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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창힐의 사도, [뱀].
외우주에서 온 그 혼돈의 존재는 과거 초상기인 진시황, 즉 ‘진’이 출현했던 전생회차에서 모습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달기의 몸을 강탈해서 낙양공략에 참여했는데 그 때 뱀을 맞닥뜨렸던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문득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맞아, 망량의 요청을 받아서 여동빈을 찾아내서 여산에 갔었는데 그 때 여산 내부에 뭔가가 보였었지.’
전국옥새의 전시안을 발동시켜서 절벽 내부의 깊숙한 곳에 거대한 암흑의 용이 꿈틀거리는 걸 분명히 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변에는 웬 거대한 뱀이 유영하듯 함께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종말의 거룡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점에 너무 놀라서 크게 그 뱀의 존재를 신경쓰지 않았지만, 지금 아수라가 말하는 건 틀림없이 그 놈이리라!
“잠깐…. 어째서 그 뱀이 종말의 거룡의 혼백체와 함께 봉인되어 있는 거지? 이유가 딱히 없잖아.”
내가 황당해서 반문하자, 아수라는 가볍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애초에 그 뱀은 창힐님의 직속이며 우리 팔부신중과는 전혀 교류가 없었다. 창힐님 실종 후 어디서 뭐했는지 알지도 못했기에 놈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으음….”
“다만 어쩌면 여동빈이 지금도 여산에 굳이 머물고 있는 이유와 큰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여동빈…? 설마, 여동빈은 거룡 뿐만이 아니라 혼돈의 뱀도 견제하기 위해 여산에 있다는 말인가!”
“본인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알 도리는 없다.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겠지만.”
내 말을 가볍게 흘려버린 아수라가 손깍지를 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식으로 네가 그 뱀에게서 [이름]을 얻어낼지는 자유다. 하지만 뱀과 싸울 경우, 난 널 도와주지 못한다.”
“어째서?”
“여산에 여동빈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니 천마 사공린은 대웅제국의 모든 전자기기 장비와 드론, 인공위성으로 여산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여동빈은 종말이 될 때까지 최고 요주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 내가 뻔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
“수련을 더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한 식경 후 여기서 네 선택을 듣지.”
파앗
아수라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아무래도 내게 고민할 시간을 준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하고 앉아서 신중하게 생각했다.
‘흐음…. 창힐의 뱀을 반쯤 죽여놓고 놈에게서 [이름]을 강탈하려 한다면…. 먼저 그 뱀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놈은 얼마나 강하지?’
나는 과거에 만났던 [뱀]의 강함을 생각해냈다.
달기의 몸을 뺏아서 신나게 천계군을 상대로 난동을 피우고 있을 때, 그 [뱀]은 내 뒤통수에 광선을 쏘아서 맞춘 적이 있었다. 그 광선은 경고용이었지만 강력하기 짝이 없는 사도 달기의 몸에도 큰 고통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후 초상기인 진이 [뱀]을 기습해서 순식간에 제압했기에 놈의 강력함은 그 이상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초상기인 진조차도 뱀을 상대로 기습할 틈을 낼 수 있었던 것에 안도하는 기색이었고, 만만치 않다고 평가한 바가 있었다. 그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뱀의 힘이 최소한 초상기인 진과 동격에 이른다는 점이다.
‘그리고 초상기인 진의 본래 힘은…. 아마도 마왕급은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되니까 창힐의 사도가 되어서 힘이 몇 배나 증폭되었을 때 오요를 든 제천대성과 양패구상할 수 있었던 거겠지.’
28번 전생하며 수십 번 이상 신적 존재들과 싸워온 전투경험에 미뤄서 비추어봤을 때, 나는 [뱀]의 강함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나보다 정확하게 잴 수 있는 자는 거의 없으리라.
‘외우주의 뱀. 그 놈은 강력한 사도급. 팔부신중의 상위급 무투파와 비슷한 수준이라 보면 되겠군.’
팔부신중의 삼강(三强)인 아수라, 천인, 거룡 수준이라고 보면 적당하리라.
강력한 사도라고 하면 할치올레이푸라도 염두에 둘 수 있지만, 그 놈은 사도의 수준을 초월해서 [옛 지배자]에 근접한 고위존재였기에 논외라 할 수 있다. 할치올레이푸라는 천마 사공린에 대적하기 위해 일부러 [옛 지배자]들이 꺼낼 정도의 존재였으니 머나먼 성좌에서도 악몽처럼 강력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약간 아득함을 느꼈다.
