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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진국준?
나는 그 말에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아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분명히 어디서 들은 이름같긴 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고뇌하는 기색이자 진국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잘 모르겠지. 대웅제국이 대월국을 침공했을 때 백련교주와 싸웠으니 본디 너희 제국과 나는 숙적이었다.”
“아…!!”
“자네와 나는 원래부터 동료는 아니었다네. 지금이 생애 첫 대면이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퍼뜩하고 기억났다.
대웅제국의 남부침공!
내가 실종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웅제국은 고려를 쳐서 고려왕의 목을 베어 동방을 안정시킨 후, 곧장 대월국을 포함한 남만일대를 휩쓸어 정벌했다. 그리고 그 정복전쟁 도중에 맞닥뜨린 대월국에서 백련교주는 뜻밖의 절대지경 고수인 진국준을 마주쳤고, 격전 끝에 그를 패배시켜 죽인 것이다.
‘기억 속에서는 지나가듯 짧게만 나온 장면이라서 잘 기억이 안 났구나.’
게다가 ‘동료’라는 전제 내에서 생각했기에, 원래 숙적관계인 적국의 절대지경 고수를 바로 생각해내긴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진국준을 기억해내고는 황당해져서 말했다.
“당신이 왜 천계에…?”
진국준은 망량을 힐끔 보더니 말했다.
“저 자가 사후에 내 영혼을 불러와서는 날 설득하더군. 생전의 원한을 잊고 세계를 구하는 여정에 동참해 달라고.”
“그래서 우리 동료가 되어준 것인가?”
“훗…. 뭐 그렇다 치지. 백련교주 독고운천 덕이라고 생각해라.”
“백련교주?”
진국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웅제국의 2대 황제였던 그가 대월국을 핍박하지 않고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다. 대월국을 유린할 수도 있었는데 무인의 의리를 지켜주었기에 너희에게 협력할 생각이 든 것이다.”
“으음!”
그랬던 건가.
‘백련교주가 대월국에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이후로도 진국준을 영입하는 건 힘들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진국준은 기억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초강자이자 절대지경의 권법고수! 또한 300여년 넘게 살아온 대월국의 수호신이었기에, 만일 대월국 자체를 건드렸다면 결코 이쪽에 복종하진 않을 인물이었다. 그가 가장 지키고싶은 대월국을 놔둠으로써 결과적으로 내 전생여정에 도움이 된 것이다.
다만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비라는 단어와 백련교주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그가 인도(人道)를 지켜준 것이다. 아무래도 나와 만난 이후의 백련교주는 무언가 심정변화가 생겼던 것일까?
그 때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백웅 황제!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네? 그 때 모습 그대로잖아!”
“극호!!”
건괘의 방으로 극호가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방천화극을 들고 있는 극호는 청년시절의 앳된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30대의 노련한 전사라는 인상이 강했다. 극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황제폐하 간만입니다! 뭐한다고 500년이나 늦게 오신 겁니까.”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 간만에 봐서 반갑다, 극호.”
“말 좀 놔도 됩니까?”
“그러던가.”
“새끼…. 잘 왔다 쨔샤!”
극호는 금세 다가와서 내 등을 팡팡 쳤다.
“컥. 감히 황제한테….”
내가 볼멘 목소리로 말하자 극호가 씩 웃었다.
“어차피 다 인간계에서 죽어서 천계에 왔는데 황제고 말고 무슨 상관이야. 갑질하려고 황제되신 건 아니잖아?”
“…….”
굉장히 허물없는 녀석이라서 나는 극호가 예전 그대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번 생에서는 직접 흑요석을 전달받지도 않았을 텐데도 거리감따위 무시해버리는 친화력! 하지만 그런 모습이 싫지 않다는 게 또 극호의 장점이었다.
망량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대기인원은 다 왔군.”
뒤에서 내 목을 잡고 까불거리던 극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두 명 안 왔는데?”
“태을신군 곽정무와 천귀마살(天鬼魔殺) 우수백(優樹柏) 말이군. 아까 곽정무가 나갔으니 곧 데리고 올 것이오.”
망량의 말대로 두 사람이 곧 건괘의 방으로 들어왔다. 곽정무와 우수백은 내가 실종된 후 대웅제국에서 키워낸 절대지경 고수들이라서 낯설었지만 곧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망량은 대기인원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공략회의를 시작하겠소.”
