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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서왕모가 사라진 게 여와 때문이라는 걸 곧장 다른 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들은 구천현녀가 말했다.
[그 말대로라면 서왕모는 흉신의 저주가 닥쳐왔을 때 이미 여와와 연결이 끊겼단 이야기겠군요. 짚이는 점이 있습니다.]
구천현녀는 서왕모와 직접 교섭했기 때문인지 내 말에 쉽게 납득한 듯 했다. 그리고 구천현녀가 내 말을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다른 자들도 내 말의 현실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듯 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망량이 말했다.
“복희와 여와가 함께 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 그리고 여와는 백웅 당신이 찾아오길 기다린다는 말이 되오.”
나는 그 말에 혹시나 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다들 애먹고 있는 탑의 시련을 그냥 넘길 수 있지 않겠소? 자기 입으로 기다리겠다 했으면 그깟 시련쯤은 통과시켜줄 수….”
망량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반대요.”
“반대?”
“여와가 복희와 함께 은거하고 있다 함은 복희의 뜻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다는 뜻. 그리고 복희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우리를 시험하는 중이오. 그렇다면 여와 입장에서는 당신의 능력을 보고싶어서라도 시련을 통과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지 시련을 없애지는 않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소.”
“…….”
“아무튼 삼황은 삼황이군. 흉신에게 당했는데도 그 정도의 힘을 남기고 있다니….”
뭔가 감탄하듯 중얼거리던 망량이 말했다.
“그럼 대기인원들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망량을 따라갔다. 망량은 서왕모의 궁 바로 옆에 있는 곳으로 향했고, 조그마한 사당의 문을 열자 그 안에는 환하게 넓은 통로가 있었다. 한참을 걸어가면서 망량이 말했다.
“본디 이 비밀통로는 서왕모의 궁 깊숙한 곳에 존재했소. 그러나 서왕모와 구천현녀님의 교섭으로 통로의 위치를 바깥으로 옮기게 되었소.”
“깊숙한 곳? 그렇다면….”
망량이 나를 심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다음에 또 도전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소리요.”
“역시….”
“하지만 방법은 다 있을 것. 우선은 눈앞의 일에 집중합시다.”
이윽고 우리가 통로의 안쪽까지 들어왔을 때였다.
쏴아아….
마치 야트막한 평원이 펼쳐져 있는 듯 했고, 가을바람에 풀이 잔잔하게 쓸려서 평화로워 보였다. 뿐만 아니라 태양과 구름까지 있어서 완전히 다른 세계나 다름없어 보였다. 바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크게 지어진 궁궐같은 건물이 평원 한가운데에 세워져 있었고, 그 건물은 대략 좌우로 이십여 개는 방이 있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 건물의 규모가 아니라 건물 뒤편에 존재하는 거대한 탑(塔)의 존재였다.
‘높다!’
99층이란 게 전혀 허언이 아니었던가?
궁궐같은 건물조차도 마치 오두막집처럼 보일 정도로 넓은 탑이었다. 탑은 너무 높아서 구름을 뚫고 올라가 한계가 보이지 않았으며 지평선의 절반은 채울 정도의 크기로 보였다. 이 장소에서의 거리는 최소한 십여 리는 되어 보였기에 그 엄청난 크기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복희에게로 향하는 비밀통로인가.”
“우리끼리는 이 이세계(異世界)를 쌍성계(雙星界)라고 부르오.”
“쌍성계?”
“저 하늘의 두 별을 보시오.”
나는 망량이 가리키는 손끝의 하늘을 보았다. 그러자 거대한 탑의 양옆에 두 개의 별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망량의 말이 이어졌다.
“말했듯 이 세계의 탐사를 시작했을 때부터 저 두 개의 별이 있었소. 그리고 1차로 대해에서 섬의 탐사, 2차로 시련의 99방을 넘는 모험을 하는 동안에 이 주변풍경은 계속해서 바뀌었으나….”
나는 망량이 말을 끝내기 전에 뭔가를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저 두 개의 별만큼은 변하지 않았던 거군.”
“바로 그거요. 원래는 비밀통로 혹은 복희의 세계 정도로만 불렀으나, 저 두 개의 별에는 큰 의미가 있다 생각해서 쌍성계라고 부르기 시작했소.”
