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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지혼(四神之魂)
이해가 안 된다. 적멸무극을 익히면 최강이 될 거라면서 어째서 안 가르쳐주는 것인가? 나는 또 다시 울컥하려다가 문득 예전 장삼봉 진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만일에 인간의 무공이 발전하고 또 발전해서, 일검(一劍)에 세계를 파괴하는 무공이 있다면, 그걸 한치의 의심도 없이 무의 극한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소?]
[잘은 모르겠지만 무신은 단순히 무공의 경지가 높다 해서 만나주려 하지 않소. 무언가 그 존재만이 지니고 있는 기준이 있으리라 생각되오.]
…….
그래, 맞다.
‘최강이라고 해서 최고의 무공은 아니다…. 장삼봉 진인은 그런 깨달음을 내게 알려줬었지.’
나는 잘 생각해보니 지금 아수라가 하는 이야기가 그 때의 장삼봉 진인이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적멸무극을 익히면 최강이 된다.
그러나 최강이 되면 [길]을 수천 년간 빙빙 돌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 적멸무극은 결코 최고의 무공이 될 수 없다.
최강의 무공이지만 최고가 아니라는 모순이었지만 그야말로 예전에 들었던 무신의 단서 그대로였던 것이다. 나는 아수라의 말을 알아듣고는 대꾸했다.
“적멸무극을 익히면 무(武)의 극한에서 멀어진다는 말인가?”
“대충 그런 뜻이지. 알아들었구나.”
“적멸무극 자체에 결점이 있는 건가?”
“…거 참, 네 녀석은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걸 너무 간단하게 묻곤 하는군. 결점이 있다고 말하기도 없다고 하기도 그런데.”
아수라는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꾸했다.
“안 되겠다. 제대로 가르쳐주진 않겠지만 적멸무극의 이론 정도는 네게 알려줘야겠군. 그래야 좀 더 쉽게 포기할 수 있을 테니.”
“알려주면 나야 고맙지. 배우러 온 거니까.”
스윽
아수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치켜들며 말했다.
“적멸무극은 총 6개의 절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아영상패룡파(月牙永狀覇龍波)는 새벽의 여신 우샤스의 교단에 전해지던 최고의 장법이며, 천수관음은 파괴신 시바의 교단에 전해지던 수호무공이며, 자영환수도(紫影幻秀刀)는 산상노인(山上老人)이라 불리던 아사신의 수장이 사용하던 암살도법.”
키기깅
아수라의 말이 천천히 이어지면서 그의 검이 잔영을 남겼다. 실체처럼 한동안 남아있던 잔영은 이내 검영(劍影)을 드리우며 허공에 초식의 형태를 남겼다.
“비천원기영옥(飛天元氣靈玉)은 고대 마우리아 왕조의 패왕 아소카를 호위하던 천축 최강무인의 절세무공이다. 그리고 폭광누멸검(爆光漏滅劍)은 내 독문무공(獨門武功)이다. 마지막으로 아수라파천(阿修羅破天)은 앞서 말했던 5개의 무공을 합일시키기 위해 따로 백오십 년의 고련을 통해 만든 새로운 무공이다.”
아수라의 무공설명이 끝나면서 허공에는 반투명한 검영이 남았고, 그 수많은 검영은 모두 적멸무극에 들어가는 6개 무공의 투로(鬪路)였다. 아수라가 의념으로 만들어낸 투로를 보자 나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으음…. 4개는 천축의 절세무공이고 한 개는 네 본래 무공. 나머지 한 개는 그 다섯 개를 조화시키기 위한 거란 말인가?”
아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적멸무극은 내외륜(內外輪)의 형태를 취한다. 5개의 무공이 외륜, 아수라파천이 내륜이다. 겉으로는 6개의 의념절기가 동시에 발동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섯 개의 외륜에 속하는 무공에서 상생(相生)하는 변화가 먼저 일어난 후 아수라파천이 그 힘을 밖으로 내뿜는다.”
“…….”
“아수라파천은 다섯 개나 되는 절기의 힘을 조화시키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격이 존재하지 않는 무속성(無屬性). 상대는 아수라파천이 완전한 무색인 탓에 초식의 성격을 간파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내륜인 아수라파천에는 오륜(五輪)의 힘이 응결되어서 여타의 절대지경 무공을 압도하는 위력을 내뿜지. 그래서 적멸무극이 강한 것이다.”
