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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검신-1103화 (1,100/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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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탁록!

나는 그 지명을 듣는 순간 거기가 어떤 장소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전생하면서 쭉 중요한 장소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탁록대전(琢鹿大戰).’

치우가 황제 공손헌원과 싸워 수없이 패퇴시켰다는 신화역사상 최대의 전쟁! 그 전쟁이 일어난 장소가 바로 탁록이었고, 고대역사를 한번이라도 공부한 자라면 탁록을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 경우는 신화적 진실이 현실이라는 걸 체감하면서 많은 신적 존재들이 탁록을 언급하는 걸 들었기에 현실감이 강하게 느껴졌다.

복희가 선선히 부채를 젓자, 다음 순간 복희를 포함한 일행 모두가 그대로 탁록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따갑기까지 한 햇살을 마주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덥군….’

탁록은 역시나 더운 곳이다. 이곳은 연경의 서쪽이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데다가 험한 산지가 가득한 장소라서 그다지 편한 지역이 아니었다. 한 번 답사해볼 겸 탁록을 들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냥 살기 힘든 시골이라는 생각 이상도 이하도 들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안 그래도 척박한 하북성에서도 연경의 외곽이라면 볼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곳으로 도읍을 옮기려 했던 전대 황제가 미친 놈이었던 것 같다. 결국 계속 수도가 낙양이 되긴 했지만 이런 시골로 수도를 옮겼다면 굉장히 수고스러웠으리라.

울창한 나무그늘 아래 서 있던 복희가 옆에 있던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에게 말했다.

“신농(神農)이 오면 너흰 돌아가도 좋다.”

“스승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아니. 신농은 평소부터 너희 같은 존재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기분을 공연히 거스를까 두렵다.”

“알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흠칫해서 복희에게 말했다.

“신농? 염제 신농과 만나는 것입니까.”

“신농의 존재도 알고 있군. 역시 재밌는 놈이야.”

“…아, 그게….”

제길. 실수한 건가?

‘탁록에 오는 거라면 당연히 치우를 만나러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어.’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대충 얼버무렸다.

“저, 저는 온갖 신들의 정보를 알고 있으니까요. 관심이 많아서.”

“그래? 하긴 가면도 뺏을 수 있는 녀석이 그정도 알고있다고 이상할 건 없겠군.”

“네! 그렇죠!”

“너는 하나도 의심스럽지 않으니까 편하게 있어라.”

“…….”

괜찮은 거 맞나?

“어차피 지금은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아니다.”

복희는 느긋하게 말하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왔군.”

쿠구구구….

그 순간, 탁록의 하늘이 쩍하고 열리더니 적황빛의 관문이 허공에 나타났다. 어마어마한 크기인지라 마치 하늘 전체가 관문으로 메워진 듯 했다. 그리고 그 관문에서 몸의 크기가 가히 일천 장은 될 법한 무시무시한 크기의 거인(巨人)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

엄청나게 크다!

해신만큼 클지도!

그리고 거인의 모습은 내가 과거에 본 적이 있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염제 신농!!’

과거 망량이 파천일월선의 힘을 이용해서 삼황 염제 신농의 봉인을 풀었던 은염(銀炎)의 거인! 제관을 쓴 인간형의 거신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아마도 저것이 거신으로서 신농의 진짜 모습이리라.

또한 그 말은 신농의 본체가 이 자리에 왔으며 지금은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라는 뜻이다. 신농이 도착하자 곧장 옆에 있던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은 공간을 이동해서 사라졌으며, 장내에는 나와 복희, 신농 셋만이 남은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신농의 곁에 또 한 명의 인영이 있는 걸 잠시 후 발견했다.

‘응? 셋이… 아닌데? 저 자는 누구지?’

수천 장 크기의 신농이 너무 거대해서 미처 살피지 못했지만 잘 보니 딱 인간크기의 누군가가 신농의 옆에 떠 있었다.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자 또한 이 자리에 출현할 정도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리라.

내가 그 자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할 때 대화가 시작되었다.

[복희여! 뇌신이 그대들을 공격했다고 들었다. 괜찮은가?]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신농이었다. 그리고 복희는 느긋하게 나무 밑에 앉아서 신농의 말에 대꾸했다.

[강력한 자였지. 나 혼자 그 자를 상대했다면 틀림없이 양패구상했을 것이다. 허나 제자들과 여와의 힘을 빌려 격퇴했고 큰 부상을 입혔다.]

