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9====================
사신지혼(四神之魂)
망량이 뛰어듬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몸이 갑자기 이동했다.
파앗!
위이잉
전장(戰場)에 도착하자 황적(黃赤)이 물결치고 대지가 조각나서 부숴진 용암의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용암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느껴지기 직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전원의 몸 주변에 새파란 막이 생겨났다.
‘이건?’
푸른 막이 생겨나자 용암의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굳이 애쓰지 않아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서 있을 수가 있었다. 틀림없이 술법의 일종이었고, 이게 망량이 시해지술로 시전한 방어막이란 걸 즉시 눈치챌 수 있었다. 망량은 하늘 저만치에 보이는 거대한 기둥을 보면서 말했다.
“저기 놈의 발이 보이는군! 좀 더 가까이 붙는 게 좋겠소.”
파앗
잠시 후 다시 한 번 전원의 몸이 허공으로 이동했는데, 이번에는 거대한 무언가로 물결치는 시꺼먼 대륙 위에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이게 대륙이 아니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까마귀의 몸통 위로군!!’
까마귀가 정말 크다. 해신보다 훨씬 더 크다고 단언할 수 있다. 우주 성층권에서 보지 않으면 몸의 윤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 크기라면 할말 다 한 게 아닌가? 여동빈이 거룡을 보고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나는 기가 질리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젠장. 이렇게 커다란 놈한테 칼질을 해봤자 무슨 소용….”
아무리 절대지경의 고수가 수십 장의 검강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이딴 식이면 생채기나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피부를 뚫을 수 있나 없나는 둘째치고 크기 자체가 너무 다른 것이다.
“우리도 70층대의 거대괴물들과 상대할 때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나름대로의 공략법이 있소.”
그렇게 말한 망량이 외쳤다.
“갑시다!”
우웅!!
망량이 외친 순간, 내 뒤에 있던 절대지경 고수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나는 깜짝 놀랐다.
“……?! 인공보패?!”
철컹 -
지상계에서 대웅제국 전술무력요원들이 장비하던 인공보패를 모두 장착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같이 갑주형 인공보패를 장비하자 나는 당황해서 말했다.
“시동어를 외치지 않아도 인공보패가 장착되는 건가?”
“그 정도는 내가 시해지술로 다 보조해서 굳이 할 필요 없소.”
시해지술로 그런 것도 가능해?
내가 놀라고 있을 때 다음 순간 무영검제가 호쾌하게 웃으며 뛰어들었다.
“뿌하하! 예전보다 이 놈 체력이 많이 사라진 거 같은데 오늘이 잡는 날이겠구나!”
파앗!
무영검제의 검이 은은한 적황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그의 안광이 허공을 흐름과 동시에 절대지경의 의념절기가 펼쳐졌다.
절대지경(絶對之境)
무영천파섬(無影千派殲)
윙윙윙
마치 벌떼가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영검제가 만들어낸 듯한 수많은 검기가 일순간에 시야 내의 하늘을 꽉 채웠다. 반투명한 검기의 숫자는 차마 셀 수도 없을 정도라서 최소한 수만 개 이상이었고, 그 검기를 띄운 무영검제가 자신의 검을 앞으로 투검(投劍)하자 동시에 허공에서 공명(共鳴)이 일어났다.
치리링! 키이잉!!
“……!!”
검기가 또다시 공명에 반응하자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더니, 수많은 검기에서 또 다른 균열과 참격(斬擊)이 터져나온다! 벌레 한 마리 피할 틈도 없이 꽉꽉 채워진 공간 속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검격이 지상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과과과광
“크윽….”
웅혼한 파장과 동시에 눈앞이 빛으로 터져나갔고 잠시동안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범위가 엄청난지 삽시간에 눈앞에 있던 시꺼먼 까마귀의 몸뚱이가 모조리 사라져 있었고 지금도 무영천파섬의 기운이 소용돌이처럼 회오리치며 천지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마치 태풍이라도 불어닥치는 듯한 기운과 함께 무영검제의 광소가 울려퍼졌다.
[하하하!! 올라간다!]
쿠오오오
태풍의 눈 속에서 의념절기를 조종하는 듯 무영검제가 거대한 검의 태풍을 이끌고 천공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가 볼까!”
“천천히 따라와라.”
그리고 그런 무영검제를 뒤따라서 극호와 진국준이 제각각 천광혈뢰와 신법을 발휘하며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그들의 신법은 내가 익힌 파천일보 정도는 아니었지만 역시 지상의 초절정무인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보였다.
