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50화 (1,147/1,615)

1150====================

사신지혼(四神之魂)

500년 만에 진소청을 보게 되다니 정말 반갑기도 하면서 놀라웠다.

진소청은 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설마 예언 그 자체를 연명에 쓸 줄은 몰랐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말대로다.

내일 죽는다는 예언과 죽기 전 진소청이 나타난다는 예언.

두 가지를 고려해본다면 당장 항우 앞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다면 당연히 진소청이 나타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가장 아귀가 맞는 예언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사대신기를 소모하지 않고 진소청이 나타난다는 것에 도박을 걸었던 것이었다.

내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진소청이 말했다.

“그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소.”

“내게 500년동안의 이야기를 해 줄 셈인가?”

“딱히 그럴 필요는 없소. 내가 겪은 것들이 모두 당신에게 도움이 되진 않을 테고, 지금 가진 것만 운영하기도 벅찰 테니까.”

담담하게 대꾸한 진소청이 창가로 갔다.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쏴아 -

바닷소리가 들린다.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가 들려왔기에 여기가 해안이라는 걸 한층 실감할 수 있었다. 수평선을 말없이 쳐다보던 진소청이 입을 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종말을 막을 순 없을 것이오. 설령 당신이 서왕모 이상으로 강력해진 항우를 이겨서 100층에 도착한다고 하더라도.”

“뭐라고... 항우가 그렇게나 강해졌다고? 그건 [옛 지배자]급이 아닌가.”

“그렇소. 그에게 씌워져있던 고대인의 봉인을 모두 여와가 풀어주었고 여와가 전폭적으로 힘을 지원해줬지. 초월자급이라 해도 무방하오.”

“…….”

압도적으로 강하다고 느꼈던 게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침음성을 흘리며 말했다.

“으음….종말을 막을 수 없다고. 왜 그렇게 단언하는 거지?”

“여와와 복희의 도움에 의존해서 종말을 극복하기엔 너무 늦었소. 그걸 하려 했다면 좀 더 일찍 했어야 하며…. 십수년 남은 시점에선 어림도 없는 이야기.”

나는 문득 호기심이 생겨서 말했다.

“어쩐지 과거였다면 충분히 가능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군. 그게 언제인지 알고있단 건가?”

“…….”

“내가 전생하던 시점이었다면 가능했을까?”

“그건 모르겠소. 내가 어찌 전생자의 한계를 측량 가능하겠소? 하지만 적어도 500년 전은 힘들 것이오.”

“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군. 진소청, 예전에 천암비서에 대한 단서를 보냈을 때도 그렇고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지? 네 목적은 뭐냐.”

진소청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꿈]을 들여다보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

“…꿈?”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인가? 황당한 소리로 들렸지만 진소청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망량선사가 내게 내려준 임무이기도 하오.”

“임무라…. 너는 망량선사의 사도가 된 건가?”

반신반의하며 질문했으나 전혀 예상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이 임무를 끝낸다면 그렇게 되겠지. 망량선사가 그 정도 보상은 줄 것이오.”

“……!!”

[꿈]이란 걸 들여다보는 임무를 해낸다면 정말로 사도가 된다는 것인가!

과거 망량선사의 사도였던 천우진이 삼황오제의 간섭조차 정면에서 떨쳐내는 강력함을 보였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경탄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진소청에게 말했다.

“대단하군, 진소청. 그렇다면 그 [꿈]이란 건 대체 뭐지?”

“백웅.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세계는 넓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오. 당신은 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탐험해 왔으니.”

“그야 알고 있지.”

“[꿈]이란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 너머의 세계. 과거이자 미래이며, 그 무엇도 아닌 것이 바로 꿈인 것이오.”

“…….”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내가 멍하니 듣고 있자 진소청이 말했다.

“마치 당신이 산하사직도에서 복희를 만났을 때와 같소…. 백웅 당신은 그것이 과거인지 미래인지 확실히 대답할 수 있겠소?”

“뭣!!”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그 일을?!’

일단 나와 흑요석을 공유하는 지상동료나 천계탐사대나 미호 등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건 전부 나와 흑요석을 공유한 자에 한정된다. 진소청은 500년 전 이후로 만난 적도 없었고 지금이 500년만의 첫 만남인데 그 사실을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으음…. [꿈]을 들여다보는 임무…. 그렇다면 산하사직도를 들여다보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문득 뭔가를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그 말은 산하사직도가 [꿈]이란 말인가?”

“처음부터 망량선사가 그대에게 말했을 것이오. 그건 그저 꿈일 뿐이라고.”

“꿈이 어떻게 세계를 넘어선 세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꿈일 뿐인데 현실도 아닌 꿈에 왜 그리도 집착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리둥절해하자 진소청이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꿈에서 얻은 성취나 술법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오?”

“…그건.”

