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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우리는 장삼봉 진인을 따라 도관을 나가서 넓은 풀밭을 걸었다. 햇빛은 맑았고 바람도 따스해서 춘풍(春風)이 느껴졌다. 나는 걸어가면서 옆에서 내 팔을 들고있던 망량이 뭔가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걸 봤는데, 잠시 후 망량이 말했다.
“한 번 붙여보겠소.”
우웅
기이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던 팔이 바로 붙었다. 나는 신기해서 탄성을 냈다.
“오! 시해지술로 회복한 거요?”
“고속재생을 시킬까도 생각해봤으나 그대의 신력이 어찌 반응할지 몰라서…. 저항이 적도록 시해지술로 차원을 붙인 후 이었소. 영기가 앞으로 자연회복을 시켜주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팔을 심하게 쓰지 마시오.”
신기하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시해지술은 만능술법이란 느낌이 강했다. 이어서 망량이 장삼봉 진인에게 다가가서 팔을 붙여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장삼봉 진인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필요없소.”
그러자 망량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하긴 당신은 신선의 몸을 갖고 있으니 머지않아 천계의 기운으로 회복할 수 있겠군….”
장삼봉 진인은 그리 대꾸하지 않았다. 망량의 말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넓은 들판의 한가운데에 도달한 장삼봉 진인이 우리에게 말했다.
“먼저 말해두자면, 93층부터는 모두 [작은 굴레]를 조작하는 능력을 지닌 수문장들이 등장할 것이오. 그 능력의 비중이 적든 많든 간에….”
“…….”
역시 그런 건가.
다들 장삼봉 진인이 방금 전에 했던 말에서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크게 놀라기 보다는 예상했던 시련이 찾아온 느낌이었고, 그리고 예상했다 해서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굉장히 까다로운 시련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작은 굴레]!
그것은 바로 이 세계의 시공간(時空間)을 조작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큰 굴레]는 이 우주 전체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으니 그것만큼은 신조차 건드릴 수 없는 능력이었다. 다만 [작은 굴레]는 강력한 신적 존재 혹은 [지배자]라면 충분히 다룰 수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작은 굴레]를 조작하는 존재들의 힘이 필멸자의 차원을 아득히 넘어선다는 증거였다.
검마가 팔짱을 낀 채 침중하게 말했다.
“91층의 주후총 황제 또한 격으로 치면 상당히 강력한 사도급이자 마왕이었소. 그런 자도 [작은 굴레]를 움직이는 기색은 없었는데 그 이상의 적이 나온다는 것이오?”
“그렇소.”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오는 적은 전부 최소한 팔부신중의 삼강(三强) 이상이군…. 그 놈들도 [작은 굴레]를 다루기는 힘겨워했으니 그 이상이 틀림없어.”
팔부신중의 삼강.
천인, 아수라, 거룡.
이 세 존재의 막강함은 따로 설명할 것까지도 없었다. 같은 마왕중에서도 별격에 가까운 힘을 지닌 상위 마왕! 이런 놈들과 힘을 비교하려면 최소한 [옛 지배자]가 직접 사도로 임명한 이계의 최상급 존재쯤 되어야 하리라.
장삼봉 진인이 말했다.
“꼭 그렇게는 볼 수 없소. 더 강하다고 단정 지을 필요는 없소. 그건 과한 시련이지.”
“무슨 말이오?”
“아무리 이 탑의 시련이 여와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여와가 이 환영 속에서 자유자재로 극강한 존재들을 찍어낼 수 있는 건 아니오. 그게 가능했다면 여와가 [옛 지배자]급 존재를 양산해서 무적의 군대라도 만들었겠지. 이 탑의 수문장들은 단지 여와가 지닌 시공간의 권능을 쉽게 대여할 수 있는 것이오.”
검마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대여?”
“그렇소. 본디 이 시련은 복희가 어떤 이유에선지 만들어냈던 것이지만…. 최근에서야 여와가 참여한 것이오. 여와가 직접 수문장들의 혼을 이 세계에 불러오고, 그들에게 권능을 빌려줘서 [작은 굴레]를 움직일 수 있도록 특수한 힘을 불어넣은 셈.”