초고대의 신어(神語)로 대화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적인 존재에게는 결코 들리지 않으며 인식조차 할 수 없다는 언어였지만 나는 아주 잘 들을 수 있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그 정도로 강력한 신성이 우주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신농이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가? 어버이 반고 이전부터 이어져오는 큰 굴레는 사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적층(積層)되어 있는 것.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균열과 숨겨진 법칙은 여기저기에 퇴적되어 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든 놀랄 일은 아니지.]

[그 존재 또한 ‘아버지’의 뜻으로 예비된 거란 말인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것보다… 그대를 올려다보려니 고개가 아프군.]

[알았다.]

슈욱!

잠시 후 신농이 거신의 몸뚱이에서 제관을 쓴 제왕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크기가 줄어들었다지만 아직도 몸 크기가 일 장은 될 법한 거인이긴 했다. 그리고 그 제왕의 형태를 본 복희가 말했다.

[괜찮은 모습이군. 미욱한 인간들을 다스리기엔 적절해.]

[칭찬 고맙군. 그런데 그대의 모습은 너무나 인간의 취향에 맞춘 게 아닌가.]

[나 또한 인간을 깊게 이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중이기에 노력하고 있네. 결국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는 혼돈의 신이 우리의 최대적수가 될 터이니 말일세.]

[흐음…. 정말로 그런 존재가 우리 앞을 가로막을까? 이해가 되지 않는군. 우주 그 자체의 법칙에 가까운 존재가 왜 이런 하위차원의 일에….]

[그 얘기는 나중에 하지. 그대와 함께 온 자는 누구인가.]

복희의 질문에 신농이 자기 옆에 서 있던 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신농의 키는 일 장에 이르는데 옆에 있는 자는 고작해야 인간중에서 키가 큰 정도라서 상당한 차이가 났다.

[우리 일족에 새로 태어난 자이다. 135만년만의 새 혈족이지.]

[과연. 헌데 거신족 치고는 너무 작지 않은가?]

[인간과의 혼혈일세.]

[호오…!! 본디 그대는 인간족과 피를 섞으려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복희가 크게 놀라는 듯 했다. 처음으로 본 복희의 순수한 경이로운 감정이었기에 그만큼 신농의 자손이 예외적인 존재라는 뜻인 듯 했다. 그러자 신농이 말했다.

[생각을 바꿨네.]

복희는 기분이 좋아진 듯 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러고보니 그 아이의 이름은 뭐지?]

[짓지 못했네.]

[어째서인가?]

[실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네. 그 혼돈의 재능은 나조차 측정할 수 없기에, 섣불리 이름을 지어준다면 가능성을 제어하게 될까봐 이름을 주지 못했네.]

[……!!]

복희가 잠시 예리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는 그대의 선택을 축하했지만 마냥 그럴 수가 없겠군. 그 아이를 제어할 수 없다면 지금 죽이는 게 좋을 것일세!]

[…….]

[측정불가의 존재일세. 우리의 힘으로는 그 아이를 막을 수 없어. 설마 불멸(不滅)의 권능을 이미 갖고있을 줄이야! 태어나면서 그런 권능을 타고나는 혼혈따윈 창세 이래 한 명도 없었다네.]

복희는 약간의 두려움마저 드러내는 듯 했다. 신농이 약간 놀랐다.

[그것까지 그대가 간파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우주의 태룡. 당연히 볼 수 있네. 설마 웬만한 신조차 경원시하는 그 힘을 이미 타고난 존재일 줄이야….]

[그것 외에도 수십 개의 재능을 지니고 있네. 거신족의 일반 전사를 이미 뛰어넘었지.]

[말도 안 돼. 당장 죽이게. 미래에 그 아이는 자네를 한 팔로 눌러죽일 수 있을 것이네.]

복희가 경고했다. 그러자 신농이 희미하게 웃는 듯 했다.

[아니. 죽이지 않겠네. 도리어 이 아이가 장성하도록 지켜볼 생각일세.]

[흉성때문에 적아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 해도 말인가?]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니….]

신농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복희여. 그대는 이 파멸의 운명에 정정당당히 맞서길 원하지만, 나는 종종 이 판에서 우리 질서의 후예들의 영향력이 약하다는 걸 실감하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수십억 년의 전투경험에서 느껴진다네. 이건 그 동안 우리가 우주의 지배자로서 겪어왔던 그 어떤 싸움과도 차원이 다른 싸움이야.]

[…….]

[너무나 장구하여 적수조차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싸움은 처음이야. 그만큼 가망이 없단 거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면 판 자체를 뒤집는 수밖에 없어. 난 그 역할을 이 아이에게 기대하고 있네.]

신농의 말에 복희는 한참동안이나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무려 한 식경이나 지나서야 복희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세상에서 가장 흉맹하고 불길한 이름을 지어주지.]

[그대가 지어줄 생각인가?]