나는 옆에 있던 망량에게 말했다.
“망량. 저들은 어디로 올라간 거요?”
“어떤 괴물이든 간에 대가리에 핵(核)이 있었소. 그 핵을 부수려고 머리부위로 가는 중인 거요.”
“핵?”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그 핵을 막으려는 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아무리 고수라도 일격에 노릴 순 없었소. 그래서 지금까지 지리하게 오랫동안 싸우면서 까마귀의 각 몸뚱이 부위를 파괴해 왔던 것이오. 부위를 파괴하면 잠시동안 핵의 방어가 약해져서 부술 기회가 생기니까.”
“음…!!”
“잠깐. 지금 뭔가 올 것 같군….”
그렇게 중얼거린 망량이 갑자기 백우선을 좌우로 홱하고 휘둘렀다.
쩌엉!
쿠콰콰쾅 -
망량의 동작이 끝나자마자 술법의 벽이 펼쳐졌고 벽에 알 수 없는 거대한 광선 공격이 날아왔다. 광선은 망량의 벽을 뚫지 못하는지 잠시동안 주위의 모든 것을 태우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지금 그건?”
“가끔씩 이렇게 발작하듯 공격할 때가 있더군. 몸을 빈대가 물어뜯을 때 꿈틀거리는 느낌인가.”
망량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직전에야 감지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보다 훨씬 앞서서 전조도 없는 공격을 탐지해서 막았냔 말이오.”
내가 놀란 건 이 괴물까마귀가 알 수 없는 광선공격을 했다는 사실이 아니다. 절대지경의 의념천주로 직전에 감지해서 대응해야할 정도의 순간적인 공격을, 아무리 대라신선이라지만 술법사에 속해서 육체적 능력은 약한 편인 망량이 사전에 알아챘다는 점이었다. 인간의 반사신경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망량이 무표정하게 백우선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보패 백우선을 제대로 쓸 실력이 생긴 것뿐이오.”
“무슨?”
“지금은 백우선 얘기나 할 때는 아니오. 빨리 올라갑시다.”
파앗!
말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우주공간으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별이 빛나면서 마치 강처럼 흐르고 있는 진기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별빛의 강은 행성의 북반구에 서 있는 거대한 까마귀의 몸뚱이를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자 그 별빛의 강은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그저 불빛으로 화한 유성(流星) 덩어리 수십만 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까마귀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이었다. 유성 하나하나의 속도가 엄청나기에 스치기만 해도 지상에서 수십 리짜리 폭발이 일어나기 족해 보였다. 저 살벌한 공간 속에서 백광(白光)과 함께 무수한 의념절기가 폭사하고 있었다.
쿠콰콰쾅!!
백광 하나가 날아다니다가 비폭(飛爆)하는 유성 하나에 맞았는지 커다란 폭음이 울렸다. 하지만 잠시 후 그 백광에서 한 줄기의 뇌전(雷電)이 뿜어져나왔다.
검뢰(劍雷)
진룡휘인(震龍揮刃)
스각 -
삽시간에 뻗어나간 뇌전의 궤적이 순식간에 반투명한 뇌검(雷劍)으로 바뀌었고, 무려 수백 장은 되어보이는 뇌검이 채찍처럼 휘어지며 빠르게 까마귀의 가슴팍을 베었다. 까마귀가 너무 커서 그 뇌검으로도 기껏해야 생채기를 내는 수준이었지만 적어도 까마귀는 그 뇌검을 막을 수 없어보였다.
투확 하고 까마귀의 몸뚱이에 눈에 보일 정도의 상처가 나타났을 때 어느 새 도착해 있던 진국준이 달려들어서 외쳤다.
[이쉬 - !!]
꽈앙
강각(强脚)이 터지듯이 진룡휘인이 베어낸 상처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까마귀가 반사적으로 흑색 주술방어막을 만들어내기 직전의 무척이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들어간 공격이라서, 진국준이 완벽하게 빈틈을 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진국준의 추가 파상공격에 까마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그 틈에 사방팔방에서 절대지경 고수들이 합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퍼버버벙!!
하지만 약점을 노출했다는 직감과는 달리 까마귀의 몸 주변에는 새까만 방어막이 생겨나서 놈의 몸뚱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나는 저 방어막을 보자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완벽한 기회였는데…. 저게 뭐지?”