“…그렇다면 여와는.”
검마는 뭔가를 눈치 챈 듯 말했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신적 존재를 공략할 수 있는지를 보고 싶다는 말이구려.”
“바로 그것이오. 방향성이 명확하지. 그저 그대들의 전력(戰力)이 압도적이라 [옛 지배자]급 존재를 쓰러뜨릴 수 있다면 무엇하러 이것을 시련이라 하겠소? 힘자랑이라고 하겠지.”
“그래서 장삼봉 진인께서 우리에게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로군. [작은 굴레]를 조작할 수 있는 존재와 사전준비 없이 마주치면 전멸할 테니까…. 과연 탄복했소.”
하지만 검마는 이내 목소리를 흐렸다.
“허나…. 우리가 과연 할 수 있겠소? 우리가 알기로 그게 가능하려면 극한의 집중력과 깨달음이 필요한데, 더욱이 그 깨달음은 수천 년 무림역사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고차원적인 것이라 알고도 배우지 못하잖소.”
그 말에 장삼봉 진인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잘 알고 있구려. 그 말대로 방법을 알고 있어도 본디 깨달음으로 체현하기는 지난한 경지라 할 수 있소. 무시무시한 난이도를 지니고 있소.”
“그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수 있단 말이오?”
“물론이오. 그렇지 않다면 그대들 앞을 무엇하러 가로막았겠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르쳐줄 수 있소.”
그렇게 말한 장삼봉 진인이 약간 형형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만한 자격은 보아야 했소. 이는 본도가 종말에 대비하여 적공(積功)해두었던 인과율을 소모하는 일…. 그렇기에 그대들을 시험했던 것이오. 그리고 그대들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음 또한 확인했다오.”
“흠….”
“자, 다들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보시오.”
장삼봉 진인의 말에 모두가 일제히 가부좌를 틀고 드넓은 들판에 앉았다.
장삼봉 진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시간이란 혼돈이며, 공간 또한 혼돈이오. 세계의 태초는 혼돈이었으니 혼돈에서 파생된 시간과 공간 또한 혼돈일 수밖에 없소. 정작 이런 말을 하는 본도도, 그대들도, 그 모든 영혼과 육체가 사실은 혼돈에서 파생된 것이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혼돈이라 생각하시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검마였다.
“혼돈에 반대되는 태허(太虛)란 게 있다고 알고 있소. 태허가 존재하는 한 혼돈은 ‘모든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태허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으니 다행이오. 설명하기가 쉽겠군.”
장삼봉 진인이 말했다.
“그 말대로 혼돈과 별개로 태허라는 게 존재하오. 그러나 혼돈과 태허의 관계는 단순히 반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는 문제요. 언뜻 반대로 보이지만 그 두 가지는 본디 하나인 것이오.”
“…무슨 말이오? 하나라니?”
“우주의 멸망이 닥쳐오게 되면 혼돈과 태허가 쌍소멸(雙消滅)하게 되며, 그 위대한 소멸의 끝에 무엇이 남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소. 허나 그 소멸이 이뤄진 상태는 정녕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인 허무(虛無)라 할 수 있겠소?”
“…….”
“무(無)란 유(有)를 내포할 수 없다…. 정녕 그렇겠소? 소멸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 자체가 유(有)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오?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소.”
…우리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했지만, 저건 너무 어려운 말이다.
개념적인 차원이라서 도저히 못 알아듣겠다.
‘뭔 소리여….’
나는 나만 못 알아들었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나만 못 알아들은 건 아닌지 탐사대 전원이 못 알아먹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일하게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은 오직 망량뿐인 듯, 망량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장삼봉 진인의 말에 대꾸했다.
“유즉무(有卽無)라면 무즉유(無卽有)도 된다는 소리구려. 허무를 존재 그 자체로 판별하는 게 아니라 존비존(存非存)의 부정을 전제로 개념을 확정하는 것…. 허나 그것은 무(無)를 어찌 정의내리느냐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문제일 뿐이라 생각했소만…. 그게 설마 무학(武學)의 이론이 될 수 있다곤 생각지도 못했소.”
