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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선악과를 왜 저 놈이 거래로 내세우는 것인가….
나는 그 의중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칼부터 앞세우면서 죽이려 드는건 하책이란 걸 알고 있었다. 이미 놈은 내가 놈의 [이름]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내가 죽여버리면 이름을 뺏을 수 없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내게 거래를 제안한 것이리라.
‘그리고 저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모르겠어…. 지금은 일단 정보를 끌어내야 해. 탐색해야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적만 쓰러뜨려봤자 남는 게 없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그걸 알고 있는 나는 마음을 정하고는 질문했다.
“선악과가 아니면 이 세계에 올 생각이 없었다는 건, 처음부터 너는 선악과를 찾으러 외우주에서 여기로 왔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래서 창힐의 사도가 된 건가?”
[후후후…. 나와 얘기를 하고싶은 건가 보군. 하지만, 거래에 확답하기 전에는 중요한 얘기를 해줄 생각은 없다.]
쳇, 정보를 캐내려는 걸 들켰나보군.
그리고 저 놈이 대화에서 우위를 가져가려 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그 우위의 전제는 바로 내가 놈을 죽이기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 전제부터 부숴버릴 필요가 있었기에 나는 서서히 수요에 힘을 끌어 모았다.
우우웅
수요가 진동하자 뱀이 흠칫하고 놀랐다. 나는 위협하듯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말해두지만 난 굳이 이 거래를 안 해도 상관없어. 마침 종말의 거룡이 깨어났으니까 저놈한테서 이름을 뺏어도 되거든.”
[호오…. 그래….]
“선악과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그걸 찾으라는 것도 웃기는군. 내가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내가 이죽거리자 뱀이 말했다.
[백웅. 네가 창힐 님을 죽이지 않았나.]
“…….”
[그 정도라면 선악과를 찾을 능력은 충분하지.]
뭐, 뭐라고?!
아니 어떻게 그 사실을…!!
뜬금없이 놈의 말이 내 심중을 찌르는 느낌에 나는 찔끔하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수련해 왔던 감정숨기기 기술을 필사적으로 동원해서 얼굴에 기척이 나는 걸 지웠지만 자신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냐! 그냥 떠본 거겠지!’
약 1초 후에야 머릿속이 냉철하게 돌아오며 놈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 근거를 찾았지만 이미 늦은 느낌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춘 채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군. 창힐이 왜 나오지?”
[후후…. 늦었지 않은가.]
묘한 웃음을 짓던 뱀이 말을 이었다.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야차가 황궁에서 너에게 패주한 후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너에 대해 조사했으며 다른 팔부신중들에게 공유했지. 그리고 야차는 마음이 급해지자 내게도 너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
[그리고 다른 놈들은 그리 주목하지 않았지만 나는 눈치챘지. 창힐이 실종되었다기 보다는 죽었으리라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뱀의 눈이 크게 번득였다.
[네가 황궁에 출현한 시기와 창힐님이 실종된 시기가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을….]
“…….”
[넌 분명히 창힐님의 소멸과 관련이 있다…. 네가 직접 죽였거나 어떤 식으로든….]
나는 소름돋는 걸 느꼈다. 저 놈이 거의 사실에 근접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인 건 아니고 천암비서가 창힐을 먹어치운 거지만….’
다른 팔부신중들이 거기에 집중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놈들은 창힐에 대한 충성과 애착이 있기에 실종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실종이라 생각하면 나의 출현과 창힐의 실종에서 창힐의 죽음까지 이끌어내기는 힘들다. 긴나라가 책사라고 하더라도 창힐이 살아있다는 전제를 두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음. 어라? 창힐의 권속 중에서 저 놈만이 그 사실을 짐작했다는 게 뭔가 의미가 있는 거 같은데….’
아, 어려워!
뭔가 직감이 왔지만 지금 당장은 그 의미가 뭔지 모르겠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는다.
일단 나는 가면술을 수련할 때의 감각을 떠올리며 최대한 감정을 감추었고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글쎄? 네 말대로라면 어쨌든 네 녀석은 지금 나를 떠 본 거군. 근거도 없이 네 맘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는 게 취미라면 그렇게 하라고.”