“운이 없군…. 저건 놈이 상시 발동하고 있던 방어막이오. 공략조가 오랜시간 싸우면서 간신히 방어막을 깨고 본체를 때릴 기회를 얻어서 싸우던 중이었는데, 하필 놈이 시간이 지나면서 방어막을 재생성한 모양이오.”
“…….”
나는 그 말을 듣자 기가 질려서 말했다.
“괴물이군…. 저거 해신보다 더 센 거 아니오?”
“해신에 비해 물리적인 육체의 방어력과 체력만은 몇 배나 강하오. 다만 저 놈은 주술이나 술수를 쓰지 못하고 신적인 권능도 없으니 단순비교는 못 하지.”
“제길. 뭐가 이렇게 어려운거야….”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아까 말로만 들었을 때와 지금 놈의 압도적인 체력을 실감한 지금은 체감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 76층이니 99층까지 갈려면…. 저 놈 포함해서 저런 괴물을 24마리는 잡아야 하는 건가?’
정말 지랄맞은 난이도다!
망량이 각오한 듯 이를 악물며 말했다.
“시해지술로 최대한 보조할 테니 어떻게든 싸워봅시다.”
“흠. 나도 한 번 저 놈을 때려 보지. 대해방 칠요라면 어떻게든 될려나.”
“당신을 핵에 접근시키는 걸 최대한 돕겠소.”
나는 투덜거렸다.
“쩝. 저렇게 큰 놈을 잡는 건 자신없는데…. 좀 쉽게 잡고 싶은데….”
“어쩔 수 없소. 저렇게 물리적인 힘에 몽땅 투자한 괴물을 쉽게 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오.”
나는 해신보다 더 체력이 빠방한 놈을 잡는다는 게 엄청나게 괴롭고 힘들고 지루한 작업이 될거란 걸 예감했기에 우는 소리를 했다.
“암만 그래도 좀 쉽게쉽게 가고싶은데…. 저걸 상대로 수천 수만번이나 막고 피하고 때려야 한다는 거요?”
“그렇게 될 거요.”
“날로 먹을 방법은 없겠.”
그 순간이었다. 나는 묘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걸 느꼈다.
‘…되나?’
왜 이런 직감이 떠오른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왠지 될 것 같다.
수련한지 100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니 드디어 나한테도 천재적인 무예인의 직감이 생긴 건가?
“…….”
아니, 이건 무인의 직감이 아니다.
어떻게든 날로 먹으려고 머리를 굴리다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일 뿐…!!
그리고 이 직감은 무인이라기보다 다른 직종의 직감이리라.
‘제길!’
나는 그 사실에 씁쓸해졌지만 아무튼 방금 전보다 좀 더 의욕이 생겨났기에 망량에게 외쳤다.
“망량! 저 방어막을 깰려면 그에 상응하는 피해를 줘야하는 거요?”
“그렇소. 절대지경 여러 명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십일 동안 때려야 하오.”
“그럼 깨고 나서 훔치는 게 좋겠소 아니면 훔친 다음에 깨는 게 좋겠소?”
“……!!”
풀어서 설명할 재주가 별로 없기에 다소 애매모호하게 말해버렸지만 망량은 단숨에 내 생각을 눈치챈 듯 했다. 그리고는 감탄한 듯 말했다.
“대단하군. 백웅 당신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소?”
“예전에 이미 써 먹은 적이 있어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소….”
“후자로 가면 될 거요. 아마 저 놈의 힘은 규모와 연관이 있을 테니.”
“내가 근처에 갔을 때 저 놈의 요격에 맞지 않게 좀 도와주시오. 쓰려면 집중을 좀 해야 되서.”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타앗!
파천일보(破天一步)
나는 공중을 박차고 한 순간에 모든 힘을 다해서 파천일보를 시전했다. 저 까마귀와의 거리는 언뜻 별로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우주공간이기에 엄청나게 멀었다. 이 광대한 거리를 좁히려면 나로서는 파천일보 외엔 딱히 방법이 없는 것이다.
우웅!
파천일보로 까마귀의 방어막까지의 거리를 절반 이상 좁혔을 때 갑자기 혈광이 사방천지에 일어나면서 수천 개의 광선이 쏘아져 왔다. 나는 이 광선덩어리를 하나하나 검으로 쳐낼까 생각했지만, 이윽고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진하시오!]
시해지술!
