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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검마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망량이 대라신선을 처형시켰다고?’
잔인한 손속이라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놀란 건 그런 게 아니다. 어차피 망량은 공사구분이 철저하고 악에 용서가 없는 성격이란 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놀란 것은 망량의 새로운 힘이 십이대선을 뛰어넘을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일단 침착하게 머릿속을 정리하며 말했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말해줄 수 있습니까? 그 새로운 힘이라는 건 뭔지 알아야겠습니다.]
“…….”
[검마. 왜 말을 안 하십니까.]
검마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망량이 이쪽으로 오고 있군.]
[네?]
[나름대로 티를 안 내려 했으나 그가 눈치를 챈 모양일세.]
나는 힐끔 지평선 너머를 보았다. 수십 리도 넘는 곳에서 확실히 망량이 축지법을 써서 오는 게 느껴졌다.
파앗
이윽고 우리 앞에 망량이 나타났다. 망량은 힐끔 검마를 한 번 쳐다본 후 내게 말했다.
“아마도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겠지.”
“…….”
“과거 나와 백웅 그대가 했듯, 육성으로 대화하며 육합전성으로 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은 게 아니겠소?”
말 한 마디에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망량은 지금 상황을 대충 눈치챈 데다가 아직은 망량을 적으로 돌릴만한 근거가 없는 단계다. 동료 간에 괜한 불신을 키우기보다는 일단 인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냥 이 자리에서 질문해 버리자.’
어물쩡 숨기고 있으면 골만 깊어질 뿐이리라. 아직은 망량을 따돌리는 게 아니라 비밀이야기 정도로 치부하는 게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당신이 새로운 힘을 얻었다고 들었소. 그 힘이 무엇이고 어떤 근원이 있는지 내게 말해줄 수 있겠소?”
“말하지 않은 건 내 잘못이군. 내가 그 동안 새로이 얻은 힘은 명계에서 얻은 힘이오.”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는 망량이었다. 나는 그 대답에 약간 안심하며 반문했다.
“명계?”
망량은 내 반문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신이 전생여정동안에 얻은 수확은 비단 무공지식 뿐만이 아니오. 당연히 무주공산 상태인 명계, 그리고 그 명계의 심처에 있는 강력한 보물들의 위치까지 알게 되었잖소? 500년 동안 그걸 그냥 두고보기는 너무 아까웠소.”
“…명계를 탐사했단 말인가!”
나는 약간 놀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뇌자에는 당신이 명계를 탐사한 기록같은 게 남아있지 않았소만.”
이게 문제다. 망량이 명계를 탐사했다면 그걸 전뇌자에 기록하거나, 전뇌자 이전의 시대라면 다른 동료들에게 정보를 공유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디에서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실인지라 이제서야 망량의 입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내 말에 망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명계를 탐사하기 시작한건 천계와 인계가 분리되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 본격적으로 대라신선의 위(位)를 얻어 시해지술이 경지에 오르고 난 다음부터 명계탐사에 도전했소. 그 때는 천계와 인간계가 멀어져 있어서 다른 동료들에게 상황을 알리기도 여의치 않았고, 또한 탐사대에게 명계탐사를 도와달라 하기에는 복희탐사조차도 너무 힘든 여정이었지. 그래서 그냥 개인적으로 파헤쳤소.”
그렇게 말한 망량이 백우선을 잠시 펄럭이곤 말을 이었다.
“지금에야 다들 투선급의 힘을 갖추게 되어 한결 편해졌지만 탐사대 초창기에는 난리도 아니었지. 대부분 절대지경 초입이었는데 그 정도 힘으로는 먹히지 않을 정도로 시련이 어려웠소. 종말까지 탐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함과 악랄한 난이도 때문에 무쌍패 등의 절기를 따로 수련할 여유조차 갖추지 못할 정도였소. 그런 동료들에게 명계 이야기를 해서 마음의 부담을 더하게 만들 순 없었소.”
“으음….”
