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검신-1118화 (1,115/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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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나는 태상노군의 대답을 재촉했다.

“대답해 주십시오!”

태상노군이 말했다.

“기억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이 세계는 보패 산하사직도 내부의 세계이고, 망량선사가 기억을 봉인한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게 망량선사의 기억이라는 보장은 없단 말입니다.”

“…….”

태상노군이 침묵하자 나는 말을 이었다.

“복희 님은 제게 ‘관찰자’를 찾으라 하셨습니다. 산하사직도에 묘사된 여와, 복희, 뇌신 셋을 제외한…. 그들의 전투를 관찰한 제 3의 인물. 저는 그게 영락없이 망량선사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까 그 자리에는 또 다른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말인가?”

“그렇습니다. 뇌신과 싸우는 자리에 이미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들 원시천존과 태상노군 또한 그 사건의 관찰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흠…. 재미있군.”

태상노군이 자신의 턱을 쓰다듬더니 말했다.

“이 세계가 일개 보패에 봉인된 기억일 뿐이라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네 말도 사실이라고 치지. 그렇다면 관찰자는 내가 아니라 원시천존일 수도 있지 않은가?”

“네. 그게 문제였는데…. 사실은….”

나는 천천히 말했다.

“전 ‘바깥’에서 왔는데, 바깥에서 겪은 모험 도중에 당신이 망량선사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내가 망량선사라는 신에게 이름을 지어줬다고?”

“그렇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알지 못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천우진이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분명히 예전에 천우진에게 들은 적 있다. 그것은 망량선사의 기억상실에 관해 이야기가 나왔을 때 오갔던 대화였고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에 앞서서 나는 스승님의 정체를 알아내고싶소. 신이 되는 건 그걸 위한 수단에 불과하오.]

[스승님께서는 한때 나와 사형께 말씀하신 적이 있소. 자신은 기억상실에 걸려 있다고.]

[스승님께서는 자신의 기원(起源)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셨소. 그 분이 갖고계신 최초의 기억은 옥황상제와 대면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었다 하오. 그러나 옥황상제조차도 스승님의 정체는커녕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존재인가 알지 못했소. 대신 옥황상제는 스승님을 설득해서 도교의 수호자 직위를 주었고 그 이후로 쭉 지상에서 지내고 계신 것이오.]

[하지만 망량선사는 지금 망량선사로 불리고 있소. 그럼 이름이 존재하는 게 아니오?]

[그 이름 망량(魍魎)은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임시로 붙인 것이었소. 경계의 제망량이라는 명호가 붙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천계 최고의 권능을 보유한 옥황상제가 그분에게서 직감한 것일지도 모르오. 그렇기에 그런 건 별명일 뿐 이름이라 할 수 없는 거요.]

그랬다.

망량선사의 이름인 망량은 도교 삼청인 태상노군이 붙인 이름!

아마 경계의 제망량이라는 별칭은 옥황상제가 그 망량이라는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서 붙인 것이리라. 나는 그 기억을 되새기며 말을 이었다.

“신에게 있어서 ‘이름’이란 엄청난 의미가 있지요. 그리고 망량선사에게 망량이라는 이름을 붙인 태상노군은 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또한 그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게 당연하고요.”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약한데.”

태상노군이 담담히 허를 찌르자 나는 괜히 찔려서 움찔했다. 사실 말하면서도 확신이 완전히 서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그리고 또 하나. 만일 망량선사의 기억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시대에 망량선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가 됩니다. 망량선사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건 이보다 몇천 년 후인 우공시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이상하지 않습니까?”

“…….”

“마지막으로…. 태상노군 당신은 제 눈에 얼굴이 너무 흐릿하게 보입니다.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게 엄청 수상합니다!”

사실 마지막 이유가 가장 크다. 내 말에 태상노군이 고개를 갸웃했다.

“흐릿하다니? 무슨 소리인가?”

“그러니까…. 처음에는 대충 잘 보였는데 지금은 눈코귀입은 물론 얼굴 윤곽이 잘 안 보입니다. 제 눈에만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습니다.”

“자네 시력이 망한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천대성의 화안금정을 갖고 있는데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전 그렇게 흐릿하게 보이는 이유가 태상노군께서 뭔가 방어술법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는 건줄 알았는데 살펴볼수록 그런 건 아닌 것 같더군요.”