투두둥 투둥
어느 새 망량이 내 몸 주위에 만들어낸 듯한 푸른 막이 더욱 진한 빛을 내면서 내 몸을 보호했고, 굳이 피하거나 막지 않아도 알아서 혈광선을 다 흡수해 주었다. 망량이 방어술을 2중으로 걸어준 게 분명했기에 나는 망량이 확실히 날 도와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좋아.’
타앙!
다시 한 번 공간을 박차고 파천일보로 쇄도하자 이제야말로 어두운 방어막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일국(一國)의 땅을 가로지른 이상의 속도였고, 나는 까마귀의 방어막 앞에 도달하자 멈춰서서 손을 내뻗고 정신을 집중했다.
“으으음…!!”
원래라면 극한의 집중상태에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해내는 거지만 지금은 그 정도의 집중력이 아직 없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일일이 집중해서 머릿속에 의념을 떠올려야 했다. 그리고 떠올린 의념을 이용해서 절기를 시전해야만 한다.
투두두둥 투두둥
투둥
사방에서 계속해서 까마귀가 소환한 혈광선이 방어막을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집중했지만 잠시 후 쩌적하고 방어막에 균열이 생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시해지술의 방어막이라도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맞기만 하면 버틸 수 없는 위력이기 때문이리라.
‘이런! 아직 염상이 다 떠오르지 않았는데…!!’
내가 곤란함을 느끼고 지금이라도 무예를 이용해서 대응할까 생각할 때였다.
절기(絶技)
탈혼검령(奪魂劍靈)
어검(御劍) 십이난화(十二亂花)
화르륵 -
마치 불꽃덩어리가 내 주변에 생긴 듯 했으나, 그것이 이내 검화(劍花)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소담스럽게 피어난 검화는 이윽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열두 개나 되는 검섬(劍殲)으로 내 주변에 막(幕)을 쳤고, 그것은 검막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력을 지닌 절대지경의 방어막이 되었다.
우우우 -
검화의 방막을 만들어준 자가 멀리서 내게 육합전성을 보내왔다.
[백웅. 망량에게 얘기는 들었네.]
[……!!]
이 목소리는!
내가 흠칫하고 놀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날 믿고 집중하게.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그럼 해야지!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지금까지 약간 산만하던 정신이 한 군데에 뭉쳐서 마치 바늘의 끝처럼 단단해진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시꺼멓고 거대한 까마귀의 방벽이 [인식]되는 것을 느꼈고, 그 크기가 마치 내 장심(掌心)으로 빨려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바로 이 감각이다.
인정하긴 싫지만, 칼을 잡고 있을 때보다 더욱 선명하게 와닿는 이 감각….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숙련된 대도(大盜)만이 지닐 수 있는 천부적 감각이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게 느껴진다.
나는 입맛이 썼지만 어쨌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으므로 최대한 집중했다.
“훔친다….”
나는 다음 순간 손을 내뻗었다. 마침 탈혼검령의 십이검화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지에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만상지투(萬象之偸)
“그 지랄맞은 크기를!”
파앗!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내 장심에 무언가 [개념적]인 것이 빨려들어옴과 동시에, 눈앞의 우주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초거대 까마귀의 몸뚱이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마치 마술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아주 멀리에 점처럼 보인다.
점으로 보인다 해도, 실제로 다가가보면 그래도 몸 크기가 1장 정도는 될 것이다. 머나먼 우주공간에 출현한 조그마한 까마귀를 보면서 나는 입맛을 다셨다.
‘흠. 완전히는 줄이지 못하나보군….’
이것도 설마 만상지투의 한계인 건가? 상대와 무(武)를 겨룰 수 있는 크기까지만 가능하다는….
슈슉
그리고 내 주위에 하나둘씩 망량을 선두로 해서 지금껏 싸우고 있던 모든 탐사대가 몰려들었다. 또한 망량과 거의 동시에 내 옆에 나타난 백의의 검술고수가 훗하고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슬아슬했네. 본디 탈혼검령을 방어용으로는 잘 쓰지 않아서 자네가 집중을 끝낼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몰랐어.”
“아뇨.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나는 간만에 그를 보자 너무 반가웠지만 억지로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검마 어르신.”
“…허허. 자네는 아직도 나를 어르신이라 부르는군.”
“저보다 500살은 더 먹었지 않습니까?”
“이번 생에는 그렇다 치지. 허나 자넨 곧 500살따윈 금방 먹게 될 걸세.”