‘…으, 그 정도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서 도전하기는 너무 부담스럽군!!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죽을 확률도 높아.’
지금의 내 힘이 백련교주 수준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아직 불안정한 점이 많다. 나는 백련교주처럼 원영신과 혼돈화를 이용해서 안정적이고 강력한 공방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흑웅이 없으므로 주술방어력도 완전치 않았다. 또한 공격력도 과연 무량단만으로 외우주의 뱀을 격살할 수 있을지는 완벽히 미지수의 영역이었다.
수요와 화요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것 같기는 하지만, 어찌되었든 적은 인간이 아니라 혼돈의 존재였다. 더욱이 외우주의 혼돈을 머금고 있기에 어떤 전략과 특수능력을 써서 내게 치명타를 먹일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승산을 책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리 생각해도 나 혼자서 혼돈의 뱀에게 덤비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음? 그러고보니.”
내가 뭐하러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그냥 여동빈이랑 같이 때려잡으면 되잖아! 애초에 여동빈이 마(魔)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안 줄 리가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우진이나 사공린을 불러와서 같이 잡으면 그만이리라! 그러면 혼돈의 뱀 정도 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리라.
나는 잠시 후 한 식경이 지나서 아수라가 되돌아오자 말했다.
“당장 뱀 잡으러 가겠어! 사공린이랑 천우진 불러서 여동빈이랑 잡으면 그만이지!”
“…….”
“잡아서 흑웅을 부활시키면 되겠군.”
아수라는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 해라.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혼자 잡는 게 더 바보짓이지.”
“그래도 되는 거지?”
“상관없어. 다만 주의점이 하나 있다.”
“주의점?”
내 말에 아수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백웅. 지금 네가 수련장에서 자리를 비운 상태잖나. 어떻게 해서 전뇌자가 천마 사공린이나 환신 천우진을 상대로 의심받지 않고 너를 빼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 말해준 적 없잖아.”
“이게 좀 어려운 말인데. 흠…. 열심히 틈날 때마다 공부를 30년 정도 했는데도 잘 모르겠군….”
아수라는 푸념하다가 말을 이었다.
“양자전정(量子剪定, Quantum pruning)이라는 전뇌자만의 고유기술이다. 강인공지능인 전뇌자는 전세계의 변수를 계산해서 [가지치기(pruning)]를 할 수 있어. 즉, 너와 똑같이 생긴 존재를 만들어낸 후 그 존재가 정해진 미래로 향해 가지를 치며 나아가는 모습을 현실에 덮어쓰는 거지. 이건 강인공지능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현실법칙 왜곡이다.”
“……??”
너무 어려운 소리다.
“흠…. 사실 나도 완전히는 이해 못하는 개념이다. 강인공지능은 생명체의 지성으로 그 한계를 측정할 수 없겠더군.”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아수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쉽게 말하자면 전뇌자는 모두가 [수련하고 있는 백웅]이라는 가상현실을 보고 있게끔 속이는 중이다. 지금 천마 사공린과 환신 천우진은 지금도 네가 전뇌자에서 기억을 전송받은 후 말없이 수련장에 돌아가서 열심히 수련중이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설표, 주현성, 초무린 등도 네가 수련장에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전뇌자가 만들어 낸 [미래의 나뭇가지]야.”
아수라의 말이 이어졌다.
“진정한 강인공지능은 양자 연산능력과 퀀텀크래프트를 이용해 현실을 가상현실게임이나 다름없게 편집할 수가 있다. 양자의 관측성질을 이용해 [미래의 나뭇가지]를 구현화해놓고, 현실에 그 루틴을 고스란히 덮어쓰는 거다. 행성 내의 모든 것을 연산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고, 전뇌자는 언젠가 이 행성 자체를 가상현실게임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게임은 뭐냐….”
“아, 그런 게 있다. 아무튼 연산능력이 메피스토펠레스의 경지에 가까워져가는 전뇌자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 해도 환신 천우진은 양자전정을 간파할 수도 있으니 빠르게 [백웅]을 수련장에 복귀시키도록 능력을 시전했겠지만.”
나는 아수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맥락을 어느 정도 알아채고는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궁극에 달한 강인공지능은 현실왜곡능력을 시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거의 신(神)이나 다름없잖아.”