“…흐음.”

“당신이 바로 기억의 주인입니다!”

어떠냐!

내가 자신만만하게 태상노군을 지목하자 태상노군이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툭하고 말했다.

“완전히 끼워맞추는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게 수상하기 그지없어서 결과에 맞춰서 다 갖다붙였단 말 아닌가. 논리적으로 옳지도 않고 일단 수상한 놈을 추궁하고 보는 식의 논박이로군. 그런 식으로 추리하면 누가 못 하는가? 촌무지렁이도 자네처럼 추궁할 수 있다네.”

“…….”

태상노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자네 말에서 근거는 희박하고 7할 이상이 추측과 의심일 뿐이야. 망량선사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사실은 확실치 않고. 일천 리가 아니라 행성 전체를 뒤지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윽…!!”

“애당초 내가 범인이 아니라 하면 어쩔 셈이었지? 때려눕혀서라도 이 세계를 빠져나갈 생각이었나? 그럴 생각이었으면 이렇게 전면에서 추궁할게 아니라 몰래 기습을 했어야 정상이 아닌가. 안 그래도 그대와 나는 실력차이가 나서 정면으로 싸우면 그대는 때려죽여도 날 못 이길 터.”

“어…. 그건….”

정말 그럴 것이다. 아무리 수요와 화요를 대해방시켜서 검신지세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해도 해신을 정면에서 일대일로 밀어붙인 천계 삼청이라는 지존급 신선과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다. 대라멸진을 쓰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것조차도 태극도에 걸리면 바로 끝장나버릴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도 흑웅의 희생을 대가로 간신히 빠져나온 건데 이번에 걸리면 살아날 자신이 없다.

“너무나 즉흥적이군. 우둔하지만 감이 좋고 성실한 녀석인가.”

할 말이 없다. 촌철살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내 약점을 말로 후벼판 태상노군 앞에서 멍하니 서 있자, 태상노군이 웃는 듯 했다.

“하지만 정답이다.”

응?!

후우웅!!

다음 순간,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시꺼먼 우주의 풍경으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던 태상노군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더니, 과거 여의봉에 남겨진 환영처럼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신령스러운 늙은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얼굴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 그 때처럼 무면(無面)이 된 것이다.

태상노군의 무면 뒤에서 희미한 후광이 비치는 게 느껴진다. 태상노군이 어느 새 영험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동안 잘 구경했다, 전생자여.]

나는 태상노군의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상노군! 다, 당신이 관찰자가 맞았습니까.”

[…….]

태상노군은 대답하지 않고 옆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원시천존을 쳐다보았다.

‘어? 그러고보니….’

원시천존이라면 이 충격적인 상황에 반응해서 당황할 법도 한데 왜 아무런 동요도 없는 거지? 자세히 보니 원시천존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서 그 표정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움직임을 멈춘 원시천존을 쳐다보던 태상노군이 말했다.

[백웅이라 했나. 자네는 날더러 태상노군이라고 했지만 그 표현은 틀렸네. 나는 태상노군이 아닌 ‘관찰자’일 뿐.]

“네? 무슨 소리입니까.”

[진짜 태상노군은 현실세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과를 맞이했겠지만 나는 그 결과와 상관없는 존재란 뜻일세. 나는 그저 기억의 관찰자로서 존재하는 주체일 뿐 태상노군이 아니야. 다만 태상노군의 힘과 기억은 갖고 있지.]

“……?”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는 이유는…. 아마 관찰자의 특징 때문이겠지. 나는 기억의 주체이기에 나 자신을 관찰할 수 없으니까. 자네가 과거에 본 태상노군의 얼굴이 흐릿한 이유 또한 망량선사의 힘에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다.]

뭔 소리야?

내가 이해를 못 하는 표정을 짓자 태상노군이 말했다.

[잘 이해 못하겠으면 그냥 태상노군이라고 부르게. 그게 피차 편하겠군.]

“아…. 네…. 아무튼 원시천존은 왜 멈춰 있는 거죠?”

