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25화 (1,122/1,615)

1125====================

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사공린의 말에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네가 구해낼 수도 있는 거잖아.”

사공린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이곳의 탐사를 시작한지도 수십 년. 금성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저 유해의 강의 정체를 알아내고 저들을 구해내려 해 보았어요. 하지만 무리라는 걸 알게 되었죠.”

“어째서? 네가 가진 천마의 힘이라면 아무리 악신의 저주라 해도….”

“풀 수 없더군요.”

“…….”

“무언가를 구하거나 회복할 때는 명백한 한계가 있는 힘이에요. 파괴할 때는 무제한에 가깝지만….”

천마의 힘도 한계는 있는 건가?

잠시 후 사공린의 시선이 금성의 지평선, 주황빛으로 서서히 타오르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이제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후오오오…

“……!!”

나는 이윽고 금성의 열풍(熱風) 너머에서 거대한 뭔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보고 흠칫했다. 그 무언가가 어찌나 거대한지 지금 내가 서 있는 장소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을 터인데도 지평선의 3할을 메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정도 크기라면 이미 단순한 거대괴물을 넘어섰고 자연재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이형(異形). 흔히 이족이라고 불리는 기괴한 생명체들의 이질적인 모습과는 좀 다른 종류이지만 저 거대괴물의 모습 또한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무지개빛 눈이 몸통과 다리에 달려 있고 나방과 메기가 결합한 것 같은 요상망측한 모습 -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이끌어내기에 충분한 무언가가 서서히 금성 저편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나는 긴장하며 수요와 화요를 뽑아들었지만 이내 옆에 있던 사공린이 손을 저었다.

“싸울 필요는 없어요. 제 힘으로 이 일대를 은신시켜서 저 존재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지나가게 내버려두라는 건가?”

“네. 귀찮은 일만 생길 테니까요.”

후우우웅…

거대한 금성의 열풍이 용오름을 만들더니 타오르는 듯한 적열(赤熱)이 잠시동안 유적 주위를 메웠고, 마치 대륙을 연상시키는 듯한 거대괴물의 모습이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게 보였다. 태산이 날아가는 듯한 그 장엄한 모습에 잠시 압도될 뻔 했지만 이윽고 거대괴물의 뒤에 또 다른 종류의 거대괴물들이 졸졸 따라가는 걸 보자 눈을 치켜떴다.

‘저건?’

생김새는 완전히 다르지만 크기는 그리 다르지 않은 놈들이었다. 괴물들은 무려 수십 마리나 되었으며 하나같이 기괴한 우주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지근거리에서 보니 실체가 없고 반투명하게 비치는 몸뚱이를 지니고 있었다.

약 한 식경이 지나서 열풍과 함께 금성의 거대괴물들이 스쳐지나가자, 그제서야 사공린이 말했다.

“백웅. 저 자들의 정체를 알겠나요?”

“…설마, 저 녀석들은 아마츠카미인가?”

“맞아요.”

나는 내 예측이 맞자 놈들이 떠난 금성의 황량한 열로 뒤덮인 평야를 응시했다.

아마츠카미(天津神)!

그 놈들은 고대에 달을 지배하던 [옛 지배자] 이자나기노미코토의 부하였으며, 지상에 내려와서 동영 땅에서 행패를 저지른 바가 있었다. 그러다가 이자나기노미코토가 삼황오제에게 패배해서 봉인당하면서 아마츠카미 또한 추방당해서 금성에 유폐된 것이었다.

‘금성에 봉인되어있는 마신이라고 해서 설마했지만.’

저 아마츠카미들은 예전에 지구에 강림하려고 해서 골치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났다.

나는 혹시나 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아마츠카미들이 아틀란티스에서 금성으로 이주한 고대인들에게 저주를 내려 유해의 강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말인가?”

“그래요.”

“…제기랄, 뭐가 그래요야?”

나는 수요를 뽑아들고는 손잡이를 꾹 쥐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뒤쫓아서 저 개자식들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자고! 너와 나 둘이면 할 수 있어.”

“…….”

“저주를 내린 사악한 신을 다 없애버리면 저주가 풀릴 거 아냐.”

“백웅. 그럴 수 없어요.”

“뭐?! 저것들 충분히 이길 수 있어!”

“그렇겠죠. 저 혼자서도 가능해요. 하지만, 아마츠카미를 쓰러뜨린 다음에는 더 큰 재앙이 와요.”

