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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항우가 서 있는 걸 보자 나는 약간 긴장했다. 그리곤 말을 걸었다.
“항우 님!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
항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거대한 흑마의 목 근육을 쓰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이어서 항우에게 말했다.
“우희가 있는 곳을 알려드릴 테니 이번 시련을 통과시켜주시겠습니까?”
항우가 여와를 통해 빌려고 하는 소원은 뻔하다. 보나마나 우희를 찾으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는 우희에 대한 정보를 줘 버린다면 충분히 항우와 교섭을 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원래라면 안될 일이지만 여태껏 계속 죽으면서 모은 정보 덕에 그에게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게 가능했다.
‘자, 깜짝 놀라겠지!’
그 동요를 틈타서 얼렁뚱땅 98층을 넘어가겠어!
하지만 항우는 그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한동안 말을 쓰다듬고만 있었다.
“……?”
어떻게 저렇게 태연한 거지? 항우가 우희의 행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에 대해 몇 번이나 전생하면서 보아왔던 나는 그의 반응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지금 마음속으로는 크게 동요했는데 억지로 안 그런척 하는가 싶을 정도였다.
잠시 후 항우가 말했다.
“있는 곳은 알고 있다.”
“네?”
“그녀는 태허궁에 있더군.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
나는 그만 덜컥 놀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어떻게?!’
뜻밖의 사태! 항우를 상대로 내놓을 수 있는 최대의 패를 내놨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져나가자 당황스러웠다. 되려 내가 놀라고 있자 항우가 나를 힐끔 보더니 말했다.
“여와가 말했던 그대로군. 네가 그 정보를 이용해서 내 시련을 넘어갈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해.”
“그, 그게…. 그럼 대체 왜 시련관이 된 것입니까? 여와가 우희를 되찾아줬다면 굳이 당신에게 여와를 통해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을 리가.”
“남의 사정을 멋대로 재지 마라. 자…. 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항우는 느긋하게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었고 이번에는 내 쪽으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본왕은 전에 없이 차분하다. 이 오추마(烏騅馬)가 지루해하기 전까지는 이야기를 들어 주마.”
“…….”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27번이나 죽어가면서 간신히 얻어낸 그 정보를 어떻게 항우가 단번에 알고 있는 상황이란 말인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자 옆에 있던 검마가 슬며시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내게 전음을 보냈다.
[백웅. 내게 대화를 맡겨 주게.]
[부탁합니다.]
나보다는 검마가 머리가 잘 돌아갈 것이다. 검마는 앞으로 나온 후 차분하게 항우에게 질문했다.
“그 정보를 알려준 것은 바로 여와가 아니오?”
“굳이 대답해줄 것도 없다 생각하는데.”
“우희가 아닌 유방의 정보에 대해서도 알려드릴 수 있소.”
“너희는 왜 자꾸 시련관과 거래하려 드는가?”
“그저 여와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시련일 뿐이므로 우리가 목숨걸고 싸우는 건 큰 손해요. 게다가 이 시련에 우리 왕의 목숨이 달려있기 때문이오.”
“왕이라면 저 녀석을 말하는 건가.”
항우의 시선이 나를 서서히 응시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응시에서 비굴하게 시선을 피하는 건 잘못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항우의 눈을 똑바로 보는 순간 그의 눈이 지금까지처럼 퇴폐적인 나태와 폭력으로 물들어있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기보다는 본인이 얘기했던 것처럼 마치 명경지수와도 같이 차가운 눈빛 그 자체였다. 적어도 그가 스스로 말하는대로 침착하다는 건 사실로 보였다.
잠시 후 항우가 말했다.
“인류의 운명따위 알 바 아니지만 저 놈에게 그 운명을 맡을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구나.”
“백웅을 본 자는 늘 그렇게 말하오. 허나 백웅의 잠재력은 그런 일견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볼까.”
항우가 냉막한 눈빛으로 충격적인 한 마디를 했다.
“백웅. 99층에 누가 있을지를 한 번에 맞춰 봐라. 그걸 맞춘다면 전투를 하지 않고 너희를 순순히 올려보내 주마.”
“……?!”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그러는 항우 님께서는 99층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단 말입니까?”
“알고 있다. 여와가 알려줬으니까.”
“아니, 그것보다 대체 이런 질문을 왜….”
“일족의 왕이란 운명을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자.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고, 온갖 간계로도 헤쳐나갈 수 없는 난마를 자신의 직감만으로 뚫는 게 요구되는 것이다.”