“…대단하군.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지?”
나는 내심 감탄했다. 여섯 개나 되는 절대지경 무공을 어떻게 조화시키나 생각했는데 실로 기막힌 방법으로 조화를 이뤄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수라가 말해주기 전에는 그 누구도 적멸무극의 실체를 간파하지 못했으니 대단한 일이었다.
아수라가 말했다.
“하지만 사실 적멸무극은 간단하게 파해가 가능하다.”
“어떻게?”
“내외륜. 즉 큰 바퀴와 작은 바퀴가 상보(相補)적으로 서로를 지탱해주므로 적멸무극이 성립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바퀴가 맞물리지 못하게 해버리면 그만이다.”
“아!”
나는 앗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내가 만상지투로 여섯 개의 바퀴 중 하나를 빼는 건 안 될까?”
대답은 즉시 단호하게 들려왔다.
“좋은 생각이지만 그건 안 될걸.”
“어째서?”
“백웅. 넌 만상지투로 내 무술경지를 훔칠 수 있나?”
“…….”
그야말로 기습적인 질문. 나는 잠시 당황하다가 대답했다.
“…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안 되겠지.”
“왜 안 된다고 생각하지?”
“그게 된다면 신투지존은 검선 여동빈의 천둔검법을 훔쳤을 테니까.”
“호오.”
나는 머릿속으로 대답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신투지존은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상대의 모든 무공을 즉시 따라쓸 수 있는 재능이 있었어. 그리고 그 재능을 갖고도 유일하게 여동빈의 천둔검법만큼은 따라하지 못했지. 재능으로 상대의 능력을 복사할 수 없다면, 만상지투로 여동빈의 경지를 훔치려 했어야 했는데 신투지존은 그러지 않았어. 아니 그러지 못한 거겠지.”
“…….”
“시험해본 적은 없지만 만상지투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해. 그리고 아마 상대방의 무술경지는 절대로 훔칠 수가 없어. 그건 신투지존이 천둔검법을 쓸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아수라가 놀란 듯 말했다.
“이거 사과해야겠군. 다들 너보고 빡대가리라길래 멍청한 줄 알았는데 거기까지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나?”
“제기랄!! 사람 함부로 얕보지 마. 동료들이 다들 천재들이라 그렇지 나도 평균이상은 한다고!”
내가 소리를 빼액 지르자 아수라가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 네 말대로다. 만상지투로 아마 상대의 무술경지는 훔칠 수 없는 거겠지. 근데 무술경지를 훔칠 수 없다면 의념이나 의념절기는 훔칠 수 있을까?”
“어… 그건….”
시험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만상지투를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쓴 적이 없기 때문이었고, 상대와 생사결전을 벌일 때는 그냥 마주 칼을 대고 싸울 뿐 만상지투로 잔꾀 부리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
“아마 못 할 거야.”
단호한 아수라의 말에 나는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생각해 봐. 너는 지금까지 만상지투를 이용해서 현실에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 그 자체를 훔쳤다. 신의 영혼의 [크기]는 물론이고 영겁지벽의 [내구도], 봉황과 합일해버린 진소청도 훔쳤지. 신투지존은 신의 형태까지 훔쳐서 변신까지 해 버렸다. 가히 만능이나 다름없는데 어째서 무술경지는 못 훔치는 걸까.”
“…….”
“모순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냐. 어째서 만상지투로 훔치는 게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는지.”
당연히 그런 건 생각해본 적 없다. 그냥 만상지투가 만능은 아니겠구나 생각만 하고 있을 뿐 그렇게까지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내가 침묵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내 생각에는 원래 만상지투는 모든 걸 다 훔칠 수 있는데 누군가가 [제약]을 걸었다고 생각한다.”
“제약이라고?”
아수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무술경지, 의념, 의념절기 등등…. 무예의 근간이 되는 기초적인 개념은 만상지투로 훔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걸 훔칠 수 있으면 더 이상 만상지투를 [무공]이라고는 부를 수 없잖아. 상대와 무(武)를 겨룰 수가 없으니.”
“……?!”