“그렇다는 말은 이 자리에 없는 자들은 전부 탑 안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탐사대가 훨씬 많은 거 같은데….”
“그렇소, 백웅. 평소에는 대기인원을 최대한 줄이고 많은 인원을 투입하는 걸 방침으로 하고 있지.”
우웅
태극이 새겨진 커다란 원탁이 건괘의 방 중앙에 나타났고 다들 의자에 앉았다. 망량이 입을 열었다.
“상황은 76층 공략 중이오. 다들 알고 있겠지만 탑은 1층을 공략할 때마다 위층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며, 그 문은 12일동안 유지되오.”
나는 뜻밖의 말에 망량에게 질문했다.
“12일이 지나면 위층으로 가는 문이 닫힌단 말이오?”
“그렇소. 그리고 다시 열기 위해서는 그 층을 재공략해야 하지.”
“으음! 근데 층이 열리면 바로 올라가면 될 텐데 왜 닫히도록 지켜봤던 거요?”
내 질문에 대답한 건 망량이 아니라 무영검제였다.
“어려운 탑의 시련인 경우 부상자와 사망자가 많았습니다, 폐하. 그들을 추스르지 않고 다음 층에 도전했다가는 진짜 전멸할 우려가 컸기에 어쩔 수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걸 포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으음!”
“공략인원과 대기인원을 따로 두게 된 이유이기도 하지요. 어쩔 수 없다면 위층으로 도전하는 걸 한 번 포기할 수밖에 없지만, 2조로 나누게 된다면 공략인원이 반파당해도 대기인원들이 바로 도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무영검제의 설명에 나는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다 해도 어려운 시련에 재도전한다 해도 또다시 큰 피해를 입고 말 게 아니오? 괜히 고통스러울 뿐인 것 같은데….”
“아닙니다. 각 층의 시련은 정해진 공략법이 있어서 한번 제대로 겪고 나면 다음번에는 상처 하나 없이 이겨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이게 효율적이었습니다….”
“아하.”
“게다가 절대지경의 무인들뿐이라서 한번 겪은 적에는 더 숙련되게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무영검제의 말대로인 것 같았다. 절대지경이란 지상의 무인들 중에서도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절대달인들이기에, 한 번 약점이나 공략법을 노출한 상대에게 쉽게 패하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지금 탑의 시련을 어떻게 공략하는지 이해한 듯 했다.
나는 또다시 질문했다.
“나는 아직 탑에 가본 적이 없소. 탑의 시련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겠소?”
“흠, 뭐라 해야할지….”
무영검제가 설명하는데 곤란함을 느끼는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앉아있던 진국준이 말했다.
“백웅. 여기 있는 놈들이 전부 무림에서는 지존칭호를 한 번씩 얻었던 녀석들이었지만 탑의 시련 앞에서는 겸허해졌다. 대충 이렇게 설명하면 되겠군.”
“…….”
“직접 겪어보면 알 거다. 아무리 절대지경이라도 혼자서는 못 깨게 되어있다. 검선 여동빈 정도가 아니라면.”
그 정도인가?
‘진국준, 저 자는 생전에 수백년간 절대지경이며 남만무림의 지존이었을 텐데 자만심따윈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구나.’
또한 여동빈의 힘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탑의 난이도에 내가 내심 놀라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탑 내부의 공략상황은 바깥에서 알 수가 없게 되어있소. 한 번 귀환해서 생존자가 직접 전달하지 않는 이상…. 그래서 76층에 도전하는 탐사대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는 기다려봐야 하는 상황이오. 원래라면 말이지.”
망량이 백우선을 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백웅과 미호가 참여하니 그냥 대기인원까지 전부 한번에 투입해서 전선(戰線)을 밀어버리는 작전으로 갈 것이오.”
“위험하지 않겠소? 그렇게 하면 전력은 강해지겠지만 만일 전멸하게 되면 미래가 없는데….”
“백웅. 어차피 단기간에 복희를 만나서 결판을 내기 위해 직접 천계에 온 게 아니었소? 미호에게도 그리 시간은 없을 것이오.”
“음….”
나는 그 말에 움찔해서 미호를 쳐다보았다. 다소곳이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미호가 말했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전에 달기를 한 번 제압해둬서 폭주위험은 덜한 것 같구나. 다만 이 천계에서 내 전력을 쓰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해두겠다.”
“미호. 왜 전력을 못 써?”