항우가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꼈다.
“자, 맞춰 보아라. 찍어도 좋다. 그걸 알아맞춘다면 네 운명을 막아설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겠다.”
“…….”
99층의 시련관이 누구냐니.
나는 그 말에 적지 않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누군지 대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99층에 항우가 있을 줄 알았는데 98층에 나와버려서 이미 예상이 틀어진 상태다. 이 상황에서 99층의 시련관이라면 적어도 이 천계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자들 중 하나일 것이다.
‘으 대체 누구….’
아마 그 자겠지?
나는 고뇌하다가 주변 동료들과 한 번 시선을 교환한 후 이를 악물곤 말했다.
“…99층의 시련관은 바로…. 사대신수 기린일 것이오!”
99층에 도착하면 신이 직접 준비한 시련관이 기다릴 것이고, 그 자를 뚫으면 복희와 여와를 100층에서 만날 수 있다고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99층은 당연히 직접 신이 임명한 시험관일 것인데, 그만한 신적 존재면서 내게 적의를 품는 존재라면 최근에 미뤄 짐작하기로는 기린밖에 없는 것이다.
‘제길. 무리수이긴 한데….’
영귀가 기린 대신 왔다고 했다면 99층이 기린일 리는 상식적으로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린이 그토록 날 죽이고 싶어 한다면 영귀가 방해하든 말든 또 오려고 할 수도 있으며, 또한 영귀는 이미 내가 내일 죽고 세계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을 해버린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영귀가 날 안 지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럽게 기억을 추억하는 시점이 바로 그 때의 선택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볼때 나는 99층의 시련관이 기린이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항우는 실망한 듯 말했다.
“틀렸다.”
“…….”
“더 이상은 할 수 있는 말도 남지 않은 듯 하군.”
쿠우우우
“남자답게 덤벼봐라. 그리고 죽어라!”
항우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패력이 뿜어져 나왔다.
“……!!”
“……!!”
그 무형의 패력에 우리 모두가 일순간 경악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다. 심지어 후예마저도 뒷걸음까지는 치지 않았지만 약간 안색이 창백해진 듯 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순간 그에게서 뿜어져나온 힘은 말 그대로 미증유의 무언가였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절대지경 무인은커녕 천계의 투선조차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 그저 압도적인 ‘힘’ 그 자체. 나는 이 힘을 강신시켜서 휘두른 적은 있었으나 적대하여 싸워본 적은 거의 없었기에 손발이 조금 떨리는 것마저 느껴졌다.
‘아…. 아냐. 예전보다 도리어 강해. 비교하려면 차라리 혈주 중 2개를 부숴서 혼돈의 봉인이 풀렸던 그 때와….’
나는 문득 뭔가를 깨닫고는 항우에게 말했다.
“항우 님! 설마 여와의 권능으로 고대인의 봉인을 푼 겁니까?”
“말이 더럽게 많군. 네놈은 이미 본왕에게 말을 걸 자격이 없다.”
항우가 천천히 오추마 위에 올라탔다. 거대한 흑마 위에 항우가 올라타자 그 이상 패왕이라는 칭호가 어울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항우는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추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오추마여. 가자.”
후우우우!!
그 순간 지금까지 유순하게 있던 거대한 흑색 거마의 안광이 빛났다. 그리고 오추마가 한 번 발을 내딛는 순간, 퍽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후두둑
…어?
나는 옆에 있던 독고성이 일격에 사망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독고성의 상체가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으니 당연히 죽었으리라. 문제는 독고성이 오추마의 다리에 얻어맞아서 죽은 거 같은데 그 순간을 도저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촤악
뒤늦게 오추마의 거대한 근육 다리와 옆구리에 거대한 참선(斬線)이 그였다. 저 공격의 형태를 보면 검뢰(劍雷)로 만들어진 상흔이 분명했다. 그 공격이 독고성의 반격이었던 모양이었으나 정작 말 위에 타고 있는 항우에게는 일격도 닿이지 않은 것이다.
‘이럴 수가….’
나는 항우가 지닌 성좌의 힘이 발동하여 시공간을 무시하고 공격했지만 [작은 굴레]에 저항한 독고성이 반격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오추마에게는 부상을 입혔으나 항우에게는 공격이 먹히지 않은 듯 했다.
도리어 항우가 감탄한 듯 말했다.
