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26화 (1,123/1,615)

1126====================

사신지혼(四神之魂)

무영검제는 백련교주를 끌어들여서 대웅제국을 처음 만들 때 아군으로 만들었다. 이번 생의 초반에 있었던 일이고, 무영검제를 끌어들이는 일은 내가 직접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영검제쯤 되는 자가 변심하면 그 당시에 그를 억제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없었기에, 우선 제갈유룡이 수를 써서 남궁세가부터 황궁의 지배하에 두었다.

내가 순어구를 얻을 때 별 생각 없이 남궁세가 가주와 남궁환 등을 다 없애버렸기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제갈유룡은 물밑에서 남궁세가의 부흥을 전제로 은거지에 찾아가서 무영검제를 영입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또한 나는 황제로 있는 동안에 다른 동료들과 종종 접촉했고 그 중에는 부하가 된 무영검제도 있었다. 무영검제에게 흑요석을 주지 못했지만 그에게 내가 남궁세가를 멸망시킨 장본인이고, 그 이유가 남궁세가의 사악한 행위 때문이었다는 걸 설명했기 때문인지, 무영검제는 나를 주군으로 인정한 듯 했다. 그는 원래부터 자기 가문의 악행을 용서치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내 무위가 그 당시에 무영검제보다 위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러던 중 나는 갑작스럽게 해신토벌에 휘말려서 실종되었고, 무영검제는 이후 대웅제국에 종사하며 무위를 높여 절대지경 고수가 되었다. 그리고 서방전쟁 때 크리슈나의 화신인 투신 아르쥬나와 싸우다가 전사(戰死)했다. 본디 무영검제는 이 싸움에서 죽어서 끝이었을 테지만 망량 등의 술법사들이 무영검제의 영혼을 초혼(招魂)해서 임시보관했고, 망량이 모종의 편법을 써서 그의 영혼을 천계로 올려보낸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무영검제를 쳐다보았다. 동료들 중에서 나와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닌 무영검제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무영검제. 여긴 어디지?”

내 물음에 그가 자신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대꾸했다.

“천계의 외곽지역인 칠운곡(七雲谷)입니다. 천제단을 통해 올라온다면 여기에 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닥이 전부 구름으로 되어 있군.”

“저도 잘은 모릅니다. 누군가의 술법으로 만들어진 곳이라 들어서.”

저벅

“따라오십시오, 폐하.”

무영검제가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구름이 가득한 비경(秘境)에서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무영검제를 따라가며 그에게 말했다.

“내가 돌아온 걸 이미 전해들었나 보군. 다들 내가 온다는 걸 알고 있나?”

“허허, 아닙니다. 저와 몇몇만 들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나는 반문했다.

“응? 어째서….”

“나머지는 탐색대로 미궁에 들어갔으니 지금 대기중인 인원만 그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래서 모시러 온 겁니다.”

탐색대.

나는 그 말을 듣자 흠, 하고 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서왕모가 만들어 둔 복희에게 가는 비밀통로, 그게 미궁처럼 이계화되어있다는 말이 사실이었군.”

현재 역대 대웅제국의 모든 절대지경 고수들은 망량의 손에 의해 천계로 올라와 있다. 그리고 그들은 고대에 서왕모이자 여와가 만들어둔 비밀통로를 통해 복희탐색을 진행중이었고, 그 탐색은 수백 년째 계속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전뇌자에 기록된 것에 따르자면 비밀통로는 마치 미궁을 연상시키는 이계이며, 그 이계의 마지막까지 도달해야만 복희에게 가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하루이틀만에 이뤄질 탐색이 아니었기에 탐사대는 탐색과 대기인원을 따로 두어서 교차투입되고 있었다.

내 말에 무영검제가 대꾸했다.

“폐하께서 올라오셨으니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 동안 정말 힘들었는데.”

“미궁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인 거야? 망량이 탐색상황을 간략하게만 입력해둬서 자세한 내부상황은 몰라.”