“재능도 원래는 만상지투로 훔치지 못할 거야. 상대가 신투지존이자 [가면]이고 특수한 상황이니까 잠시 통했으리라 생각되는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이야기를 못 따라가서 허우적대고 있자 아수라가 말했다.
“가설이긴 하지만, 만상지투는 원래 무공이 아니었지만 무공이 되기 위해 이것저것 제약을 달아놓은 거라고 본다. 무(武) 그 자체가 만상지투의 한계를 결정짓는다고 생각해.”
나는 황당해서 말했다.
“무슨 근거야? 대체 누가 그런 제약을 걸었는데?”
“글쎄…. 나도 모르지.”
아수라는 왠지 얼버무리려 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을 때 아수라가 말을 이었다.
“얘기가 딴 데로 샜군. 아무튼 굳이 시험해보지 않아도 네 만상지투로 의념천주 그 자체를 훔칠 순 없어. 당연히 적멸무극의 6대절기중 하나만 빼서 훔치는 것도 안 될 거다.”
“흐음….”
“적멸무극의 진짜 약점은 바로 륜(輪)의 이음새다.”
“이음새라고?”
“적멸무극이 발현되기 전 아주 잠깐이지만 외륜의 5대절학과 내륜의 아수라파천의 의념이 맞물리는 순간이 있다. 그 때 연약한 이음새가 드러나지.”
나는 듣다보니 기분이 이상해져서 말했다.
“자, 잠깐. 이음새라고 하니 무슨 진짜 륜처럼 들리는데…. 비유가 그렇단거지 실제로는 여섯 개의 서로 다른 무공이 적멸무극으로 펼쳐지는 것뿐이잖아. 이음새가 육안으로는 절대 안 보이는 거 아니야?”
실제로 적멸무극을 옆에서 보면 그냥 아수라가 검을 들고 번쩍! 하니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다섯 개의 절학이 륜을 이루고 아수라파천이 머금거나 하는 변화는 아예 인간의 감각으로는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것이다.
그나마도 절대지경이기에 적멸무극의 시전을 감지할 수 있는 거지, 그보다 경지가 낮으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적멸무극에 당해버린다.
하물며 그 미묘한 이음새를 어떻게 보란 말인가!
“날카롭군. 그 말대로야. 이음새의 약점은 절대 눈에는 보이지 않지.”
아수라가 히죽하고 웃었다.
“잘 들어. [흐름]이야. 다섯 개나 되는 의념이 보조를 맞춰서 하나의 흐름에 섞이기 위해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위적인 흐름. 만일 상대가 그 하나의 흐름을 파악해서 이음새를 베어버릴 수 있다면.”
일위(一爲)
암야참(暗夜斬)
그 순간, 아수라의 일 검이 고요히 휘둘러졌다. 별다를 것도 없는 가벼운 일 참일 뿐이었는데 - 그 일 검의 흐름은 순식간에 허공에 수놓아져 있던 적멸무극의 무수한 수천 개의 검영을 갈라버렸다. 거대한 힘을 담은 것도 아니었는데 보는 이가 소름돋을 만큼 완벽하게 의념이 공간 째로 쩍 갈라진 것이다.
“……!!”
“적멸무극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수라는 지금 스스로 적멸무극을 일검에 부술 수 있음을 증명해낸 것이다!
비록 허공에 검영을 흩뿌리고 그걸 헤쳐나간 것에 불과하지만, 나는 절대지경으로서 아수라가 실제로도 그럴 역량이 있다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문제는 적멸무극의 이음새 그 자체가 아니라 그걸 갈라버린 아수라의 검술이었다.
“어.”
나는 검의 흐름을 계속해서 머릿속에 되새기다가 현실을 깨닫고는 아수라에게 말했다.
“이봐. 그건 적멸무극의 약점이 아니잖아. 그 흐름을 단숨에 읽고 베어버릴 수 있는 실력이면 적멸무극이 아니라 다른 절기도 다 벨 수 있는 거 아냐?”
“뭐, 사실 그렇다만.”
아수라가 검을 집어넣었다.
“이 흐름을 읽는 법을 따로 가르쳐 줄 수 있어. 오직 적멸무극 한정이지만. 그럼 파해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
“흠.”
