처럼 살풍경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백여 평 정도의 공간에 온갖 종류들의 시계들이 가득 차서 째깍거리고 있었고, 갖고 들어온 금회중시계인 히든피스는 양 팔로 들어야 할 정도로 거대해져 있는 것이다.

째깍 째깍

제갈무후가 말없이 눈 앞의 상황을 쳐다보고 있자, 나는 그에게 설명했다.

“보다시피 이 회중시계에 7개의 시침이 있는데 하나도 겹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7번째 침은 칼파(劫)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호오…. 겁?]

“네. 그런데 어떠한 힘에도 이 시침이 움직이지 않아서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하는 것 같습니다. 시침을 움직여야 하는 것 같은데….”

[재미있군. 기다려 보게.]

제갈무후는 한동안 커다란 방에 가득 있는 시계들을 한번씩 살펴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말했다.

[계산해 보니 이건 윤달을 의미하는 시간일세.]

“헉! 풀어내셨습니까? 어떻게?”

[모든 시계가 서로 공식처럼 얽혀서 단 하나의 시간을 가리키는 방식이군. 모든 수리와 물리에 달통하지 않으면 이렇게 예술적인 구도를 만들 수 없어. 이 자는 팔괘 또한 공부했는지 그 묘리가 스며있군.]

제갈무후가 감탄했다.

[이걸 만든 자는 대단한 천재로군. 나만큼이나.]

“…….”

자화자찬같은데 어쨌든 천재니까 할 말이 없다.

나는 애써 본론으로 되돌아갔다.

“아무튼…. 윤달이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든 시계가 가리키는 단 한 번의 윤달을 향해 7개의 시침을 맞추면 수수께끼가 풀릴 거란 뜻이지. 이리 줘 보게.]

끼릭 끼릭

“오…!!”

저게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네?!

내가 했을 때는 호신강기로 둘러싸도 손이 베일 뻔 했고 산을 뒤집는 힘으로도 안 움직였는데!

내가 놀라고 있자 제갈무후가 말했다.

[이런 수수께끼는 힘이 아니라 머리로 푼다면 아무런 저항이 없는 법이지.]

끼리리릭

6개째의 시침까지 정해진 부분까지 돌려놓았던 제갈무후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제갈무후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윤달…. 겁…. 굉장히 의미심장하군. 자넨 윤달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아는가?]

“잘 모릅니다.”

[은월(隱月)이라고도 하지. 윤달이 비치는 동안 천상의 신은 인간에게서 눈을 거둔다는 전설이 있네…. 즉 이 시침을 움직이는 순간 우리는 신의 눈에 띄지 않는 모종의 장소로 향하게 될 것일세. 그리고 이런 사실에서 미뤄보면 자넨 혹시….]

“…….”

[아닐세. 그럼 마지막 시침을 맞추도록 하지.]

끼긱!

하지만 제갈무후는 마지막 시침을 움직이지 못했다.

[으음.]

그는 당혹하더니 내게로 회중시계를 건네주었다.

[내가 풀었던 순서를 외워서 그대로 자네가 풀 수밖에 없겠네. 7번째 시침의 위치를 알려줄테니 그대로 이동시키게.]

“왜입니까?”

[…처음부터 자네만을 위해 만들어진 수수께끼일세.]

제갈무후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시침만큼은 자네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있군...]

“…….”

지금 그 의미를 생각해봤자다.

다만 파우스트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해놨는지는 왠지 알 것 같다.

차칵 차칵

나는 제갈무후가 풀었던 순서를 외우고 있었기에 차근차근 시침의 위치를 이동시켰다. 그리고 한참 후, 나는 일곱번째 시침을 마지막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키이잉 -

갑자기 금회중시계에서 빛이 났다.

환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빛이 계속되는지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다.

파앗

나는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황무지에 와 있었다. 사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여긴….’

설마 연금술사 칼리오스트로가 히든피스로 도착했다던 그 장소인가?

잠시 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갑소, 전생자 백웅. 내가 파우스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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