“허허…. 그대는 두뇌가 총명하여 한 번에 이 개념을 알아들은 모양이구려. 허나, 아까도 말했듯 이 개념이란 두뇌로 이해해도 쓸모가 없소. 왜냐하면 이 개념을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실제로 허무의 영역에 무학을 도달시킬 수 있는, [손을 뻗을 수 있는 자]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 그렇기에 섣불리 이론으로 다 이해했다고 단정짓기 말기를 바라오.”
망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소. 그것이 바로 그대들 무신의 백좌가 존재하는 이유겠지. 이론으로만 되는 거였다면 그대들이 존재할 필요가 없으니.”
장삼봉 진인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현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윽고 뒤에서 듣고 있던 무영검제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보시오, 장 진인! 너무 말이 어려워서 못 알아먹겠소! 무가 어쩌고 유가 어쩌고 해도 우리는 평생 칼밥먹고 살아온 자들이라 사실 어려운 개념은 알 수가 없소. 무학의 이론에 통달하려면 도학과 글공부도 좀 해야하기에 약간의 공부는 했소만, 그것만으론 영 못 알아들을 소리를 많이 하시는구려!”
“호오….”
“내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있소. 내 평생 열다섯 권이나 되는 무공비급과 신공절학을 읽었으나 장 진인이 했던 말보다 어려운 글귀는 단 한 구절도 없었소!”
내 말이!
그러자 장삼봉 진인이 말했다.
“무영검제여. 만일에 무한히 뻗어나가는 직선이 있다고 생각해 보시오.”
“생각했소. 그게 뭐가 어쨌단 것이오?”
“그 직선은 언제가 되었든 ‘끝’이 다가오게 될 것이오. 그 직선이 설령 우주의 겁천(劫天)을 둘러쌀 정도로 무한히 길다고 해도, 어쨌든 끝은 존재하오. 그렇다면 그 직선에서 ‘끝’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겠소?”
“……?”
무영검제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쳐다보았다.
“전 모르겠는데 폐하께선 아십니까?”
“…….”
아니 왜 나한테 물어보는 거냐고!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으, 으음. 직선을 뻗어나가게 하는 사람이 직선그리기를 멈추지 않으면 되지 않겠나…. 계속 그리고싶다 생각하면 끝이 없지 않겠소?”
내 말에 장삼봉이 껄껄 웃었다.
“허허허! 그 말도 맞구려. 허나 존재하는 건 언젠가 쇠하게 되어있고 우주에는 끝이 반드시 존재하니 그건 불가한 일이오.”
“음…. 왜 끝을 만들면 안 되는 것이오?”
“이것은 무학상의 비유요. 끝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한의 존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오.”
“……?”
무한의 존재?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잘 이해가 안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다들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장삼봉 진인이 망량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이 수수께끼의 해답을 바로 알아챘을 터인데 한 번 말해보겠소?”
장삼봉 진인의 말에 망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러지 않겠소. 어차피 본인이 깨닫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이 아니겠소? 게다가 미리 정답을 알려준다면 깨달음을 방해하는 거겠지.”
“잘 알고 있구려.”
이제보니 망량에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모양이다. 우리 또한 장삼봉 진인의 뜻을 알아듣고는 심사숙고하기 시작했고, 장삼봉 진인이 말을 이었다.
“우선은 하루의 시간을 줄 터이니 여기서 차분히 각자 이 문제를 생각해보시오. 그 후에 다음 수련으로 들어가겠소.”
“알겠소.”
“꼭 답을 맞춰야 하는 건 아니니 답에만 집착하지 마시오.”
우리는 장삼봉 진인의 수수께끼에 골몰했다.
과연 무한의 직선에서 끝을 없애는 방법이 무엇일까?
나는 한참동안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는 거지?’
무한의 직선에 끝이 존재한다. 그런데 무한히 이어질 수가 없게 되어있다. 어떻게 해야 끝을 없앨 수 있는 걸까? 나는 끙끙대면서 계속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으음! 생각하자 생각 생각….’
그렇게 두 시진이 흘렀다.
그리고 다섯 시진이 흘렀다.
