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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여와는 반고의 강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곧장 납득한다는 듯 대꾸했다.
[좋다…. 황제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자!]
오오오오오
여와의 몸 주변에 떠 있던 오행신옥이 갑자기 하나로 결집하더니 칠채(七彩)를 내뿜는 하나의 옥(玉)으로 변했다. 그리고 여와가 그 옥에 자신의 힘을 강하게 불어넣더니, 이윽고 복희의 눈앞으로 휙하고 던졌다.
우우웅!!
처음에는 너무나 크기차이가 나서 의미가 없어보였지만 오행신옥의 크기가 급격히 불어나더니 종래에는 복희의 여의주처럼 보일 정도가 되었다. 복희는 오행신옥을 물더니 외쳤다.
[오행의 법칙을 바치나니! 우리의 청을 받아들여 내려오소서!!]
파앗!
오행신옥이 빛의 광선처럼 변하더니 전방의 시꺼먼 어둠 속으로 쏘아졌다. 잠시 동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적이 이어진 후, 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견고했던 시공간의 차폐막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끼기깅 -
[과연 반고의 힘! 황제가 봉인한 옥좌의 입구가 열리는구나.]
신농이 찬탄하듯 말했다. 그러더니 복희에게 말했다.
[복희여. 이로써 지구에 존재하던 오행의 법칙은 반고강신의 제물로 바쳐져서 붕괴했노라. 우리 셋은 지구에 있는 모든 [옛 지배자]들의 공적(共敵)이 되었다. 지금껏 우리가 그토록 피해왔던 질서와 혼돈의 전면전이 시작되는 것이지. 과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복희가 답했다.
[상관없다. 어버이 반고가 내려왔다면 그깟 일은 무시해도 될 일이다.]
[그 정도인가?]
[신농이여. 느껴지지 않는가?]
복희가 웃었다.
[지금, 전 우주의 균형이 질서 쪽으로 기울었다!]
화악
말이 끝나는 순간 여와와 복희, 신농이 동시에 혼연 속의 어둠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모습을 감추자 나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황제와의 결전이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저기로 들어가야겠군.’
거리는 말 그대로 성간의 거리만큼 넓으므로 일반적으로는 갈 수 없을 것이다. 눈으로 보이긴 하지만 실제 거리는 수억 리를 훨씬 넘는 것이리라.
‘흠 어떡하지?’
나는 시험삼아서 소환수를 부르려 해 보았지만 불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장소에 ‘혼연’이라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라멸진으로 저만한 거리를 뛰어갈 수도 없었기에 나는 고민하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복희님! 도와주십시오!”
말과 동시에 생각으로도 외쳤다. 보통 이렇게 하면 복희와 연락이 되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복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바빠서 그런 건가?
이유를 잘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복희에게 백날 외치면서 기다리기만 할 순 없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기에 나는 급히 차선책을 쓰기로 했다.
“소호님! 도와주십시오!”
꿩대신 닭이다!
우웅
내가 외치자 눈앞에 소호의 환영이 희뿌옇게 나타났다. 소호금천은 본체모습이 아니라 제왕모습의 환영으로 나타났는데, 다소 귀찮다는 듯 내게 말했다.
[왜 불렀느냐?]
“지금 옥좌로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거리가 멀어서 갈 수가 없습니다.”
[순간이동 못 쓰느냐?]
“…….”
비등은 가본 곳만 갈 수 있고 수억 리를 순간이동하는 강력한 초능력이나 술법은 없다고! 대라신선도 술법을 써서 저정도 거리는 가기 힘들 거고 소환수도 막혔는데!
당연하다는 듯 질문하는 기색에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래도 제가 사도인데 소호님이 좀 도와주십쇼.”
[귀찮다.]
“어…. 그래도 좀 어떻게 안 되겠습….”
[흠…. 생각 좀 해볼까.]
잠시 후 소호가 또다시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찮구나!]
“…….”
아 맞다…. 소호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지!
만사를 귀찮아하는 소호의 성격탓에 안 도와주려는 듯 했기에 나는 급히 말했다.
“소호님! 사도인 제가 그 싸움터에 가야 소호님을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니가 와 봤자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냐. 손가락으로 한 번 누르면 죽어버릴 놈이.]
“…….”
소호가 있는 대로 나를 무시했지만 할 말이 없다. 실제로도 그 이상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호가 고개를 홱 돌리고 가 버리려다가 문득 이상한 걸 느낀 듯 질문했다.
[흠, 근데 싸움터? 혹시 여와 복희 신농이 혼연의 벽을 뚫고 만신전의 옥좌로 들어왔단 말이냐?]
방금 전 삼황을 막고 있었던 결계를 ‘혼연의 벽’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저도 뒤쫓아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황제와 우리가 전력을 다해 막아놓은 곳을 어찌 이리도 빨리 뚫는단 말이지? 아무리 고대신들이라지만.]