“악담하지 마십쇼.”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절기로군.”
내가 투덜거릴 때 검마가 말했다.
“설마 만상지투로 저 괴물의 [크기]를 훔칠 수 있을 줄이야….”
그렇다.
내가 떠올린 방법은 바로 만상지투를 이용해서 초거대 괴물의 크기를 줄이는 것!
해신같은 신적인 존재한테는 이런 꼼수가 안 먹히겠지만, 저 괴물은 신적 권능이 별로 없다는 말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만상지투에 대한 저항력도 없다시피 할 것이고, 저 괴물의 크기만 일반크기로 만들어버리면 굉장히 상대해지기 편해질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 예전에 신의 영혼을 줄여본 적이 있어서 가능했던 생각이지.’
그 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바로 떠올리기는 어려웠으리라.
쿠우우우….
까마귀 괴물은 저만치에 떠 있다가 잠시 후 우리 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끼오오오!!]
“온다!”
“준비해라.”
다들 전투준비를 하며 까마귀 괴물을 때려잡을 준비를 하기 시작하자, 나는 저 괴물의 새까만 방어막이 아직 골치라는 걸 알아챘다.
‘쳇. 크기는 줄였는데 저 방어막의 방어력이 그대로라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
그래서 아까 망량에게 크기부터 줄이고 나서 방어막을 깰지, 아니면 깨고 나서 줄일지를 물어봤던 것이다. 망량의 생각에는 크기를 줄이는 편이 효율적이라 생각한 것 같지만 여하튼 지금도 저 방어막은 까다로운 게 사실이다.
역시 대해방 칠요를 써서 최대출력으로 깨야 하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저 놈의 모습을 보자 멍하니 딴생각이 들었다.
‘까마귀… 새….’
소호 금천같다.
나한테 민폐만 끼친 새대가리 새끼…. 언젠가 나도 되갚아주마.
“음?! 잠깐….”
그 순간, 나는 달려드는 까마귀를 향해 눈에 힘을 집중했다.
“……?”
“뭐하는….”
눈이 살짝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새하얀 빛이 내 눈에 모여들자 나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광 - 선!!”
쿠콰콰쾅!!
내 눈에서 파괴광선이 뿜어져 나가자 까마귀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새까만 방어막이 마치 유리에 균열이 일어난 듯 갈라졌다. 옆에 있던 망량이 크게 당황했다.
“그… 그것은?”
“오오오오오…!!”
나는 눈에서 힘을 풀지 않으며 광선을 계속 발사했다.
[끼이익?!]
그러자 까마귀는 방어막이 계속 깨지는 것에 당황한 듯 돌격을 멈추고 주춤거렸고, 그 틈에 나는 마지막 힘을 다해 광선을 발사했다.
“광 - 선!!”
콰광!!
[끼오오오!!]
방어막이 깨지면서 까마귀가 푸드득거리며 뒤로 날아갔다.
“깨졌다.”
“쳐죽여.”
그러자 칼을 갈고 있던 절대지경 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어서 까마귀에게 절대지경의 절기를 날리기 시작했다. 온갖 기술이 뿜어져나오며 까마귀를 난도질하기 시작했고, 까마귀의 타고난 몸뚱이의 체력과 방어력도 굉장한지 그걸 맞고도 한동안은 버텼다.
콰지직
쿠콰쾅
[끄…르륵….]
까마귀의 목이 베여나가자 몸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주로 녹아들듯이 사라진 까마귀가 있던 자리에 조용히 푸른 빛의 차원문이 생겨났다. 그걸 본 망량이 말했다.
“77층으로 가는 문이 생겨난 듯 하오.”
“…….”
나는 눈이 따가워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황해서 말했다.
“누, 눈이 안 보이는데….”
눈물이 줄줄 나는데 사방이 전부 칠흑같다. 시력이 사라진 게 분명하다.
광선을 너무 많이 쓰면 이런 부작용이?!
“…으음. 그 광선은 대체 무엇이오?”
“어쩌다보니 소호금천이 파괴광선을 눈에서 발사하는 능력을 준 거요.”
“…….”
그가 보기에는 너무 황당한 일이라서일까?
망량이 당황한 듯 한동안 말을 하지 못하다가 말했다.
“시해지술로도 바로 치유가 되지 않는군. 다른 계통의 권능이기 때문인가? 아무튼 일단은 77층으로 넘어간 다음에 본진으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