“훌륭한 검객이군. 생전에 나와 오추마가 함께 싸우는 동안에 이 세상 그 누구도 반격하지 못했거늘.”
“…으아아아아아아!!”
얼마 전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수련을 완료하고 함께 따라온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가 기합을 내지르며 항우에게 덤벼들었다. 나 또한 그와 호흡을 맞춰서 덤비려 했으나 그 순간 옆에 있던 검마가 의념으로 나를 제지하며 전음으로 외쳤다.
[백웅! 지금은 아닐세! 덤비면 같이 죽어.]
피잉 -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정중단 일검세가 항우의 목을 베어왔으나 항우는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이 힐끔 쳐다보더니 그저 주먹을 한 번 내질렀다.
그리고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칼을 허공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절대지경 오의를 발동했다.
무토도리(無刀取り)
그는 자신의 장기이자 절기를 절대지경 이후에도 수백 년간 연마하여 고유의 경지이자 기술으로 완성한 상태였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공격은 안 먹힐거라 생각하고 바로 수비태세로 전환하여 항우의 공격을 한 번 받아넘길 각오였던 것이다.
콰과광
그것이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최후였다. 그의 양 손은 항우의 주먹을 정면으로 받아내었으나 손목 뒤편의 몸뚱이가 모두 사라져버린 것이다.
투둑
잠시 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양 손목이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항우는 잠시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좋은 기술이다. 본왕의 공격에서 육신을 남길 수 있다니 훌륭한 성취구나.”
저것은 조롱인가?
…아니다. 조롱이 아니다. 그저 태어나서 여태껏 무적으로 살아왔던 자로써 순수하게 노력으로 여기까지 온 자에 대한 경탄의 감정을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수한 경탄의 감정이 도리어 사람을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투선급 경지에 오른 탐사대 두 명을 절명시킨 항우.
그런 항우를 본 후예가 말했다.
[항우. 왜 백웅부터 죽이지 않지?]
“성급한 놈. 오랫만의 전투이니 좀 더 즐기고 싶을 뿐이다.”
항우가 천천히 말 위에서 손가락을 까닥이며 후예를 도발했다.
“너는 제법 싸울 맛이 날 것 같으니 덤벼도 좋다.”
[좋다.]
후예가 서서히 적궁백시를 기울이며 눈을 빛냈다.
[하나 제안하지. 내 첫 일격을 네가 정면에서 막아낸다면 나는 패배를 인정하고 스스로 죽겠다. 받아들이겠나?]
그러자 항우가 피식 웃었다.
“재밌군. 네 적궁백시의 위력을 본왕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나?”
[…….]
“천계를 천여 년 이상 정탐하면서 네 이야기와 소문도 많이 들었다. 적궁백시의 위력도…. 네 놈은 아마도 적궁백시의 최대위력을 첫 발에 담아서 쏠 수 있기에 본왕에게 그런 도발을 한 것이겠지.”
헉?!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항우는 단번에 그 사실을 눈치챘단 말인가? 이전부터 생각했지만 단순히 때려부수기만 잘하는 게 아니라 두뇌 또한 영민한 게 항우인 듯 했다. 후예가 자신의 진짜 의도를 간파당했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서 할 거냐 말 거냐? 너야말로 말이 많구나.]
항우가 대꾸했다.
“하겠다.”
엉?! 하겠다고?!
[후회하지 마라.]
그렇게 말한 후예는 잠시 내 쪽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백웅. 내가 죽어도 항아를 평생 돌보며 탐하지 않을 것을 네 이름을 걸고 맹세해라.]
“…….”
나는 후예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게 인간적으로 옳은 도리란 걸 깨닫고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한다.”
[그럼 해 볼까. 끼어들지 마라.]
끼기긱
후예가 적궁백시의 활시위를 당겼다. 나는 아까부터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멍하니 두 영웅의 대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항우는 정말로 후예의 활을 피할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후예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투웅!
다음 순간, 일반적인 백시의 65536배의 힘을 담은 적시(赤矢)가 발사되었다.
‘아무리 항우라도 저건 죽는다!’
과거에 내가 적궁백시의 힘을 이용해서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를 공격했을 때 그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전적을 생각하면 저 일격은 [옛 지배자]의 본체에도 중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하물며 보패가 사용자의 역량에 따라 위력이 바뀐다는 사실을 고려해본다면, 후예가 발사한 지금의 적시는 말 그대로 신을 죽이는 화살 그 자체!
