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2====================
사신지혼(四神之魂)
아수라의 말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의념을 없애버린다니!
의념이란 내가 목숨을 걸고 익힌 무예의 고급경지로써, 자신의 의지력을 현실에 형상화시키는 능력이자 무예의 극점이었다. 의념을 쓸 수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전투력은 천지차이였으며 심지어 절대지경에서는 의념의 최대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의념천주까지 세워서 의념을 강화시키려 했다. 의념이란 강하면 강할수록 좋은 것이었고 약해져서 좋을 게 절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말했다.
“무슨 미친 소리야?! 의념을 없앤 검은 그냥 철쪼가리에 불과할 텐데.”
아수라가 히죽 웃었다.
“음? 검은 원래 철쪼가리가 아닌가.”
“…….”
“검에 의미를 불어넣는 건 인간이다. 검은 검일뿐이지.”
나는 아수라의 대답에 한숨을 푹 쉬었다.
“검론(劍論)은 수련만 하던 시절에 지칠 정도로 생각하고 고민해 봤어. 하지만 지금은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의념을 담지 않으면 결코 강한 일격을 가할 수 없어.”
“그래? 그럼 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있냐.”
“뭘 진지하게 생각해.”
“‘어째서’ 의념을 담으면 강해지는 건지.”
“…음.”
뭐지? 너무 원론적인 질문이라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면 절대지경이라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차분하게 평소부터 생각했던 걸 대답했다.
“의념은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원하는 공격의 형태와 위력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줄 수 있고, 때론 현실의 물리법칙도 바꿔줘. 약할 이유가 없잖아.”
아수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종종 느낀 적이 있지 않나? 의념의 ‘강함’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
“웬만한 절대지경의 일격으로는 마왕급 이상의 적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 그나마 마왕과 전투가 일단 성립이 된다는 것만 해도 절대지경이 대단한 거지만, 그렇다 해도 진짜 마왕에 버금가기는 힘들지. 아무리 강대한 의념을 담았다 하더라도 마체(魔體)가 지니고 있는 끔찍할 정도의 방어력을 뚫는 건 강철 젓가락으로 바위를 꿰뚫는 것과 같다.”
“흠!”
“불가능까진 아니겠지만 수백 수천 번 해도 힘든 일.”
철젓가락으로 바위를 뚫는다라….
‘확실히.’
전뇌자가 보여줬던 과거 동료들과 팔부신중의 전투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절대지경의 공격을 허투루 취급할 수는 없으니 철젓가락 정도는 되지만 팔부신중의 방어력도 바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조금만 대비하고 방어해도 팔부신중이 절대지경의 공격을 흘리거나 막기 일쑤였다.
“나 또한 마왕의 육체를 다룰 때는 절대지경을 상대로 그냥 맨몸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굳이 귀찮게 방어초식을 펼치지 않아도 될 정도였지. 왜냐하면 마왕의 육체란 일반적인 마도사의 결계보다 수십 수백 배는 견고한 생체결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우주의 악의가 뭉쳐있는 사악한 힘의 덩어리이니 당연하지 않겠나.”
“말하고 싶은 게 뭐야?”
“마왕의 육체도 쉽게 뚫지 못하면 [옛 지배자]의 본체에는 아예 가망이 없어. 그렇다면 의념의 ‘강함’ 자체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고 봐야하지 않겠냔 말이다.”
“……!!”
생각지도 못한 관점!
하지만 나는 그 관점을 손쉽게 인정할 수 없었기에 미간을 모으며 고민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내가 무예를 수련하는 의미가 없잖아. 그런 전제를 깔아서는 안 되는데. 그리고 신역절기는 신을 죽일 수도 있어.”
“흐흐. 물론 신역(神域)에 이르면 달라지지. 그러나 나는 말했듯이 무신을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신역에 이르면 뭔가 천지가 개벽하리라는 희망을 갖고 수련한 게 아니라 그 반대였어.”
“반대?”
“무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신을 벨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었지. 내 입장에선 당연하지 않겠냐.”
“…그 말은….”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의 말뜻에 담겨있는 걸 파악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념이 무신의 도움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그래. 난 그럴 수도 있다 생각했지.”
“그런 말도 안 되는….”
“단정짓지 마. 아니라는 근거도 없잖아? 그리고 만일 무신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신(神)의 개념이라 생각한다면 의념도 신이 내려주는 힘일 수도 있고, 그럼 당연히 신을 못 때려죽이지 않겠나? 그저 하사받은 힘에 불과하니까.”
“아냐. 의념은 신력과는 완전히 달라! 신력은 아니라고.”