그럴듯한 이야기다. 안 그래도 정해진 종말을 극복하는 게 너무나 절망적인 난이도라서 근근이 버텨가는 자들에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으리라. 검마가 듣고 있다가 불쑥 이야기했다.
“그래, 자네가 간혹 명계를 찾아볼 생각이 있단 얘기를 지나가면서 하긴 했지만 진지하게 우리에게 털어놓은 적은 없었지. 이해는 가네. 그 덕에 우리 탐사대는 쓸데없이 중압감을 느낄 일은 없었으니까.”
검마의 안광이 형형해졌다.
“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해 보이는군. 명계의 탐사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그런 조잡한 변명으로 우리를 기만하려 드는 거지? 명계에서 얻은 것 중에서 천계공략에 도움이 될만한 유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왜 우리와 공유하지 않은 건가.”
“지당하신 말씀이오. 그래서 나를 따돌리고 백웅에게 넌지시 나를 의심케 만든 것인가.”
“의심할만 해서 했다고 생각지는 않는가? 합리적인 설명을 해 보게. 자네의 특기일 테니.”
나는 검마 또한 한 마디도 안 지고 날이 섰다는 걸 느꼈다. 겉으로는 망량과 사이가 좋아보였지만 실상은 그 동안 검마가 느꼈던 찝찝함 때문에 균열이 적잖게 있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리 말하니 일단 명계탐색의 결과물을 보여드리지.”
망량은 천천히 백우선을 좌로 흔들었고, 그러자 공간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많은 보물이 튀어나왔다.
후두둑
“자, 이게 명계에서 내가 얻었던 보물이오.”
나는 그 보물들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중얼거렸다.
“평등대왕의 법장, 무조의 괴, 황천릉…. 그 외에도 네다섯 개가 더 있구려.”
나는 암기력은 좋은 편이라서 명계탐색 당시에 전륜성왕의 방에서 얻었던 물건이 무엇인지는 다 외우고 있다. 내 말에 망량이 대꾸했다.
“그 전생 당시에는 삿갓무사도 쫓아오고 여유가 없어서 그대가 3개 이상의 보물을 얻지는 못했지만 5개의 보물이 더 숨겨져 있었소. 나는 시해지술을 대성한 후 명계로 가서 약 7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륜성왕의 방을 완전공략했고 그 결과 모든 보물을 얻게 되었소.”
“잘 되었군. 근데 이걸 왜 탐사대에게 알리지 않았….”
“이 황천릉을 잘 보시오.”
우웅
망량의 손에 황천릉이 들리자, 거기서 기묘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그 파동은 명백히 이질적이고 사악한 기운을 품고 있었으며 마치 전신의 피부를 찌르는 듯 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검마는 흠칫하며 뒤로 물러서는 기색이었는데 방금 전의 파동에 큰 압박을 받은 듯 했다.
“으음.”
그러더니 더 버티지 못하고 두 걸음이나 물러나는 검마였다. 망량이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백웅, 당신은 별다른 영향이 없구려.”
“따끔따끔한 느낌은 드는데 그렇게 아프진….”
“…보다시피 회수한 유물에서는 모두 알 수 없는 파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소. 아무래도 회수하는게 너무 늦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추측하고 있소.”
“무슨 말이오?”
“구천현녀께서 말씀하시길, 이 황천의 유물들은 누군가를 [부르는] 파장을 내뿜는 중이라 하셨소. 누군가가 미리 이 유물들을 묻어두어서 인과율에 의해 자신을 끌어들이도록 안배해 뒀다는 이야기였지. 또한 그 소환의 파장은 지극히 강력하고 오래된 이계의 힘이므로 이 파동을 정화하지 않으면 이 유물을 쓸 수 없소.”
망량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명계보물의 회수에 나선 것은 천계를 분리시킨 후 백 년이 훨씬 넘은 후의 일. 우리의 시대로부터 수백 년이 지나면 회수해도 쓰기 힘들다는 단점을 알아낸 것이오.”
“구천현녀가 파동을 정화할 순 없소?”