[그래. 천상천하를 뒤집어엎는 무한의 액운으로 그 자의 파천황의 기운을 억누를 수 있도록, 가장 불길한 이름을 나 복희가 지어주겠노라.]

[호오.]

[그 자가 이름의 액운을 이겨내어 성인이 된다면 나의 가호로 본디 지녀야 할 수십 배의 힘을 얻게 되리라. 대신(大神)조차 그 자 앞에서 벌벌 떨게 되리라!]

신농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지. 이 녀석이 우주를 멸망시킬 수 있게 되겠군.]

[지금 당장은 이름을 지어주기 어렵겠군. 다음 만남 때 지어오겠네.]

[기대하지. 그럼 잡담은 이쯤 하고 오늘 만남의 본론을 시작하지.]

신농의 말에 복희가 무겁게 말했다.

[황제(黃帝) 말이군.]

[전에 내가 제안했던 건 생각해 보았나?]

신농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내 거신족의 모든 명운을 황제와의 전쟁에 걸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자를 타도하여 이 별의 정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그대들 복희, 여와도 내 편으로 참전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

[망설일게 뭐가 있지? 황제가 적이라는 건 이미 확실해졌다. 그 자가 혼돈의 힘을 뿜어내어 세계의 법칙을 왜곡시키는 중이잖은가.]

신농의 말에 복희는 크게 망설이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자는 혼돈뿐만이 아니라 질서의 규율도 지니고 있다. 그 자의 정체성은 도저히 한 마디로 결론내릴 수 없다.]

[그건….]

[단순한 [옛 지배자]의 일원이 아니야. 그 자는 뭔가 차원이 다른 존재다. 섣불리 적대시했다가는 우리가 당할 것이다.]

[황제가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칼끝을 들이미고 있는데 말인가? 맞서지 않으면 당할 뿐이다.]

[아니야. 그 자는 수(手)가 깊어. 지금의 단순해보이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가 있다. 어쩌면 그 자는…. 인과율을 읽는 능력을 갖고 있을 수도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리는 없다!]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신농이 이윽고 말을 이었다.

[거절으로 알아듣겠다, 복희. 그대가 이토록 겁쟁이일줄은 몰랐구나.]

[…….]

[여와에게도 찾아가 보겠다. 그럼 100년 후에 보자.]

파앗!

신농이 옆에 있던 거신족과 함께 사라졌다.

신농과의 대화가 무위로 돌아갔다고 느낀 것일까? 이윽고 복희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나라고 황제를 당장 치고싶지 않은 줄 아는가? 그러나 인과율을 계산할 수 있는 존재와 싸우려면 무력(武力)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황제와 싸워봐야 필패이거늘.”

“스승님….”

나는 그 때까지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를 여기에 데려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그러고보니 아까 신농이 옆에 있던 아이가 몇 년 만에 태어난 아이라고 했지? 깜박했군.”

갑자기 이건 왜 묻는 거야?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135만년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흐음, 그렇군.”

복희가 빙그레 웃었다.

“너는 신어(神語)로 한 대화도 다 알아들을 수 있군! 그래도 넌 전혀 의심스럽지 않다, 백웅.”

“…….”

“뭐 신농의 본체를 보고도 미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은 것도 그렇다 치지. 의심스러워 할 일은 아니야.”

으아아아!!

실수했다!

설마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다니!

‘아 제기랄!! 나도 영보천존처럼 손가락 한방으로 죽이는 거 아냐?!’

내가 혼란에 휩싸여서 당황하고 있을 때 복희가 부채를 부치며 말했다.

“너를 신농과 만나는 탁록에 데려온 건 다른 이유가 아니다. 이제 곧 황제가 부하들과 함께 여기에 행차할 것이라는 미래를 읽었기 때문이지.”

“네?”

“이유는 뻔하지. 내가 신농과 만나서 뭔가 꾸미는 게 싫으니 나를 공격하려고 황제의 부하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담담하게 이야기한 복희가 문득 나를 쳐다보았다.

“백웅. 솔직하게 대답해주길 바란다.”

“뭐, 뭐를 말입니까.”

“너는 이 세계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미 다 알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

“대답해주지 않으면 너를 이 자리에서 술법으로 금제하겠다. 그리고 곧 이 탁록에 도착할 황제 앞에 던져놓고 가겠다.”

뭐, 뭐 이런 존재가 다 있단 말인가.

나는 전에 없이 완벽하게 상대의 속셈에 놀아나는 기분에 참담하기까지 했다. 복희가 너무 현명해서 가만히 앉은 상태로 이미 나에 대해서 거의 다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두려워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억지로 마음을 다잡은 채 차분히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거짓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

거짓말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까 영보천존의 소멸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복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해서 이 시대로 오게 된 거지?”

