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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영귀의 말에 고민했다.
‘흠…. 일단 영귀의 저의부터 알아보자.’
선택을 하려면 그것부터 알아야 할 듯 하다. 나는 영귀에게 말했다.
“영귀여. 당신은 왜 이렇게 내게 호의를 베푸는 겁니까?”
“그게 이상합니까?”
“네. 사실 일면식도 없는 자에게 굳이 기린을 멈춰세우면서까지 이런 호의를 보이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일리있는 의문이군요.”
영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사실은 이미 이 세계의 미래에 대해 점을 쳐 보았기 때문입니다.”
“네? 무슨….”
“결과가 정말 기이하더군요. 몇 번을 다시 해 보아도 선괘(先卦)가 의미없어졌습니다. 이는 더 이상 점을 이용해 굴레의 너머를 내다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뜻…. 세계멸망의 인과율을 품고 있는 당신 백웅의 선택에 따라 모든 게 바뀌는 것입니다.”
“…….”
“저는 당신을 통해 인연을 걸쳐 미래에 관여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또한 일종의 거래라 할 수 있겠지요.”
그렇군.
영귀가 딱히 내게 큰 호의를 품은 게 아니라 이제 인과율의 중심에 내가 존재하며 나를 배제하고는 아무런 미래도 존재하지 않기에, 내게 인연을 만들어 둠으로써 미래를 엿보려 하는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살살 싸워준다는 건 어떤 뜻입니까? 결코 우리를 죽거나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아마 그렇게 되겠지요. 설령 그런 상황이 생겨도 무마시킬 수 있으니 실감나는 연습전투 정도로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기린은 얼마나 강하죠?”
“백웅이여. 사대신수의 강함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시는지요.”
“음…. 신수 린봉귀용(麟鳳龜龍) 중에서 용(龍)인 응룡이 현재 만신전에 있으며 그 강함이 오제에 버금간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말에 영귀가 차분히 대꾸했다.
“린봉귀용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이 봉황(鳳凰)이며 그 다음이 응룡과 기린으로 그 둘은 호각입니다. 단순한 전투력으로는 제가 넷 중에서 가장 약하지요.”
“……!!”
“단 봉황은 그 누구도 실체를 영접한 적이 없어서 환상의 존재.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기린은 최강의 신수 중 하나가 맞습니다.”
나는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쳤다.
“기린이 삼황오제만큼이나 강하단 겁니까?!”
“그 태고의 신왕들과 진정한 의미로 대등할 순 없겠지요. 정상적으로는 조금 아래로 봅니다. 허나 인간이나 웬만한 신성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으며, 그 또한 수십억 년을 살아온 정령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으음….”
뭐가 그렇게 세단 말인가.
칠요의 시련 막바지에 응룡의 진짜 실체와 맞닥뜨려서 싸워본 적 있던 나로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내가 사대신수의 강력함에 오금이 저리고 있을 때 옆에서 곰곰히 생각을 하고 있던 검마가 불쑥 영귀에게 말했다.
“영귀여. 사대신수 봉황이란 존재가 환상의 존재라면서 사대신수 최강이란 건 어찌 알고있단 말이오? 말이 모순되지 않소?”
“어, 그러고보니.”
나는 검마의 말이 맞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실체도 본 적 없다면서 어째서 최강이란 걸 확답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질문에 영귀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째서요?”
“태초의 계약. 우리 사대신수들의 근원에 대한 비밀이므로….”
“……?”
무슨 말일까?
잘 알 수는 없지만 영귀는 지금 한 이야기에 뭔가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비밀은 결코 지금 맨입으로 해줄 게 아닌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일단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어쨌든 기린이란 게 오제급이라면 우리가 뭔 짓을 해도 못 이길 게 아닙니까.”
“아니요. 기린은 인과율에 걸리는 최상위 존재이므로 그대들에게는 화신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본체의 현신은 웬만해서는 있을 수가 없지요. 다만 그 화신조차도 매우 강력할테니 연습삼아 싸워보지 않겠냐는 제안입니다.”
“아.”
그런 뜻이었군!
‘하긴 현재의 미호조차도 인과율 때문에 섣불리 거동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응룡과 호각이라는 기린이면 그럴 수밖에….’