[후후….]
웃는 게 재수없다.
나는 더 이상 끌려가선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외치며 화요와 수요를 공명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창힐을 죽였든 아니든간에 지금 그건 관계없어. 내 입장에선 당장 죽여버려도 모자랄 네놈을 살려주는 대신에 이름을 얻겠다는 거고, 거절하면 네놈은 지금 당장 죽인다!”
우우우우!!
공명의 기운이 강해지자 뱀은 흠칫하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약간 놈의 예상과 빗나간 모양인지 뱀의 눈이 더더욱 가느다랗게 변했고, 나와 뱀 사이에 기싸움이 이어졌다.
[…….]
“빨리 대답해.”
저 놈은 내가 놈을 죽일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나도 9할 정도는 교섭에 집중할 것이며 죽일 생각은 1할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절대지경이었으므로 의념을 고도로 집중해서 진정한 살기를 시시각각 뿜어낼 수 있었고, 놈은 그 살기에 견제받아서 자신의 주관을 끝까지 끌고나가기 힘든 것이다. 만에 하나 내가 진짜로 놈을 죽이려 들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살벌한 공기가 이어지고 있을 때 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백웅. 부탁한다. 나는 선악과가 있어야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갈 수가 있다.]
“뭐라고?”
[선악과는 [나무]에서 생겨난 결실. 삼천세계에서 가장 위대하신 전능자의 이름 아래 오로지 선악과만이 다중세계를 넘을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준다. 창힐 또한 직접 외우주로 와서 나와 계약한 것이 아니며 중개자의 도움을 받았을 정도로 내가 살던 세계는 머나먼 곳….]
“흠!”
[이대로라면 나는 너희세계의 종말에 휘말려서 함께 파멸하게 된다. 너무 억울한 일이다…. 부디 사정을 봐 주길 바란다. 선악과를 찾아준다면 그대에게 더한 보상을 해줄 수도 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나는 과거에 파우스트 박사를 통해서 선악과에 태허를 응용하면 다중세계를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십이율주가 선악과를 이용해서 우리 세계에 온 산 증인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의 능력을 솔직히 얘기하는 걸 보면 저 놈이 간절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으며 뱀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하필 거룡의 혼백체가 봉인되어 있는 여산에 몰래 숨어들어 있었던 이유는 뭐지? 이걸 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다!”
[그것은…. 거룡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외우주의 힘을 영혼속에 간직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말까지 저 놈과 최대한 협력해서 힘을 끌어모은 후 마지막 순간에 힘을 모아서 탈출하려 했다.]
“그게 가능한가?”
[모른다…. 하지만 내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신뢰해도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아귀는 맞는 답변이다. 나는 곰곰히 생각하다가 잠시 후 말했다.
“좋아. 선악과를 찾아주지. 하지만 이쪽은 조건이 몇 개 더 붙는다.”
[말해라….]
“첫째. 선악과를 찾는다 해도 너한테 안 줄 수도 있다. 나한테 이득이 된다면 안 줄 거야. 둘째. 너는 선악과는 물론이고 창힐과 계약하게 된 배경과 너의 정체에 대해서 모두 내게 말해야 한다.”
[…….]
“이게 마지막 제안이다.”
뱀은 잠시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좋다…. 그렇게 하겠다! 계약하자.]
“알았….”
바로 그 때였다.
쿠오오오오!!
[여동빈이여!! 살려다오!!]
갑자기 저만치 멀리에서 거대한 용의 포효가 들려왔다. 그리고 엄청난 기세로 오색(五色)의 기둥이 하늘을 꿰뚫었으며 그 기둥의 한가운데에서 용이 승천(昇天)하는 모습이 내 눈에 보였다!
“……!!”
뭐야?!
기둥 한가운데 있는 저거 설마 종말의 거룡?!
내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뱀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후흐하하하….]
“뭐? 무슨 일인지 넌 알고 있나?”