“뭐?”

사공린이 나를 차분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마츠카미들은 금성에 유폐된 동안에 이 별에 깊게 유착해서 별의 궤도와 심핵(深核)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어요. 저 자들을 쳐서 쓰러뜨리게 되면 별의 궤도가 뒤틀려서 금성이 튕겨나가게 되고, 칠요(七曜)의 모든 행성의 운행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수십수백이나 되는 정신체 마신들의 소멸에는 그 정도 영향력이 있는 거예요. 특히 근처에 있는 지구에는 틀림없이 대재앙이 찾아오게 되겠죠.”

“……!!”

“강력한 인과율이에요. 저 자들은 혼자 죽지 않게 되어있어요….”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저도 아마츠카미를 쓰러뜨리려 했지만 금성의 기록을 본 후에는 포기했어요. 그리 강력한 마신들은 아니지만 쓰러뜨린 후의 뒷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도리어 삼황오제가 거의 소멸한 지금에도 유폐감옥인 금성에 남아있어주는 게 고마울 지경이죠.”

“그런 게 어딨어. 그럼 아틀란티스의 고대인들은 그냥 고통받게 놔두자는 거냐?”

“…….”

사공린이 침묵하다가 말했다.

“굳이 세상에 피해없이 쓰러뜨리려 한다면 방법은 하나, 정신체인 저 자들을 지상에 강신시켜서 강신된 몸채로 죽이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방법…. 괜히 무수한 마왕들과 피터지게 싸우는 일만 생기는 거겠지요. 아마츠카미 전원의 힘이라면 결코 팔부신중에 못지 않고, 그건 자연재앙보다 더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 고대인들에게 유일한 구원은 종말뿐이에요. 종말이 찾아와서 모든 게 소멸하게 된다면 고대인들의 고통은 사라지게 되겠죠.”

그런 뜻으로 내게 말했던 거였나.

나는 수요를 늘어뜨린 채 침묵했고, 사공린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답이 없는 상황이니, 고대인들을 위해 종말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건가?”

“모든 게 사라진다면 고통도 없겠지요. 백웅 당신의 이상(理想)이기도 하고요.”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달라. 결과적으로 외신(外神)을 없앨 수 없다면 몇만 번을 멸망하더라도 무의미한 거라고. 그리고 무의미한 종말에 혹해서 현재를 내던지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

“그러니까 그딴 소리 집어쳐!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되는 거야!”

그러자 사공린이 웃었다.

“후후후…. 역시 백웅이군요. 시험해서 미안해요.”

“뭐? 시험?”

“그냥, 당신이 종말을 앞둔 이 시점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했어요. 제가 만일 당신이라면 이렇게 암울한 상황에 대충 빨리 다 끝내버리고 싶을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웃기지 마. 지금보다 더 힘들 때도 많았는데 왜 이 정도로 포기해야 해? 난 끝까지 갈 거야!”

이번 삶은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기에 버틸 만하다. 지금보다 더 힘든 시점이 수두룩하게 많았기 때문에 이 정도는 이제 고생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 좋군요.”

사공린은 훗하고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번 천계탐사에서 복희를 찾아야 할지도 몰라요.”

“무슨 뜻이지?”

그녀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지금 한 가지 이상현상이 있어요. 그건 바로 삼황오제 대부분이 소멸했는데도 아마츠카미들이 이 금성에서 탈출하지 않는 현상이죠.”

“응? 그게 왜.”

“말했듯 여긴 아마츠카미들에게 있어서 감옥이나 다름없어요. 고대에 저 자들은 신의 육체도 갖고 있었지만 삼황오제에게 강제로 육체를 소멸당하고 정신만 금성에 귀속된 거죠. 게다가 강력한 영적 결계가 금성에 쳐지고 금요가 금성의 백을 담당하게 되면서 풀려나올 희망조차 사라졌죠. 그러나 삼황오제 중 소호금천이 소멸한 지금, 그 결계는 금성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

“까다롭긴 하겠지만 저 자들이 조금만 수를 쓰면 지난 500여년 동안 지구에 강림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요. 정신체라고 할지라도 마도사들에게 [부름]을 썼다면 그들의 소환의식을 이용해 쉽게 탈출할 수 있었죠.”

“놈들은 달을 꼭 경유해야만 지구에 갈 수 있잖아?”