쿠콰콰쾅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차원 전체가 뒤집혔다. 그 여파로 눈앞의 모든 시공간이 소멸되며 끝도 보이지 않는 혼돈의 공간으로 휩쓸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전력을 다한 후예의 일발 공격에 시련의 탑 자체가 왜곡되어서 파괴되려는 것이다.
‘으윽…. 설마…. 이랑진군을 죽일 때도 전혀 전력이 아니었단 건가?!’
지난번보다 훨씬 강대한 위력에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화살을 감당하는 항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뒤집히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계속 뒤집히는 차원 속에서 억지로 신법을 이용해서 몸의 균형을 잡고 있었는데 잠시 후 중후한 항우의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오오오오오!!]
아주 짧은 순간.
항우가 자신의 명치에 반쯤 파고 들어있는 적시를 맨손으로 잡아서 억지로 버티는 광경이 보였다. 항우라 할지라도 저 공격을 완전히 막아내기는 무리인지 명치에 이미 화살촉이 꽂혀서 항우의 전신에서 선혈이 꿀렁거리며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온힘을 다해서 적시를 명치에서 뽑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
저…저게 대체 무슨….
최강의 위력을 지닌 적시가 폭발하기 전에 억지로 멈춰 세워서 힘으로 막아내는 게 된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리가….
뿌드드득
[크아아압!!]
잠시 후 항우의 손에 핏줄이 올라오더니 적시가 완전히 그의 명치에서 뽑혔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뒤흔드는 대폭발이 천지를 뒤집어엎었다.
쿠콰콰쾅
콰콰쾅
실로 번천지복(飜天地覆)! 이미 사방은 대우주의 시꺼먼 흑암과 별빛으로 바뀐 지 오래였고 시련의 공간은 온데간데 없었다.
휘이이잉
그리고 우주의 허무 속에는 피칠갑을 한 항우가 오추마 위에 타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에게서 십 장 떨어진 곳에 후예가 적궁백시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스윽
항우가 부숴진 적시를 손바닥 위에 올려서 후예에게 보여주는 듯 했다. 그리고는 후예에게 말했다. 성좌의 힘을 끌어내어서인지 육성이 아니라 신어로 바뀐 목소리였다.
[막았다.]
[…….]
후예는 허탈한 눈으로 그 화살을 바라보더니 문득 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놈… 내가 졌다.]
그러더니 그는 백시 하나를 꺼내서는 자신의 목을 찔러서 자진했다.
푸욱!
털썩
그것이 대영웅 후예의 최후였다. 약속한 대로 항우가 적궁백시의 최대위력을 정면에서 막아내자 더는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
무인다운 죽음이긴 했지만 나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후예의 저 공격마저 안 통하는 항우를 도대체 무슨 수를 써서 쓰러뜨려야 하는 것일까?
“황룡마신!”
나는 황룡마신을 소환해서 입으며 타신편을 애써 들어 보았지만 옆에 있던 검마가 말했다.
“백웅. 우리가 태공망도 아니고 그걸 임시변통으로 써서 저 괴물을 이길 순 없을 걸세. 내가 틈을 만들어볼 테니 지상으로 도주하게….”
검마의 말대로다. 태공망처럼 항우를 상대로 파고들어서 타신편을 몸에 꽂아서 성좌를 파괴할 수 있을까? 너무 확률이 적은 일이다. 심지어 그 위업을 행했던 태공망조차도 항우의 성좌를 파괴했는데도 항우의 힘이 줄지 않아서 결국 살해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의를 다졌다.
“그럴 순 없습니다. 죽을 땐 같이 죽읍시다.”
“그런 식으로 졌지만 잘 싸웠다고 합리화할 수가 없네. 자넨… 살아야 해.”
“아뇨. 전 끝까지 싸울 겁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갖고 있었다.
“…내일 죽는다는 예언이라면 적어도 오늘은 안 죽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저 항우가 설마 저를 갖고놀다 죽이지도 않을 테고요. 차라리 예언이 어찌될지 보고싶군요.”
“백웅, 그건….”
그 때 나와 검마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항우가 불쑥 우리에게 말했다.
“재미있구나. 백웅 너는 내일 죽는다는 예언을 들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사대신수 영귀한테서!”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설마 서초패왕께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저를 굳이 내일까지 살려두실 생각은 아니시겠죠!”
“흐음.”
항우는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이제 이길 희망이 안 보였으므로 자포자기하듯 말했다.
