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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태공망을 쓰러뜨린 후 일단 팔괘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96층으로 도전할 준비를 갖춘 후 96층으로 갔는데, 도착하자 대뜸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의 존재였다.
“나타태자!”
화첨창과 건곤권을 장비한 나타태자가 후예를 노려보며 외쳤다.
[덤벼라!]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라고 할까? 투선 중에서도 호전적이며 강하다는 보패인간 나타태자가 96층의 시련관으로 등장했는데 크게 긴장은 되지 않았다.
‘나타태자라고 해도 현재의 후예를 상대로는 못 이기겠지.’
그냥 후예가 싸우게 내버려두면 통과할 수 있는 시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혹시 나타태자에게서 알아낼만한 게 있지 않은가 해도 잠시동안 생각을 해 보았다.
콰아앙
하지만 이윽고 후예와 나타태자가 격돌하자 나는 별생각 안 하고 구경만 해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저 자들의 격돌에 괜히 내가 한 손 얹어봐야 후예를 방해할 뿐이며 심지어 나타태자의 움직임이 후예를 잘 따라잡지 못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흠. 기다려 볼까….’
쿠구구궁….
퍼엉!!
생각보다 전투가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나타태자는 혼천릉과 건곤권을 이용해서 후예의 적궁백시를 흘리거나 피하며 응수하고 있었고, 나타태자의 기민함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인지 후예는 섣불리 적궁백시의 제약을 풀어서 기습할 수 없는 듯 했다.
‘빠르다!’
나는 나타태자의 평균적인 움직임이 인간의 한계를 가볍게 초월하여 일반적인 인간 절대지경의 수준에서는 칼조차 대어 보기 힘든 정도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절대지경의 특성상 근접한 거리에서 찰나의 순간에 반격하거나 방어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평균적인 기동력이 생명체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는 것이다.
콰앙!
게다가 보패 화첨창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응수하는 것도 가볍게 해내는 듯 했으며 나타태자의 발에 달려있는 조그마한 바퀴 보패인 풍화륜은 일시적으로 나타태자의 속도를 초가속해주는 능력도 있는 듯 했다. 건곤권과 화첨창을 공격이 동시에 날아오는데다가 혼천릉으로 후예를 감싸려고 하는 파상공세를 보니 마치 자연재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서야 나는 나타태자의 강함이 진짜 보패를 완벽하게 활용하는 전투보패인간의 강함이란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하나의 보패조차 잘 쓰기 힘들어하지만 보패인간인 나타태자는 보패의 힘을 최대한으로 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와의 권능을 받아서인지 평상시보다 훨씬 더 강화되어 있는 게 분명할 것이리라.
‘인간끼리만 나타태자와 싸운다면 분명한 강적이다….’
그렇게 약 일백여 초가 지났을 때였다. 나와 함께 나와서 관전하고 있던 독고성이 불쑥 말했다.
“결판을 낼 생각이군.”
촤좌좌좍!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예의 적궁백시가 갑자기 천하를 가득 채우듯 무수한 무형의 화살을 쏘아내었다. 나타태자는 보패 혼천릉을 거대화시켜서 화살 모두를 릉 내부로 삼키려는 듯 했으나, 이윽고 벌어진 일은 신기(神技)처럼 보일 정도였다.
슈슈슉
“……!!”
놀랍게도 그 수많은 무형의 화살들은 마치 빛줄기처럼 변하더니 계곡의 물을 타듯, 살아서 움직이는 게 아닌가? 혼천릉으로 에워싸는 범위를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피하는 화살을 보자 저게 대체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타태자 또한 당황했는지 급히 풍화륜을 가속시켜서 피하려 했으나 그 때는 후예가 발사한 화살 한 방이 그의 어깨에 적중된 후였다.
가히 신궁(神弓)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궁술!
투웅!
화살의 적중과 함께 나타태자의 팔죽지가 그대로 떨어져서 하늘을 날았다. 분명한 치명상이었지만 나타태자가 개의치않는 듯 계속해서 풍화륜으로 고속이동을 했고, 놀랍게도 고속이동을 하는 와중에 나타태자의 사라진 팔이 고속재생되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뭐야 저거?! 사기 아냐….”
“아무래도 저게 여와가 나타태자에게 준 권능인가 싶군.”
“검마.”
“무한생명력과 고속재생. 나타태자 정도로 강대한 투선에게 저 능력이 있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악몽이 따로 없을 것이네.”
“…….”