“제곡이 소멸한 지금 아마츠카미들은 그냥 달에 있는 마도사나 봉사종족에게 빙의해도 상관없어요. 소환사가 스스로 빙의당하기를 원하면 막아줄 자가 없습니다.”

“으음.”

“그런데도 저 자들은 금성에서 탈옥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 계속 금성을 돌고 있을 뿐입니다.”

“이상하군. 왜 탈출하지 않지?”

아마츠카미들이 지난 수만 년 동안 이자나기노미코토의 패배와 함께 갇혔다면 간절하게 금성에서 탈출하길 원하고 있으리라. 실제로 내가 예전에 칠요의 시련을 진행할 때도 그런 기색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아마츠카미들은 얌전하게 금성에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사공린이 말했다.

“제 생각에는, 저 자들이 탈출하지 않는 이유는 금요(金曜)와 관계있습니다.”

“금요?”

“이번에 삼황오제가 소멸했는데도 봉인된 이자나기노미코토가 풀려나지 않은 것도 이상하지 않나요?”

“아, 그러고보니….”

“그 자의 본체를 직접적으로 억제하는 것은 바로 삼황오제 제곡의 힘. 그러나 그 제곡이 소멸했는데도 이자나기노미코토가 풀려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건, 제곡의 봉인을 누군가가 이어받아서 유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봉인을 이어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은 월요(月曜)의 소유자겠지요.”

“……!!”

“칠요의 주인이라면 그게 가능할 테니까요.”

나는 월요가 언급되자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십이율주….”

“그렇습니다. 십이율주가 이자나기노미코토를 계속 봉인하고 있는 중이겠죠.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대로라면, 마찬가지로 금요의 소유자가 아마츠카미들을 봉인하려고 힘을 쓰고 있다는 말이겠군.”

“그거예요. 그리고 금요의 소유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서방의 수호자. 그 자가 금요에 힘을 불어넣어서 금성의 재앙을 막아주는 중인 거예요.”

서방의 수호자는 다소 인간에게 우호적인 고대의 신적 존재였다. 그렇다면 금성의 재앙을 봉인하고 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만나면 고맙다고 해야겠군. 근데 그거랑 복희를 꼭 만나야 하는 건 무슨 상관이지?”

“백웅. 이전에 삼황오제가 다 모이면 종말을 유예할 수 있다고 한 적이 있었죠.”

“그랬지. 하지만 삼황오제 중 대부분이 죽거나 힘을 잃으면서 이젠 무의미해졌지….”

“그 이야기에서 신농은 복희가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강조한 적이 있어요. 그 말은 다른 삼황오제가 없어도 복희가 혼자서도 중대한 부분은 해낼 수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나요.”

“으음.”

귀가 솔깃한다. 아직까지 희망을 놓을 때는 아닌 건가?

“복희가 귀환한다면 현재의 불완전한 봉인상황에 처해있는 칠요를 이용해서 뭔가 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것 자체가 종말의 유예가 될 수도 있겠죠. 또한 복희의 술법이라면 저 불쌍한 유해들에게 걸린 저주만 풀어줄 수 있을지도.”

복희를 찾아서 제정신이 들게 하는 건 이 세상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는 일인 것인가.

나는 새삼스럽게 이번 일의 중대함을 깨달으며 사공린에게 말했다.

“좋아. 반드시 복희를 찾아오겠어. 나만 믿어!”

“부탁하겠습니다, 백웅. 중대한 임무이니만큼 제 나름대로 지원을 해 드리죠.”

사공린이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 웬 홍옥(紅玉)을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금성에서 발견한 아틀란티스의 유물입니다. [총독의 심장]이라고 하는 마도석이죠.”

“호오, 이거 좋은 건가.”

“지니고 있으면 사용자에게 찾아올 죽음의 운명을 한 번 왜곡시켜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

굉장한데?!

여벌목숨 한 개가 더 생긴 건가!

내가 놀란 눈으로 홍옥을 살펴보자 사공린이 훗하고 웃었다.

“백웅. 금성에서 얻은 고대의 과학기술은 최근에야 해석되었고 그게 제일 먼저 도입된 게 바로 당신에게 드린 인공보패인 황룡마신입니다.”

“그 갑옷?”

“네. 사실 황룡마신의 코어에는 아틀란티스의 최고기술이 도입된 의문의 코어가 그대로 끼워넣어졌어요. 총독부의 최심처에 있던 코어였고, 지금 드린 총독의 심장과 함께 놓여있었던 물건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잠재력이 있는지는 본국의 연구자들도 미지수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

“당신이라면 왠지 황룡마신의 잠재력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신기한 얘기다.