[‘관찰자’의 특권일세. 나는 이 세계의 진행을 멈출 수 있는 권리가 있어. 시간을 멈춘다는 개념이 아니라 그저 원래대로 2차원인 ‘그림’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지. 기억의 재생을 멈춘다고 보면 될 걸세.]

“원시천존이 다른 반응을 보일까봐 걱정된 겁니까?”

[자네가 원시천존을 배려한 것과 같은 이유일세. 자기가 사실 허상일 뿐이라는 걸 깨달아도 멀쩡할 수 있는 건 복희 님 정도 뿐일세. 아무리 우리가 천계의 삼청(三淸)이라 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은 아니야.]

“음….”

[사실 고민했네.]

“뭘 고민했단 말입니까?”

이어진 태상노군의 말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관찰자라는 걸 알아냈다고 해서 내가 그대에게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고 세계의 진행을 멈출 필요도 없어. 왜냐하면 여긴 봉인된 기억의 세계일뿐이고 망량선사는 내게 아무런 의무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내 입장에서는 속편한 일이었네.]

“……!!”

[지금까지 봐왔던 바로는 그대가 정말 우둔한 자질을 지니고 있기에 굳이 안 밝혀도 상관없지 않나 생각했지…. 그대가 이 세계에서 몇천 년을 지내든 간에 관여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 그런 게 어딨….”

[하지만 그 둔한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서 직감과 기억에 의존해서 날 단번에 찾아낸 것은 칭찬할만하더군. 그래서 그대와의 대화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

아니 칭찬하든 욕을 하든 하나만 하라고!

내가 내심 투덜거리고 있을 때 태상노군이 말했다.

[백웅. 그대가 원하는 건 이 세계에서 나가는 것인가?]

나는 즉시 ‘네’라고 대답할 뻔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태상노군의 무덤덤한 기색을 알아채자 직감적으로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태상노군은 두말하지 않고 내보낼 성격이다. 말 끝나기 무섭게 내보낼 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면 당장 내보내달라고 하는 건 손해야!’

언제 산하사직도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른다. 엉길 수 있다면 최대한 엉겨서 이 장소에 대한 정보를 얻어가는 게 옳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몇 가지 궁금한 걸 대답해주실 수 있습니까?”

[말했듯 내가 그 질문에 대답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저 이 기억의 관찰자이며 유지를 담당하는 자일뿐이니.]

태상노군이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의무가 없으니 대답하는 것도 내 자유겠지. 물어보라.]

나는 침착하게 궁금한 걸 질문했다.

“…이 세계는 정말로 허상이고 가짜인 겁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가 봤던 뇌신과 복희 등의 힘은 진짜였는데….”

이게 가장 궁금한 점이다. 그저 기억 속의 세계로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여기서 맞닥뜨린 신격들의 힘과 권능은 진짜였다. 심지어 해방된 칠요조차 그대로 해방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가짜 세계를 만드는 것만으로 이렇게 생생한 체험을 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자 태상노군이 대답했다.

[이 세상을 진짜와 가짜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생각하는가? 이 세계는 망량선사가 봉인한 기억의 세계, 그러므로 가짜 세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 그래, 망량선사가 관여했으니 말이지….]

나는 어리둥절해서 대꾸했다.

“……? 무슨 말입니까. 아까랑 말이 다르잖습니까. 어쨌든 여긴 실제 세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질문하지. 그대가 세계를 실재라고 여기는 기준이 무엇인가?]

…….

너무 철학적이고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대답하기가 궁색해져서 중얼거렸다.

“음…. 진짜니까 진짜죠….”

[진실로 방외(方外)와 방내(方內)를 구분하는 게 그대의 생각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전생자여. ‘진짜’라는 단어는 그대의 생각보다 더욱 실체가 분명치 않다.]

“…….”

[도는 본디 이름이 없으니(道常無名), 이름이 없어도 천지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무슨 말인 걸까?

[그대가 말한대로 이 세계에서 복희를 비롯한 삼황오제들의 힘은 진짜와 같이 구현화되었다. 생명도 영혼도 존재하지. 이 세계에서 그대가 살아간다면 현실처럼 역사가 전개될 것이며, 죽음도 삶도 분명히 존재한다.]