[보나마나 여동빈이 거룡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갔겠지…. 하지만 거룡은 살아남기 위해서 지금까지 모은 힘을 이용해서 차원을 넘었다.]
슈욱
잠시 후 오색의 기둥이 사라졌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뱀의 말대로라면 팔부신중 거룡이 도주에 성공한 것이리라. 나는 뜬금없는 상황에 황당함을 느꼈지만 일단 저쪽 상황에 집중하기에는 아직 이놈과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튼 계약이다.”
종말의 거룡이 도주해봤자 지금 내 상황과는 큰 상관이 없다. 애초에 뱀이 주목적이었고 거룡은 덤 같은 것이었기에 나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거룡이 도망친다고 해서 뭔가 대단한 변화가 생길 일은 아니다.
[좋다.]
그 순간 언령을 통해 계약의 인과율이 묶이는 게 느껴졌다. 뱀은 잠시 후 서서히 뱀의 형태를 잃고 혼돈이 되어서 허공으로 녹아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와중에 뱀의 말이 허공에 울려퍼졌다.
[나는 백웅에게 나의 이름을 주노라…. 계약에 따라 백웅이 선악과를 찾는 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리라!]
위이이잉
강력한 힘이 갑자기 내 전신에 쏟아져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공력같은 것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힘! 그러나 마력처럼 마냥 사악하지만은 않았으며 묘한 신성함도 같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뱀이 말했다.
[나의 이름은 사이탄(Satan)…. 신에 종속된 자…. 전능자의 나무에 거하는 뱀이다!]
파아앗
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전시안과 화안금정으로 살펴도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일단은 여동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엄청난 격전이 일어난듯 여동빈이 거하던 여산의 절벽은 완전히 소멸되어 있었고 심지어 여산 자체도 산이 절반 이상 뭉개지거나 날아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전술무력요원들 몇몇이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군.’
아무래도 파동이나 광선공격에 튕겨져나간 정도라서 경상인 듯 했다. 나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는 여동빈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여동빈! 거룡을 놓쳤소?”
“…….”
“당신 정도의 실력자가 어쩌다가….”
여동빈이 무겁게 말했다.
“마지막에 놈을 벨 수 있었다. 놈이 차원을 넘은 직후였다 하더라도 차원째로 베었다면 가능했으리라.”
차원을 벤다는 어마어마한 말을 했지만 나는 여동빈의 말이 허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500년 동안 수련한 여동빈은 충분히 그만한 역량이 있었다.
“그런데 왜 안 벤 겁니까?”
“놈이 살려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여동빈은 눈을 감는 듯 했다.
“내 과거의 업이 생각나 버렸다.”
“…….”
전후사정을 모른다면 여동빈이 거룡을 놓치고 개소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지나간 일은 잊읍시다.”
나는 여동빈의 과거를 본 적 있다. 그리고 여동빈이 망량선사를 찾아갔을 때, 승천하려는 이무기를 살해하는 선택을 한 후 망량선사에게 꾸짖음당한 적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승천한 용은 여동빈에게 고맙다고까지 했었으므로, 그가 지금 거룡을 베려 할 때 살려달라는 말에 반응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과거의 실패한 선택이 또다시 눈 앞에 나타난 꼴. 여동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여동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는 뱀을 잡았는가?”
“그렇소. 잡아서 놈의 이름을 얻었소.”
“축하한다.”
“흠. 그나저나 천우진은….”
나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천우진을 들쳐 업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의 몸에 기를 흘려보내서 내부상태를 살펴보았지만 신체에 이상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깨어나지 못하고 혼절해 있다는 건 큰 문제가 있다.
‘전시안을 써 보자.’
나는 전시안을 써서 천우진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천우진의 몸 내부에 시꺼먼 뱀같은 게 심장을 칭칭 감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몸 내부에 있는 걸 어떻게 빼내야하는 지 알고 있었으므로, 즉시 이혼대법을 써서 영수(靈手)로 천우진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토독 토독
마치 진드기처럼 달라붙은 뱀같은 걸 천우진의 심장에서 하나하나 떼어내어서 허공에 던지자, 옆에 있던 여동빈이 즉시 어검술으로 갈라서 처치해 버렸다. 약 열 마리를 떼어내자 심장은 말끔해졌고 서서히 천우진의 얼굴에도 혈색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혼대법을 쓴다고 정신력을 많이 썼기에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도대체 이게 뭐지?”