내가 강하게 부정했지만 아수라는 그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을 꺼냈다.
“정말로 의념이 사라지면 약해질 것 같다고 생각하냐? 일단 그 자체가 고정관념이라고만 말해 두겠다.”
“믿을 수 없어.”
“그건 네 자유다. 하지만 암야참을 수련하려면 그 전제를 버리고 완전히 마음을 비워야만 따라올 수 있어.”
아수라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백웅. 지금 선택해라. 네가 암야참을 배우지 않겠다면 지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수련을 시켜줄 테니까.”
“…….”
나는 침묵했다.
당연히 상식적으로는 내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암야참을 배우겠다고 나서야 한다. 그러나 이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이야 아무렇게나 할 수 있지만, 진심어린 수련은 수련자 본인도 신념으로 따라가야 하므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헛소리를 해 봤자 나 자신만큼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음에 미혹이 생기면 설령 100년의 수련이라 해도 헛것이 되는 법.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고민했다. 과연 내가 진심으로 아수라의 생각을 받아들여 고정관념을 버릴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배우겠다!”
해보지 뭐!
아수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암야참의 역륜(逆輪)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고리’를 인식해야 한다.”
“고리?”
“너는 이미 무기에 만들어진 의념을 없앨 때는 어떻게 하지?”
나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야 먼저 기(氣)를 없애고 나서 의념을 거둬들이지.”
“그건 왜 그렇지? 왜 기를 먼저 없애야 하냐.”
“무슨 당연한 얘기를…. 기가 없어지지 않으면 의념도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렇지.”
“그렇다. 그게 바로 기와 의념 사이에 존재하는 기묘한 성질이지. 하지만 달리 말하면 너는 의념을 없앨 때 기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으니 중간과정 때문에 늦어진다.”
즈응 -
아수라가 다시 한 번 검을 새까맣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하지만 ‘고리’ 그 자체를 역회전시킬 수 있으면 굳이 기를 따로 통제하지 않아도 의념을 무(無)로 만들 수 있어. 과정 하나가 사라지고 그만큼 시전자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
“검이 새까매지는 건 역회전 시킬 때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고.”
기를 가만히 놔두고도 의념만 없앨 수가 있다고?!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나는 약간 경악했다.
“고리가 뭔데?”
“만물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연결이다. 그리고 고리를 움직일 수 있으면 의념을 기와 떼어놓아서 따로 조종할 수가 있지.”
“모르겠군. 그런 무론(武論)은 태어나서 처음 들어. 여동빈도 장삼봉도 이런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
정말로 이런 건 처음이다. 내가 당황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정석적인 방법으로 신역절기에 도달한 자들은 이런 기술을 따로 연마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건 내가 만들어 낸 사도(邪道)라고 할까.”
“따로 연마할 필요가 없다니?”
“그들은 이미 태허(太虛)를 인식하고 있으니 이렇게 귀찮은 방법을 안 써도 된다는 거야. 하지만 너나 나는 그런 게 아니니까 이렇게라도 ‘도달’하려는 거고.”
“……?”
“뭐 지금 당장은 이해할 필요가 없다. 일단 네게 기술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재능있는 자들이 해석해 주겠지.”
그렇게 말한 아수라가 말했다.
“우선은 검을 새까맣게 만드는 역회전의 단계로 들어가는 요결만 알려주마. 이 요결에는 본디 심득(心得)도 장난아니게 필요하지만 지금은 네게 기술 그 자체만 전수하지.”
“알았어. 얼마나 연습할까?”
“하루에 1만 번.”
“…너, 너무 많지 않냐? 또 먹지도 자지도 않고 수련하라고?”
“무슨 소리냐. 10만 번 안 시키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재능도 없는 녀석이 운 좋게 절대지경에 올라놓고는 무슨 배부른 소리야?”
“…….”
“전생자의 시간이 무한이랍시고 설렁설렁 하다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테니까 긴장 좀 해라.”
윽, 할 말이 없다.
아수라가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또 하나. 잘 기억해 둬. 암야참은 결국 네가 수련하고 있던 선검술(仙劍術)의 성취와 상통하게 될 거다. 극이 결국 통하게 되어있으니 서로 다른 기술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늘 머릿속에 다른 하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생각해.”
“응? 통한다고? 어떻게?”
“암야참을 실전에서 쓸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왜인지 알게 될 거다.”
“…알았어. 일단 수련하겠다.”