태상노군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가 ‘바깥’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이 세계를 거짓이라 부정할 권리가 있는가? 그대가 개입하지 않는 한 이 세계는 영겁토록 반복되겠지만 동시에 실재성을 지니고 연속되는 것도 사실일진대.]

나는 태상노군의 말에 어이없어서 중얼거렸다.

“…그건 궤변 아닙니까. 엄연히 ‘진짜 세계’가 존재하는데 무슨….”

[궤변이 아닐세. ‘진짜’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어. 왜냐하면 지금도 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무한의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

[이 세계의 관리자가 ‘관찰자’인 이유가 이 사유(思惟)에 맞닿아 있네. 바로 관찰과 인식, 그 자체가 도(道)와 자연(自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한 태상노군이 나를 응시하는 듯 느껴졌다.

[그대는 굳이 기억의 수면에 뛰어들어 크나큰 파급을 미쳤으나, 사실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고 그저 관측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인과율에는 거대한 변화가 생긴다. 필멸자든 불멸자든 그리 쉽게 인과율을 만질 수가 없는 이유이다.]

“저… 저기. 너무 어려워서 잘 못알아듣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진짜라는 겁니까 아니란 겁니까?”

[진짜라고 생각하면 진짜가 되겠지. 허나 그럴 권리는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없으니, 우선은 진짜에 한없이 가까운 가짜라고 정의하자.]

“…….”

[이 세계가 진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라.]

미치겠다. 대체 뭐라는 거야? 나는 태상노군의 말이 너무 어렵고 애매모호해서 머리를 쥐어뜯다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됐습니다. 아무튼간에 당신은 태상노군이 맞는 거죠?”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아, 그러니까 진짜인지 아닌지를….”

[그걸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따로 있다.]

아무래도 실재성에 대해서 더 따져도 비슷한 대답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그래 뭐 따져봤자 뭐해! 진짜든 가짜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지!’

이런 질문은 해봤자라는 걸 깨달은 나는 더 중요한 질문을 하기로 했다.

“망량선사는 왜 거짓말을 한 거죠? 그는 천우진에게 산하사직도를 줄 때 여와의 기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태상노군 당신의 기억이었다니….”

[그건 나중에 본인에게 물어봐라. 다만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

“그게 뭐죠?”

[이 기억이 봉인된 이유는 뇌신(雷神) 때문이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는 뜻밖의 말에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

“뇌신 때문이라고요? 지금까지 뇌신 그 개새끼…. 아니 뇌신은 코빼기도 안 보였는데.”

[그건 그대가 원하는 걸 보기 위해 이 세계가 관측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 세계에 뛰어든 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관찰자는 그대였다. 당연히 이 세계의 모든 사건이 그대를 중심으로 흘러갈 수밖에.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나?]

“…그렇긴 했죠.”

[허나 사실 이 기억의 시발점은 뇌신이고, 뇌신과 여와, 복희가 충돌한 그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왜 중대한 겁니까?”

[이 세계에서는 뇌신과의 전투 당시에 그대가 끼어들어서 어영부영 복희가 그대를 제자로 삼는 인과가 분화되었지만 실제 역사는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결투는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고 매우 혼잡한 사건이 연속으로 벌어졌지. 태상노군은 그 기억을 반드시 보존할 필요를 느꼈기에 이후 망량선사와 협력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이상은 망량선사에게 물어봐라.]

“역시 태상노군은 망량선사와 손을 잡은 거였군요!”

내 추측이 대충 맞는 것 같아서 쾌재를 부르자 태상노군이 묘한 말투로 말했다.

[글쎄…. 아무튼 내가 알기로 여와의 기억이란 말도 거짓말까지는 아니다. 태상노군의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여와의 도움까지 받은 거였지.]

“두 사람의 기억이 함께 반영되어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 관리자가 여럿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가 관찰자로 존재할 뿐.]

확실히 그렇다면 거짓말이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산하사직도는 망량선사, 여와, 태상노군이 합작해서 만든 보패 겸 기억봉인공간이란 말이군….’

다만 저 태상노군은 이 공간이 ‘왜’ 만들어졌는지까지는 이야기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걸 이야기해줄 수 있는 건 아마도 이 보패에 진짜로 관여한 망량선사뿐이리라. 하지만 지금의 망량선사는 자기가 말했듯이 나를 도울 수가 없으므로 이번 생에서는 그에게 질문할 기회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의문사항을 계속 질문했다.