그렇다면 기린과의 모의전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반면에 영귀가 제안한 [종말의 운명에 대한 점]도 끌리기는 마찬가지다. 종말에 어떤 일이 생길지 하나도 모르는 상황에서, 직접 인과율에 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대신수 영귀의 점은 소중한 미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백웅. 모의전을 피하고 점괘를 택하는 게 좋겠네.”
옆에 있던 검마가 진언했다. 검마의 말에 내가 옆을 돌아보자 검마가 말을 이었다.
“예감이 안 좋아. 아무리 모의전에서 봐준다 해도 너무 상대가 강력할 경우 미리부터 기가 죽어서 마음이 꺾일 우려가 있네.”
“백해무익하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후예를 앞세워서 싸우고 있으나 사실 후예의 힘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라고 하긴 힘들잖은가? 이 상태에서 모의전을 해봐야 후예가 얼마나 강한지만 볼 수 있을 뿐 실제 우리 상황에 대입시키긴 힘들어.”
“그건 그렇습니다만….”
“차라리 이번 탑의 시련 이후를 보고 점괘를 얻어가는 게 앞으로의 방향설정에 옳은 게 아닌가 싶군. 영귀 저 자도 그게 더 이득이겠지.”
검마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나는 검마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먹고는 말했다.
“영귀여. 나는 기린과의 모의전투를 피하고 그대에게 점괘를 받겠소!”
“그렇군요. 그것이 당신의 선택입니까?”
“그렇….”
그 때였다.
우우웅
공간이 일렁이는 듯한 기분과 함께 내 앞의 시야가 몽땅 흑암으로 물들었다.
“허억!!”
갑작스러운 사태에 대해방 칠요를 양손에 들고 잔뜩 경계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항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항아가 천천히 말했다.
[주인이시여. 이 시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 이봐 무슨 소리를….”
[저는 기억의 단말. 서(書)의 권능을 전해주는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인께 시간을 기억할 의사를 여쭙고자 합니다….]
“…….”
뭔가 항아는 원래도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은 무언가의 의지에 조종당하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항아만 보일 뿐 주변에 있던 영귀나 후예, 검마 등 다른 인물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도 수상한 일이었다. 나는 혹시나 해서 항아에게 물었다.
“항아! 네가 혹시 시간을 멈춘 거냐? 신족의 힘으로….”
[본래 제곡의 자식이니 그런 권능을 쓸 수는 있으나 위대한 사대신수 영귀에게 제 권능이 통하진 않지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어… 그건 그런데.”
[이것은 위대한 서(書)의 권능. 당신께서 각성하신…. 오롯한 당신의 권리.]
항아가 살며시 양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 이름의 주인이여. 이 시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으으윽. 난 불륜은 안 해!! 니 남편은 후예라고.”
[아니….]
잠시동안이지만 항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듯 했다. 그러더니 원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시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으음….”
아무래도 좋은 시간을 가지자는 뜻은 아닌 듯싶다. 나는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으며 생각했다.
‘시간을 기억하겠냐니?’
아까부터 기계적으로 저 말만 반복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저 말에 동의하거나 그렇지 않아야 이 흑암의 시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시간을 기억한다는 그게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시간이야 원래 기억하는 건데 굳이 그걸 물어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나는 결국 직설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기억하면 어떻게 되는데?”
[이후 서(書)에 대가를 지불할 경우 기억된 시간을 추억할 수 있습니다.]
“……? 그게 뭔데.”
[시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동의 안 하면 어떻게 되지?”
[다음 번의 중대한 나뭇가지에 다시 기억할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나뭇가지?
설마 미래의 나뭇가지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이 중대한 선택의 순간이라서…?’
기린의 환영과 모의전을 하는지 영귀의 점괘를 받는지가 중대한 선택이기 때문에 항아의 몸을 빌려 서라고 하는 게 내게 제안을 하러 나왔단 것인가.
“기억할 기회는 무한정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의 생에 단 한 번입니다.]
“아….”
그렇다면 잘 모르는 상태로 무작정 기억하겠다고 하는 게 손해일 수도 있다. 단 한 번의 기회라면 왜인지 모르지만 시기에 따라 천지차이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이 시간을 기억하겠어.”
까짓거 한번 해보지 뭐.
[선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르륵
내 손을 맞잡고 있던 항아의 손이 점차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빛을 내뿜더니 시야가 완전히 백색으로 물들었다.