소호는 약간 당혹스러워하다가 말했다.
[어떤 술수를 썼는지 봤느냐?]
“복희와 여와가 반고를 소환했습니다.”
[크으윽…!! 정말인가! 오늘 모든 게 결판나겠구나.]
소호가 당황스러워하는 게 환영으로도 느껴졌다. 그만큼 반고를 소환했다는 게 소호에게 있어서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소호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안되는 건 안 된다.]
“네?!”
[애초에 넌 도움도 안 되고, 만신전의 내부에 아무 놈이나 들일 순 없다.]
이런…!! 이대로라면 정작 중요한 건 보지도 못하고 다 끝나버릴 상황이다!
‘황제놈 면상은 봐야 큰 이득일 텐데!’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소호에게 말했다.
“소호님. 앞서 말했듯이 제 힘으로는 신들의 싸움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제가 그쪽 편에 선다고 외쳐도 복희나 여와가 콧방귀나 뀌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넌 왜 그렇게 약해빠진 것이냐?]
“대신에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나는 은근한 말투로 소호에게 진언했다.
“복희 측에 서서 싸우는 척 하다가 전황이 결정적으로 기울게 되면 소호 님의 명령을 받아서 중대한 역할을 맡겠습니다. 이게 더욱 복희에게 큰 타격이 되겠지요! 복희는 저를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말만 이렇게 솔깃하게 해 두면 되겠지!
복희를 배신할 생각은 없지만!
[호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
소호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좋다. 전욱에게도 일단 말해 두지. 네 녀석은 그의 사도이기도 하니.]
“엑…. 말 안하셔도 되는데.”
잠시 후 소호가 말했다.
[전욱도 네 계책에 동의했다. 다만 네 녀석이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도 보호해준다는 보장은 없으니 알아서 네 몸을 지켜라!]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급히 말했다.
“어…. 근데요 방금 생각났는데.”
[뭐냐?]
“복희를 해할 수 없다는 게 소호님과의 사도계약 조항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럼 이런 모의가 무의미한데.”
소호가 불쾌한 듯 말했다.
[내가 바보인 줄 아느냐? 사도인 네가 나나 복희 중 누구도 공격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건 직접 공격에 한정되는 것일 뿐, 네가 우리 뜻에 따라 복희에게 간접적인 피해를 주는 건 가능하다.]
“그렇습니까?”
[그래. 네겐 하나도 해가 될 게 없다. 걱정말고 우리를 도울 준비를 해라.]
…뭔가 소호가 숨긴 게 있는 걸까? 오랫동안 거래를 해 왔던 촉으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지만 그게 뭔지는 잘 짚이지 않는다.
어쨌든 배신을 안 할 생각이니까 큰 상관은 없지 않을까? 나는 표정을 숨기고 힘차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들어오라.]
파앗!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혼연의 벽을 뚫고 광대한 거리를 이동해서 어딘지 모를 장소에 와 있었다. 그리고 이 장소가 마치 수많은 실선이 퍼져있는 듯한 암혼(暗混)이 내려앉아있는 거대한 평야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곳이 만신전의 내전인가?”
쿠궁
그 때 거대한 소리와 함께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하늘에서 서서히 사제(四帝)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욱, 소호, 제곡의 본체가 차례로 강림했으며 요순은 정말로 소멸했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삼재의 방위로 둘러싼 한가운데에 제관을 쓴 황금빛 옷의 제왕이 나타나 있었다. 나는 그것이 전형적인 중원황제의 모습처럼 보였고 저 존재가 입은 게 영락없는 용포(龍布)처럼 보였다.
‘저것이 황제 공손헌원!!’
다만 좀 이상하다. 황제 공손헌원에게서는 곁에 있는 삼제의 본체만큼 강대한 힘이 느껴지지 않았으며 저 모습은 마치 인간과 같았다. 뿐만 아니라 공손헌원은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가?
‘…가면? 왜지?’
가면은 용(龍)의 형상이었으며 황금색이다.
가면이 용처럼 생긴 걸 제외하면, 어찌보면 백련교주와도 닮은 모습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복희와 여와, 신농 또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웅
사제(四帝)와 삼황(三皇)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
그 상황에서 황제 공손헌원이 서서히 복희에게 말했다.
[반고를 이 세상에 불러냈더군.]
[그걸 바로 눈치채다니 과연 황제로구나.]
[적이지만 훌륭하다. 그대에게 인과율을 읽는 능력은 없음에도 가장 내가 꺼려하는 길만 골라서 선택할 수 있다니, 그것이 바로 지혜의 태룡이 지닌 역량인가.]
그 말에 복희가 훗하고 웃었다.
[별로 내 수가 효과가 없었나 보군. 태연하게 남의 계책이나 평가하고 있다니 여유가 있구나.]