“그리고 파해법을 가르쳐주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아수라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절대로 전생하면서 적멸무극만큼은 배우지 마라. 너 같은 녀석이 배우면 최강이 되겠지만 절대 이런 식으로 최강이 되어서는 안 돼.”
나는 아수라의 말에 피식 웃었다.
“최강도 아니구만 뭐. 암야참을 써서 베어버리면 되잖아.”
“아니. 구궁파천뢰에 적멸무극을 같이 쓰면 못 막는다. 이음새를 베는 수법도 구궁파천뢰가 뒷받침되면 못 써먹는다. 내가 적멸무극 파해법을 가르쳐주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전생초기에 나를 제압하기 쉽게 하려는 용도다.”
“…뭐야 임마!! 말이 앞뒤가 다르잖아!”
내가 황당해하자 아수라는 울적하게 말했다.
“그냥 그러려니 해라. 지금 나는 적멸무극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인 것 같아서 그저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너무 극단적인 것 같은데.”
“…….”
아수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나 입을 열었다.
“그럼 시작하지.”
나는 아수라의 지도대로 적멸무극을 상대로 흐름을 읽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수라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느리게 적멸무극이 이루어지는 걸 보여주었고, 점차 내가 적멸무극에 눈이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의념절기가 교차하는 순간을 감지하는 요령을 내게 알려주었다.
약 여섯 시진 동안 쉬지 않고 파해법을 배운 후 잠시 휴식을 했다. 나는 옆에서 쉬고 있던 아수라에게 말했다.
“아수라. 그러고보니 너는 어쩌다가 창힐의 밑에 가게 된 거냐?”
“내 과거사 말인가.”
아수라는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다가 대꾸했다.
“나는 대략 삼천 몇백 년 전쯤인가 여기서 태어났다. 중원의 역사로 치면 상(商)에서 주(周)나라로 넘어가던 과도기쯤이었겠지.”
“뭐? 유세비크가 고향이라고?”
“내 일족은 칼파 신조문명에 속해 있었다. 까마득한 고대에 고대신 비슈누를 따르다가 비슈누의 패전 후 전 대륙을 수천 년 동안 유랑했다. 그러다가 나는 유세비크에 남겨져 있던 고대 무공비급을 혼자 수련해서 고수가 되었고, 천축무림에서 손꼽힐 만큼 강해진 후 창힐님을 만났지. 그리고 창힐 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신하가 되었다.”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
“뭐가 이해가 안 되나?”
“넌 무공 외에는 별 관심도 없는 놈인데 창힐이 구세(求世)를 한다는 말에 따라나서서 충성을 바친 이유가 뭐지? 세상을 구하겠답시고 팔부신중씩이나 된 이유를 모르겠군.”
내 말에 아수라는 기둥에 등을 기대서 앉으며 말했다.
“그 말이 맞아. 나는 세상을 구하는 건 관심도 없었지. 하지만 창힐 님은 인간의 수명으로는 최강의 무(武)를 성취하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하셨다. 오래 살면서 무공을 원하는 만큼 수련해보는 게 어떠냐고 내게 제안했지.”
“뭐?”
“난 예전부터 하고 싶은 걸 맘껏 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건 창힐 님이 내게 신의 육체를 준 덕에 불로불사를 맘껏 누렸기 때문이지. 나는 은혜를 받은 만큼 창힐 님에게 충성했을 뿐이야.”
“…….”
“받은 만큼은 하는 게 바로 의리겠지.”
나는 어이없는 눈으로 아수라를 쳐다보았다. 어찌보면 이 녀석이야말로 팔부신중 중에서 가장 창힐을 냉정하게 대하는 게 아닐까? 말로는 은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창힐에게 마음의 빚이 있을 뿐, 충성심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팔부신중들이 창힐을 부활시키려고 이런저런 짓을 해도 거리를 둔 거였군….’
나는 아수라를 껄끄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이… 알고 있겠지만, 창힐은 이제….”
아수라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알아. 네가 가진 천암비서에 먹혀서 소멸되었지. 그리고 이젠 네가 전생할 때마다 즉시 소멸당해버리고.”
“…….”
“신기한 게, 전뇌자를 통해서 그 기억을 직접 봤어도 분노같은 건 전혀 생기지 않더군. 그저 그럴만 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창힐 님은 너무 야망이 커서 승천하던가 파멸하던가 둘 중 하나일 거라고 늘 생각했거든.”