굉장히 까다롭고 악독한 저주다. 작은 뱀 한 마리 한 마리에서 대요괴 수십마리 분의 강력한 요기(妖氣)가 깃들어 있기에, 나도 이혼대법으로 영수를 쓰면서 수요의 영기를 빌려서 내 몸을 보호해야만 했다.
“이 뱀들에게서 혼돈의 힘이 느껴지는군. 아마 방금 전 그 뱀이 탈출하면서 시전한 저주가 천우진에게 정통으로 먹힌 것 같다.”
“그럴 수가. 천우진은 환신(幻神)이오. 지금 힘의 절반을 잃었다 하더라도 토요 팔괘도를 들고 있는데 어떻게 저주 한 방에….”
내가 믿겨지지 않아서 말하자 여동빈이 힐끔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 뱀이 그대의 생각보다 더욱 거물일 수도 있다는 말이리라. 현재 환신의 역량을 상회할 정도로 강력한 저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진짜 힘은 마왕보다 더욱 거대한데도 방금은 일부러 수세인 척 몰렸다는 말인가?
나는 여동빈이 말한 가능성을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친다면 방금 전 최선을 다해 토벌했어야 하는 건 거룡이 아니라 도리어 뱀이었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제길. 이제 와서 생각해 봤자지….’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쨌든 뱀과 했던 계약에서 추가제안까지 했으니 내가 밑질 일은 그다지 없다. 게다가 나중에 뱀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게 기정사실이 되었으니 그때 가서 뱀을 해치워도 되지 않은가?
잠시 후 천우진이 깨어나자 나는 천우진에게 말했다.
“좀 괜찮냐?”
“큭…. 상황은 어떻게 되었냐.”
나는 천우진에게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그러자 천우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사공린을 데려왔어야 했군.”
“어쨌든 다 물리쳤잖아.”
“아니. 우리가 두 마리의 괴물들을 너무 얕본 것 같다. 어찌되었든 한 놈은 대당시대에 세계를 멸망시킬 뻔한 놈이고 한 놈은 사도 달기와 동격으로 대접받던 마물이었는데.”
“…….”
“하긴 사공린 본인이 이걸 너의 시험으로 삼겠다 했으니 그녀의 책임도 있겠군.”
천우진이 말을 이었다.
“백웅. 지금은 서둘러 사공린에게 보고하러 가자.”
“알았다.”
파앗
나는 일행을 데리고 사공린에게로 귀환했다. 그리고 사공린에게 이번 임무의 기억을 담은 흑요석을 넘겨주자, 사공린이 말했다.
“거룡을 놓친 건 아쉽지만 당신이 뱀의 [이름]을 얻었으니 성공이군요.”
“그거 말인데, 거룡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추적할 방법은 없나?”
내 말에 대답한 건 사공린이 아니라 옆에 있던 천우진이었다.
“사실 차원을 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상급 술사의 솜씨를 갖고 있으면 적절한 의식과 술법, 주문을 이용해서 해낼 수 있지. 마찬가지로 차원을 넘은 것 또한 추적하는 술법이 있다.”
“호오!”
“하지만 거룡을 추적해서 어떻게 잡을 것인지가 문제군.”
“응?”
“크게 힘을 잃은 상태지만 그렇다 해도 여동빈과 전술무력요원을 상대로 버텨내고 도주할 정도로 강력한 팔부신중이다. 전성기 팔부신중의 삼강이었다는 말은 허명이 아니야. 그렇다고 여동빈이 도와주지도 않는다면 사실상 잡기가 매우 힘들다.”