“흐음. 저 별은 뭐지?”
“사실 오늘 이 때까지 짐작가는 건 하나도 없었소. 그러나 당신이 한 말대로라면 한 가지 가설이 있긴 하오.”
“그 가설이 무엇이오?”
이어진 망량의 가설에 나는 흠칫하고 놀랐다.
“저 별이 바로 삼황(三皇)을 상징한다는 거겠지.”
“……!!”
“우선 팔괘궁(八卦宮)으로 들어갑시다. 저기가 바로 이 쌍성계를 탐험하는 우리 탐사단의 전진기지이니.”
우리는 눈앞의 팔괘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 쪽에 한 명의 무인이 서 있는 걸 바로 볼 수가 있었다. 도복을 입고 있으며 헌앙한 체구였고, 상당한 힘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무인을 발견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한 건 내 전생동료로 영입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잠시 후 도복을 입고 있는 헌앙한 사내가 우리 쪽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크게 인사했다.
“곤륜파의 태을신군(太乙神君) 곽정무(郭晶茂), 대웅제국 초대황제 백웅 폐하를 뵈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인사를 받자, 나는 그제서야 그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태을신군 곽정무!
과거 대웅제국에서 동서전쟁 이후 키워낸 절대지경 고수로써 정파를 영도하던 인물이었다. 26세에 초절정에 이른 후 명룡자와 신승의 지도로 절대지경에 이르렀고, 이후 남극대륙 탐사에 투입된 적 있었던 것이다.
‘내가 500년 시간이동을 한 이후에 대웅제국에 등장한 인물이군. 그러니까 내가 모르지….’
전뇌자를 통해서 기억으로는 한 번 스쳐지나가며 봤지만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태을신군 곽정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반갑네, 태을신군.”
“제가 폐하께 팔괘궁을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흠….”
곽정무의 말에 내가 고민하자 옆에 있던 망량이 손을 저었다.
“괜찮네. 곽정무 자네는 대기인원 전원을 건괘의 방으로 불러오도록.”
“알겠습니다, 현허궁주님.”
파앗!
곽정무가 신속하게 곤륜파의 신법을 발휘해서 사라졌다. 나는 곽정무를 보자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말했다.
“이야기만 들은 자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신기하군.”
“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오. 백웅 당신은 현재 대웅제국 사람들에게 신화 그 자체나 다름없으니.”
“그런가?”
“대기인원들이 다 모이면 이야기를 시작합시다.”
우리는 망량의 인도에 따라 건괘의 방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건괘의 방에 도착하자 아늑한 태극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고, 그 자리에 이미 와 있던 선객(先客)이 우리를 인식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검 위에 앉아있다.
가부좌한 채 자신의 키만한 기다란 장검의 날 위에 올라타 있는 소년이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오늘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건괘의 방으로 올 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소년을 보자 외쳤다.
“명룡자!!”
틀림없이 명룡자다! 전생 초기에 보았던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기에 나는 왠지 기쁜 마음이 들었다. 명룡자는 눈을 천천히 반개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백웅.”
“그 동안 잘 지냈나?”
나는 그냥 말을 놓기로 했다. 어차피 명룡자도 내가 전생자라는 건 알고 있을 테고 피차 계급이나 항렬로 존댓말을 따지기에는 관계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명룡자도 별 신경 안 쓰는 듯 대꾸했다.
“네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일이 있을 테고.”
“뭐 어쩔 수 없지….”
“지상에서 여동빈을 만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갑자기 명룡자가 발검(拔劍)했다.
채앵!
명룡자의 일검이 향한 것은 바로 망량의 목이었다. 나는 찰나지간에 명룡자의 쾌섬에 반응해서 마주 쾌섬으로 그의 칼을 막아내었고, 명룡자와 나의 의념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쩡 하는 소리가 뒤늦게 울려퍼졌고 청광(靑光)이 바람과 함께 한 차례 휘날리자 나는 명룡자에게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망량을 왜 공격하냐?”
“나야말로 무슨 짓인지 묻고 싶군.”
명룡자가 날카롭게 망량을 쳐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왜 여동빈을 천계에서 쫓아낸 거냐, 망량. 너만한 두뇌를 가진 놈이 여동빈을 압박하면 그렇게 될 줄 몰랐나?”