“당신이 산하사직도에서 신술 태극도의 기초를 얻었으며 각종 신력의 잠재력을 동시에 획득했음을 알고 있소. 그 모든 게 꿈이었다면 산하사직도에서 현실로 나오는 순간 잃어버렸어야 했겠지. 그러나 당신은 그 모든 걸 멀쩡히 보유하고 있소.”

“…….”

나는 진소청의 말에 두려워져서 말했다.

“그, 그 말은 산하사직도가 사실 꿈이 아니라 또 하나의 현실이라는 건가…!! 평행세계인가 뭔가 하는 것이란 말인가?!”

“전혀 다르오. 평행세계란 건 현실과 꿈의 경계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허상이며 잣대에 불과한 것. 법칙에 구애된 자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망집이오.”

진소청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소. 꿈은 꿈이오. 산하사직도 내부의 일은 그저 꿈이란 걸 다시 한 번 말하오. 하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꿈일 뿐.”

“더 헷갈리는 기분이군…. 그렇다면 내가 있는 이 장소는 현실이란 말인가?”

“장주지몽(莊周之夢)을 알고 있소?”

“당연히 알고 있지.”

“당신 스스로가 나비라 생각하는지 장자라고 생각하는지 그건 중요치 않소…. 왜냐하면 꿈의 경계를 없앤 자는 두 가지 모두 될 수 있기 때문.”

“……?”

“그것이 파천의 가호를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오….”

뭔 소리지…?

너무 수준높은 이야기라서 내가 알쏭달쏭하고 있자 이윽고 진소청이 말했다.

“사대신기를 항우와의 대결에서 아낀 것은 잘 한 판단이오. 다만 항우를 뚫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론 안 되오.”

“내게 항우를 공략할 방법을 일러줄 셈인가?”

나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진소청에게 간절히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와서 날 도와 줘, 진소청. 엄청난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너라면 항우를 물리칠 수 있지 않겠나!”

“처음에 내가 종말을 막지 못하는 이야기를 한 이유를 알고 있소?”

“응?”

“여와와 복희는 종말을 막을 수 없는 존재들이오. 이미 그럴만한 명분도 기력도 잃었지. 그 자들이 당신을 불러들이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유이니, 당신이 탑의 시련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오.”

“…….”

“나름대로의 보상은 있겠지만 그건 결코 종말을 막는데 직접 도움이 될 건 아니겠지.”

진소청은 담담한 얼굴로 창가에 서서 말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탑을 내려가시오. 탑의 시련에 모든 것을 쏟지 말고 하루 동안에 더욱 이득 볼만한 행동을 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오.”

나는 황당해서 진소청에게 말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여기까지 오는데 대체 몇 명의 희생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지?! 검마도 독고성도 노부츠나도, 후예도 모두 죽었어! 이대로 항우를 앞두고 물러가는 게 될 것 같냐고!!”

“어차피 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다 똑같소. 그 자들은 하루 일찍 죽었을 뿐 이제 전 우주의 억조창생, 수백조의 생명이 멸하여 생명을 잃겠지. 이게 무엇이 다른 것이오? 동료의 복수를 했다는 자기만족이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오?”

“그, 그건.”

“동료를 위한다는 명분이 당신의 인간성을 지키기엔 매우 좋소. 허나 지금은 좀 다른 이야기. 당신은 지금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소.”

위험하다고?

내가 어리둥절해서 진소청을 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내겐 보이오.”

“뭐가 보인단 말인가?”

“당신은 [큰 굴레]의 일부에 묶여있소. 아니…. [매듭]을 지었다고 보는 게 맞겠군.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은 그 때문에 그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내가 죽으면 [큰 굴레]가 돌아간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일부의 매듭에 묶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마 다음번에 당신을 만날 때 나는 당신을 만났던 기억을 잃는다는 이야기겠지. 지금 그 매듭을 확인했던 것도 내 힘이 아니라 망량선사의 힘이었으니.”

“응?”

또 뭔 소리야?

진소청이 말했다.

“잠깐 나갑시다.”

쏴아 -

나는 진소청을 따라 허름한 건물에서 나가 해안가를 걸었다. 해안은 매우 맑고 푸르렀으며 백사장의 모래도 무척 고운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고 문득 생각하고 있을 때 진소청이 말했다.

“미안하오.”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말이지.”

“지난 세월 동안 나 자신의 힘을 키우면서 동시에 당신의 천암비서가 지닌 저주를 해제하려고 노력했소. 어찌되었건 당신은 이번 생에 내게 은(恩)을 베풀었고 갚는 게 마땅한 도리였으니…. 하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천암비서의 실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했소. 단서 몇 개는 주웠지만 그것만으로는….”

“…….”

“그것은 꿈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 마도서처럼 생겼지만 절대 마도서가 아니오. 본디 존재해서는 안될 것이리라 생각하오.”