“그건 보패 산하사직도를 써서….”

“산하사직도?”

“어 그게….”

나는 일단 이 세계로 오게 된 경위에 대해서 대충 이야기했다. 내 이야기를 차분히 듣던 복희가 말했다.

“그렇군. 그 말대로라면 나는 보패 속의 등장인물이고 여긴 보패 속의 세계란 말이겠지.”

“…그런 셈입니다.”

“내가 보패 속의 등장인물이라면 내가 족자 밖으로 나갈 수가 있을까? 결국 넌 원래 바깥세계로 나가야 할 게 아닌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사, 사실은 어떻게 나가는지조차 모르는지라….”

“흐음…. 뭔가 이상한데.”

“네?”

“네 말대로라면 나와 여와가 뇌신과 싸웠을 때의 기억을 봉인한 게 보패 산하사직도라는 말이겠지. 그리고 그 보패의 제작자는 여와가 아닌가.”

복희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여와는 왜 그 기억을 봉인할 필요가 있었던 거지? 그리고 왜 망량선사라는 존재에게 건네준 것이지? 여기에 단서가 있겠군.”

“……!!”

“모르는 게 너무 많군. 백웅, 망량선사란 자에 대해서 내게 좀 더 말해라.”

“저, 저기.”

“왜 그러느냐?”

나는 황당해서 복희에게 말했다.

“너무 이성적이지 않습니까? 복희님께서는 자기자신이 허구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게 두렵지 않으십니까?”

“…….”

내 질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어찌보면 지금의 복희는 가짜이며 그저 족자 속의 그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되기 때문이다. 보통이라면 말 그대로 정신이 붕괴될만한 사실이었는데도 복희는 너무나 태연하다! 심지어 나보다도 이성적으로 사태를 분석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복희는 잠시동안 가만히 있다가 문득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

“왜… 왜 웃으십니까?”

“하하하…. 아니, 백웅 너는 신격들의 인식세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듯싶군, 하하하.”

“……?”

“이런 일은 그리 신좌에서 태어난 존재의 정신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특히 나는 반고에게서 태어났으니 어느 정도는 미뤄 짐작하고 있던 일. 존재의 실존과 비실존 정도로 애먹는 건 신이라 할 수 없지. 그냥 힘 센 필멸자일 뿐.”

뭐라고?!

“자신이 허구의 존재라는 건 살아가는 의미가 없다는 말도 되지 않습니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네.”

복희가 아무런 인간미 없는 웃음을 빙긋 지었다.

“이 세상에서 허구란 부정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야. 그저 모호하게 만들 수 있을 뿐. 결국 모든 것이 위대한 존재의 회귀일 뿐이니,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신이라 할 수 없어.”

“……?”

“뭐…. 절대자의 지위를 너무 오래 누리게 되면 착각할 수도 있겠지. 절대자는 오로지 한 분뿐이지만.”

그렇게 복희가 중얼거릴 때였다.

쿠구구구구구!!!

하늘 저편이 번쩍거리며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마치 하늘에서 다섯 개의 문양이 서서히 내려오는 것 같았고, 아까 신농이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거대한 관문이 허공에 기둥의 모양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모습을 보던 복희가 빙긋 웃었다.

“황제 패거리가 왔군.”

그 말은 저 문양 하나하나가 삼황오제의 오제(五帝)란 말이리라.

‘큰일났다.’

방금 전 신농이 모습을 드러낼 때처럼 오제의 본체가 한꺼번에 현신하면 그 위압감과 힘이 장난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도망쳐서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줄어든다.

“이, 이제 도망쳐야 합니다.”

“도망? 어째서?”

“도망치지 않으면 황제가 공격할 겁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으으으으으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러다 죽으면 진짜 개죽음인데!

내가 발만 구르고 있자 복희가 진득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백웅. 황제와 얘기를 해 보자.”

“안….”

내가 뭐라고 소리를 지를 때였다.

쿠구구궁!!

갑자기 거대한 암흑의 거신이 허공에 제일 먼저 나타났다. 그 신은 내가 수십 번이나 보아왔던 모습이었고, 거대한 몸뚱이를 꿈틀거리며 포효했다.

[복희!! 잘도 도망치지 않았구나!!]

쿠구구구!

쿠구구!

삼황오제 전욱을 위시하여 옆에도 차례차례 오제의 모습이 현신했다.

잠시 후, 전욱이 흉맹한 어둠의 창을 소환해서 한 손에 잡더니 이쪽을 향해 투척했다.

[나 전욱이 네놈의 목을 뽑아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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