왜인지 모르겠지만 망량은 내부의 구체적인 탐사기록을 전뇌자에 입력하지 않고 간략하게만 진행상황을 연 단위로 가끔씩 입력하곤 했다. 아마도 지상에 자주 왕복하기에는 천계의 대라신선으로써 인과율이 부족하기 때문이리라. 그러자 무영검제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마치 누군가의 꿈같은 장소지요.”

“응?”

“들어가보시면 알 겁니다. 들어갈 때마다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에…. 감히 소신의 말로는 형용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이제 칠운곡을 나왔는지 사방이 구름으로 뒤덮힌 광경에서 서서히 선계의 영산(靈山)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신선으로 보이는 신령스러운 존재들이 있는 걸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흠칫하고 놀랐다.

“헛.”

뭐, 뭔가 기괴하게 생겼어?!

그 기괴함은 이족에서 느껴지는 끔찍함과는 좀 달랐다. 아예 인간의 문명과 동떨어진 듯한 이질적인 감성의 외모를 한 신선들이 곳곳에 보였다. 완전한 인간형을 하고 있는 신선들이 훨씬 더 많긴 했지만 뭐가 뭔지 모르게 생긴 신선도 꽤 있었다.

상상을 약간 뛰어넘은 꿈결같은 모습…. 괴물이라고 표현하긴 애매했고 이계수(異界獸)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인간의 감성으로는 본질적인 거부감이 드는 머나먼 모습이었다. 수만 광년 너머에 있는 이계인이라고 하는 게 차라리 옳았다.

‘그래. 금성에서 봤던 아마츠카미들과 차라리 닮았군….’

아무리 그래도 천계에서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놀라자 무영검제가 히죽 웃었다.

“놀라셨습니까?”

“신선들이 왜 저렇게 생겼지? 인간과 완전히 다른….”

“저도 지나가면서 들은 거지만, 천계와 인간계의 차원 거리가 멀어지면서 천계인들이 더 이상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계보다 더 가까운 차원에 있는 환계나 혈계 등의 모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

“신선들이 어떤 모습을 하던 간에 별로 신경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가끔 미궁을 탐색할 때 술법지원을 해줄 뿐 우리들과는 거리를 두려 하는 자들이라.”

“음….”

하긴 신선들은 정신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정신체들이 일부러 인간의 형상을 하고있는 게 도리어 이상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 해도 내 머릿속에는 천계의 신령스러운 존재들에 대한 고정관념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깨어지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반대로…. 인간세계와 천계가 가까웠을 때는 신선들이 인간과 닮은 모습을 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군.’

그건 무슨 의미가 있는 사실일까.

내가 곰곰히 생각하고 있을 때 무영검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폐하. 천계에 온 후 줄곧 생각했던 것이지만…. 한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너무 격식 안 차려도 돼. 뭐가 궁금한데?”

무영검제가 히죽 웃었다.

“폐하는 싸우는 게 재밌으십니까?”

“……?”

엥?

너무 뜻밖의 질문이었기에 나는 눈이 둥그레졌다. 무영검제의 혈육인 남궁세가의 개종자들을 전생마다 벌할 거냐는 질문이나 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입밖으로 내었다.

“재밌긴 하지. 근데 왜?”

“별 거 아닙니다. 폐하께서 무공을 정말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줄곧 궁금했던 겁니다.”

“나는 자네가 남궁세가 학살 이야기를 할 줄 알았네.”

무영검제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 생전부터 다 털어버렸던 이야기입니다. 폐하께서 나쁜 놈 죽이겠다는데 그런 놈들 다 잊어버렸습니다.”

저 말은 진심인 듯하다.

‘도리어 과거에 얽매여 있었던 건 나인가.’

무영검제는 역시 순수한 무인인 듯 하다. 나는 그의 맑은 눈을 보자 동요시키고 싶어져서 짐짓 과장스럽게 말했다.

“뭐 그렇게까지야…. 그냥 남궁환의 사지를 자른 후 애비 앞에서 목이나 벨 생각일세.”

“맘대로 하십시오. 다음 생부터 남궁환을 일검에 꼬챙이로 만들어버리시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흐음.”

약간 시험해보려고 괜히 심술궂게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군.’