“말했듯 이건 인과율의 촉매. 구천현녀 또한 신이니 인과율과 연관된 유물을 섣불리 건드리긴 힘드오. 그래서 내가 그 동안 아공간보패를 이용해서 이 유물들을 보관하며 지속적으로 정화해오고 있던 참이었소.”
“흠…….”
나는 이상한 점을 알아채곤 말했다.
“근데 망량 당신은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그 황천릉을 멀쩡히 들고있지 않소?”
“요점을 짚었군. 그게 바로 내 새로운 힘의 근원이오.”
“새로운 힘?”
“나는 오랫동안 명계의 보물을 보관하면서 이 파장을 정화시킬 방법을 연구하던 중, 내 시해지술로 [흡수]하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소.”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흡수?”
“그렇소. 이 파동은 인과율의 촉매이므로 [부름]의 의지가 있는 한 없앨 수 없소…. 그렇다면 부르는 힘 그 자체를 시해지술으로 내 것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소. 보시겠소?”
우웅!!
갑자기 황천릉을 들고 있던 망량의 손에서 황색의 영기가 일렁였다. 그 영기는 신선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걸 훨씬 뛰어넘어서, 잠깐동안이지만 초월적인 영역에 가까운 힘을 뿜어내었다. 동시에 망량의 머리카락도 영기에 흩날리며 이글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유물에서 힘을 빨아들여서 파동을 약화시키면서 내 힘을 강화시켜왔던 것이오.”
“으음! 그 힘을 쓰는 게 위험하진 않소?”
“전혀 그렇진 않소. 말했듯 파동을 흡수하는 것뿐이니까.”
스르륵
힘의 흡수를 멈춘 망량이 차분한 눈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파동이 너무 강해서 놔두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간이 왜곡될 정도였소. 하지만 지금은 많이 나아졌기에, 종말 전에는 어떻게든 이 유물들을 사용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오.”
“그랬군….”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알리지 않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오. 허나 이유는 앞서 말했듯 여러가지가 있었소….”
나는 검마를 돌아보며 말했다.
“망량의 이야기에 틀린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
검마는 이상할 정도로 고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망량…. 아무리 보아도 자네가 지닌 8개의 명계보물 중에서 명경(冥鏡)은 보이지 않는군. 어째서인가?”
“명경은 구천현녀께 드렸소.”
“뭐라고? 어째서….”
“명경은 다른 차원을 비춰보고 자유롭게 다른 차원계로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도 있소. 천계 쪽에서도 인간계를 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명경이 그런 단순한 물건이 아닐 터인데. 나는 술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명경은 그 이상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니었나?”
“나는 천계의 유지에 필요하다고 느꼈소.”
그러자 검마는 잠시 하늘을 보다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후회할 짓을 하지 말게, 망량….”
파앗
검마는 갑자기 경공을 발휘해서 팔괘궁 쪽으로 가 버렸다. 내가 그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백웅. 이 유물들은 정화가 덜 되었으나 필요하다면 넘겨주겠소.”
나는 손을 저었다.
“아니 됐소. 남은 탑의 공략을 할 때 당신이 요긴하게 써 주길 바라겠소.”
“…….”
“왜 그런 눈으로 보시오?”
망량이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백웅. 당신은 나를 믿소?”
“믿소.”
“검마가 방금 왜 저런 반응이었는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
“당연히 당신이 뭔가 숨기고 있다 생각해서겠지.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 왜 황천의 유물을 주겠다는데 받지 않는 것이오.”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는 망량 당신을 믿소. 그거뿐이오.”
망량이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까지 의심하기에는 망량을 믿고싶은 마음이 더욱 큰 것뿐이다.
“…그런가.”
망량은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짓다가 술수를 부려서 다시금 황천의 유물을 자신의 아공간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수십 번을 죽었는데도 당신은 정녕 예전 그대로구려.”
나는 망량과 함께 팔괘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약간의 작전회의를 거쳤다.
“지금부터라도 무쌍패를 다같이 수련해 보는 건 어떨까? 무쌍패를 다 알고 있다면 승산이 조금쯤은 높아질 텐데….”