“천계에 그냥 체류하는 건 인과율을 덜 소모하지만, 어쨌든 나는 신(神)이며 인과율에 걸리는 존재이다. 이 육신도 사실 본체라기보다는 본체와 중첩된 화신을 임의로 천계에 소환해둔 거지.”
“어? 그런 거였어?”
“그래. 그런 까닭에 나는 인과율에 걸리지 않는 화신수준의 힘밖에 쓰지 못한다. 따로 너희가 내게 제물이라도 바치지 않는 한.”
“흠. 그런 거라면 내가 너한테 제물을 바쳐서….”
“나는 상관은 없다만 구천현녀가 그리 좋게 보진 않을 거다.”
“구천현녀가 왜?”
“…….”
미호가 침묵하자 망량이 나서서 설명했다.
“신인 미호가 제물을 받아서 이 천계의 시련에 관여한다는 것은, 이계의 신이 천계에 간섭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소. 천계 입장에서는 [옛 지배자]의 침공같은 느낌이고 설령 악의가 없다 하더라도 천계의 차원이 불안정하게 변해버릴 가능성이 높소. 안 그래도 천계를 유지하는데 모든 힘을 쓰고 있는 구천현녀가 싫어할 수밖에. 절대지경 10명을 합친 것보다 강력한 천마 사공린이 직접 천계의 시련을 공략하지 못하는 것도 같은 이유요.”
“아, 그렇군!”
“…그렇다 해도 미호 님의 전력은 탑 공략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될 터이니 아예 배제할 순 없소. 그러니 한 번 정도라면 내가 시해지술로 어떻게든 반발을 무마해보겠소.”
“고맙소 망량.”
나는 이야기를 하면서 새삼 미호가 대단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걸 실감했다.
‘하위 [옛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저 제물을 받아서 힘을 쓰는 것만으로도 천계에 큰 뒤흔들림을 줄 수 있을 정도의 상위차원 지배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호가 과거에 비류를 물리친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망량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우린 99층에 도달하면 아마 복희를 틀림없이 볼 수 있을 것이오. 이번 탑 공략이 마지막이 틀림없소.”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소?”
이어진 망량의 말은 뜻밖이었다.
“먼저 2번의 시련 공략이 있었소. 대해의 공략, 미궁의 공략. 그리고 3번째인 탑의 시련이 출현했을 때, 탑의 1층에서 영귀(靈龜)가 출현해서 우리에게 이번 탑의 시련이 끝이라고 직접 말해주었소.”
“여, 영귀?! 정말이오?”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소. 또한 탑의 99층에 올라온다면 신이 직접 준비한 시련이 기다릴 것이라고 공언했었소. 그게 벌써 수십년 전의 일이오.”
“…….”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영귀!
그 존재는 사대신수의 하나로써 응룡, 봉황, 기린과 함께 신으로 여겨지는 존재였으며 과거 내 전생여정 도중에 마주친 적이 있었다. 나는 영귀를 통해서 가면술을 쉽게 숙달시킬 수 있었으며 그에게 길흉의 점을 받은 적도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영귀가 이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 신농에게 제물이 되어 신농의 힘을 빌린 적도 있었다. 틀림없이 신령스럽고 선한 존재인 영귀가 이 천계 탑의 시련에 출현했다고?
나는 망량에게 말했다.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지상의 전뇌자에 입력해두면 좋았을 텐데…. 지금 듣고 놀랐잖소.”
그러자 망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들었겠지만 지상에는 배신자들이 암약하고 있소. 그래서 섣불리 천계의 공략정보를 흘렸다가는 어떤 음모가 여기까지 닥쳐올지 몰랐기에, 나중에 그대가 천계에 직접 오면 알려주려 했던 것이오.”
“음.”
“천제단만 뚫어도 천계에 오는 건 여반장이니 말이오.”
배신자.
나는 그 말에 용중일을 떠올렸다. 분명히 대웅제국의 소속이었지만 칠대절학을 들고가서 실종되었다는 놈! 언제고 용중일을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그 자와 결판을 내게 되리라.
‘하긴 일리는 있군. 대웅제국을 적대시하는 놈들은 지상에 차고 넘치니….’
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망량이 말했다.