내가 유치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멋쩍어서 머리를 긁자 무영검제가 말을 이었다.

“천계에 올라와서 미궁탐사 때 무한에 가깝게 싸우고 실력을 연마했습니다. 도리어 이게 제가 원하는 삶이란 생각도 들더군요. 그래서 폐하에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만?”

“폐하께서 즐기지도 못하는데 무한히 신들과 싸우고 있다면 그건 비극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즐기는 자가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 줄 아는가? 하지만 즐길 수 있는 건 재능있는 자 뿐이지. 나는 늘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뭐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원래 천재라서.”

“…….”

아 그러고보니 무영검제도 검술천재였지? 천재가 아니면 겉으로나마 중원제일고수 명호는 못 가질 테지?

“엥이….”

여동빈한테 처맞았으면서!

유치하게 반박하고 싶지만 과거 생의 일이라서 이번 생에는 이걸로 반격하지 못한다.

나는 할 말이 없어져서 입맛을 쩝쩝거렸고 무영검제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뿌하하…. 폐하는 역시 폐하군요. 예전 그대로십니다.”

“시간을 넘어왔으니 당연하지. 그대는 이제 절대지경이 되어 수백 년간 수행했으니 나보다 더 강해졌겠군.”

“딱히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다만 미궁탐색에 있어서는 폐하께 가르쳐드릴게 꽤 많겠지요.”

“기대하고 있겠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 건가?”

“현허궁입니다.”

역시.

나는 무영검제의 대답에 생각대로라고 여겼다.

쿠르르릉

이윽고 거대한 도가의 궁전 앞에 도착했고, 거대한 목재 문이 자동으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우로 서 있던 우마(牛馬) 머리를 한 신장(神將)들이 고개를 숙이며 우리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현허궁의 내문(內門)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려.”

나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부르르 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도대체 얼마만에 듣는 목소리인가?

나는 궁전의 가장 안쪽, 평상좌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선인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망량…!!”

망량은 내가 부르자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대꾸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물론.”

나는 망량의 맞은편에 앉았고 무영검제는 옆에 시립했다. 망량과 마주보자 그는 젊은 시절 망량의 모습 그대로였고, 단지 새하얗고 기품있는 선복(仙服)을 입고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또한 지난 세월동안 대단한 영력을 쌓았는지 척 봐도 대라신선이라는 위풍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망량은 입을 열었다.

“지상의 이야기는 잘 들었소. 지금은 달기와 융합된 미호를 구제하기 위하여 서왕모와 먼저 대면하는 게 일차과제겠구려. 그 후는 탐사대를 도와 복희를 찾아내는 임무에 투입될 것이고.”

“그렇소, 망량. 그보다 그간 잘 지냈소?”

“…….”

망량은 순간 어두운 안색으로 바뀌었다. 아주 잠깐동안 스친 표정이었지만 나는 저런 망량의 표정을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무감정한 얼굴로 되돌아온 망량이 대답했다.

“나는 늘 나로써 지내오고 있었소….”

응? 뭔가 묘한 대답인데….

망량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탐사대가 미궁의 76층을 공략하는 중이오. 언제 탐사대가 귀환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바로 미궁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소.”

“76층? 미궁이 무슨 탑이란 말이오?”

“우리가 지난 세월동안 탐사해온 성과에 따르면 미궁은 총 3개의 구획으로 이뤄져 있었소. 첫 구획은 끝없는 망망대해에서 섬을 따라서 출구에 도착하는 모험이었고, 두 번째 구획은 시련의 방을 넘는 모험이었소. 그리고 이제 마지막 구획이 바로 탑을 등정하는 모험으로써 목표는 99층이오.”

“……?”

뭐라고?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말했다.

“그렇게나 복잡하단 말이오? 가히 끝도 없는 규모군…!!”

“…아마도 단순한 비밀통로나 이계가 아니기 때문일 거요. 서왕모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지만 아마 우리가 탐사하고 있는 곳은…. [태초의 꿈]의 편린이오.”

“[태초의 꿈]?”