파아앗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항아는 저만치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는 원래대로 되돌아 와 있었다.
“…….”
내가 항아를 한참이나 쳐다보자 항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를 알아챈 후예가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네 놈…. 계속 항아를 쳐다보지 마라.”
“아, 됐거든.”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모르겠다. 무언가 이 세계의 상식으로는 아직 판단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나중에 망량을 만나서 물어보던가 해야겠다.
“그럼 종말의 점을 치겠습니다, 백웅이여.”
“부탁합니다.”
영귀가 탁자를 소환하더니 그 위에 산통을 꺼내서 올려놓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사대신수 영귀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종말의 미래여…. 백웅의 인과율에 빌어 그 모습을 드러낼 지어다.”
투웅
산통을 들어올려서 크게 바닥을 치자 산통에서 막대기 세 개가 튕겨나가서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그 떨어진 모양을 주의깊게 보던 영귀는 내게로 산통을 넘겨주더니 말했다.
“이번엔 당신이 산통을 살짝 탁자 위에 내리쳐 보십시오.”
투웅
내가 영귀가 말한대로 산통으로 탁자를 치자 내 산통에서도 세 개의 막대기가 튕겨서 날아갔다.
여섯 개의 막대기.
한참이나 그 모양새를 보던 영귀가 말했다.
“백웅이여…. 충격받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네?”
이어진 영귀의 말에 나는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실로 대흉(大凶). 당신은 바로 내일 죽을 것입니다…. 이 점괘는 그렇게 말하고 있군요.”
“…….”
뭐시라?
영귀가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종말의 인과율을 지닌 자가 이토록 빨리 죽을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아, 아니 잠깐만. 내가 왜 죽습니까?”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우주의 의지는…. 내일 그대가 죽을 것임을 고했습니다.”
스르르륵
영귀가 천천히 은빛 안개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 그대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위대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파앗
그 말이 끝나자마자 97층의 차원문이 열렸다.
영귀가 시련을 통과시켜주어서 98층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말도 안 돼.”
나는 옆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사대신수가 틀릴 때도 있구만! 내가 왜 내일 죽겠어? 그냥 탑의 공략을 내일까지만 멈추고 팔괘궁에서 쉬면되잖아. 하하하.”
“아니, 반대일세. 백웅.”
저벅
검마가 옆에서 침중한 얼굴으로 걸어나왔다.
“당장 98층으로 갑세. 우린 오늘 내로 복희를 만나야만 하는 것일세.”
“검마. 저딴 말도 안 되는 점괘를 왜 믿….”
검마는 꺼지듯 탄식하며 말했다.
“허어…. 그냥 점쟁이라면 개소리라고 치부할 수 있지. 허나 사대신수가 복희와 여와의 시련에 나타나서 소신을 걸고 행한 점괘가 과연 틀렸겠는가?”
“…….”
“저 자는… 할 짓 없는 존재가 아니야. 저 점괘는 사실일세.”
어…. 그럴 리가….
천계의 시련은 그냥 이번 삶에서 지나가는 걸로 생각했는데….
진짜 싸움은 이거 끝나고 지상에 내려가서 십이율주랑 싸움박질하는 거라고 여겼는데….
내가 정말 내일 죽는다고?
현실감이 없어서 멍하니 서 있자 검마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며 말했다.
“정신차리게! 이렇게 된 이상 백웅 자네가 죽음의 운명을 피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단 말일세. 못 알아듣겠나?!”
“그게 무엇입니까?”
“말했듯이 복희를 만나는 것일세.”
검마가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내로 100층에 도달하여 복희와 여와를 만난 후, 그 자들에게 죽음의 운명을 피할 방법을 전수받는 것! 바로 그것뿐이라네!”
“……!!”
젠장할!
진짜란 말인가!
나는 정신을 차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좋습니다. 한 번 해보죠!!”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어차피 다 깰 생각이었으니 한 번에 100층까지 바로 돌파한다!
파밧
우리는 차원문을 통해 98층에 바로 올라갔다.
그리고 98층에 도착하자마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급한 놈들이군. 벌써부터 본왕(本王)의 시련에 도전하려 드는 것인가?”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가 칠흑처럼 거대한 말의 곁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