“꿈의 너머? 그게 무엇이오.”

“윤회(輪回)가 원융(圓融)하는 장소요. 신들조차도 악몽이라 생각하는 무언가….”

잠시 침묵하던 진소청이 말했다.

“아무튼 미안하오.”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미안하면 좀 도와줘. 500년동안 술법을 수련했으면 엄청 강할 텐데 나 하나 못 도와준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내 도움을 받으려면 당신은 대가를 줘야 하오.”

“뭐, 대가?”

“나도 인과율에 걸리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오. 다음 번 매듭에 참고하시오.”

“그게 무슨 말….”

내가 반문할 때 진소청이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셨군.”

파앗

“……!!”

잠시 후 내 앞에 나타난 존재를 보자 나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전혀 뜻밖의 인물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마, 망량선사!!”

매번 마주치던 새까만 고양이가 눈 앞에 있다!

나는 당황해서 외쳤다.

“너 지금 대결계랑 동화해서 존재가 잠시 사라진 거 아니었냐?!”

[진소청은 [꿈]을 넘는 술법을 익혔으니 그 제약을 무시하고 여기에만은 자유로이 나타날 수 있지.]

“…….”

망량선사가 자신의 앞발을 핥으며 잠시 딴짓을 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번 생의 승리자는 황제 공손헌원으로 정해져 있다. 지금 네가 하는 것은 그에게 최대한 흠집을 남기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진소청의 말대로 탑을 오르는 일은 무의미하다.]

“정해져 있다고? 왜?”

[천마(天魔)가 강림했을 때 이미 정해진 일이었지. 도리어 그런 얘기를 하긴 늦은 감이 있다.]

망량선사는 네 발을 움직여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백웅. 점차 내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뭐? 기억이 돌아온다고?”

[아주 머나먼 옛날과 같지만, 나는 예전에 우주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있었다. 그 곳에서 떨어질 때 무언가를 각오했었지만…. 그 각오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동료와 무언가를 결의했었다.]

“…….”

[아마 내 기억이 되돌아오는 건 너와 관계가 있겠지.]

“아니 그렇게 말해도 난 아무것도 몰라….”

망량선사가 빤히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네가 이제부터 어떤 일을 겪을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 서(書)가 횡포를 부린다면 나의 이름을 불러라. 네가 [매듭]에 갇히는 걸 막아주겠다.]

“응? 매듭에 갇혀?”

[꼭 기억해 두어라. 네가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나 또한 끝을 보지 못한다.]

스스스스

잠시 후 망량선사와 진소청의 모습이 아련해지며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말로 꿈결처럼 주변의 모든 것이 안개처럼 변해서 사라지는 중이었다. 나는 급히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잠깐 기다려!! 정말로 항우의 시련을 포기하라는 건가?! 여와와 복희를 만나지 말고 탑을 내려가라고!!”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안개가 심해졌지만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럴 순 없어!! 그럼 동료들이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고생한 건 대체 뭐냐고!! 난 그들을 위해서 결말을 봐야만 해!”

내가 비명처럼 외치자 망량선사의 대꾸가 들려왔다.

[그게 누구를 위한 결말인지 생각해본 적이 있나?]

파앗

눈앞의 환영이 사라졌을 때, 나는 어느 새 팔괘궁에 누워 있었다.

“…….”

98층이 아냐.

“괜찮습니까?”

“어떻게 된 건가.”

내 머리맡에 서 있던 무영검제가 씁쓸하게 말했다.

“모두 전멸하고 폐하만 기절해서 복귀했습니다. 항아가 데려왔지요. 지금은 폐하를 치료중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 혼자서만 팔괘궁 앞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쓰러져 있었다는 것 같다. 다행히 목숨에 큰 지장은 없지만 황룡마신은 완전히 망가져서 벗기는 것도 고생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무영검제.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나?”

“네? 그야 술이나 잔뜩 먹지 않을까 싶군요. 평소에 안 먹고 있던 미주를 꺼내서 자축이나 하겠지요.”

“자축?”

“세상이 망할 때까지 잘도 살아왔구나 싶어서 기쁠 거 같기도 합니다.”

“하하하….”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움직여보았는데 생각보다 부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내공으로 빠르게 치유가 가능할거라 생각하고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난 잠시 지상으로 가 보겠네.”

“무얼 하시려는지요.”

“나 또한 내일 죽는다면 수단방법 가릴 때가 아니겠지.”

나는 중얼거리다가 말했다.

“지상에 내가 아는 강자들 모두를 불러올 생각일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항우를 없애겠어.”

망량선사도 진소청도 내게 탑의 시련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검마의 모습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두고 봐라.’

정말로 내일 죽는다고 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검마와 동료들의 원수를 갚고 말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