“마치 꿈결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인간을 시험하는 듯한 장소. 그것이 바로 삼황 복희를 만나기 위한 시련이오. 이 꿈의 주인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겠지. 이 꿈을 깨어나게 할 자격이 있는 건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도전했지만 꿈의 주인은 아직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었소.”

뭔가 복잡한 설명을 한 망량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검마가 아직 복귀하지 못했으니, 지금 당장은 탐사대에 합류시킬 수가 없겠소. 그러니 이곳에 온 1차적인 용무를 먼저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소.”

“서왕모를 볼 수 있는 것이오?”

망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구천현녀를 뵈러 갑시다. 그 분을 대동해야만 서왕모의 결계를 뚫을 수 있으니.”

“그럽시다.”

“잠시 그 전에….”

망량이 갑자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어리둥절해서 그를 쳐다보자, 망량이 말했다.

“월요를 보여줄 수 있겠소?”

“아!”

나는 그동안 꺼내지 않았던 월요를 목갑에서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망량은 월요를 차분히 살피다가 말했다.

“본디 월요를 비롯한 칠요는 재액을 품고 있는 것…. 삼황오제의 소멸 후 세상의 인과율이 뒤틀어졌소. 그대가 시간을 넘지 않고 이 세상에 남아있었다 해도 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오.”

“…….”

“그대가 칠요의 정령을 무리없이 각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말세가 가까워지면서 누군가의 의도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망량이 말했다.

“시간이 되면 월요의 정령도 각성시키는 게 좋겠소.”

“그럴 생각이오.”

“그럼 나가 봅시다.”

나는 무영검제, 망량을 따라서 현허궁을 나갔다. 그리고 한참을 걸어서 구천현녀가 머무는 산에 도달했고 망량이 무언가 주문을 외우자 구천현녀가 우리 앞에 소환되었다.

파앗!

망량이 고개를 숙였다.

“현허궁주 망량이 천계의 지존 구천현녀를 뵙니다.”

[망량. 고개를 드세요.]

나는 간만에 본 구천현녀가 예전과 아주 다른 느낌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굉장히 존재감이 엷어졌다….’

이전에 보았던 구천현녀는 가공할 힘을 응축하고 있는 신적 존재 그 자체였는데, 어쩐지 신력을 지니고 있는 내 감에 지금의 구천현녀는 굉장히 엷은 느낌이 들었다. 자세히는 묘사할 수 없지만 그녀의 힘 자체가 줄어든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시간을 넘었다는 게 진실이었군요….]

구천현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서왕모를 만나러 가지요.]

“아, 그 전에 미호를 소환하려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나는 그 말에 미호가 준 곡옥을 목갑에서 꺼냈다. 그리고 곡옥에 신력을 불어넣자, 신령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곡옥이 소멸되며 눈앞에 미호가 소환되었다.

파앗!

소환된 미호는 주변을 둘러보는 듯 했다. 그리고는 구천현녀를 보자 인사했다.

[구천현녀여. 서왕모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생각외로 마찰 없이 무난하게 넘어가는 듯 했다. 서로 다툴 이유가 없기 때문일까?

[그럼 서왕모의 궁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어느새 꽤 불어난 일행들과 함께 나는 서왕모의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두에 서 있던 구천현녀가 손을 내뻗어서 궁 앞의 투명한 결계에 접촉하자, 두웅 하고 일렁이는 소리가 울려퍼진 후 내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라!!]

강한 거절의 의사!

명백히 서왕모의 목소리였기에 일행은 다들 멈칫했다. 구천현녀가 곤란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웅이여. 서왕모가 분노해 있습니다. 지금 그녀를 억지로 만날 순 있겠지만 전투가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화가 난 겁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나는 대충 짐작이 간다.

서왕모는 이 천계에 미호가 소환된 순간 알아챈 거겠지.

그리고 미호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포기하면 너무 큰 손해야.’

이번에 포기하면 앞으로 내 전생동안 영영 미호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그녀를 동료로 삼을 수 없게 된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나아가야 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구천현녀에게 말했다.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어떻게든 오늘 서왕모와 끝장을 냅시다.”

[하지만….]