‘황룡마신은 따지자면 고대의 유물이 된 셈인가.’

갑옷은 잘 안 입는 주의지만 이제부터는 황룡마신을 자주 입고 다녀야겠다.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는 사공린, 류하와 함께 지상으로 돌아왔다.

파앗!

돌아온 직후 나는 천제단으로 향했고, 소림의 천제단에서 다시 신승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신승과 만나자 인사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구려, 백웅 시주….]

“안드로이드 몸은 어때? 안 불편해?”

내가 걱정스럽게 묻자 신승 명호대사의 눈에서 기계의 빛이 깜박이더니 대답이 들려왔다.

[시주…. 혹시 그 사실을 알고 있소?]

“뭘?”

[보시오….]

나한주권(羅漢註拳)

갑작스럽게 명호대사의 몸이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였고, 그의 강철 주먹에서 권형(拳形)이 일어나더니 내 코앞까지 짓쳐들어왔다. 어마어마한 기력과 함께 태산처럼 거대한 힘이 내 전신을 휩쓸어오는 듯 했다.

멈칫

내 코 바로 앞에서 멈춘 명호대사의 기계손. 나는 뒷머리조차 권풍에 휘날리지 않는 걸 느꼈고, 마치 거짓말같은 이 무위의 정체를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물리현상조차 통제할 수 있는 이 능력은 틀림없이 내가 알고 있는 그 능력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의념?! 어,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지?”

틀림없다! 방금 전 명호대사가 쓴 것은 소림사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나한주권이며 권형의 전개는 기로 했으나 마지막 마무리를 의념으로 통제하면서 신기나 다름없는 권법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신승 명호대사는 이미 옛날에 인간으로서의 육체가 죽어버리고 안드로이드로 정신을 옮긴 상태!

안드로이드 로봇이라면 의념을 쓸 수 없어야 정상 아닌가?!

내가 놀라워하자 명호대사가 주먹을 거두고 기계손으로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의념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육체가 기계라는 건 아무 상관이 없소. 축기를 하여 내공을 쌓지는 못하지만 그마저도 기를 축적한 기계장치로 해결할 수가 있었소.]

“허…. 지, 진짜군. 어떻게 이럴 수가.”

[…….]

상상 밖의 일이다. 지금까지 인간만이 의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로봇이 되어서조차 의념을 쓸 수 있다니? 합장을 하고 있던 명호대사가 침묵하다가 말했다.

[백웅, 만일 생각할 줄 알고 자기 의지를 지닌 기계가 스스로 인간이라 칭한다면 그 기계 또한 인간이오?]

“당연히 인간이지.”

[그리 생각해 줘서 고맙소. 허나 노납은 최근 이 명제가 헷갈리기 시작했소…. 과연 어디까지를 인간이라 할 수 있겠소.]

신승 명호대사의 눈에 불빛이 깜박거렸다.

[나는 자기자신을 신승 명호대사라고 생각하는 안드로이드일 뿐 아닌가?]

“…….”

[의념은 쓸 수 있으나 의념천주는 쓰지 못하는 게 현재 노납의 한계. 백웅 그대는 이 점을 유념하여…. 의념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봐 주시오.]

“무슨 말이지?”

[의념을 넘어선 곳에… 무(武) 그 자체의 의지가 존재할지도….]

끼이이잉…

그 말을 끝으로 신승의 눈에 불이 꺼졌다. 놀라서 옆을 쳐다보자, 날 따라온 천우진이 한숨을 쉬었다.

“의념을 쓰면 꼭 이렇게 과부하 현상이 생기더군. 수리하면 되니까 걱정 마라.”

“천우진. 방금 신승의 그 말은….”

“몰라. 나한테 묻지 마. 그건 네가 풀어야 할 숙제야.”

“엉?”

“내가 의념을 쓸 수 있다고 해서 무인인 줄 아냐? 술법사한테 별 걸 다 묻는군.”

퉁명스럽게 말한 천우진이 신승 명호대사의 목 뒤편에 있던 버튼을 꾹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하긴 전생하면서 늘 새로 살아가는 네놈이 지금 신승보다 더 고민이 깊어야 할 텐데도 정체성 고민따위는 눈꼽만큼도 하지 않으니, 참 다행이다. 네 정신력을 걱정할 필요도 없겠구나.”