퍼퍼퍽
지금도 나타태자가 미처 걷어내지 못한 후예의 필중 화살더미가 나타태자의 전신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하나하나의 부상은 아무렇지도 않게 숨 몇 번 쉴 사이에 완벽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으 제길….”
저런 놈을 상대로 절대지경의 의념절기를 도대체 몇 번 때려 박아야 죽을지를 생각해보니 아찔해질 지경이다. 하물며 나타태자는 둔하게 다 맞아주던 80층대의 마수들과 달리 자체기동력이 웬만한 절대지경을 상회하는데다가 전술전략까지 구사하는 보패인간이지 않은가? 전체적인 능력이 높은 존재가 체력과 방어력이 무한에 가깝다면 그 자체로 재앙이다.
‘운 좋게 대해방 칠요를 다 맞추면 가능할… 아니다. 정공법으론 도저히 무리…겠군.’
96층의 나타태자가 다소 쉬운 상대일거라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떨떠름하게 나타태자를 보고 있을 때 나타태자가 잠시 숨을 돌리듯 허공에 몸을 띄우며 말했다.
[후예! 저 인간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는지 몰라도 그만둬라! 시련관이 시련을 도와주는 일은 들은 적도 없다!]
후예는 그 말을 듣자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만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시련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다, 나타태자.]
[흥! 그렇다면 오늘 우열을 한 번 가려볼까.]
[…네 녀석도 나한테 호승심이 있다는 건가?]
쾅 쾅
나타태자가 자신의 건곤권과 화첨창을 부딪히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못 이길 것도 없지. 방금 전은 방심해서 몇 방 맞았지만 이제 네 궁술은 어느 정도 파악했다.]
[…….]
후예가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제곡 때문에 죽어지냈더니 개나 소나 나와 겨루려 하는군…. 내가 이따위로 취급받을 줄이야.]
[뭐라고?]
[봐줬던 건 바로 나다. 그럼 네 말대로 지금부터는 제대로 해 보자.]
[허세는….]
투콱
말이 끝나는 순간 후예가 발사한 화살 한 발이 건곤권의 중앙에 정확히 날아가서 꽂혔다. 관통된 건곤권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쳐다보던 나타태자는 급히 후예의 화살을 뽑아내었으나 다음 순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쩌적
[아니?!]
건곤권에 금이 가더니 마치 거미줄같은 균열이 생겨난 것이다! 본디 저 보패 건곤권은 신화시대의 강력한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예는 보패가 부숴지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어버린 것이다.
나타태자가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외쳤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보패를 부술 수가….]
[파괴력을 일점집중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화살에 그 정도 파괴력이 존재할 리가 없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놈. 기껏해야 인조인간 주제에 네가 내 궁술을 판단하려 하는가?]
후예가 차가운 눈으로 나타태자를 겨누었다.
퓨퓨퓽
나타태자는 이후 일백여 초 동안 열심히 싸웠다. 자신의 보패를 휘두르며 후예의 공격을 최대한 치고 막고 피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후예가 거리를 두고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이 되어버리자 나타태자는 풍화륜에 의지해서 회피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었고, 마침내 끝이 찾아왔다.
콰광
보패 화첨창과 혼천릉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후예가 적궁백시의 힘을 이용해서 부숴버린 것이었다.
퍼버벅
상중하단전이 차례로 화살에 꿰뚫린 나타태자의 의식이 사라진 듯 눈빛이 시꺼멓게 죽었다. 허공에 마치 박제당하듯 화살 수십 발에 꿰뚫린 나타태자의 모습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예가 내 쪽으로 날아와서는 말했다.
[이겼다.]
“…….”
[왜 그런 표정이지?]
“다 좋은데… 꼭 보패를 부쉈어야 했냐?”
그렇다. 보패 덩어리라고 할 수 있었던 나타태자의 거의 모든 보패가 전투중에 부숴져 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이동보패인 풍화륜뿐인 것이다. 풍화륜도 썩 나쁜 건 아니었지만 건곤권이나 혼천릉은 상급 보패였기에 아깝다는 생각이 심각하게 들었다.
후예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배가 불렀군. 그럼 보패인간의 힘의 근원이 보패인데 안 부수고 나보고 쓰러뜨리란 말인가?]
“아 뭐 어쩔 수 없었으면 말고….”
[마무리나 해라.]
“그러지.”
촤악
내가 이윽고 다가가서 대해방 칠요를 교차하며 반죽음이 된 나타를 없애자,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그리고 97층으로 가기 전 독고성이 자못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바로 무임승차하는 기분인가. 썩 나쁘진 않구나!”