그렇게 말한 아수라가 힐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옛날 일이다. 창힐 님 얘기는 더 하고싶지 않군. 그럼 수련이나 마저 하자.”
나는 휴식을 끝내고 아수라에게 계속 적멸무극 파해식을 배웠다. 그리고 나흘쯤 지나 어느정도 이음새의 흐름을 느끼는 요령을 배운 후, 아수라가 말했다.
“다음은 개선된 팔선신공이다.”
팔선신공은 아수라의 손에 많이 바뀌었는지 구결 전체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하나의 초식에도 아수라가 여러 개의 해석을 덧붙여서 새로운 운용법으로 서너개씩 만들기도 했기에, 배워야 할 게 매우 많았다. 적어도 백여 개의 초식운용법을 배워야 했기에 내가 기가 질려하자, 아수라가 말했다.
“어차피 넌 재능이 없어서 십 년 내내 이것만 수련해도 잘 안 될테니 너무 열심히는 안 해도 된다. 묘예의 역 배우듯 이제 와서 여기에 전념할 이유도 없으니 대충 해라. 진짜 배워야 할 건 다른 거니까.”
“…너무 대충대충인거 아냐?”
“대충대충? 그럴 리가. 네 기억을 다 봤기 때문에 재능도 없는데 괜히 갈구기만 해봤자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있는 것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속만 탔을 뿐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잖나.”
“…….”
“네 재능을 욕하면서 다그쳐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지. 그럼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는 게 낫다.”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아수라였다. 나를 무시한다기 보다는 마치 현실을 인정하고 체념한 듯한 태도라서 참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웬만큼 파해식도 팔선신공도 쓸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다음 단계라면?”
“무한대련이다.”
아수라는 벽에 기대앉아서 어디선가 사 온 책을 읽으며 말했다.
“네 경지도 대단히 높기 때문에 내가 일방적으로 뭔가를 가르칠 수는 없어. 그리고 내 심득도 말이나 이론으로 전해줄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 그러니까 나중에는 먹고자는 시간 외에는 계속 싸울 거다. 그리고 실전에 가까운 대련 속에서 네가 갖고있는 걸 최대한 소화시키는 것이고.”
“흐음.”
이런 식의 훈련은 뇌신류에서도 많이 받았기에 나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내 실력이 늘어난다는 건가?”
“어느 정도는.”
아수라가 힐끔 나를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말해두지만 여기서 머무는 동안 내가 다 가르쳐줄 순 없어. 너는 지금까지 네가 갖고있던 것들을 되짚으면서 스스로 생각하는 게 좋다.”
“알았어.”
“그리고 수련이 끝나면 술법을 연마해라.”
“응?”
술법이라고?
뜻밖의 이야기에 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아수라가 [레이드 지침서 : 던전에서 탱커가 해야하는 100가지 일]이라는 책을 덮으면서 말했다.
“흑웅을 부활시켜야 할 거 아니냐. 그래야 음신지력을 제대로 쓸 텐데.”
“아…!!”
“단순한 법문외우기 반복수련이겠지만 어쩔 수 없겠지. 못 부활시켜도 어쩔 수 없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봐. 이곳은 반복수련하기 좋은 곳이니까 조용히 암송수련 해 보라고.”
“알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그 말에 이상함을 느끼며 말했다.
“음, 해야하는 일인 건 맞는데…. 왜 무공에만 집중하지 않고 술법을 같이 연마하라고 권유하는 거냐? 원래 무공에만 집중해도 모자라다고들 하던데….”
아수라가 말했다.
“너, 이번 수련이 끝나고 천계 탐사대에 합류한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 탐사대에 합류하려면 천마 사공린에게 실력을 검증받아야 하고.”
“그랬지.”
“천마가 어떤 존재인지 아직도 감이 안 잡히나 보군…. 흑웅은 그녀에게 맞서기 위한 최소조건이다.”
이윽고 아수라는 골치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흑웅이 없으면 너는 천마 사공린을 상대로 10초도 못 버틴다. 그녀가 가로막는다면 절대지경의 무공만으로는 택도 없다는 소리야. 쌓을 수 있는 힘은 다 쌓아야 한다고….”