아무래도 지금은 아수라와 내 수준차가 너무 나서 그의 설명을 거의 알아듣지 못할 듯하다. 나는 우선은 아수라가 가르쳐주는 기술부터 연마해서 내 것으로 만들기로 다짐하며 밤을 새워서 수련하기로 했다.
우우웅!
요결대로 검에 불어넣은 의념을 없애자 기이한 울림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그 울림을 들은 아수라가 고개를 저었다.
“기(氣)가 움직였군. 다시 해라.”
“기를 움직이지 말라고? 어떻게….”
나는 황당해서 외쳤다.
“이봐! 의념을 없애는데 기를 움직이지 말라는 건 계란 껍질을 까지 말고 계란만 빼내라는 거랑 같은 소리란 말야!”
“호오, 제법 괜찮은 비유인걸. 그 말대로야.”
“모순인데 이걸 어떻게 해!”
“모순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술이다. 실제로 난 할 수 있잖아?”
“윽, 그러니까 어떻게 하는지 단서라도….”
“그걸 찾아내는 것도 수련이다. 내가 말로 알려줘봤자 무의미하다. 어차피 오성과 감으로 해내야 하는 거니까 머리로 이해한다고 될 일이 아냐.”
“…….”
“1만 번을 오늘 내에 다 하려면 시간이 없을 텐데.”
“알았다고.”
내가 미친듯이 수련해서 일천 번 이상 암야참의 요결을 수련하자 시간이 약 세 시진이 흘러 있었다. 그때쯤 되자 아수라가 일어섰다.
스윽
‘이제 제대로 가르쳐주려는 건가!’
하지만 내 기대와는 달리 아수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럼 열심히 수련해라. 나는 며칠동안 좀 갔다올 데가 있다.”
“어디 가는데?”
아수라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곧 등장하게 될 세계최초의 막보스…. 아니 대마왕, 섬멸의 베르윈스트를 잡아야 한다.”
“뭣…!! 그런 마왕이 있었나?”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런 놈이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 있었다고?!
“아아, 그래. 내 동료들과 함께 저녁 9시에 루하비 계곡에 출현하는 그 놈을 잡아야 해.”
“동료?”
“진정한 마음의 동료들이지. 생사를 함께 할 정도다.”
“흠. 마왕이라면 얼마나 강한 거냐? 너 혼자서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단 말이냐?”
이럴 수가. 지금의 아수라가 인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강력한 마왕이라니! 그 정도라면 거의 예전에 나타났던 할치올레이푸라 수준이다.
“당연하지.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는 버티기만 할 뿐 이길 수 없다. 내가 놈의 공격을 막는 동안 다른 녀석들이 때려줘야 해.”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 정도라니…. 내가 따라가지! 칠요공명으로 한 방 먹여주겠어!”
어떻게든 도와줘야겠다! 그러자 아수라가 손사래를 쳤다.
“아 괜찮아 괜찮아. 넌 필요 없어.”
“엉?! 내가 필요 없다니!”
“넌 그 녀석을 한방도 못 때리게 되어 있다. 칠요도 못 쓰게 되어있고 모든 무예가 안 통하는 마왕이다. 넌 그 마왕을 만날 자격도 없어.”
“……?!”
“그런 마왕이지.”
무슨 소리야?! 그런 괴물도 다 있나?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아수라가 말을 이었다.
“그 동안 네 녀석의 수련을 봐준다고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군…. 베르윈스트의 약점과 패턴을 연구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
“뭐? 약점과 패턴을 연구할 수 있단 말이냐? 뭐 그렇게 친절한 마왕이 다 있어?”
“음…. 몇 번이고 도전할 수 있으니까.”
“뭐라고?! 패배한 놈을 살려보낸단 말이냐. 내가 마왕이라면 그냥 다 죽여버릴 텐데.”
“그래.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이 있지. 상처 하나없이 귀환할 수도 있으니 그런 건 걱정 마라.”
“대단하군 아수라….”
과연 팔부신중 최강의 마왕이었던 건가.
“아무튼 내가 다른 인간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놈을 때려잡고 오겠다. 자칫하다가는 전멸할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해야 해.”
“그렇게까지 위험한 놈에게 도전해야 하다니…. 무엇때문이냐?”
아수라가 팔짱을 끼고는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세계 최초의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정말 비장한 태도다. 나는 아수라가 이렇게 진지한 건 처음 봤기 때문에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목숨걸고 수련하겠어. 걱정 말고 마왕을 잡고 와라, 아수라!”
아수라는 내 감탄에 껄쩍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음…. 너무 그렇게 응원할 필요는 없다만….”
“응?”
“아니다. 그럼 나중에 보자.”