내가 의견을 냈지만 검마가 곤란하다는 듯 했다.
“지금까지 무쌍패를 수련할 줄 몰라서 안했던 게 아닐세. 종말까지 너무 빠듯해서 수련할 여유조차 내지 못했고 자기자신의 무학을 다듬기에도 바빴기 때문이지. 무쌍패를 통해 음양의 진의를 얻어내려면 최소한 자네처럼 십여 년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련에만 매달려야 하지 않는가?”
“그래도 십육 년 정도 남았는데 십 년 정도는….”
“그 십 년도 자네에게 장삼봉 본인이 붙어서 하나하나 다 가르친 것이었네. 그건 무인으로써 말도 안 되는 특혜였다고 할 수 있지. 우리가 피상적인 무학경험만으로 무쌍패를 넘보려 하면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
“그렇다 해서 자네가 무쌍패를 남에게 가르칠만큼 완벽하게 숙련된 것도 아니고…. 장삼봉처럼은 가르칠 수 없겠지.”
그, 그렇겠구만….
내가 끄응하는 소리를 내자 망량이 말했다.
“또 하나의 편법이라 한다면, 여동빈에게 가서 화룡진인의 영만 소환하겠다고 허락을 받는 것이오.”
“응?”
“화룡진인에게는 대라신선을 즉시 소멸시킬 수 있는 응룡왕의 인(印)이라는 능력이 있소. 아무리 장삼봉 진인이 강하다 해도 그도 신선의 하나이기에 그 권능을 피하지 못하고 소멸당할 것이오.”
“…그런 방법은 안 쓰기로 했잖소.”
“상황에 따라서는 쓸 수도 있다 생각하오.”
그 때였다.
“가타부타 시끄럽기만 하군.”
장내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자에게로 쏠렸다. 나는 나타난 자를 보고 말했다.
“명룡자!”
“다들 나를 따라와라.”
파밧
명룡자가 경공으로 신형을 옮기자 나를 포함해서 모두가 그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명룡자는 한적한 들판으로 나온 후 모두에게 말했다.
“장삼봉 조사와 싸운다 들었다. 딱 한 번만 그를 꺾을 단서를 보여줄테니 잘 보아라!”
그렇게 외친 명룡자가 갑자기 나를 향해 쇄도해 왔다.
구요신검(九曜神劍)
절대지경의 신검류가 내 명치를 쪼갤 듯 날아오자 나는 곧장 검으로 쳐내려 했지만, 내가 방어초식을 전개하자마자 명룡자의 칼끝이 요이(妖異)하게 흔들리는 듯 했다.
태정조극(太正操極)
구요쌍관검(九曜雙關劍)
따앙!!
시퍼런 의념의 기운이 갑자기 열여덟 개로 분열하더니 사방팔방을 찔러왔다. 나는 급히 그 공격을 막았지만 검결 하나하나에 태극이 맺히더니 구요신검이 갈수록 무거워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검?’
하지만 단순한 중검이 아닌 듯 했기에 이대로 안이하게 막으면 큰일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량단으로 반격할 틈을 찾으려 했으나 명룡자는 빈틈없이 공격해 왔으므로 여유가 나지 않았다.
촤앗
마침내 명룡자의 검끝이 내 볼을 살짝 스치며 혈선이 났다. 내 간격이 깨어졌다는 뜻이었으며 이제 두세 번만 더 공격하면 명룡자가 내 방어를 완전히 뚫고 한 칼을 먹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태극의 일검이 내 미간으로 쏘아지듯 날아들었다. 삼보절기로 무마할 수 있을지 확신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일격!
“……!!”
무쌍패!
나는 그 순간 모든 집중력을 동원해서 무쌍패를 시전했다. 음양의 기운이 패도와 무위전변을 거쳤고, 명룡자의 필살의 일검이 무쌍패에 무효화되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나는 명룡자에게 외치려 했다.
“이게 무슨 짓…….”