“[기어오는 혼돈]의 힘은 어떻게 된 겁니까? 삼황오제를 전멸시킨 그 압도적인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겁니까?”

정말로 그렇게 강력한 놈이 적수라면 절망 그 자체다. 삼황오제도 당해낼 수 없는 괴물을 내가 어떻게 이긴단 말인가?

반쯤은 자포자기하듯 질문했지만 대답은 뜻밖이었다.

[나도 모른다.]

“모른다고요? 여와나 태상노군이 직접 목격한 게 아니란 말입니까.”

[그래.]

“……?!”

이게 뭔 개소리야?!

나는 황당해서 재차 말했다.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가 기억의 세계라면 당연히 보고 들은 적 있는 걸 반영하는 것일 텐데.”

[꼭 그런 건 아니다. 나와 여와의 기억은 이 세계의 뼈대를 이루고 있으나, 사실 망량선사 또한 큰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태상노군이 직접 목격했던 [기어오는 혼돈]의 힘은 홍균도인(鴻鈞道人), 즉 영보천존이 각성했던 모습이었는데 사실 그조차도 네가 봤던 수준으로 압도적이진 않았다.]

“그럼 여와가 목격한 게 아닐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기어오는 혼돈]이 이 기억의 세계에서 그런 힘을 드러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무한에 가까운 변수가 존재했으나 [기어오는 혼돈]은 자기의 특성대로 음모와 암약에만 치중했지. 그 사건만큼은 관찰자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

[어쩌면…. 꿈 속에서 잠재의식이 뜻밖의 단서를 준 걸지도 모르지. 실제로 ‘그걸’ 봤을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네게 단서를 준 것이다. 삼황이 동시에 황제에게 도전하는 상황을 만들어낸 네 녀석이 대단한 걸지도.]

꿈? 잠재의식?

알 수 없는 단어에 내가 헷갈려하고 있자 태상노군이 말했다.

[더 이상 궁금한 점은 없나?]

“그 거시기 뭐냐, 말 나온 김에 생각났는데 태상노군께서는 홍균도인이란 놈한테 습격당해서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원시천존도 홍균도인에게 당한 것 같고. 근데 그 홍균도인이 영보천존이잖습니까.”

[그랬지.]

“영보천존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삼청 중 두 명을 없애다니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기어오는 혼돈]의 가면으로 각성한 거겠지. 태상노군은 바깥에서 소멸당할 때까지 자세한 전모를 몰랐겠지만 이 세계의 관찰자로서는 그렇게 단언할 수 있다.]

“가면이요? 그걸로 각성하면 [기어오는 혼돈]으로 변신하는 겁니까?”

[…….]

태상노군은 그 일에 대해 대답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나는 그 눈치를 읽고는 다른 질문을 했다.

“태상노군이 망량선사의 이름을 지어준 이유는 뭐죠?”

[먼저 지어달라고 했으니까.]

“네? 망량선사가요?”

[그래. 천상에서 떨어진 망량선사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바로 태상노군이었고, 태상노군을 발견한 망량선사가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었다.]

그 고양이가 태상노군한테 먼저 부탁을 했었다는 건가?

뭔가 중요한 정보 같았지만 지금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결국 하나도 제대로 된 걸 얻어내지 못한 느낌에 투덜대고 말았다.

“솔직히 중요한 건 아무것도 안 가르쳐주신 것 같은데 왜 이리 인색한 겁니까?”

내가 투덜거리자 태상노군이 대꾸했다.

[네게 뭔가를 가르쳐줌으로써 이 세계의 유지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 가르쳐 줄 의무도 없다. 그런데도 대답을 해준 것에 감사함을 느끼는 게 어떤가?]

태상노군의 목소리가 다소 냉담해지자 나는 찔끔해져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뭐, 걍 그렇다고요…. 암튼 감사합니다. 이제 내보내 주십쇼.”

[그러지.]

태상노군이 손을 들어서 내 눈 앞으로 내밀었다. 그가 서서히 손에 영기를 모으더니 말했다.

[이곳에서의 인연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겠으나 부디 진실을 찾기를 바라겠….]