“수십 년 동안 76층까지 올라오기 위해 많은 자들이 무척 애를 썼소. 다만 좀 더 빨리 오를 수 있었는데도 일부러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했지. 왜냐하면 영귀가 말했던 대로라면 99층에 존재하는 시련은 감당하기 힘들 게 뻔했기 때문이오.”
“신이 직접 준비했다는 시련.”
“그렇소. 수백 년간 대해와 미궁을 탐험하며 단련된 고수들이었지만 도저히 그런 시련에 대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소. 그래서 적당한 속도로 공략하면서 아군의 역량을 키우는데 좀 더 집중했던 거요.”
나는 그 말을 듣자 말했다.
“구천현녀나…. 아니, 제천대성이나 항우같은 천계 절대강자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소? 99층만 도와달라고 부탁해도 되지 않겠소? 투선들은 왜 우리를 돕지 않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구려.”
망량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당연히 우리도 초기부터 투선들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투선들은 이 쌍성계에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었소. 일반 대라신선 정도는 올 수 있었지만.”
“……?! 대체 왜….”
“아마도 의도적인 거라고 생각되오. 순수한 우리의 역량을 보고싶다는….”
말을 흐린 망량이 말했다.
“구천현녀께서도 천계를 유지하는데 대부분의 힘을 쓰고 있기에, 삼황의 시련에 섣불리 개입할 정도의 여유가 없소. 그래서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 공략할 수밖에 없었던 거요.”
“그런 거군.”
“하지만, 이제 백웅 그대가 귀환했으니 최선을 다해 전선을 밀 생각이오. 백웅 그대가 전력을 다한다면 현 탐사대 중에서도 단연 상급의 실력이라 할 수 있고 잠재력은 그 이상이니.”
나는 그 말을 듣자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껏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고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상급’ 정도라니?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내가 아마 제일 셀 건데….”
“…….”
“…….”
좌중의 분위기가 크게 어색해졌다. 어색해진 이유는 절대지경 대부분이 호기심과 더불어서 호승심을 내비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눈빛에 담겨있는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 판 붙어보자고.
특히 진국준이나 무영검제의 눈빛에 의욕이 가득했다. 당장이라도 칼 뽑고 한판 붙자고 할 것 같은 열정이 느껴진다.
“아, 뭐, 안 그럴 수도 있고. 암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최강고수를 가리는 대련을 시작하면 내가 후달릴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의념천주가 하나같이 장난아닌 압박감을 내뿜는 것도 한 몫 했다. 나도 온갖 수라장을 헤쳐왔다 생각하지만 이 녀석들의 기세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
도대체 이 자식들 수백 년 동안 무슨 지옥을 겪은 거야?
내가 내심 기가 질려 있을 때 미호가 턱을 괴며 말했다.
“상황설명은 다 들었는데 한 가지 이해가 안 되는 게 있구나, 망량.”
“무엇이오?”
“쌍성계에 투선은 출입불가능이라 했다. 그러나 과거에 여동빈만은 이 곳에 들어와서 탐사대를 도와준 것 같구나. 어째서 여동빈은 예외인 거지?”
“…그건 우리로서도 수수께끼였소. 제천대성, 이랑진군도 쌍성계의 출입이 거부되었지만 여동빈만큼은 아무런 저항없이 사당의 비밀통로로 들어올 수 있었지. 이유는 알지 못하겠소.”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망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장삼봉 또한 출입이 가능했소.”
“흐음. 그렇느냐?”
미호가 뭔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망량. 네가 어째서 아까 명룡자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 알 것 같구나. 너 스스로도 알고 있겠지.”
“…….”
“아무튼 좋다. 시간을 더 낭비할 필요가 없다면 탑으로 가보자꾸나.”
우리는 다같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팔괘궁을 나갔다. 그리고 팔괘궁 앞에 그려져 있는 팔괘이동진 위에 올라서자, 망량이 주문을 외웠다.
우웅!
잠시 후 우리는 거대한 또 하나의 세계에 온 듯 했다. 나는 탑의 내부를 상상했는데 나타난 것은 우주공간이었기에 크게 당황했다. 시꺼멓고 광활한 우주공간과 더불어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엉?! 어째서 우주에….”
“탑 내부는 무한의 공간이오. 우주가 나타나도 이상할 건 없지.”
“황당하군. 우주를 날아다녀야 한다는 소린가?”
“아니오. 잘 보시오.”
망량이 손가락으로 하늘 저편을 가리켰다. 그러자 은은한 별빛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길이 은하수 저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망량이 말했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면 시련과 맞닥뜨리게 되어 있소.”