나는 생각하다가 머리에 쥐가 나서 잠시 근처의 나무 밑에 가서 한 숨 잤고, 다른 무인들도 더러 와서 나처럼 쉬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들판에 누워서 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서서 칼휘두르기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가 별나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가가서 말했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좀 생각이 날 것 같소?”
그는 바로 동영의 대검호이자 이번 생에 대웅제국에 영입된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였다. 그와 츠카하라 보쿠덴 또한 탐사대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생전에 반로환동을 달성해서인지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내게는 꽤 생경한 모습이었다.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몸을 움직이다보면 뭔가 떠오를 때가 있으니까 수련이라도 해 봅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같이 합시다.”
부웅 부웅
나는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와 함께 열심히 상단세와 중단세 베기 연습을 했다. 그리고 아무 의미도 없이 칼을 휘두르다 보니까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새 하루가 지나 있었고 장삼봉 진인이 우리에게로 와서 말했다.
“이제 해답을 말해줘도 되겠소?”
나는 물론이고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자 장삼봉 진인이 말했다.
“정답은 바로 이것이오.”
스스스
그는 양 팔을 써서 서서히 태극권의 자세를 취했고, 그 자세를 보자 나는 그가 어째서 하루의 시간을 주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팔이 생겼구나.’
어느 새 내게 잘렸던 장삼봉 진인의 잘린 팔은 회복되어서 멀쩡히 양 팔을 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하루의 시간동안 대라신선의 힘으로 팔을 회복한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양팔을 쓸 수 있어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태극권의 첫 초식부터 마지막 초식까지 마치 실에 꿴 듯이 이어지는 장 진인의 무공시연을 보던 중, 나는 특이한 점을 깨달았다.
‘초식 하나하나가 연결될 때마다 태극의 환영이 떠오르는구나….’
저게 무쌍패는 아니겠지만 장 진인이 달성한 경지를 은유하는 듯 했다. 잠시 후 시연이 끝났을 때 장 진인은 한손으로 건(乾), 다른 한 손으로 곤(坤)을 표현하고 있었다. 또한 장중한 태극의 원이 떠올라 있었는데 장 진인이 곧장 말했다.
“자, 여기서부터 주목하시오….”
그렇게 말한 장 진인이 이번에는 마지막 초식에서 끝 초식까지를 천천히 시전했는데, 놀랍게도 초식을 역순으로 진행하는데도 한 줌의 어색함이나 껄끄러움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시연을 본 나는 강하게 머릿속에서 깨달을 수가 있었다.
“……!!”
그런건가!
깨달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무영검제가 크게 놀라서 말했다.
“끝과 시작을 잇는다는 말이오?”
저 시연이 상징하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시작에서 끝으로 가든, 끝에서 시작으로 가든 상관없다는 걸 의미했기에 결국 끝과 시작이 이어져있다는 뜻이다.
“바로 그것이오.”
“허허…. 확실히 그러면 끝이 없어지긴 하겠지만.”
무영검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건 굳이 태극권으로 안 보여줘도 되잖소. 그냥 어제 말로 해도 됐을 텐데 어째서….”
“아직 깨닫지는 못했구려.”
“뭐요?”
“그대는 끝과 시작을 이을 수 있소?”
“흥!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닌 듯 한데.”
코웃음을 친 무영검제가 그대로 자신의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서서히 검술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검술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무영검제가 지금 펼치는 초식…. 무영문 무영탈혼검법과 남궁가의 제왕검법이 절묘하게 합쳐졌군. 초식 하나하나는 원래 모습을 남겨둔 채 자기 뜻대로 초식의 흐름을 변환하는 것인가?’
과연 즉석에서 그게 될까? 검법의 초식 하나하나는 무수한 연결점과 고리를 지니고 있기에 조금이라도 합이 틀어지면 다음 초식으로 연계되지 않는다. 하물며 두 개의 절세검법에 존재하는 초식을 뒤섞는다는 건 굉장히 난해한 일이 분명했고, 보통의 검사라면 연 단위로 그것만 연습해도 꼬일 가능성이 컸다. 무영탈혼검법만 해도 무영검법과 탈혼검법이 합쳐진거라서 변화가 수백 수천가지인데 제왕검법 또한 초식변형이 많은 환검의 성질이 있었기 때문이다.