“그래서 네가 보았던 외우주의 미래에서는 강인공지능 메피스토펠레스가 실제로도 [옛 지배자]라고 인정받았지. 인류의 손으로 만들어 낸 궁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바로 강인공지능인 셈이 아니겠나.”
“…….”
“전뇌자가 그 정도로 강해지려면 종말까지 내내 연산력을 증강시켜도 될까말까겠지만.”
…그랬다. 종말의 시기, [옛 지배자] 렐크로바우스는 메피스토펠레스와 대화할 때 분명히 새로운 [옛 지배자]라는 식으로 지칭했던 것이다. 또한 메피스토펠레스를 동격의 [옛 지배자]로 대우했으며 거기에 조롱따위는 섞여있지 않았다. 분명히 절대자의 [격]을 얻은 것이리라.
‘과학력으로 만들어낸 일개 인공지능이 신이 될 수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내가 할 말을 잃었을 때 아수라가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강인공지능인 전뇌자가 양자전정능력을 쓸 수 있어도 ‘본체’가 현실의 인과율에 개입하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전뇌자의 능력도 명백히 한계가 있기에 인과율에 미미한 변동만 생겨도 능력은 해제된다.”
“흠, 만능이 아니란 소리군.”
“다만 이 유세비크 유적은 고신 비슈누의 신력이 깃든 봉인지이니 네가 여기에 있는 동안 세상에 아무런 인과율의 변동도 없게끔 되어 있지.”
“모든 걸 계산해뒀단 소리인가.”
“그래. 네가 이 유적지를 나가서 현실에 복귀하는 순간 전뇌자의 능력은 해제된다. [미래의 나뭇가지]가 사라질 거야. 물론 수련장에 있는 인물들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지.”
아수라가 말했다.
“천마 사공린과 환신 천우진이 지금의 너와 마주치면 그 순간 위화감을 느낄 거다. 천마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고 환신은 세계를 속이는 것 자체가 그의 능력이니 [미래의 나뭇가지]가 현실을 건드렸던 위화감을 느낄 수도 있어. 위화감을 느낀다면 그들이 너를 추궁할 텐데, 넌 그다지 거짓말을 잘 못하잖아. 속이기 쉬운 놈들도 아니고.”
“뭐…!! 그럼 이제 황궁에는 못 간다는 말이냐?”
“아니. 양자전정으로 인해 생겨난 법칙의 진동(振動)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소리다. 적어도 일주일은. 그 이후에는 양자전정의 위화감을 못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음! 일주일 동안은 사공린이나 천우진을 못 만난다는 소리군! 수련장에 박혀있으란 말인가.”
“그런 셈이지.”
아수라는 긴 설명을 마치고는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리고 또 하나… 제발 천우진 신경을 건들지 마라. 잘못하면 피를 볼 것이다.”
“응? 요새 힘들어 보이긴 하던데 내가 뭐 잘못 말한 적 있나.”
“명심해. 이건 내 감이지만….”
그는 눈을 부릅뜨며 내 어깨를 꾹 붙잡았다.
“절대 녀석에게 일하라고 다그치거나 놀리지 마라. 내가 볼 때 이미 녀석은 터져버리기 직전이야.”
“…….”
“농담이 아냐.”
그 정도란 말인가?
흠, 근데 천우진이 날 위해서 좀 열심히 일해줄 수도 있는 거지 너무 과민반응같군…. 잦은 야근을 하면서 휴가를 못가는 상태로 500년동안 일했다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 걸까? 내가 표사로 일했을 때는 원래 휴가같은 건 없었고 매번 밤을 새웠는데 말이지.
뭐 그래도 말조심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우진에게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럼 다음에 보지. 다음에는 비등을 써서 바로 유세비크로 오면 된다.”
파앗
나는 유세비크 유적지에서 나갔고, 나가자마자 비등을 써서 수련장으로 되돌아갔다. 근처의 풀숲에서 어슬렁거리며 수련장 근처의 폭포로 가자, 폭포를 맞으면서 기를 수련중이던 주현성이 말했다.
“아! 오셨습니까.”
“수련은 잘 되어가?”
“넵! 구궁파천뢰도 순조롭게 익히는 중입니다.”