“…….”
“본디 여동빈이 가끔씩 우리를 도와준 덕에 탐사가 수월했는데 그가 빠져버려서 점차 탐사가 위험해지는 게 눈에 보인다. 무슨 생각이었냐고 묻고 있다, 망량!”
망량이 여동빈을 쫓아냈다고?
‘그러고보니 여동빈에게 무신에 대한 걸 계속 물어보았기에 여동빈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지상으로 도피한 거였지…. 그리고 내가 망량의 의뢰를 받아서 그런 여동빈을 여산에서 찾아냈던 거고.’
그 당시에는 여동빈의 일을 그리 신경쓰지 않았지만 천계 탐사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중대한 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자신의 목을 겨누고 있는 명룡자의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망량이 말했다.
“종말까지 얼마 시간이 남지 않았소. 언제까지 고고한 검선 여동빈이 무신의 비밀을 한결같이 지키기를 지켜봐야 하겠소? 무신에 대해 뭔가 알고 있다면 털어놓게 하는 게 백웅의 책사로서 옳은 행동이오.”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이었다면 진작 털어놓았겠지! 결국 그건 여동빈이 백웅과 둘이서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너만한 놈이 여동빈을 압박한 건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억측이 구구하군.”
“망량. 난 너를 믿을 수 없다.”
후오오
“속셈을 털어놓지 않겠다면 그냥 여기서 목을 내놔라.”
명룡자의 가공한 살기가 일순간 좌중을 덮쳤다. 나는 그가 과거에도 강력했는데 지금 느껴진 기세가 굉장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나 강해졌나!’
절대지경에 오른 후 전생초기의 명룡자 정도는 이긴다고 자부했지만 지금의 명룡자는 그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팔부신중과 전쟁을 벌일 때 구요신검을 쓰던 명룡자를 보고 예상은 했지만 직접 대면하니 상상 이상이었다. 그의 의념천주가 한없이 정순하면서도 날카롭게 단련되어 있어서 자칫했다가는 나도 명룡자와 맞찔러죽는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공만 써서는 양패구상할지도….’
아니, 당연한 일이다. 원래부터 절대지경에 한발짝 남겨두던 무당파의 천재검사이자 초고수. 그런 명룡자가 나를 통해서 온갖 기연을 전해받으며 500년간 무수한 전쟁과 인외의 강적과의 전투로 자기자신을 단련했으니 - 엄청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장소에서 확실히 명룡자보다 강하며 그를 제압할 수 있는 건 미호 뿐인 듯 했다. 구천현녀는 이 통로로 들어오기 전에 돌아갔으니 미호만이 희망이었다. 하지만 미호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생각하는 듯 그저 강건너 불구경같은 태도였고, 그게 옳긴 했다.
잠시 후 망량이 말했다.
“내 솔직한 속셈을 말해주지. 나는 백웅이 무신(武神)의 좌에 오르게 하고 싶소. 그리고 무신의 좌가 지닌 모든 비밀을 알아내고 말 것이오.”
“그게 비밀을 캐내는 걸로 되는 일인가?”
“당연히 당신 말대로 백웅이 알아서 해야할 일인 건 맞소. 허나 종말이 코앞인데 무신의 패거리가 자기들만의 복안을 가지고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면 그 자들을 존중할 이유가 어디에 있소? 결국 그 자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오.”
뜻밖의 말인 듯 명룡자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관심이 없다고?”
“그렇소. 생각해 보시오.”
이어진 망량의 말에 좌중이 침묵했다.
“무신과 그의 좌에 속한 자들이 이 세상을 구해내겠다고 어디 말이라도 한적이 있냐는 말이오.”
“…….”
어? 그런가?
무신이 이 세상을 구하려는 거 아니었어?
‘어… 그러고보니….’
나는 망량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망량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렇다.
지금껏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여동빈을 비롯한 무신의 좌들은 종말의 시대에 싸우려는 선택을 하게 되지만, 그 자들이 싸우는 동기 자체가 이 세상을 구하려는 것인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황당해져서 망량에게 말했다.