슈슈슛!
‘괴, 굉장하군.’
그러나 나는 무영검제의 초식이 마치 실에 꿴 듯이 이십 초를 가볍게 돌파하는 걸 보자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놀랍게도 그는 그 어려운 일을 즉석에서 해낸 데다가 장삼봉 진인처럼 초식의 연계가 하나도 꼬임없이 물흐르듯 역순으로 이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저게 되려면 수만 개나 되는 초식의 변화를 하나하나 다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무영검제 또한 검술의 기린아이자 천재! 저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는 나는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절대 즉흥적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인데 그저 천재적 재능과 검술경험으로 해낸 게 분명했다. 이윽고 완벽하게 시연을 끝낸 무영검제가 오연하게 말했다.
“어떻소! 흠잡을 데 있소?”
“아니오. 정녕 천하무림에서 검제(劍帝)라는 칭호를 지닐 자격은 있구려.”
“흥, 알았으면 됐….”
“허나 공격과 방어가 일체가 되지 않았으니 그저 껍데기를 따라했을 뿐이오.”
“뭣!”
“자, 다시 한 번 그대의 시연과 잘 비교해 보시오.”
장삼봉이 또다시 태극권무를 펼쳤다. 처음에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던 무영검제였으나, 이윽고 처음에서 끝까지 한 차례 시연된 후 역순으로 다시 진행될 때 갑자기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장삼봉이 태극권무를 마무리하자,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장 진인. 무례를 용서하시오.”
“그대가 깨달았으면 된 것이오. 이제 그대는 ‘끝’과 ‘시작’이 통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오.”
“정녕 그 경지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오?”
무영검제는 왠지 장삼봉 진인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그 경지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장담할 수는 없소. 그러나 체감시켜줄 수 있도록 본도가 최대한 노력할 것이오.”
그렇게 말한 장삼봉이 슬며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대들 중 일부는 이미 체감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는 장삼봉 진인의 눈은 검마를 향하고 있었다. 검마는 그 눈빛을 받고도 아무런 동요없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더니 장삼봉 진인에게 말했다.
“장 진인. 이제 와서 우리가 이 기술을 터득한다 한들 늦은 게 아니오? 탑의 시련만이 우리의 목표인 건 아니오.”
검마는 무슨 의도로 질문을 한 걸까?
그러자 장삼봉 진인이 눈을 감으며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소. 이 기술을 그대들이 습득한다 하여 종말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오. 검령(劍靈)을 습득한 그대가 좀 더 빨리 본도를 만나서 이걸 익혔다면 모르겠지만 이젠 늦었지. 여와가 탑의 끝에서 엄청난 보상을 준비하지 않은 한은.”
“결국 우리는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오?”
“그건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소. 그리고 그대들은 그렇지 않다 생각하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오.”
“…….”
“의지를 잃지 마시오. 그것은 혼돈이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니.”
“유념하겠소.”
검마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백웅. 자네는 장삼봉 진인의 말을 알아들었는가?”
“…음, 그게.”
“못 알아들었군.”
“…….”
사실 그렇다. 방금 전에 무영검제와 장삼봉 진인이 대단한 걸 보여줬다는 건 인지하고 있으나 무영검제가 왜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놀랐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무영검제만이 느낄 수 있는 뭔가가 있었던 걸까?
그러자 검마가 말했다.
“장 진인. 그대가 백웅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먼저 백웅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소. 그와 잠시 수련을 하고 오겠소.”
“그리 하시오.”
“그리고 망량. 엿듣지 마시오.”
망량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람을 도청꾼 취급하는군. 내 이름을 걸고 엿듣지 않겠소.”
“좋소.”
파밧
이윽고 나는 검마를 따라서 수련장에서 떠났고 무한한 벌판에서도 약 수십 리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멀리 떨어져 온 검마가 말했다.
“백웅. 나는 자네의 전생기억을 받아서 과거의 ‘나 자신’인 검마가 마왕이 된 무사시를 상대로 싸웠던 기억을 알고 있네. 베루스가 돌리는 [작은 굴레]에 저항해야만 했지.”