그러나 그 때였다. 명룡자의 검이 그의 중단에 맞춰서 일직선으로 곧추섰고, 명룡자의 안광이 빛나며 신검합일의 기세로 의념천주가 크게 솟아올랐다. 명룡자의 의지에 따라 현실이 변혁된다는 게 느껴졌다.
진(眞) 태극혜검(太極慧劍)!
명룡자의 몸 전체가 태극이 되어 빛나고 있었다. 검극에 완연히 솟아오른 태극은 강대한 패도를 내뿜기 시작했고, 나는 패도의 변화를 쳐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것은 설마….
콰아아앙!!
“크윽!”
이윽고 내뻗어진 명룡자의 태극혜검은 내가 펼쳐낸 무쌍패와 충돌했다. 그러나 나는 무쌍패의 무위전변으로 태극혜검의 괴력을 무마할 수 없었으며 마치 두 개의 태극이 상쇄되는 듯 하는 걸 느꼈다.
나는 명룡자가 바로 달려들어서 내 목을 칠거라고 생각했으나 명룡자 또한 기력소모가 심한지 안색이 약간 창백해져 있었다.
명룡자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본디 우리들의 시대, 강호에는 무당파의 태극혜검이 천하일절이며 무당파의 제일검법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태극혜검이란 그저 남겨져있던 절세검법 중 사상검(四象劍)의 상승검로를 본 강호인들이 만들어낸 소문이었다. 장삼봉 진인은 태극혜검을 본파에 남기지 않으셨다….”
“…….”
“다만 소문이 난 걸 없다고 하기 껄끄러워서 구궁영을 이용한 거짓 태극혜검을 만들어 속가의 고수들에게 전수했지. 위지혼이 배운 것이 그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천계에 온 후 조사께 직접 태극혜검을 전수받았다. 진정한 태극혜검의 극의는 바로 무쌍패와 같은 것.”
“그런 것 같군….”
방금 전 명룡자의 태극혜검은 무쌍패를 깼다기 보다는 같은 무위전변의 힘으로 상쇄시킨 것이었다. 무위에 무위를 부딪혔으니 결국 내 방어가 더 빨리 깨진 셈이다. 나는 희망을 느끼고는 명룡자에게 말했다.
“태극혜검 또한 패도의 무위전변을 쓸 수 있는 것 같군. 그렇다면 태극혜검이 무쌍패를 깰 수 있는 유일한 검학인 게 아닌 건가?”
“아니. 그저 무위전변이 공격에 쓰이느냐 방어에 쓰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전혀 해결책이 아니다.”
“……?”
“이 대결을 잘 곱씹어라. 승패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차분하게 말한 명룡자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백웅. 그리고 모두들 잘 들어라. 장삼봉 진인을 꺾기 위해서는…. 이기는 것에 집착해선 안 된다.”
명룡자가 말을 이었다.
“무중생유(無中生有)! 이게 유일한 장삼봉 진인의 파해법이 될 것이다.”
휘익
명룡자는 그 말을 하고는 등을 돌려 사라지려 했다. 나는 그런 명룡자를 불러 세웠다.
“잠깐!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 그냥 우리랑 같이 탑을 공략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망량을 싫어하는 거야!”
명룡자가 힐끔 나를 보며 말했다.
“저 자는 무념(武念)과 타협할 생각도 수용할 생각도 없다. 그런 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순 없다.”
“…….”
“허나 위지혼의 넋을 보아 단서를 주었을 뿐이다.”
명룡자는 그 말을 끝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명룡자가 절대로 망량과는 함께하지 않으리란 걸 알아채자 골치가 아팠다.
‘제길…. 명룡자는 분명 무쌍패도 쓸 수 있을 건데….’
아니, 명룡자 본인이 장삼봉에게 도전하면 우리 중에서 가장 승산이 높은 거 아닌가? 그렇지만 본인이 망량과 동행하는 걸 거부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검마가 말했다.
“중대한 단서를 얻었네. 한 달간 수행의 시간을 갖고 도전하도록 하지.”
“무중생유의 뜻을 알았단 말입니까?”
“음? 자넨 못 알아차렸나?”
“…….”
“아무튼 함께 수련해보세.”