“죽일 테면 당장 죽여보십쇼! 영귀의 예언과 왕야의 손속, 어떤 게 나은지 구경이나 합시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영귀의 예언을 한 번 깨보는 것도 재밌겠군.”
항우가 말을 탄 채로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성좌를 단숨에 모조리 전개한 듯, 그에게서 개세(蓋世)의 기(氣)가 느껴졌다.
우우우우 -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항우가 단 한 방으로 우리를 죽일 생각이라서 전력(全力)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무쌍패….’
무쌍패로 딱 한 방은 버틸 수가 있다. 하지만 검마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음 충돌에서 아마 검마는 산산조각나서 죽을 것이고 나는 억지로 무쌍패로 한 번 버텨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공격에 죽겠지.
정해진 패배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만큼 기분나쁜 일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는 게 있었고, 내 눈빛을 본 검마도 뭔가를 알아차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검마에게 간절히 말했다.
“검마. 당신이야말로 도망치십시오. 개죽음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동료가 둘이나 죽었는데 여기서 내 한 목숨 살리려 도망치는 건 무인이 아닐세.”
“검마…!!”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싸움이겠군…. 혜아를 잘 부탁하네.”
쿠웅
그리고 항우의 절대적인 일 권이 날아들었다. [작은 굴레]를 조작하는 시시한 기교는 필요없다는 듯 그저 빠르고 간결한 일 권일 뿐이었다. 그러나 저 일 권에 담긴 힘은 말 그대로 역발산(力拔山).
‘다른 방법은 없다…!!’
무쌍패!
우웅
태극이 떠오르며 무위전변이 일어난다! 항우의 패력은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으나, 나는 그 거대한 패력에 말도 안 되는 교환비로 버텨낼 수 있음을 알아차렸다. 본래는 내 무쌍패의 잠재력으로 못 버텨낼 일이지만 어쩐지 황룡마신의 도움이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모든 것은 예측대로 이루어졌다.
퍼버벅
나는 무쌍패를 써서 항우의 일격을 막아내었으나, 그 순간 검마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으아아아아아아!!”
제기랄!!
나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쳤지만 도저히 항우에게 반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냉철한 이성은 반격하기는커녕 다음 공격도 계속 무쌍패로 막아야 살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항우가 다시 한 번 나를 공격했다.
투웅
“제법 죽이기 성가시군.”
구우웅…!!
항우의 주먹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패력의 흐름은 차원을 찢어버릴 듯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주먹이 내뻗어졌다.
무쌍패!
나는 다시 한 번 무쌍패 무위전변을 이용해 항우의 공격을 무마했으나 순식간에 암담한 절망과 피로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암담한 절망과 피로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쌍패로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즉사급 공격을 퍼붓지만 나는 쓸 때마다 도박인 무쌍패로 끝도 없이 반격조차 못하고 버텨야 한다는 상황.
투웅!
태극에서 항우의 주먹이 튕기듯 떨어지는 순간 나는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힘의 여파 때문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내상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머릿속이 아찔했다.
‘아…. 이젠 더 이상은….’
세 번째의 무쌍패도 성공했지만 나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앞에서 동료들이 몰살당했다는 무력감과 절망이 무쌍패에 필수적인 심기체의 유지에 최악의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심(心)이 더할 나위없이 피폐해져버렸기에 다음 번 공격에 나는 죽는다는 걸 깨달았다.
‘사대신기를 쓸까….’
네 개 있는 사대신기 중에서 대부분이 봉인되거나 못 쓰게 되었지만 딱 하나 남은 게 있다. 그 사대신기를 쓰면 어쩌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하지만 쓰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처음 생각을 밀고 나간다. 광기에 가깝지만 도리어 그렇기에 냉철해진다. 검마의 죽음으로 생겨난 슬픔 이상으로 머릿속 한켠이 냉정해짐을 깨달았다.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하자 마지막은 무쌍패를 쓰지 않고 도리어 대해방 칠요를 잡아서 쌍요공명을 시전했다.
우우웅!!
힘 대 힘으로 부딪혔을 때 항우를 이길 순 없다. 아무리 대해방 칠요로 쌍요공명을 했어도, 적궁백시를 정면으로 막아낸 저 괴물을 상대로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마지막 반격 정도는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네 번째의 공격. 나는 항우의 주먹을 맞이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부딪히는 순간 나는 칠요와 함께 죽는다.