여동빈이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천우진이 넘겨짚은 듯 했지만 나는 그럴만한 예상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과거의 일이 떠올라서 마지막에 거룡을 베지 못한 여동빈이 이제와서 추적 및 척살에 협조해줄 리가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백웅 네가 나서서 거룡을 사냥하기에는 때가 늦었단 거지. 잡으려면 막 풀려나서 힘이 제일 약할 때 잡아버렸어야 했는데. 더 이상은 무리야.”
그렇게 말한 천우진이 힐끔 사공린을 바라보았다.
“사공린. 네가 직접 잡아야 할 일 아닌가? 괜히 백웅을 시험한답시고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거잖아. 이건 네 판단실수다.”
“…….”
“처음부터 네가 갔다면 거룡은 절대 도망갈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여동빈이 강하다지만 그는 신적인 권능이 없이 오로지 무(武)만을 연마했기에 이런 상황엔 약해.”
나는 뜻밖의 상황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천우진은 사공린한테 약한 거 아니었나?’
그동안 숱하게 천우진이 사공린에게 당하게 살았던 걸 봤으므로, 나는 사공린이 권위로 깔아뭉개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사공린은 천우진의 힐난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군요. 제 잘못이에요.”
“인정하는 거군.”
“네. 제가 직접 가서 거룡을 잡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거룡의 특성이 있는 만큼 오랫동안 방치하면 큰일날 테니.”
그렇게 대답한 사공린이 문득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백웅. 일전에 말한대로 거룡을 잡고 나서 상대해 드리죠. 그럼….”
파앗
사공린은 갑자기 순간이동을 써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대화할 시간조차 아껴야 한다는 태도였다.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야 잠깐! 어떻게 차원을 넘어서 추적하는지 방법을 듣고….”
“필요없어.”
“뭐?”
천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천마한테는 그런 자질구레한 게 필요없다고. 그녀는 당장 여산으로 가서 차원이동의 흔적을 읽어낼 테고 곧장 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다. 신의 감각으로 세계의 흐름 자체를 읽을 수 있으니.”
“…….”
“천마는 필멸자의 제약 자체가 없는 존재야.”
“으음, 그렇지만 너무 만능인데.”
“신이란 건 원래 그런 거지.”
나는 그 말에 반감이 생겨서 말했다.
“사공린은 인간이야. 너까지 그녀를 신 취급하면 어떡해?”
“…지금까지 천마의 행적을 전해듣고도 인간이라 생각하는 네 녀석이 도리어 대단한데.”
천우진은 질린 듯 고개를 젓다가 말했다.
“후, 아무튼 일단 따라와. 흑웅을 부활시켜야 하니까.”
저벅
나는 천우진을 따라서 연구소 내부로 들어갔다. 천우진은 서문혜가 봉인되어 있는 심처까지 들어와서는 전면에 서문혜가 갇혀있는 거대한 얼음을 응시하며 말했다.
“긴나라 놈 때문에 정말 고생했지. 이 봉인이 안 풀리게 온갖 수단을 동원하면서 새로운 봉인시설을 만들어야 했으니.”
“그래서 그 동안 야근을….”
“…….”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른 듯 천우진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런 건 굳이 말 안해도 돼.”
그러나 이윽고 회복한 천우진은 말을 이었다.
“자, 봐라. 서문혜의 봉인을.”
나는 천우진의 말에 전면에 있는 거대한 수십 장 크기의 천년빙암을 쳐다보았다. 서문혜는 눈을 감은 채 마치 잠든 것처럼 얼음절벽 한가운데에 있었다. 나는 그녀가 500년 전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새삼 인지할 수가 있었다.
천우진이 말했다.
“서문혜는 나치와의 전투 이후 스스로의 시간을 멈춰버리는 방식으로 봉인을 했지만, 힘의 여파만으로도 매년 얼음빙벽의 넓이가 계속 넓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힘의 여파가 더 새어나오지 않도록 그동안 봉인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문혜가 1차봉인을 걸었고 내가 2차봉인을 건 식이지.”
“흠, 그런 거였군.”
그렇게 긴 설명을 한 천우진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네가 뱀의 [이름]을 이용한 언령을 갖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그녀를 풀어줄 수 있다. 일석이조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