“종말에 [옛 지배자] 패거리들과 싸운다고 하는 게 똑같은 의미인 거 아니었소? 굳이 다른 의미로 볼 필요는….”
“다르오.”
단언하듯 말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그들은 무(武)를 수양한 결과 종말에 싸울만한 장소를 찾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오. 단순히 세상을 구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라면 당신처럼 온갖 신화적인 단서나 유물을 찾아다니면서 [옛 지배자]를 효율적으로 때려잡으려는 연구라도 했어야 하오. 그러나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적 그 자체인 [옛 지배자]의 정보를 모으는 일 따윈 하지 않잖소.”
“…….”
“그 자들의 의도는 너무나 불분명하오. 그리고 만일 그 자들이 신을 없애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어쩌면 적이 될 수도 있는 것. 그렇기에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당신에게 무신백좌의 정보를 최대한 알려주기 위해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거요.”
“하지만….”
“가장 큰 의문은 바로 이거요. 어째서 율주의 세계에서는 종말에 무신백좌가 등장하지 않은 건지.”
“……!!”
“결국 율주의 세계는 완전한 종말과 계시가 닥쳐와서 무참하게 파멸했지.”
뜻밖의 쐐기.
그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망량이 눈을 빛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그 자들이 종말에 나타날지 어떨지도 확실치 않은 것이오. 도리어 내가 무신의 백좌를 믿지 못한다고 말해두겠소.”
“…….”
그러자 명룡자가 서서히 검을 늘어뜨리더니 자신의 등에 있는 커다란 검집에 집어넣었다.
“여기까진가.”
명룡자는 눈을 감더니 홱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걸어서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명룡자에게 말했다.
“어디 가!”
내 제지에 멈춰 선 명룡자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난 이번에 네가 탑을 탐사하는 데 절대 참여하지 않겠다. 망량이 주도하는 한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백웅.”
파앗
명룡자가 경공으로 사라져버리자 나는 황망한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명룡자 - 틀림없이 강대한 전력일 텐데도 이렇게 어이없게 빠져버린다고? 아니 그것보다 명룡자는 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난 거야? 망량이 한 말도 크게 잘못된 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뭔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불안감이 스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정신을 채 차리기도 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500년만이군, 백웅!”
나는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건괘의 방에 나타난 자를 보고는 말했다.
“…누구신지?”
정말 누군지 모르겠다.
단단한 구리빛 근육으로 몸을 무장한 권사. 남만사람인 듯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이지만 검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고, 어디서 야채나 팔고 있을 듯한 평범한 외모. 다만 엄청난 고수라는 건 그가 흘려내는 의념천주의 기세만으로도 느껴졌고, 방금 전 명룡자에 못지않은 초고수라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자 구리빛의 권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나야 나. 날 정말 모르냐? 500년만에 봤잖아.”
“……?”
서운한 듯 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지난번에 신나게 같이 놀고도 잊어버리다니 흠….”
누, 누구지?
나는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어… 권성 이혼… 이었나….”
“아닌데. 하, 이거 참…. 그렇게 친했는데 이거 섭섭하군.”
“아니 잠깐! 기억날려고 해. 그러니까 500년 전에 분명 봤던 것 같… 아니 안 봤….”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구리빛 권사가 한숨을 쉬었다.
“허어…. 실망이다 백웅…. 500년 지났다고 친구를 잊어버리는가….”
“아, 500년이면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아, 그게 아니라…. 아이고.”
“그거 아나?”
“뭘?”
“나한테서 돈 빌려갔잖나…. 지금까지 갚지도 않고.”
“……?!”
돈 빌렸다고?! 어, 언제 그랬지?
나는 당황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아니 왜 기억이 안 나는겨?!
누구야?!
대체 누구지?!
그러자 내 옆에 있던 무영검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폐하.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응?”
“500년 전에 본 적 없으니까….”
“무슨….”
그러자 구리빛 권사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탕탕 쳤다.
“크하하하하핫!! 이거 대웅제국 초대황제가 왜 이렇게 어리숙해? 그래도 멍청한 게 정감가는구만.”
“……?!”
이윽고 권사가 씨익 웃으며 팔짱을 꼈다.
“대월국 무아이보란의 종사(宗師)였던 진국준(陳國峻)이다. 만나서 반갑다, 백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