‘오냐. 오거라…. 죽음아.’
아직 나는 포기한 게 아니니까.
쿠구구궁
번쩍
쌍요가 공명하며 내뿜은 빛이 강대한 십자(十字)의 상흔을 허공에 만들어내었고, 쌍요공명을 벼려낸 검기가 항우의 일권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항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주먹을 전진시켰는데 그 순간 거대한 파장과 충격파가 동시에 일어났다.
꽈광!!
“커하아아악!!”
나는 내장이 통째로 터져나가는 감각에 그만 비명을 질렀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내장이 토막토막 끊어진 느낌이었다. 힘의 격류가 너무 강해서 황룡마신조차도 버티지 못하고 갑옷째로 망가져버리는 기분! 우그러지는 황룡마신의 갑옷을 육안으로 보고 있자니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오버웰밍 데미지로 인해 피해흡수 기능 정지.]
[현재 갑주외부 파괴율 56.52퍼센트. 완전수복 불가능.]
[보조동력을 가동합니다.]
[보조동력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업데이트 불가능. 무기한 휴면상태 승인 중….]
내 머릿속에 쉴 새 없이 황룡마신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나같이 황룡마신은 이제 끝장이라고 선고하는 듯한 암울한 소리들이었다.
어지럽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다.
쿠구구구….
하지만 뜻밖인 것은 항우의 일권이 내게 큰 타격을 줬음에도 한번에 날 육편으로 만들진 못하고 잠시 허공에서 멈칫거렸다는 사실이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멈추지 못했던 항우의 주먹이 멈춘 것에 놀랄 새도 없이 더 놀랄 일이 벌어졌다.
촤좍
“……!!”
항우의 주먹에 열십자의 상흔이 남았다. 고작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상처였지만 확실하게 항우에게 새겨진 참격이었다. 항우가 눈썹을 꿈틀거리고 있을 때 나는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간신히 잡았다.
‘크으으으윽….’
하체의 근육이 다 끊어질 것 같았지만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버텨낸 채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다.
‘버, 버텼다.’
항우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훗하고 웃었다.
“제법이군.”
그리고 재차 날아오는 항우의 일 권.
쿠구구구
‘끝…인가….’
시꺼먼 절망과도 같은 그 주먹을 본 나는 더 이상은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걸 깨달았고,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리고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 벌어졌다.
파앗!
마치 거짓말처럼 내 앞에 있던 항우의 모습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고, 나는 알 수 없는 장소로 이동해 있었다.
“…….”
정말 처음 보는 장소다.
조잡한 나무로 만들어진 가옥이었고 딱 필요한 생필품만 구비되어 있는 듯한 느낌. 바깥은 맑은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대해가 창밖으로 보였다. 방금 전까지 항우의 공격을 받고 생사를 넘나들다가 이런 곳에 오니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자가 말을 걸어오자 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이오.”
그 자는 무인의 수련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다소 권태감이 감돌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쿨럭! 쿨럭! 역, 역시….”
그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죽었어야 할 부상이오. 억지로 육체의 피해를 술수로 분산시키고 있으니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시오.”
나는 그 말을 듣는 동안에 천천히 몸의 고통이 줄어드는 걸 느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 이윽고 고통이 가라앉아서 말을 할만한 상황이라는 걸 깨달았다.
‘더 못 쓸려나.’
나는 피에 젖어서 우그러진 황룡마신을 씁쓸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예언대로 네가 내 앞에 나타났군.”
“…….”
처음부터였다.
처음부터 나의 죽음에 관련된 예언은 한 개가 아닌 두 개였다.
영귀가 뒤늦게 죽음의 예언을 추가했지만, 그 전에 이미 망량선사가 내게 예언을 했던 것이다.
[그는 미래에 선택하게 될 것이다. 양면성을 지닌 세계에서 그 자신이 무(武)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진소청은 당분간 내가 맡아두겠다. 그리고, 너는 죽기 전에 진소청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항우가 대단한 놈이라 해도, 설령 사대신수 영귀의 예언을 부술 수 있다 해도 상관없다.
아무리 항우라도 망량선사는 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마지막 삶의 도박을 걸었던 것이다.
눈앞에 서 있는 인물은 500년 전 그 때와 전혀 다른 점이 없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그의 손에는 창이 들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그 자의 이름을 불렀다.
“진소청.”
죽기 전에 진소청이 내 앞에 나타난다는 망량선사의 예언이 실현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