[반고가 소환됨으로써 이 우주의 균형추가 질서 쪽으로 크게 기울었지. 허나 이는 태초의 상태로 되돌아갔을 뿐 딱히 혼돈에 편중된 우주가 달라졌다는 것은 아니다.]
황제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그대가 현명하다면 그 수는 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누구보다도 반고가 [현상]으로 변하여 몸을 숨긴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자…. 전멸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를 치려 할 줄은 몰랐다.]
[…….]
[그대가 반고의 특이점을 해결할 능력도 없을 텐데 이리도 무모한 짓을 하다니. 후후후….]
황제가 웃는 듯 했다.
복희는 침묵하다가 대꾸했다.
[황제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구에 이미 많은 [옛 지배자]들이 내려와 있으나 그들 중 절대다수는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고 죽은 듯이 종말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망아지처럼 날뛰며 활발하게 움직이는 혼돈은 오로지 그대들뿐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지?]
[그대는 [종말]과 [계시]에 대해 뭔가 다른 걸 알고 있어. 그저 허공록의 행방을 찾고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이라고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토록 활발하게 우리와 접촉하는 게 아닌가?]
복희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이 있지…. 사실 종말이란 만신(萬神)의 종말조차 의미한다는 가능성이. 황제 너는 그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종말에서 살아남고 너 나아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부터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
[그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종말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어야 추구할 수 있는 거겠지.]
그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황제의 곁에 있던 삼제들은 혹시나 하는 기색이 되었고 심지어 복희 측에 있던 여와와 신농조차도 설마? 하는 눈으로 복희를 쳐다보는 듯 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황제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쩔 셈이지? 네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네가 나와 싸울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가 종말 이후를 알고 있는 내게 복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찌 그리 생각하는가.]
[신이라 해도 존재에 대한 갈망이 존재하는 법. 종말을 넘어서서 그 이상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있지 않겠는가.]
[…….]
[신이라 해도 우주의 법리(法理)에 귀속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 황제가 천천히 손을 들어서 복희 쪽으로 내뻗었다. 그는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질서의 후예들이여. 나를 믿어라.]
황제의 목소리가 마치 최면처럼 장내의 모든 이들에게 들려왔다.
[우리 모두가 정해진 운명을 뒤엎어 승천(昇天)할 수 있다. 거기에는 너희 질서의 신성들 또한 포함된다. 나를 믿어라.]
그 말에 여와는 상당히 흔들리는 듯 했다.
[으으음….]
[사실인가.]
그리고 신농 또한 크게 고민을 하는 기색이 되었다. 왜냐하면 황제의 말이 사실이라 한다면 황제의 부하가 되어 복속하는 게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변화가 없는 건 복희뿐이었다. 복희는 그저 초연한 눈으로 황제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황제여. 그렇다 해도 그 승천의 길에 오를 수 있는 건 오로지 한 명뿐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무슨 근거지? 다 같이 승천할 수 있다.]
[아니. 거짓말이다.]
복희의 눈이 현묘한 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가 여태껏 모두에게 비밀을 숨길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다같이 오를 수 있는 길이라면 모두에게 조력을 요청하면 그만이다. 허나 그대는 질서의 신성마저도 만신전에 포섭하면서 그대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도 지금 했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
[황제여. 그대는 오롯이 자기만의 길을 가려는 자. 결국 우리를 발판으로 삼아 희생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전 우주에 해악을 끼쳐 또 다른 강대한 악(惡)으로 발전하려 들 것이다. 그 참사를 막아야만 한다.]
복희가 포효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나, 반고의 직계이자 우주의 태룡인 복희가 우주의 운명을 걸고 그대 공손헌원을 쓰러뜨리려는 이유다!]
후와앗
우주태룡후(宇宙太龍喉)!
복희가 입을 벌리자 거대한 포효가 터져나왔다. 예전에 오제를 물질계에서 쫓아냈던 복희의 권능! 삼황답게 대단한 권능이었지만 그 공격을 마주한 제곡이 복희에게 비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여기가 물질계인줄 아는가? 만신전의 심처에서 그딴 권능은 통하지 않는다…. 어엇.]
후웅!!
[제곡!!]
전욱이 흠칫하며 제곡을 불렀으나 제곡의 모습이 이미 흔적도 남지 않아 있었다.
‘뭣?!’
내가 깜짝 놀라서 지켜보자 황제가 힐끔 그 모습을 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과연…. 큰소리칠 정도는 되는군. 복희와 여와, 그대들이 반고의 영혼을 절반씩 나누어 강신한 것인가?]
[그렇다.]
[제곡은 이제 틀렸군…. 설마 포효 한 번으로 외우주로 쫓아내버릴 줄은.]
[황제여. 겁나는가?]
[그럴 리가.]
황제의 몸 주변에서 황금색 기운이 서서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황제의 등 뒤에서 천마(天魔)로 보이는 짐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제대로 된 적수로 인정해 주마. 복희!]
황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삼황과 오제의 전무후무한 대격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