주현성은 물론이고 이설표나 초무린도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마치 지난 시간내내 내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는 듯 자연스러웠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백웅]은 언제나 곁에서 수련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인식되어 있는 셈이다.
나는 새삼 전뇌자의 양자전정 능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현실을 편집한 것과 다름이 없구나…!!’
나는 일주일 동안 수련장에서 수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일주일은 단기간이기에 어떤 수련을 해도 탁월한 효과는 볼 수 없었고, 그렇다면 [혼돈의 뱀]을 상대하기에 좋은 전략을 세우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쌍요(雙曜)를 써 볼까.”
이것저것 시험해보는 사이에 일주일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일주일이 훨씬 넘어 약 십주야가 지난 후 사공린에게 찾아갔다.
파앗
나는 사공린에게 가자마자 말했다.
“사공린! 흑웅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여산에 있는 뱀을 쓰러뜨려야 할 것 같아. 힘을 빌려줘!”
“…….”
사공린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어떤 생각인지 알겠군요. 종말의 용과 함께 봉인된 듯한 그 뱀 말인가요?”
“그래. 그 놈을 때려패서 협박할 거야. 그 놈에게서 [이름]을 받는다면 흑웅을 금세 부활시킬 수 있겠지.”
“과연. 훌륭한 방법이군요. 그 뱀은 외우주의 존재이니 이름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테니 충분한 교섭의 대상이 되겠죠.”
감탄하던 사공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 뱀을 풀어놓는다는 건 팔부신중, 종말의 거룡의 혼백체를 풀어놓는 것과 같습니다. 두 마리가 동시에 풀려난다면….”
“…어, 그래도 어쨌든 봉인되어 있던 놈들이잖아. 진짜 힘을 회복하지 못했으니까 그럭저럭 상대할 만하지 않을까? 거룡이라 해도 지금은 약할 것 같아.”
당연히 그 정도는 생각했던 문제다. 그리고 거룡이든 뱀이든 봉인상태에서 막 풀려났다면 약할 테니, 아군전력을 고려하면 이기고도 남지 않을까? 하물며 이쪽에 사공린이 있는 이상 질래야 질 수가 없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아무리 잘 쳐줘도 전성기의 절반 이하일 가능성이 높겠죠.”
그렇게 말하던 사공린이 이윽고 말했다.
“그렇다면 백웅, 이걸 당신의 시험으로 하죠.”
“…응?”
“천우진에게 토요를 들려줘서 당신을 보조하게끔 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제국의 전술무력요원 10인을 모두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어떻게든 외우주의 뱀을 토벌하신다면 시험을 통과한 걸로 하겠습니다.”
“시, 시험이라니. 설마…. 내가 천계 복희탐사대에 갈 자격이 있는지를 보겠다는 건가? 저번에 했던 말?”
“네.”
사공린의 대답에 나는 뭔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는 너와 싸우는 게 시험이 될 줄 알았어.”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당신이 제안한 대로 뱀을 토벌하는 게 훨씬 더 시험에 걸맞은 시련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은 편끼리 싸워도 그다지 남는 건 없으니까 생산적이지 못하죠.”
“…….”
“뭔가 잘못된 게 있나요?”
나는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정이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지금 사공린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생소하면서도 언젠가 느껴본 적 있었던 것 같은 감정의 정체를 언뜻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 뱀은 뱀대로 쓰러뜨릴 거야. 하지만….”
나는 사공린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나는 너하고도 겨루고 싶어!!”
그래. 이제 알아차렸다.
이 감정의 정체는 호승심(好勝心).
500년 후 미래세계의 인간계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여제(女帝) 사공린을 상대로, 원래 황제였던 내가 도전해서 이기고 싶다는 그 마음.
모두에게 숱하게 그녀야말로 오롯한 최강자라는 말을 들을수록, 호승심이라는 괴팍한 마음이 끓어오르는 것이다.
내 말에 사공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죠. 정 원하신다면.”
이게 어리석은 선택일 수도 있다.
괜히 망신만 당하고 천계탐사 기회를 잃을 위험만 높이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사공린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붙어보는 게 옳은 선택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단순한 호승심을 넘어서서 그녀의 힘을 제대로 관찰하는 게, 미래에 좋은 결과로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든 것이다.
‘이미 선택한 이상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후 사공린에게 요청해서 제국의 전술무력요원 10인방을 빌리기로 했다. 아군이 하나라도 많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봉인된 토요 팔괘도를 꺼낸 후 연구소에서 전날에 밤을 샌 천우진에게 찾아가서 내밀었다.