“뭔 개소리야.”

“바보라서 좋겠단 소리다, 멍청아.”

“…….”

천우진은 이쪽을 쳐다보지 않고 약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바보가 아니면 곤란했을 거야. 정말로.”

이 새끼는 욕을 하는 거야 뭐야?

삐잉!

내가 짜증이 날 때 천우진이 천제단의 버튼을 기동시키며 말했다.

“하나 둘 셋 하면 올라간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라.”

“야 잠깐….”

“하나둘셋!”

야 그건 하나 둘 셋 이 아니잖아 왜 빨리 세는 거야!

파앗!

내가 천우진한테 따지기도 전에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었다.

구름!

사방 천지에 구름만 가득했고 땅도 구름이었다. 정확히는 폭신하게 밟을 수 있는 구름덩어리로 이루어진 대지인 것 같았다. 이렇게 구름을 밟으며 걸어다닐 수 있는 건 생각해본 적 없었기에 내가 신기해서 서 있자, 저만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군.”

익숙한 목소리.

내가 뒤쪽을 돌아보자, 거기에서 누군가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가 곧장 검을 뽑으며 외쳤다.

“어디 간만에 황제폐하 실력 좀 봅시다!”

쉬리링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치 면도날같은 무형의 검기가 내 전신을 향해 파도처럼 쏟아졌다. 나는 이런 공격을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에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고, 상대의 공격에 화답해 종(從)으로 길게 일참을 그었다.

촤앗

파도를 가르는 일참이었으나 상대는 즉시 의념을 발휘하여 수 겹의 검파(劍波)를 중첩시켰고, 나는 파고(波高)를 가볍게 넘지 못함을 깨닫고는 이번에는 칠대절학 중 진무칠절경(眞武七絶經) 명곡(鳴曲)의 묘의를 이용해서 검끝으로 파장을 방출하며 상대의 검파를 잔뜩 헤집었다.

물방울이 가볍게 튀었다. 물방울이라고 여긴 것은 사실 의념이 극도로 뭉쳐있는 필살의 검기였고, 나는 튕겨나와서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서 내 미간을 관통하려는 물방울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면서 동시에 삼보절기를 써서 검파의 옆으로 돌아갔다. 검파가 정면으로 방출되고 있으니 옆구리가 약할 거라는 계산이었다.

투둥!

하지만 잠시 후 내 기운과 상대의 기운이 크게 충돌했고, 나는 팔다리가 잠시 저릿하는 걸 느꼈다. 마치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미리 호신강기로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꺾이면 상대의 반격에 낭패를 당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그대로 강검으로 내려베었다.

푸콱

강력한 일섬은 상대가 정면으로 막지 못한 건지 즉시 검파가 원형의 파괴흔을 남기며 터져나갔고 머리통도 함께 터져나간 듯 했다. 그러나 머리통이 터진 것은 그저 상대의 분신일 뿐이었고, 이윽고 상대방이 도리어 내 앞으로 뛰어들면서 거리를 좁혀 나와 똑같이 내려베었다.

“음!”

강검(强劍)에는 강검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무량단을 쓰려고 했지만 뭔가 뒷골이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 실전경험에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나는 찰나의 직감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므로 우선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기로 마음먹고는 아수라 밑에서 수련했던 유검기(柳劍氣)를 써서 끝까지 관찰했다.

우웅

아주 찰나간의 진동.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상대의 칼이 무려 세 쌍으로 분열했다! 나는 그 분열양상을 보자마자 이게 어떤 검법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고, 무량단으로 상대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까강!

돌려깎기에 흘리기로 대처하자 상대는 더 이상 공격적으로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내 반격을 경계해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일련의 검격 공방에서 상대방의 정체를 알아내고는 핀잔을 주었다.

“천계에 오자마자 칼싸움이라니 너무하지 않나?”

상대는 흰 수염을 떨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뭐 어떻습니까 황제여. 평생 해야 할 게 칼싸움인데.”

“젠장.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나는 투덜거리며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무영검제(無影劍帝).”

그렇다.

천계에 오자마자 무영탈혼검법(無影奪魂劍法)으로 나를 맞아준 절대지경의 고수는 바로 무영검제 - 500년 전에 내가 대웅제국을 세울 때 전생의 인연을 이용해 부하로 거둔 남궁세가 사상 최강의 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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