“도와주십시오. 만일 적극적으로 도와주신다면 월요의 힘으로 천계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구천현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제안이군요. 그렇다면 문을 열겠습니다.]

쿠구구구….

나는 서서히 결계가 걷히는 걸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가자.’

오늘 서왕모와 결판을 낸다!

이윽고 서왕모의 궁전 내부로 진입하자, 궁전 내부에 있던 푸른 옷의 시녀들이 넙죽 엎드려 있었다. 그 시녀들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청조(靑鳥)라고 불리는 존재들로써 반인반요같은 자들이었다. 청조들이 이윽고 일제히 입을 모아서 외쳤다.

“돌아가 주십시오!”

“주인께서 진노하셨나이다!”

“돌아가지 않으시면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옵니다!”

그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어서, 청조들이 서왕모에게 품고있는 경외와 공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비켜라.”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동요하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왔고, 청조들은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고 엎드려있을 뿐이었다.

푸콰콰콱

잠시 후 뒤에서 피분수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힐끔 돌아보자 청조들의 목이 일순간에 모조리 베여버려서 바닥에 목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서왕모의 짓인가….’

아무래도 우리를 멈춰세우지 못하면 다 죽여버리겠다는 엄포를 듣고 왔는데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대가인 듯 했다. 나는 서왕모의 잔혹함에 눈살을 찌푸리며 전의를 다시금 불태웠다.

이윽고 궁의 내전에 들어섰을 때였다.

쿠구구구….

내전의 옥좌에는 서왕모가 노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옥좌의 손잡이를 쥐고 있었는데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힘줄이 드러나보일 정도였다. 서왕모가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구천현녀…. 분명 이 천계의 지배권을 네게 넘겨줄 때 이야기했을 것이다. 더 이상 여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그 말에 구천현녀가 나직이 대답했다.

[서왕모여. 어찌 그리도 노했습니까? 우리의 방문이 그대의 심기를 심히 거스를 이유라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서왕모가 미호에게로 시선을 향하며 외쳤다.

[나의 음신에서 떨어져나온 하찮은 꼬리가 금기를 있는 대로 범하고도 감히 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단 말이다!!]

꽈르르릉!!

서왕모의 어마어마한 살기와 함께 뇌음(雷音)이 천상을 진동시켰다. 궁 전체가 뒤흔들리면서 그 영기의 파동이 실제로 우리 모두에게 격렬한 피해를 주는 게 느껴졌다.

‘으윽.’

나라도 맨몸으로는 절대 받아낼 수 없는 기세였다. 호신강기를 발휘하자 좀 나아졌고, 이윽고 구천현녀가 자신의 힘을 써서 서왕모의 살기에서 모두를 보호해주는 게 느껴졌다.

그러자 미호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미호와 서왕모가 서로 마주 대면한 상황 - 겨우 십여 보를 사이에 둔 미호는 갑자기 서왕모에게 말했다.

[저는 서왕모님을 어머니라고 생각했나이다.]

[…….]

[위대한 존재든 아니시든 저의 근원, 저의 어버이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대를 존경합니다….]

[여를 존경하느냐?]

서왕모가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하거라! 그러면 너를 용서해 주마, 하찮은 꼬리야!]

미호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뭐라고?]

쿠구구구구….

미호가 갑자기 반인반요의 형태에서 몸뚱이가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모습이 거대해져서 마치 달기처럼 변신한 미호가 외쳤다.

[지금의 제 모습을 보십시오, 서왕모여!]

파아앗!!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미호의 전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고, 구미(九尾)가 이미(二尾)로 줄어들었다. 인간만한 크기의 황금빛 여우로 변신한 미호가 신성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대는 저에게 무엇을 원하여 지상으로 내려보내셨나이까?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저는 이미 그대의 품을 떠난 여우이옵니다.]

[…….]

[저를 삼황 여와의 후계자로 인정해주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청이옵니다.]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서왕모가 살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꾸드득 하고 옥좌의 손잡이를 잡아 부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너따위를 인정할 순 없다.]

[그러하옵니까?]