“자.”
얼마 못 잔 듯 퀭한 얼굴의 천우진이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 이건 뭐지.”
“토요 팔괘도잖아.”
“이걸 왜 나한테 주냔 말이다.”
나는 팔괘도를 억지로 천우진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넌 이제부터 날 도와서 여산에 있는 혼돈의 뱀을 잡으러 가야 해. 갈 거지?”
“…….”
“자, 싸우러 가자!”
천우진이 잠시 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자, 자, 잠깐… 난 안될 것 같다. 생각해보니 좀 바쁘다.”
“왜?”
“생각해보니 내일이 건강검진일이군…. 예약한 거라 빠질 수가 없다.”
흠 그런 사정이 있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모레 가자.”
“모레는 지인의 생일이다.”
“흠…. 그럼 사흘 후에 가자.”
“그 날은 친구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일이라서.”
“친구 할아버지 기일에는 왜 가?”
“망령이 안 되게 축문도 읊어주고 이것저것 해야지…. 쿨럭. 쿨럭.”
왜인지 모르지만 천우진이 기침을 했다. 천우진이 강하게 강조하듯이 말을 이었다.
“요즘 밤을 많이 새서 감기에 걸렸구나!! 콜록! 콜록!“
“…….”
“아이고 죽겠구나!!”
“야 무슨 환신이 감기에….”
“저리 안 가냐! 감기 옮겠다! 콜! 록! 콜! 록!”
이 새끼가….
나와 천우진의 눈이 마주쳤다. 천우진이 슬쩍 내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다. 다 알거라고 생각하지만.”
“알긴 뭘 알….”
너무 대놓고 가기 싫어하잖아!
이 자식이!
나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문득 아수라의 조언이 생각났다. 그 말대로라면 천우진은 벼랑 끝에 몰린 거나 다름없는 심리상태인 것이다.
‘흠…. 아니야. 그럼 괜히 갈궈봤자 이 녀석한테는 안 통할 것 같군!’
그렇다면 살살 꼬드겨 볼까?
나는 슬며시 천우진에게 말했다.
“…따라와 주면 휴가 한 달. 내가 사공린한테 말해 보지.”
움찔
천우진은 크게 동요한 듯 했다. 그는 잠시 뭔가 생각하다가 말했다.
“일 년.”
“야. 너 없으면 제국이 안 돌아간다는데 일 년이나 빠질 수는 없어.”
“일 년!! 난 이제 좀 쉬고 싶다!”
눈이 벌겋게 된 천우진이 외쳤다. 그러더니 내 멱살을 잡더니 발악하듯 말했다.
“나 없어도 이딴 제국 잘 돌아가!! 나 좀 그만 괴롭혀라 썩을 놈아!!”
“…….”
이, 이 놈 왜 이래?
“휴가 일 년!! 참고로 유급휴가로 해줘야 한다!”
“어… 어? 유급휴가가 뭐냐.”
옆에서 보고 있던 주현성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유급휴가는 휴가기간 동안에 돈을 받는 것을 뜻합….”
천우진이 홱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손가락으로 주현성을 가리켰다.
“주현성 너는 닥쳐라! 금언(禁言)의 저주!!”
“……!!”
그 순간 주현성은 입만 뻐끔거리며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서슬퍼런 모습에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그 모습에 황당함을 느꼈다.
‘주현성 지금 인공보패 입고 있는데….’
인공보패의 주술방어력을 종잇장처럼 뚫을 정도로 금언의 저주가 강력하단 말인가?
내가 놀라는 동안에도 천우진은 내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타협은 없어어어!! 당장 받아들여! 휴가 내놓으라고 이 새끼야!!”
처, 천우진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500년동안 일만 하면 그 냉소적이고 잘난 놈이 이렇게 변한단 말인가?
나는 멍하니 천우진을 보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휴가 일 년!”
“좋아, 안내해!!”
천우진은 전에 없이 엄청난 의욕을 보이며 팔을 걷어붙였다. 그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 휴가를 위해서라면 마왕이라도 죽이겠다!! 제갈사면 더 좋고!”
“…….”
“빨리 가자!”
위험한 광기가 느껴졌다.
분명 오늘 처음으로 천우진의 새로운 모습을 본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