파앗
우리는 별빛의 길을 따라서 천공을 오르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별빛의 길에 오르자 방향감각이 기묘하게 뒤틀려서 아무리 오르막을 걸어가도 평지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고, 조금밖에 걷지 않았는데 족히 수천 리의 하늘길을 걸은 것처럼 지상이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별빛의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복희는 정말로 미친 걸까?’
뭔가가 이상하다. 정말로 미쳤다면 이런 시련을 두어서 인간들을 시험하려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복희는 수하에 영귀를 두고 부릴 수도 있는 걸로 보였고, 여러모로 미쳤다고 보기엔 뭔가 무리가 있었다.
미친 척 하면서 뭔가를 꾸미는 건가?
‘아냐. 하지만 이전에 여와가 나를 복희의 차원으로 보냈을 때…. 그 때의 복희는 아무런 이성이 없었고 나를 그저 입김 한 번으로 소멸시켰어.’
그건 거짓으로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때의 복희는 미친 용이라는 표현이 고스란히 어울렸다. 하지만 그 광기와 더불어 이 시련에서는 이성이 느껴진다. 산하사직도에서 느꼈던 우주 제일의 현룡(賢龍)같은 위풍이 있다.
광기와 이성이 공존하는 게 가능한가?
복희는 [가면]이 벗겨졌다는 데 그거랑 관련이 있는 건가?
내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쿠구구구….
거대한 별의 북구(北區), 극(極)처럼 보이는 머나먼 하늘에서 굉음과 함께 뭔가 불빛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끄오오오!!]
그 곳에서 거대한 날개를 지닌 독수리 같은 게 홰를 치며 수십만 개의 광선을 뿜어내는 게 멀리에서 보였다.
콰과과광
폭열하는 그 전투광경을 멀리서 보던 나는 아연함을 느꼈다.
“뭐, 뭐야? 저게 설마 시련인가?”
“그렇소. 76층의 시련이자 괴물수호자. 추정 몸크기는 소국(小國)의 땅크기 만한 갈가마귀요. 저 놈과 현재 탐사대가 200여일동안 전투중이라고 보고받았소.”
차라리 재앙에 가까운 크기! 그런 괴물이 행성 표면을 달구면서 수십만 개의 광선을 예측불허의 궤도로 뿜어내는 전투가 우주 저편에서 관측되는 건 장엄하기까지 했다. 나는 멈춰서서 황당해져서 말했다.
“너무 크잖아…. 탐사대들이 안 보여. 앗.”
투쾅!!
갈가마귀가 크게 부상하는 게 우주에서 보였다. 이윽고 갈가마귀가 입에서 뭔가 바람을 내뿜자, 천체의 구름덩어리가 크게 흩어지며 열광파(熱光波)가 둥근 지평선으로 퍼져나가는 게 보였다. 족히 수만 리는 퍼져나가고 있었다.
고오오오 -
“…….”
저런 괴물이랑 붙어서 싸우는 중이라고?
전생하면서도 흔히 겪지 못했던 규모의 전투에 내가 황당해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절대지경 고수들이 하나하나 무기를 꺼내는 게 느껴졌다. 무영검제, 극호, 진국준 등이 의념천주를 곧추세우며 말했다.
“저 까마귀 엄청 셉니다, 폐하. 각오 좀 하셔야 합니다.”
“천광혈뢰를 써도 잘 파고들지 못할 정도로 반사신경도 대단하고.”
“흠. 전력을 다해서 후려갈겼는데도 눈알이 안 터지더군.”
싸우려는 의욕이 만만하다는 게 느껴진다.
“…너희 저 놈이랑 싸워봤던 거냐?”
내가 3인의 절대고수들에게 황당해서 물어보자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할 말을 잊고있자 망량이 말했다.
“70층부터는 급격히 난이도가 올라서 계속 이런 느낌이었소. 완전히 상급 마왕이나 다름없지. 그래서 다들 적응이 된 거요.”
“설마 층이 오를 때마다 계속 강해지는 것이오?”
“지금까진 그랬소. 그래서 그대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요.”
파앗
망량이 눈에서 새파란 영기를 띄우며 백우선을 들고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시해지술을 발휘하는 망량이 나직이 말했다.
“이런 추세라면 99층은 틀림없이 [옛 지배자]급과 싸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