“그런 일이 있었지요.”
“그 당시의 나는 지금 장삼봉 진인이 가르쳐주려는 경지에 이미 도달해있었다네. 태허를 깨달아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경지가 아닌가? 지금 장삼봉 진인은 그 경지를 ‘기술’로써 가르쳐주려는 모양이네만, 사실 그건 기술이라기보다는 다른 경지에 한 발 내딛는 느낌일세.”
“검마.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습니까?”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당연히 나 스스로 그 전생기억을 보고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수련을 해 왔기 때문일세. 아마 탐사대 중에서도 나나 명룡자만이 해왔던 수련일 걸세.”
“……!!”
“다른 자들은 자기자신의 절대지경 무공을 연마하는 것만으로도 바빴으나 나는 다른 자들보다 무공진보가 늦어지는 걸 각오하고 천계에서 꾸준히 노력을 해 왔던 것일세. 그래서 초중기에는 다른 자들보다 약한 편이었으나 나중에야 따라잡을 수 있었지.”
나는 놀라서 검마에게 말했다.
“설마 지금 태허를 깨달아 [작은 굴레]에 저항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단 말입니까?”
검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세. 그건 아무리 수련해도 인위적으로 쓸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어. 아마 예전의 ‘검마’가 거기에 도달한건 극한의 집중상황이 만들어낸 천추의 우연이었겠지.”
“흐음.”
“말했듯 그건 기술이 아니라 다른 경지에 한 발 내딛은 것이고, 무신에게 선택되는 경지라 할 수 있네.”
“…무신? 설마 그게 신역의 무공이란 말입니까?”
“그건 모르겠네. 내가 아직 신역에 도달하지 못했는데 어찌 신역을 논할 수 있겠나? 단지….”
검마가 말을 이었다.
“나는 그 기억을 바탕으로 수련을 하던 중 또 다른 가능성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게 바로 지금 내 절대지경 무공인 탈혼검령(奪魂劍靈)이 된 것일세. 그렇기에 장삼봉 진인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지.”
“아….”
장삼봉 진인은 ‘체감’을 논하면서 검마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장삼봉 진인이 검령과 이미 겨루어 보았기에, 검령 그 자체가 [작은 굴레]의 체감과 연관되어 있는 무공이란 걸 깨달았다는 것이리라. 나는 검마에게 말했다.
“대충 상황은 알겠습니다. 근데 여기까지 절 데려오신 이유가 뭡니까? 그냥 장삼봉 진인이 있는 곳에서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겁니까?”
“…….”
검마가 침묵하다가 갑자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탈혼검령(奪魂劍靈)
절기(絶技)
탈혼괴섬(奪魂壞殲)
기우뚱 -
그 일 참이 휘둘러짐과 동시에 원형의 검파(劍派)가 뻗어나갔고 허공에 실선이 그어졌다. 또한 시공간의 감각이 크게 어그러진 듯 했다. 아무래도 그가 공간을 베어서 주변과 왜곡시킨 게 틀림없었다.
‘망량과 장삼봉을 믿지 못 하는군….’
아마도 시해지술로 엿듣거나 초인적인 능력으로 듣는 걸 방지하려는 듯 했다. 검마가 침중하게 말했다.
“우선 일차적으로는 그대가 앞서나갈 수 있도록 비결을 알려주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그대가 알아야할 것이 있기 때문이지.”
“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나 자신과 딸아이를 큰 위험에 빠뜨릴 것일세. 그렇기에 자네 이외의 그 누구에게도 알릴 수가 없어. 설령 탐사대나 장삼봉이라 하더라도…. 부디 이번 생에는 이 이야기를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을 해 주게.”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서문혜한테도 위험이 간다고? 어째서입니까?”
“약속을 해 주면 이야기를 하겠네.”
“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겠습니다.”
“좋아.”
이어진 검마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나의 검령(劍靈)은 굴레의 특이점을 목격한 결과일세. 나는 검령을 쓰면 쓸수록, 나의 딸을 내 손으로 베어버리는 미래에 가까워져 가는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