파앗
아수라가 사라지자 나는 각오를 달리했다.
“좋아! 아수라가 목숨걸고 싸운다면 나도 목숨걸고 수련이다!”
잠자거나 쉴 여유는 없어!
예전 무쌍패를 수련할 때처럼 전력을 다해서 수련하겠다!
나는 그렇게 약 열흘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아수라가 가르쳐준 요결을 하루에 1만번씩 수련했다. 그러나 1만번을 달성하지 못한 채 하루가 지나가는 일이 계속되었고, 하루에 고작해야 5천 번을 수련하는 게 고작이었다. 왜냐하면 단순반복이 아니라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직감을 끌어내어 암야참의 진짜 뜻을 알아내는 과제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의념을 없앨 수 있지?
벌써 암야참 요결을 수만 번은 반복한 것 같은데 도저히 아수라가 요구하는 것처럼 기를 움직이지 않고 의념만 없애는 게 되지 않았다. 나는 한참이나 끙끙대다가 어느 순간, 탁하고 머릿속에서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고리…. 고리를 역회전시킨다고 했다. 그럼 먼저 고리부터 인식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 고리란 게 뭐지?
나는 이게 아수라가 내게 내준 진짜 과제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예전에 아수라가 말했던 설명을 떠올렸다.
만물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연결.
“…….”
너무 추상적이잖아….
나는 이걸 갖고 어떻게 암야참의 모순을 극복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또 다시 사흘밤낮을 계속 수련하며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 젠장! 그냥 단순수련만 하자.’
심득이 언제 쉽게 찾아오던가? 이럴 때는 머리 비우고 몸이나 움직이는 게 장땡이지!
우우웅
우우웅
그렇게 몇만 번을 했을까….
약 한 달 정도가 지나서 아수라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백웅. 수련은 잘 했나?”
“최소한 십만 번은 한 것 같아.”
나는 가부좌하고 앉아서 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답이 안 보여.”
“그것 또한 과정이지.”
“그나저나 그 베르윈스트라는 마왕은 잡았나?”
내 질문에 아수라가 한숨을 쉬었다.
“회복술사가 광역섬멸기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아니, 이후에 다시 도전해서 성공하긴 했는데 세계최초를 달성하는 데 실패해 버렸지.”
“그런가…. 뭐 어쩔 수 없지. 마왕을 무찌른 것만 해도 어디냐.”
“크윽…. 세계최초란 게 중요한 거다. 제길!”
응? 그게 무슨 상관이지?
마왕을 죽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다만 왜인지 엄청나게 아쉬워하던 아수라가 말했다.
“삽질만 계속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요결에는 익숙해진 모양이군.”
“아수라. 이제 정답을 가르쳐줘도 되지 않나? 나는 기를 움직이지 않고 의념을 없애는 법을 도저히 모르겠어.”
아수라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기(氣)는 적연부동(寂然不動)하나 정중동(靜中動). 무림에서는 유명한 격언이지.”
“……?”
“그럼 어째서 멈춰있는데도 움직인다고 하겠나? 기 그 자체의 성질을 잘 살펴보는 게 좋다.”
“무슨….”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야! 죽어라 요결수련만 했고 정작 암야참은 쓰지도 못하는데! 시간만 낭비한 거 아냐?”
“…역시 재능이 없어서 알아서 깨닫지는 못하는군. 그럼 내가 좀 도와주지.”
아수라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말했다.
“다시 요결을 발동해 봐라. 대신 이번에는 선검(仙劍)을 검 위에 덧씌우는 의념을 발휘하고.”
우웅!
“……!!”
어? 된다?
갑작스럽게 내 검이 새까맣게 물들자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수십만 번 삽질을 해도 안 됐던 게 갑자기 되다니!
그러자 아수라가 훗하고 웃었다.
“역시 그랬군. 선검이 검게 물들었을 때 그런 건줄 짐작은 했다.”
“뭐?”
“넌 아직 암야참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암야참을 깨달으면 아무런 소모 없이 쓸 수 있겠지만, 지금 너는 암야참을 제대로 쓰는 대신에 선검을 소모하는 게 가능하다.”
“선검을…?”
“편법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연습하다보면 암야참의 심득을 깨닫는 게 가능하겠지. 언젠가는.”
선검을 소모해서 암야참을 발동시킨다고?
뜻밖의 발동방법이었기에 내가 당황하자 아수라가 말을 이었다.
“걱정말고 수련해라, 백웅.”
아수라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네가 무(武)를 버리지 않는 한 무(武) 또한 널 버리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