그 순간이었다.

투확!!

갑자기 태상노군의 전신이 찢어졌다!

“허억?!”

나는 그의 몸뚱이가 찢어져서 산산이 흩날리면서 ‘무언가’ 혼탁한 어둠이 사방으로 뻗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천지간에 악몽같은 기운이 가득참을 알아차렸다.

쿠구구구구….

불길함이 가득하다. 나는 이 공간의 공기가 어마어마한 흉악함을 내포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여기에 일분일초라도 더 머무른다면 내가 끔찍하게 살해될 확률은 한없이 올라갈 게 분명했다.

‘크윽! 도망쳐야….’

나는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혼돈이 너무 빨리 확산되어서 피할 길이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혼돈의 어둠 속에 묻혀 버렸고, 사방에 빛이 모조리 사라지면서 마치 바다 속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쿠르륵

전신에서 힘이 빠진다. 나는 신력을 끌어내어서 개방하려고 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니, 그렇기는커녕 혼돈이 내 몸에 있는 신력을 빠르게 먹어치우는 기분마저 들었다.

슈슈슉

압도적으로 쌓여있던 신력의 덩어리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제일 먼저 전욱과 소호가 줬던 신력들이 빨아먹히고 있었고, 나는 이 신력이 다 흡수되고 나면 생명력마저 흡수되어 죽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했다.

“……!!”

이건 대체 뭐야…!!

신력을 먹어치우는 어둠이라니!

이대로 죽는 건가?!

‘제길!! 이대로 죽으면 다 날아가!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다. 절대지경의 의념을 발휘해 보았지만 이 어둠에는 의념조차 잘 먹히지 않는지 내가 칼을 휘둘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말 그대로 모든 힘이 흡수당하는 끔찍한 기분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힘이 빠진다.

‘아…안 돼….’

꾸르륵

마치 촉수같은 게 허공에서 어둠과 함께 뭉치더니 내 앞으로 꿀렁거리며 밀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촉수가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내 가면은… 어디갔지?]

“……!!”

뭐지?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이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

그래, 분명 그건 외우주에 가서 달마대사를 만났던 그 때, 모든 것의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신투지존의 몸을 뺏은….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 걸 느꼈다.

만상지투(萬常之偸)

나는 저 촉수에 [가면]이 있다고 상상하고는 곧장 가면을 훔쳤다. 만일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정체라면 가면을 훔침으로써 뭔가 반응을 할 것이리라. 그리고 만상지투가 시전되어 촉수에 닿는 순간,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무언가’를 잡았다.

촤악!

가면을 잡자 전신에 진흙처럼 잔뜩 달라붙어 있던 어둠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질척거리던 어둠들이 한꺼번에 걷히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좋았어! 이대로!’

마치 물 안에 있던 가면을 꺼내듯 내가 그것을 벗겨내는 순간이었다. 나는 이어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경악했다.

촤촤촤촤

‘가, 가면이 무한대로….’

내가 끌어온 혼돈의 가면의 뒤에 마치 지네처럼 셀 수 없는 무량대수의 가면들이 들러붙어서 같이 딸려오고 있었다. 그 기괴하고 두려운 광경에 나는 도리어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보통 인간이라면 미쳐도 이상하지 않지만 나는 짜증나기만 할 뿐이었다.

‘이 개새끼!’

갯수가 무한대면 못 훔칠 줄 알아?

‘가면을 잡으니까 확실히 몸이 움직여! 그렇다면….’

촤악

나는 만상지투를 써서 이번에는 내가 있는 공간만 따로 떼어내서 훔침으로써 공간의 절단을 시도했다. 그러자 내가 있던 공간만 뚝 떨어져서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가면의 연결도 떨어졌고, 나는 뒤로 빠르게 추진하듯 날아갔다. 그리고 촤촤촥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가면들이 날아오자 나는 이를 악물고는 눈에 힘을 주었다.

“으랴압!! 광 - 선!!”

쿠콰콰쾅

눈에서 파괴광선이 나가서 가면덩어리를 부쉈다. 나는 한 숨 돌린 기분이 들었고 방금 전까지 쉴 새 없이 빨아먹히던 신력들이 이제 누수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양손에 수요와 화요를 들며 전의를 불태웠다.