이윽고 미호가 자신의 몸을 크게 부풀리며 눈에 혈광을 띄웠다.

[그럼 싸워서라도 인정받겠사옵니다.]

[뭐라고?]

[여와가 서왕모라고 할지라도, 서왕모는 여와가 아닌 법. 그대를 죽이면 화신의 자리가 비지 않겠습니까?]

[크후후후.]

서왕모가 미호의 말에 광소를 터뜨렸다.

쿠구구구…

서왕모의 모습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과거에 보았던 끔찍한 마수로써, [옛 지배자]조차 천려오잔 한번에 물리쳐버린 악몽같은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다. 서왕모가 완전히 마수로 변화한 후 말했다.

[마침 잘 되었구나…. 널 잡아먹고 내 힘이나 보충해야겠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여가 판단할 일이다.]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건가.

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굳이 드라큘라의 뜻대로 하지 않아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군….’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미호를 도와서 다같이 서왕모를 때려잡는 수밖에….

‘여기서 목숨을 걸자.’

내가 각오를 세우고 있던 그 때였다.

번쩍!!

갑자기 시간이 멈추었다. 느닷없이 일어난 상황에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존재가 멈추어 있었다. 심지어는 서왕모나 미호, 구천현녀마저도 굳어 있었기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쟁쟁한 존재인데 이들을 상대로 시간정지를 걸 수 있다고?

게다가 서왕모나 미호, 구천현녀 등은 우주적으로도 상당한 격을 지닌 존재였기에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놀라고 있을 때 내 앞에 무언가가 천천히 환영처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너무 오랫동안 내버려두었군….]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은은한 환영이 내게서 십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 모습을 확인하자 눈을 부릅떴다.

‘여와?!’

서왕모가 아닌 여와의 본체 모습이었다. 내가 놀라고 있자 여와의 본체 모습을 한 환영은 나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별빛을 벼려서 만든 여의 걸작…. 화신이자 분신…. 그렇기에 내가 세상을 버리고 은거했을 때도 내 의지와 자기자신을 동일시했고…. 지금도 착각 속에서 움직이게 되었군….]

“…….”

[너무… 강력한 화신을 만들면...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그렇게 말한 여와의 환영은 손을 뻗었다.

슈르륵!!

그러자 놀랍게도 서왕모가 여와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뭐, 뭐야?

서왕모가 즉 여와인 거 아니었나?!

이게 무슨….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여와의 환영이 서서히 사라지며 말을 남겼다.

[…굴레를 움직이는 자여…. 감히 짐작할 수 없는 혼돈이여.]

“…….”

[그대는 우주의 [꿈]에 간섭하여… 여의 의지에 변혁을 일으켰다….]

“…….”

[본디 여는 지금 서왕모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았을 테고…. 그대들은 전멸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겠지만…. 여는 그리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그대가 만들어낸 사소하지만 거대한 인과율의 변혁. 황제조차 읽어내지 못한 혼돈의 결과물이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인정받고 싶다면 진짜 여의 은거지에 찾아오거라.]

여와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복희가 있는 곳에 여 또한 있으리라….]

파앗

잠시 후  시간정지가 풀렸다. 그리고 나 이외의 모두가 시간정지에서 깨어나며, 갑작스럽게 사라진 서왕모 때문에 당황했다.

“아니?!”

“이런….”

[어떻게 된 거지? 서왕모는….]

[도망친 건 아닌 것 같군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침묵했다.

“…….”

내 머릿속에 아수라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산하사직도에 들어가기 전에는 거역할 수 없는 장대한 흐름 같은 게 이 세상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나나 전뇌자는 그 흐름을 인식했으나 거스를 방법이 없어서 너만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산하사직도에 들어갔다 나온 후 무언가 흐름에 균열이 생긴 것처럼 느껴진다.]

무언가 거대한 흐름….

나는 그걸 느끼자 잠시 소름이 돋았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산하사직도의 일이 바깥세계에 영향을 미쳤단 말인가?’

뭐가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반드시 이 천계에서 미궁을 돌파해서 복희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아마 그 곳에 진짜 여와 또한 있으리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