그리고 우리는 명룡자가 준 무중생유의 단서를 가지고 한 달 동안 제각기 무공을 가다듬었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우리는 다시 모여서 92층의 탑으로 향했다.
파앗!
장삼봉 진인은 여전히 도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삼봉 진인을 향해 걸어간 첫번째 도전자는 바로 검마였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소.”
“허허…. 검마 서문대룡. 그대가 탐사대 대장이며 무위에 있어서 최강일 것이거늘 빨리도 도전하는구려.”
뭐?
나는 검마를 최강이라고 단언하는 장삼봉 진인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실 탐사대 고수들의 무위를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다들 투선급에 이르렀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삼봉 진인은 검마가 다른 자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정말?’
검마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아마 이 시련은 답이 정해져있는 해답. 그렇다면 쓸데없이 당신 그 자체를 연구하며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소. 왜냐하면 우리가 500년간 강해진 이상으로 무신의 좌에 오른 당신은 더욱 강해졌을 터이니.”
“…허허.”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한 답이 흐려져서 어렵게 변하는 법이 아니겠소? 그러니 속전속결로 끝내보겠소.”
“훌륭하군…. 과연 무영문(無影門) 서문세가(西門世家)의 주인답소.”
스윽
장삼봉 진인이 태극권의 기본자세를 취했다. 검마는 그를 상대로 담담히 서 있던 중 자신의 검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럼 무신의 좌를 상대로 도전해보겠소….”
탈혼검령(奪魂劍靈)
검마의 검에서 희뿌연 영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낸 검령이 마치 사람같은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검령.
그것은 검마만의 절대지경으로써 원리는 알 수 없지만 검의 영을 불러내어 함께 싸우는 능력이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영혼이라 한다면 이혼대법을 대성한 내가 영혼의 존재를 느끼거나 흡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저걸 왜 영혼이라 부르는 걸까?
‘정체불명의 힘이다.’
검령을 목격한 장삼봉 진인이 약간 눈썹을 꿈틀거렸다.
“설마 그걸 완성시키다니…? 그대를 상대로 삼 초를 양보한 게 다소 후회되는구려….”
“엄살이 심하시구려. 자, 그럼 가겠소.”
우우우
검마의 검령이 움직였다. 검이 움직이기 한발 앞서서 움직인 희뿌연 영기는 검마의 검속보다 훨씬 더 빨리 장삼봉 진인의 지근거리까지 쇄도했다. 다만 빠르다고 해도 결코 뇌신지혼이나 천광혈뢰보단 빠를 수 없었기에 나는 그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저 정도 속도면 틀림없이 장삼봉 진인의 방어나 회피에 걷힐 것이리라.
‘생각보단 느리군.’
그러나 상황은 내 생각과 달랐다. 무쌍패도 쓰지 않으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장삼봉 진인은 검령이 날아오자마자 지체없이 무쌍패를 시전한 것이다.
그리고 음양패도의 무위전변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끼잉 -
“……!!”
마치 방울달린 실이 떨리는 듯한 고음이 크게 울리더니, 장삼봉 진인이 만들어낸 무쌍패의 태극 한가운데로 검령의 희뿌연 영기가 침입했다. 그리고 영기는 틀림없이 무쌍패의 태극 맞은편으로 그 칼날을 넘기고 있었는데, 마치 투과(透過)를 해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아주 느긋하게 전진하는 검령의 검기.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느린 검기였으나 장삼봉 진인은 모든 정신을 집중해서 검령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일 보를 좌측으로 옮기며 자세를 고쳐 잡으며 태극 그 자체의 흐름을 이끌어서 검령을 원 바깥으로 떨쳐냈다.
슈웅!
검마의 검으로 검령이 회수되자 검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일 초. 아깝구려.”
장삼봉 진인이 껄껄 웃었다.
“허허. 검령의 존재를 몰랐다면 당했을지도 모르겠구려.”
“과찬의 말씀.”
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투과?!’
그렇다.
방금 전 검마의 검령은 무쌍패를 투과할 뻔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