“오냐 한번 해 보자!”

이렇게 된 이상 튈 방법도 없고 죽을 때까지 싸워주마!

쿠구구구구….

우오오오오오

“…….”

하지만 이윽고 그 혼돈의 어둠이 무한대로 커지더니 눈앞의 모든 우주를 집어삼킬 정도로 거대해지자 할 말이 없어졌다. 비늘 한 장이 대륙만한 복희조차도 새끼용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존재라서 도저히 싸움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듯 했다. 내가 여태껏 익혔던 모든 무공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정도의 아득한 왜소감이 들었다.

‘어…. 안 돼….’

내가 좌절을 느낄 때였다.

[백일몽(白日夢)이 길었구나.]

우웅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서서히 주변의 풍경이 흐려지며 환몽(幻夢)에 물들기 시작했다.

쿠어어어

한없이 거대하던 어둠이 마치 비명소리같은 걸 내지르며 사방으로 팔을 휘둘렀는데, 그 어둠조차도 마치 꿈결처럼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둠은 계속해서 한없이 작아지다가 티끌처럼 변했는데, 잠시 후 어둠이 무수한 별빛 너머로 사라졌다.

우우웅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별빛이 어느 새 떠올라 있다. 나는 저 별빛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다음 순간, 그 중 하나의 별빛으로 온 몸이 빨려들어감을 느꼈다.

파앗!

오솔길….

나는 오솔길에 누워 있었다.

“헉, 헉….”

하지만 어둠에 큰 힘을 빨아먹혔는지 숨만 간신히 몰아쉴 뿐 다른 생각을 하지도 못할 정도로 지쳐버렸다. 방금 전까지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냈지만 더 이상은 한계인 것이다. 내가 오솔길 한가운데에 누워서 반쯤 기절하다시피 하고있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결국 관여하게 되었군. 굳이 남의 꿈을 들여다보다니 귀찮은 녀석이구나.]

맞은편에 새까만 고양이가 앉아있는 게 보인다. 나를 쳐다보는 저 고양이의 정체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힘겹게 말했다.

“망량선사….”

[아무리 환몽으로 봉인을 걸어뒀어도 신의 힘에는 자물쇠가 반응한다는 거겠지. 말세(末世)가 아니었다면 네가 산하사직도의 내부까지 들어가게 하진 않았을 텐데.]

망량선사는 뭔가 알고 있다.

여와, 태상노군, 망량선사가 힘을 합쳐서 봉인해둔 그 기억의 진실을.

‘으윽… 젠장….’

나는 망량선사에게 물어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몸에 힘이 없어서 당장 기절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눈만 떠서 망량선사를 쳐다보고 있자 새까만 고양이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항의하듯 눈을 부릅뜨자 마치 망량선사가 내 마음을 읽은 듯 말을 이었다.

[잊어버리는 게 좋다. [그 놈]은 꿈의 단말에조차 숨어들어갈 수 있으니, 이미 그 꿈은 오염되어 버렸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억은 두 번 다시 써먹을 수 없을 것이다.]

“……?”

[놈의 가면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도록 완전히 문을 닫아버려야겠군.]

무슨 소리야?

설마 방금 내가 마주쳤던 그 어둠이란 게….

사뿐사뿐 걸어온 망량선사가 멈춰 섰다.

이윽고 그가 앞발을 들더니 서서히 내 눈꺼풀을 감겼다.

[잊어버려라. 찰나의 꿈에 불과할지니.]

파앗!!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앞으로 고꾸라진 채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진흙에 뒤덮인 듯한 피곤한 느낌이 씻은 듯이 사라진 걸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경악하는 천우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천우진이 말했다.

“…안에서 무, 무슨 짓을 하고 나온 거냐?”

“응?”

잠시 후 천우진이 산하사직도를 내 눈 앞에 들이대며 광분하듯 외쳤다.

“폐(廢)가 새겨졌잖아!! 대체 뭔 짓 한 거냐고!!”

그 말 대로였다. 산하사직도의 풍경은 몽땅 소멸되어 있었고 대신에 족자 한가운데에는 고풍스러운 글씨로 폐(廢)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

망량선사가 산하사직도를 영원히 봉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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