“자기 손으로 쓰러뜨리는 게 무인의 긍지 아니었습니까?”
“내 싸움일 때의 얘기지. 알아서 싸워준다는데 굳이 거부할 것도 없다.”
“…….”
나도 독고성과 같은 생각이었기에 할 말이 없다.
파앗
97층에 도착하자 약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둠으로 가득한 사방의 분위기가 스산했으며 시꺼먼 수초 같은 게 사방에 가득한 하천에 온 것 같았다. 특이한 지형이었기에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스
잠시 후 97층의 시련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나는 그 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엥?! 아, 아니 잠깐! 당신이 왜….”
정말 왜 여기 있는 거야?!
너무 생각 외의 인물이 등장했기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흐리멍텅한 눈을 가진 회색머리칼의 청년.
그 자는 내가 이전에 마주친 적이 있었던 자였고, 나 이외의 동료들은 그 자를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지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이었다. 후예 또한 힐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는 자인가?]
회색 머리칼의 청년이 말했다.
“과연 범상치 않은 자로군요…. 첫 대면일진대 마치 나를 알아보는 듯한 그 반응은.”
“…….”
나는 힘겹게 그 자에게 말했다.
“귀영(龜靈). 당신은 천계 소속이 아닐 텐데 어째서 이 탑의 시련에 와 있는 것입니까?”
내 말에 동료들 중에서 검마만큼은 상대방의 정체를 깨달은 듯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설마….”
그리고 귀영이라 불린 청년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정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하군요…. 인간의 황제 백웅이여.”
“…당신이 여와의 말을 들을 이유는 굳이 없을 텐데 왜 여기 있는 건지 묻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럴 필요가 없는 존재잖습니까.”
“이유라면야 단 하나 뿐입니다.”
귀영은 현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본디 여기에 기린(麒麟)이 직접 시련관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내가 그를 말리고 대신 찾아왔습니다. 기린은 기필코 당신을 죽이려 하는 의지가 강했으니까요….”
“…크윽, 제기랄!”
나는 신경질을 낼 수밖에 없었다.
“그 기린이라는 새끼는 도대체 나한테 무슨 원수를 졌길래 예전부터 나를 봉인하거나 죽이려 든다는 겁니까?! 대체 왜!!”
“그건 저도 잘은 모릅니다…. 허나 그 또한 신성한 존재. 모든 것이 인과율에 의한 안배이겠지요.”
그 때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후예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귀하의 정체를 알 것 같소. 내게 나타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서 못 알아보았소.]
후예에게로 귀영의 시선이 향했다. 후예가 이어서 말했다.
[허나 내 생각대로라면 귀하는 백웅의 말대로 이런 곳에 기껏 시련관으로 등장할 존재가 아닌 것 같소만…. 찾아올 곳을 잘못 택한 것으로 보이는구려.]
“과연 대영웅 후예. 그대와는 예전에 면식이 있었지요. 십양을 떨어뜨리기 전 나에게서 점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 점은 아주 잘 맞았소. 그 점 덕분에 십양을 상처 하나 없이 쓰러뜨릴 수 있었으니 감사하오.]
“별 말씀을.”
[이후의 점괘도 귀하에게서 보고 싶었으나 도무지 있는 장소를 알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불사약에 대해서 다른 놈에게 점을 봤다가….]
후예는 뭔가가 무척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후예가 신화시대에 이미 귀영과 만난 적이 있었다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아마 나한테 해준 것처럼 점을 쳐준 거겠지….’
이제 알 만한 자는 다 귀영의 정체를 알고 있는 상황.
귀영은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말했다.
“나는 백웅에게 세계멸망의 인과율이 몰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운명을 점쳐주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역시 망량선사의 말대로인가?
나는 신중하게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여와가 원하는 것은 시련일진대.”
“물론 나와 굳이 싸우고 싶다면 다른 선택지도 가능합니다.”
귀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와 싸우겠다면 사대신수(四大神獸) 기린(麒麟)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살살 싸워 드리지요. 백웅 그대와 기린은 반드시 싸울 운명이니 이 싸움의 경험치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제기랄….
기린 그 놈이랑은 진짜 싸워야하나보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대가 종말에 임하게 될 운명에 대해서 점을 쳐 주고 가 드리지요…. 이게 본디 목적입니다.”
“…….”
나는 선택해야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귀영, 아니 실제 정체는 사대신수(四大神獸) 영귀(靈龜)가 내게 제안해 온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